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

元載
(? ~ 777)

당나라의 인물

자는 공보(公輔)이며, 섬서성 봉상현 기산 사람이다. 천보연간 당현종이 도교에 심취하여 장(莊),노(老), 문(文), 열(列) 4자학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원재가 뽑혀 빈주 신평위가 되었다. 홍주자사와 탁지시중에 부임하더니 당숙종 때 환관 이보국의 인척으로 경조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고사하고 동중서문하평장사, 탁지전운사에 임명되었다. 당대종이 즉위하자 대종의 측근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집현전대학사 등을 역임하여 국사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768년, 토번이 빈녕을 어지럽히자 대종에게 마린을 경주, 곽자의를 빈주에 주둔시키고 빈녕경 3주를 삭방에 예속시키자고 제안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환관 이보국이 죽자 그는 환관 동수를 매수하여 황제의 밀지를 열람하는가 하면 전횡을 일삼았던 환관 어조은(魚朝恩)과 대립하다가 대종과 함께 일을 도모하여 제거하는 등 과감한 경세가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이때 제정가 제오기도 연루되어 죽었는데 그를 대신하여 원재가 탁지를 총괄하였다. 그의 전횡이 날로 심각해지던 773년, 토번이 빈녕(邠寧)으로 쳐들어와 당의 감숙성 일대를 어지럽히자 원재는 곽자의를 경주(涇州)로 옮겨 농산, 석문으로 쳐들어오는 토번군을 막게하는 한편 원주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리고 명사현에 풍안군을 주둔시키는 안건을 올렸으나 대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원재가 어조은을 죽인 후부터 전횡을 일삼았던 까닭인데 법을 어기고 충신들을 배척하고 권력을 함부로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등 많은 악행을 자행하였다. 결국 많은 신하들의 비난과 고발이 빗발쳤고 유안(劉晏)의 탄핵으로 그는 실각되었다. 이후 대종은 모반죄로 그를 사형에 처하였고 왕진(王縉)과 원재의 아내 왕씨[1] 그리고 아들 역시 사형에 처했다.
  1. 개원연간 하서절도사 왕충사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