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효걸

王孝傑
(? ~ 697)

당나라 장수, 주로 토번전과 돌궐전 그리고 거란전에 참전했다.

섬서성 신풍(新豐) 사람이다. 당고종 말기에 부총관이 되어 공부상서 유심례를 따라가 대비천에서 토번군과 싸웠다. 대비천 전투에서 유심례와 함께 토번군에 붙잡혔으나 토번의 첸포가 “용모가 나의 부친과 비슷하구나.”라고 하여 사면되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측천무후가 즉위하자 우응양위장군에 임명되었다. 왕효걸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토번의 약점을 알고 있었는데 그 경험을 인정받아 692년, 무위도행군총관으로 임명되고 아사나충절과 함께 토번군과 서돌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킨 후 안서사진을 회복했다. 이에 당 조정에서 구차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왕효걸이 진수하도록 했다. 측천무후는 안서사진을 회복한 공이 왕효걸에게 있다면서 좌위대장군과 하관상서에 겸직시켰고, 청원남에 봉했다. 이후 동봉각란대상품, 삭방도총관으로 승진했다.

696년, 왕효걸은 숙변도대총관으로 부임되어 부총관 누사덕과 함께 소라한산에서 가르친링이 이끄는 3만의 군대와 함께 혈전을 벌였으나 당군이 패배하였고, 누사덕과 함께 겨우 몸만 빼어 살아 돌아왔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왕효걸을 면직시켰다. 평민으로 강등된 왕효걸은 청변도총관으로 다시 복직되어 18만의 군사를 이끌고 이진충의 반란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후군총관 소굉휘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고 수수방관 하니 적에게 포위된 왕효걸은 골짜기에서 떨어져 죽었고, 그의 군대도 무너져 버렸다.

조정에서는 사신을 파견해 소굉휘를 참수하도록 명했으나, 소굉휘가 공을 세워 죄를 묻지 않았다. 왕효걸 사후 경국공으로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 왕무택을 조산대부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