왕수(삼국지)

1 후한 말, 위나라의 인물

王脩
(? ~ 220년)

청주 북해 영릉현 사람으로 는 숙치(淑治). 공융, 원담 등을 섬기다가 나라를 섬겼다.

그는 그가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매우 슬퍼하자 마을에서는 왕수를 걱정하여 그의 어머니를 위한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왕수는 스무살에 남양에서 유학하였는데, 장봉의 집에서 머물렀다. 질병에 걸린 장봉의 가족들을 보살폈다. 이후 그는 장봉을 떠나 초평 연간에 공융의 부름을 받고 주부와 함께 고밀현의 현령에 임명되었다.

왕수의 부임지 고밀현에는 호기로운 손씨라는 큰 호족이 있었다. 손씨의 자식과 손씨의 집을 오가던 손님들은 손씨의 세력과 권세를 믿고는 자주 법을 어기거나 백성들 중에 약탈하였다. 관리들은 손씨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집으로 법범인이 숨어 들어가면 관리들은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한채 쩔쩔맬 뿐이었다. 그러나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손씨의 집을 포위했다. 손씨는 집안 사람들을 동원해서 저항하였다. 그러나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에게 공격하지 못하는 자는 도적과 같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외쳐 사람들을 고무하였다. 결국 손씨는 저항을 멈추었고, 이후 손씨의 권세에 기대어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없어졌고, 또한 호족들은 스스로 귀부하였다.

이후 교동에서 공사로 일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수는 공조에 임명되어 이들을 토벌했으며, 왕수는 공융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도움을 주어 어려움을 면할 수 있게 도왔다. 이후 196년에 원담의 공격을 피하고자 공융이 북해를 버리고 조조에게로 달아나자 원담은 왕수를 치중종사에 임명했다. 당시 청주별가[1] 유헌이 왕수를 자주 헐뜯었지만 훗날 그가 죄를 지어 사형당할 일이 있었을 때 왕수가 이를 직접 조사하여 유헌이 사형을 면하도록 했기에 사람들이 더욱 왕수를 칭찬했다고 한다.

원소의 부름을 받아 즉묵현의 현령을 대행하도록 임명받았으며, 이후 청주로 돌아가 별가가 되었다.

원소가 세상을 떠난 뒤, 원상과 대립하던 원담이 크게 패하여 청주 전역에 반란이 일어났다.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는 원담에게 왕수는 동래태수인 관통이 진퉁이라며 그를 부르도록 진언하였다. 동래군에 남아있던 관통의 처자식은 반란군에게 모두 살해당했으나 관통은 바다를 건너 원담이 있는 곳에 당도하였다.

왕수는 원담이 원상과 대립하던 내내의 원담을 따르며 모든 일을 따져 올바른 헌책을 원담에게 올렸다. 그 예로 곽도와 신평이 원담에게 원상을 습격하기를 부추겼을 때, 왕수는 극구 반대하여 간신들을 베라고 원담에게 간언했으며, 그가 예측한대로 참패하고 돌아온 원담이 재차 원상을 공격하자, 이러는 것은 명백한 패가망신의 길이라며 말렸다. 원담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왕수가 올바른 사람임을 알았다고 한다.

훗날 원담이 왕수에게 다시 조언을 구하자[2] 왕수는 형제를 이간질하며 중간에서 영달을 도모하는 간신 몇몇[3]을 죽인다면 형제가 다시 화목해져 천하를 호령할 것이라 말했지만 원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해 원상을 격파한다.[4]

원상이 조조에게 패하여 쫓겨나고 원담과 조조의 대립이 표면화됐을 무렵, 왕수는 악안에서 식량을 운반하던 도중에 고밀현에 이를 때 원담의 전사 소식을 들었으며, 조조를 찾아가 원담을 위해 곡할 것을 청했다.

조조는 왕수의 충절을 높이 사 그 요구를 들어주면서 등용하여 독군량관에 임명하면서 낙안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조조가 원담의 성들을 모두 항복시켰지만 관통 만이 악안에서 저항하자 조조가 그의 목을 베도록 했다. 그러나 관통은 충신이었기 때문에 결박을 풀어주면서 조조를 만나보게 하여 조조는 관통을 사면시켰다.

이후 조조가 업을 함락하여 원씨 가문의 신하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으며, 남피에서 왕수의 가산을 조사하니 곡물이 열 섬도 안되면서 책만 수백 권이 있었다고 한다. 사공의 속관에 임명과 동시에 사금중랑장을 대행했으며, 그 다음에 위군태수로 승진하여 백성들이 칭찬할 정도로 좋은 정치를 펼쳤다.

