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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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世勳

1951년 1월 31일 ~

댓글장인 마티즈 출발했습니다

1 개요

이명박 정권 때 행정안전부(현 행정자치부) 장관, 국가정보원 등을 역임한 댓글왕 전직 관료.

2 생애

2.1 초년시절

1951년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개성군 출신의 의사이자 재력가로 경상북도 영덕군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선대의 고향인 영주군 풍기읍에 정착했으며, 아버지의 대에 다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이주하였다.

1967년 서울 중앙중학교, 1970년 2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3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으며, 1973년 10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중에 제1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 야간반으로 전과하여 낮에는 서울특별시청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1974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군대는 하악골절(?)이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보충역 판정을 받아 사실상 면제되었다.[1]

2.2 관료시절

서울시청에서 계속 일하다가, 2003년 서울시청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그해 10월 30일 차관급인 서울특별시 행정제1부시장이 되었다. 행정1부시장 시절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청계천 복원과 중앙버스전용차로 도입 등 중요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인사, 재정 등 서울시의 안살림을 꼼꼼하게 챙겨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2006년 6월 이명박의 시장 퇴임 때까지 임기 4년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그 후 2007년 초에는 이명박 예비후보 상근특보로 발탁되었다.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자 이명박 대통령후보 특보가 되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2008년 2월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2009년 1월 개각 후 그해 2월, 전임 김성호 원장의 뒤를 이어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야당에서는 정실인사 혹은 그의 전문성에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국가정보분야와 거리가 먼 지방행정분야에서 일해온 관료 출신이었기 때문.

약 4년 넘게 국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본연의 업무인 해외첩보활동은 소홀히 한 채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적극 주도하고(대표적인 게 노무현에 대한 '논두렁 시계' 언론 플레이)[2]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야당과 시민단체에 종북좌파 공세를 펼치는 등 물의를 빚었다.[3]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삼성을 비롯한 여러 대기업들이 이를 미리 예측하고 사망정보를 빨리 입수하며 혼란에 대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정원은 이에 대해 깜깜이어서 원장의 무능함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시즌2

2013년 2월 이명박이 퇴진할 때 함께 사퇴하는 것이 예상되었으나 국가정보원장 후임자 인선이 늦어져 계속 근무하였다. 그러나 2013년 2월부터 댓글조작 의혹이 나타나자 3월 21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전격 퇴직하였다. 그 후 국정원장 재직 당시 근무하던 직원들을 통해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여론조작을 지시한 것이 폭로되어 논란이 되었으며, 2013년 6월 검찰에 의해 전격 기소되었다.그 반격으로 2013년 9월 검찰총장 채동욱에 대한 조선일보의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가 시작되었...

이후 구속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러다가 2015년 2월 9일 서울 고등법원 형사 6부(부장판사 김상환)에서 국가정보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 받아 다시 법정구속되었다. 결국 2015년 7월 16일 대법원에서 국가정보원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 받았으나, 공직선거법 위반에 관해서는 유죄 여부의 최종판단이 보류되어 사건이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되었다. 관련 기사

3 의혹

아들 병역 특혜부터 대선 여론조작까지(...) 그랜드슬램 달성

3.1 대선 여론조작 의혹

2013년 2월경 국가정보원에서 제18대 대선 당시 댓글 알바 혹은 직원을 통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의혹이 포털사이트를 통해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전직 국정원 직원의 폭로로 원세훈의 개입에 의해 광범위한 댓글 여론조작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4] 그리고 2016년 2월, 징역 3년 법정구속을 선고받았다.

자세한 사항은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항목 참조.

3.2 대북 휴민트체제의 와해 의혹

국가정보원장으로 부임한 직후 3차장 산하의 대북전략국을 해체했다. 남북회담, 남북 비공개접촉, 교류협력을 하던 파트였는데 이를 없애버린 것이다. 대북전략국에는 오랜 시간 북한 문제를 다뤄온 요원 200여명이 근무중이었으나, 실무자들은 대부분 국내 파트로 전출됐고 고위급들은 대부분 옷을 벗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기에 이미 한차례 크게 타격받았던 대북 휴민트를 또다시 날려버린 셈이었다.

