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용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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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우용득(禹龍得)
생년월일1950년 2월 13일
출신지대구광역시
학력대구상고[1]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2년 삼성 라이온즈 코치[2]
소속팀삼성 라이온즈(1982~1983)[3]
지도자 경력삼성 라이온즈 타격·배터리코치(1982~1987)
MBC 청룡 타격코치(1989)
삼성 라이온즈 타격·작전코치(1990~1992)
삼성 라이온즈 1군 감독(1993~199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1998~1998.6.)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1998.6.~2001.7.)
롯데 자이언츠 1군 감독 대행(2001.7.~2001 시즌 종료)
롯데 자이언츠 1군 감독(2002~2002.6.)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김성근
(1991~1992)
우용득
(1993~1995)
백인천
(1996~1997)
롯데 자이언츠 역대 감독
김명성[4]
(1999~2001)
우용득[5]
(2001~2002)
백인천[6]
(2002~2003)

1 소개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 감독.

2 선수 시절

대구광역시 출신으로서,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제일은행, 한일은행[7]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포지션은 포수로서 1970년대 국가대표 선수였다. 그래서인지 이미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음에도 불구, 삼성 측에선 그래도 국가대표 포수니 만약을 대비한다는 개념으로 백업포수를 목적으로 플레잉 코치로 등록시켰다.

3 지도자 시절

1981년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한일은행 야구단의 코치로 있다가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진에 합류하였다. 코치라고는 했지만, 워낙 젊었기 때문에 말이 코치였지 플레잉 코치로 선수로서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프로에서는 주로 대타로 출전. 스스로도 내심 선수 생활에 미련이 남았는지 비시즌마다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가 1984년 김일융의 전담 포수를 겸해 영입된 송일수의 모습을 본 후 선수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 계속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재직[8]하다가 1993년 김성근 감독이 물러나고 정식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감독이 되자 세대교체에 힘써서 노장 선수들을 정리하고 젊은피로 체질을 개선했다. 1993년 정규 시즌을 2위로 마치고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숙명의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와 접전을 벌여 초반에 2승 1무 1패로 앞서 나갔으나, 젊은 선수들의 경험 부족으로 세판을 내리 패해 우승에는 실패하였다.[9] 이것과 비교되어[10] 야신이 삼성에서 찍은 흑역사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1994년과 1995년에 내리 5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삼성의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11][12]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 2군 감독을 지내다 2001년 김명성 감독이 갑자기 급사하자, 감독 대행이 되었다. 2002년 시즌을 맞아 7년 만에 정식 감독으로 복귀하나, 투자에 소극적인 구단과 타선을 이끌었던 호세의 2중 계약 파문 등 어수선한 팀 분위기 때문에 최하위를 전전하고 16연패를 당하기도 하면서 그 해 6월에 해임되었다.[13]

고졸 좌완 투수 유망주 이승엽과 우완 투수 유망주 이대호를 타자로 전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펠릭스 호세배영수를 가격하여 남은 시즌을 뛸 수 없게 되자, 호세를 말소한 후 그 때 이대호를 1군에 불러들였다.

이후 신문의 야구 컬럼을 쓰기도 하고 야구중계 해설자 등을 맡고 있다가, 2009년 삼성 라이온즈스카우트 팀에 합류하여 복귀하였으며, 2015년 12월 18일에 대학야구연맹의 전무 이사로 승진했다.#

4 연도별 성적(선수)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
1983삼성 라이온즈1418.1112000100
통산1418.1112000100
  1. 고교 졸업 후 바로 실업팀에 입단했다
  2. 사실상 플레잉코치
  3. 선수로서. 이후 코치로 계속 있었다.
  4. 2001년 7월 24일 심장마비로 사망.
  5. 2002년 6월 시즌 도중 해임.
  6. 2003 시즌 도중 해임.
  7. 이때 사부는 다름아닌 친정팀 삼성제국의 기틀을 다진 갓끼리사마.
  8. 중간에 MBC 청룡의 코치로 옮겨간 적이 있었다.
  9. 선방했다는 평가가 강했다. 한국시리즈 7번의 해태 타이거즈..
  10. 1992년 삼성 라이온즈는 준플레이오프에서 단 2투수에게 1점도 뽑지못하고 두게임연속 완봉패를 당하면서 무너졌다.
  11. 이 때 당시 뛰던 일부 선수들은 전임자와의 차별화 때문이었는지 리빌딩의 강도가 너무 강했고, 노장 선수들의 부재가 팀 케미스트리에 영향을 끼쳐 성적이 떨어졌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2. 하지만 이 시기에는 평균관중이 가장 좋았던 해였는데, 전임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고 우용득이 부임하면서 삼성 특유의 호쾌한 공격야구가 부활하자 1993년에 평균 관중수가 지방 구단 최초로 50만 관중을 기록했으며, 1995년에는 평균 관중 60만을 기록하는 등 평균 관중 동원쪽에서 평타 이상을 기록했다.
  13. 참고로 삼성 감독과 롯데 감독 시절 후임으로는 다름 아닌 백인천이었다. 물론 결과는 달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