조조가 위왕에 봉해진 216년에는 대사농 겸 낭중령으로 승진했으며, 또한 봉상으로 임명되었다가 엄재가 반란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인솔했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원담의 부하인 청주의 별가로 원담이 죽은 소식을 듣자 조조가 원담을 위해 곡을 하는 것을 금지했음에도 목숨을 걸고 통곡했는데, 연의에서의 내용은 이와 같다.(이하 김홍신 평역판에서 발췌)

(전략)조조는 원담의 목을 벤 뒤 영을 내렸다.
"원담의 목을 저잣거리에 내걸고, 누구든지 그를 위해 곡을 하면 목을 베어라!"
며칠 후, 병사가 두건에 상복까지 갖춰 입은 자를 끌고 왔다.
"이 사람이 원담의 목 앞에서 곡을 하기에 끌고 왔습니다."
조조가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왕수입니다."
원담이 원상에게 구원군을 보내지 않고 조조군에게 죽게끔 방조하는 계책을 반대했던 그 왕수였다. 조조가 그 부분이 생각나자 노기를 띠며 따졌다.
"포고문을 보지 못했는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위하여 곡을 하는가?"
왕수는 태연히 말했다.
"그가 살았을 적에 원가의 녹을 먹었으니 죽어서도 그들을 위해 예를 다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만약 제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제가 그의 장사까지 지내 주는 것을 허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조는 이 말을 듣자 잠시 생각을 하고 있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하북엔 왜 이리도 충신들이 많단 말인가?[5] 만약 원소가 이들의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하북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조는 왕수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또한 사금중랑장(무기 제작관청의 책임자. 수정바람)이란 벼슬까지 내리자 왕수는 이에 감사함을 표했다. 일이 처리되자 조조는 왕수에게 물었다.
"원상과 원희가 아직 남아 있소. 그들을 어찌 하면 좋겠소?"
조조가 계책을 물었지만 왕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조조가 다시 감탄했다.
"과연 충신이로다." (후략)

구주춘추에 의하면 원담은 통치에 무지하고 아첨만을 좋아하여 주위엔 소인배만이 들끓었고 왕수 같은 유능한 인물도 그저 말직이나 차지할 뿐 중용되지 못했다고 하나 왕수전의 서술에 따르면 왕수는 청주의 최고 자문인 별가로 중용되고 있었으며 중대 사안에서 발언권을 내보이고 원담도 비록 이를 받아들이진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구주춘추의 서술이 틀렸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상식적으로 자신을 박대하던 이가 죽었는데 말 그대로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하고 상복까지 갖춰입고 통곡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니 실제로 우대 받았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

다만 왕수가 처음 원담 밑에서 치중종사를 지내던 시기에는 별가 유헌에게 자주 참소를 당하는 등 취급이 좋지 않고, 원소가 직접 왕수를 불러 기용한 이후 왕수가 다시 돌아가 원담의 별가를 맡은 정황으로 봤을때, 원담이 다스리던 청주의 행정이 워낙 개판이었기에 원소 차원에서 직접 개입한 인사로 보는 것도 개연성이 있다.

세설신어에서는 7살 때 어머니를 토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날에 잃어 다음해에 이웃 마을에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준비하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해 처음 어머니를 여읜 것처럼 몹시 애통해했기 때문에 이웃 마을에서 토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그만뒀다는 일화가 있다.

1.1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지력, 정치가 70대의 무난한 문관으로 나온다.

삼국지 5에서의 능력치는 39/62/67/69. 무력 외에는 그럭저럭 무난하지만 무력이 낮아 무관 일러스트와 괴리감이 조 있다. 그런데 220년 사망한 인물이 234년 시나리오에서 버젓히 살아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2/65/71/76. 배반 외에는 모략계 병법도 없고 해서 그냥 내정용으로 쓰게 된다. 정란이 있긴 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3/27/76/78/65. 명사특기가 있으며 정치 78은 그냥저냥 괜찮은 수치인데 농업, 상업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효용이 나름대로 높다. 북해 태수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투력에 형편없음에도 원소가 조조에게 전역(관도대전)을 걸 때 부대장으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다.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王遂

생몰년도 미상

오나라에서 가화 연간[6]에 큰 동전을 주조해서 주거의 부대 사람이 받기로 했지만 왕수가 이를 속여서 받았는데, 이로 인해 여일에게 주거의 관리가 고문을 통해 죽임을 당하거나 주거가 모함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군리를 지낸 유조가 진상을 밝히면서 그 큰 동전을 횡령한 범인으로 밝혀지게 되었으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횡령한 죄로 처벌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한 범인으로 등장하며, 유조가 주거가 모함을 받은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거나 주거, 대사농의 관리에게 질문을 하면서 조사를 할 때 대사농의 관리가 저 사람에게 3만전을 줬다면서 자신을 지목하자 땀을 늘리면서 당황한다.

주거도 왕수를 보고는 내 수하에는 저런 시커먼 놈은 없다는 소리를 했고 유조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손권이 주거를 모함한 여일도 뒤가 구린 것이 있다고 생각해 여일에 대한 조사를 지시한다.
  1. 자사의 최고 자문.
  2. 정황상 원상측에서 곽도를 베고 화해하자고 제의해 오던 무렵의 일로 여겨진다.
  3. '이간질하던 간신들'은 정황상 가장 적극적으로 내분에 앞섰던 봉기, 곽도, 신평, 심배 네 명을 말하는 듯하다. 봉기와 심배는 원상의 아래에 있었으니 신평과 곽도만 포함되는 듯.
  4.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시 원담 자신도 심배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으나 곽도에게 겁박당했기에 돌이키지 못하고 성 위에서 통곡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 이에 따를 경우 연이은 참패로 원담의 내부적 입지가 바닥을 기게 되면서 곽도와의 갑을관계가 역전된 것으로 보인다.
  5. 정말 많기는 했다. 전풍, 저수는 물론이고 심배 등등. 물론 심배는 원가 형제를 싸움붙였을 지언정, 조조군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니.
  6. 232 ~ 238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