특히 압권이었던 것은 서훈 국정원 3차장을 축출한 것이었다. 서훈은 대북문제의 국보급 인사로서, 북한의 실세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국방위 부위원장)과도 밤새워 통음할 정도로 북한 고위층과 관계가 밀접했던 인물이었는데, 정권교체 직후 정두언 의원과 만났다는 이유로, 국정원에서 쫓겨나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야당측과 접촉한것이 들어났다.

3.3 뇌물 수수 의혹

2013년 6월 건설업자에게서 순금 등 뇌물을 받은 혐의가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수사에서 포착되었다. 한편 뇌물을 받은 혐의에 대해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가 이 사실을 확인하고도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묵살한 사실이 밝혀졌다.

한 건설업체의 회장으로부터 골프 접대를 받았는데 그 업체의 회장이 접대를 위해 구매한 회원권은 7억 원에 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실제로 국정원장 시절 원세훈은 골프를 치기 위해 국정원의 업무 보고에 불참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사원시선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대우건설컨소시엄이 포스코건설 컨소시엄을 근소하게 제쳤는데 대우건설이 0점을 받아야 할 항목에서 점수를 받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비리 의혹이 있었는데 원세훈이 관여했다는 제보가 나왔다.

또 홈플러스가 인천 무의도 산림청 국유지에 연수원을 지으려 한 과정에서 산림청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용인시의 토지와 교환하는 안을 수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외압을 한 혐의도 받았다.

결국 2013년 7월 2일, 억대의 현금을 받은 사실이 포착되었다. 이에 따라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2013년 7월 10일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같은 날 저녁 구속 수감되었다. 그리고 2013년 12월 27일, 징역 3년이 구형됐으며, 2014년 1월 22일에는 징역 2년추징금 1억 6천272만 원이 선고됐다.

3.4 인사 전횡 의혹

2009년 2월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호남과 PK 물갈이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른바 '우군화 작업'의 일환으로[5]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요직에 있던 국정원 직원들을 대거 지방으로 좌천시키거나 특별정신교육으로 보냈다. 특별정신교육은 해병대 캠프에서 이뤄졌는데 그 방법은 삼청교육대와 유사했다. 해병대 교육 커리큘럼은 국정원 인사팀에서 교육담당 과장을 맡고 있던 ㅇ씨가 짰다. 해병대 특별정신교육대상인 살생부에 든 이들은 2~4급 국정원 직원 가운데 80여 명이었다. 관련 기사

2009년 5월 국정원 수사국의 윤아무개 단장(2급)이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제주 4.3사건 진압은 정부 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고 한 말 한마디를 갖고서 '좌파적'이라는 이유로 대기발령시켜버렸다. 윤 단장은 수사국에서도 손꼽히는 베테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6] 대기발령을 받은 윤 단장은 결국 국정원을 떠났다. 수많은 간첩 조직을 수사해온 국정원 고위 간부가 ‘좌파’로 몰려 쫓겨난 것이다.

2009년 9월 수사국에서 파트장(4급)을 맡고 있던 강아무개씨가 부하 직원의 보고 내용을 검토하던 중 ‘지난 좌파 정권 10년’이라는 문구에 대해 “지난 정권 10년으로 문구를 바꾸자”고 지시하자, 이를 이유로 강 아무개 파트장을 지역 출장소로 좌천시켜버렸다.

국정원 수사국 직원들의 동요가 심해지자, 2010년에는 지휘부를 서울시청 인맥인 'S라인'으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직원 혹은 자신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 직원을 색출하여 지방의 출장소로 내보내거나, 해임, 사퇴시켜버렸다.

예를 들어 2010년 11월 김모 행정사무관이 국정원 직원 10여명과 함께 밥을 먹는 자리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는 “원 전 원장은 이명박 서울시장할 때 똘마니 하다가 여기 와서 뭘 알겠냐”는 말을 한 것이 알려지자, 상관을 모욕했다며 해임처분을 해버렸다. 그리고 2011년 9월 29일에는 국정원 5급 직원인 김아무개씨가 술자리에서 원세훈 폄훼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해임해버렸다.

이렇게 파격적인 스타일로 이미 자리 잡았던 국정원의 시스템 인사를 무너뜨렸다. 인사 시기도 제멋대로였다. 정년과 연금이 달려 있는 법정 승진 시기는 공무원에겐 가장 민감한 사안인데 이마저도 무너졌다. 국정원 내부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지금도 원세훈 전 원장이 이끈 4년1개월을 ‘동토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관련 기사

3.5 아들 군복무 특혜 의혹

2008년 행정안전부장관 후보 인사청문회에서 통합민주당 윤호중 의원에 의해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 군 복무중 사법시험에 응시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에 "응시한 사실이 없다"고 답변하였으나, 윤 의원이 법무부에 질의, 회신한 문서를 꺼내들며 "원 후보자의 아들 성혁군은 2003년 2월과 2004년 2월 각각 사법시험 1차 시험에 응시했고 두번 모두 떨어진 것으로 나왔다"고 채근하자, 그제서야 "아버지로서 (집안 일을) 몰랐다. 나는 모르는 사실"이라며 물러섰다.

당시 그의 아들과 의무소방원 생활을 같이 했던 의무소방대 선임자들은 2004년 "원씨가 자대에서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며 청와대에 투서를 했고, 이에 서울중앙지검이 '고위공직자 자제 군 복무 특혜 의혹'과 관련해 내사까지 벌였지만 서울소방재난본부측이 '인사 행정 처리 미숙으로 오해를 산 것 같다'고 해명하였고 검찰은 이를 내사 종결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03년 서울시 1부시장이 된 직후인 그해 11월 아들 원모씨가 의무소방원으로서 '6개월 일선 소방소 근무'라는 관례를 깨고 자대 배치 한달만에 방재본부에서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개인별 2달에 한번, 3박4일(72시간)범위내 실시키로 돼 있는 정기 외박 규칙을 위반해 2005년 4월, 6월, 7월에 각각 81시간씩의 정기 외박을 다녀온 것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서도 지적을 받았다.

참고로 원세훈의 외아들 원성혁은 2010년, 30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하였는데, 20대 젊은 학생들만 입학시키는 것으로 소문난 서울대 로스쿨에 원세훈의 외아들이 30세의 나이로 입학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 원성혁은 2013년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였고, 현재 김앤장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근데 1970~1980년대 초는 지금과는 다르게 건강한 청년들이 넘치고 넘치는 상황이여서 군대에서도 적당히 뽑아갔던 시기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신체등급이 1등급이 아닌이상 군대 안가도 됐다는 소리.(!!!) 다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서서히 그런것도 사라졌다.
  2. 2009년 4월 검찰노무현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혐의를 증명하기 위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일 때, 국정원이 '논두렁 시계' 운운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였다.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나 극적이고 황당했기 때문에, 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였고, 국민 다수가 노무현에 대해서 실망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경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진실은 노무현과 그 측근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논두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국정원의 언론 플레이로 억울한 심경이 극에 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후 어떠한 파국을 맞이했는지 생각해보면 이때의 언론 플레이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때 국정원이 언론 플레이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기밀사항이었으나 2015년 2월 25일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의 술자리 발언으로 결국 폭로되었고 기사화되었다. 기사 참조
  3. 2009년 2월~2013년 매달 국정원 부서장회의를 주관하며 "전교조 등 종북좌파 단체들이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의 허울 뒤에 숨어 활발히 움직인다"고 말했다. 또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전교조 등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렵다" 등의 말도 했다. 이러한 국정원장의 발언은 회의 뒤 요약돼 국정원 내부 전산망의 공지사항에 '원장님 지시·강조말씀'이란 제목으로 올라갔다. 기사 참조
  4. 원세훈은 이 지시 사실이 밝혀진 이후 사직서를 제출, 2013년 3월 21일 비공개로 퇴임식을 하고 퇴임하였다.
  5. 우군화 작업 대상은 연예인들도 비켜가지 않았다. 당시 국정원에는 연예TF팀이 꾸려졌다. 경제팀장·사회팀장 등이 참여해서 진보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 관리에 나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에서 사회를 본 김제동에 대한 사찰이 이때 이루어졌다. ㄱ, ㅇ, ㄱ, ㄹ 직원 등이 이 TF팀에서 중심적으로 활동했다.
  6. 당시 국정원 직원들은 “간첩 조직 수사와 관련해서는 윤 단장만한 전문가가 없었다. 국정원 수사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황당한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그 이후 국정원에서는 ‘점심때 다른 직원들하고 밥도 먹지 말아야 하냐’는 푸념이 흘러나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