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양왕

魏襄王
(? ~ 기원전 296년)

전국시대위나라 제4대 군주. 위혜왕의 아들. 재위 기간은 기원전 318년 ~ 기원전 296년.

1 생애

이름은 혁(赫). 기원전 319년에 위혜왕이 죽자 장례를 치루기로 했는데, 장례를 치루려는 날에 비와 눈이 크게 내려 성곽이 무너질 지경이 되자 장례를 강행하면 백성들이 힘들고 장례 비용이 크게 늘어나 관의 비용으로 충당하기 어렵다고 하자 위양왕은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혜시의 설득으로 다른 날에 장례를 치루기로 한다.

기원전 317년에 장의가 진(秦)나라를 위해 연횡을 성사하기 위해 유세하자 위양왕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진나라에게 하외의 땅을 바치기로 했다. 기원전 312년에 연나라에서 자지로 인해 내란이 일어나고 서주의 대부 궁타가 연나라#s-1를 위해 사신으로 오자 몇 달 동안 받아들이지 않다가 연나라의 내란을 이용해 땅이나 보물을 차지하라는 설득을 듣고 궁타를 만나본 후에 귀국하게 했다.

기원전 310년에 전수가 죽자 소대의 계책을 받은 소어의 설득으로 태자 칙을 재상에 임명했으며, 기원전 306년에 진(秦), 가 위나라를 공격해 피씨가 포위되었는데, 초나라가 진나라를 등지하고 위나라의 편에 서자 태자 칙을 초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그런데 초나라의 배신에 분노한 진나라에서 위나라와 손잡고 초나라를 공격하려 했는데, 진나라에서 초나라에게 위나라의 태자를 돌려보내면 성읍, 땅을 주겠다고 하자 이에 속아넘어간 초나라가 태자 칙을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진나라가 위나라와 손잡고 초나라를 공격했지만 위양왕은 내심 이를 꺼려했는데, 누완이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초나라가 진나라와 연합해 공격할 것이라면서 진, 초 두 나라가 싸우도록 만들어 한 번에 양 쪽을 제압하는 것이 낫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를 공격했다. 대신 관비, 척강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관비를 추종하는 사람으로부터 척강을 비방하는 말을 들었다.

기원전 307년에 진나라에서 서주군을 부르자 서주군이 이를 꺼려했는데, 위양왕이 서주군을 위해 유세한 어떤 세객의 말을 듣고 하남 땅에서 열병을 해서 서주군이 이 소식을 듣고 진나라로 가지 않았다. 또 진나라와 맹약하면서 태자를 인질로 보내려 했는데, 태후가 보내지 못하게 하자 보내지 않으려다가 소연의 설득으로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기원전 296년에 , 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고 돌아가는데, 서주에서 위나라가 길을 빌려달라고 청할 것을 우려했는데, 어떤 세객이 초, 두 나라에게 진나라가 3국의 땅을 떼주어 강화를 맺을 것을 불리하게 여긴다면서 장차 위나라의 창고를 공격해 진나라에 유리하게 만들 것이라 하자 위양왕은 두려워해서 급히 철수했다.

맹자와 만나서 천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위양왕은 천하를 어떻게 안정시키는지, 천하를 누가 통일하는지, 천하를 통일하는 사람이 누가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맹자는 통일이 되면서 안정될 것이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통일할 것이라 했으며, 천하가 모두 귀의할 것이라면서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볼 것이라 했다고 답했다.

2 기록 문제

기원전 334년에 서주에서 제위왕과 회견해 서로 왕호를 사용해 그 부군을 왕으로 추존했으며, 기원전 328년에 진무왕과 응 땅에서 회견했다. 기원전 327년에는 상군의 모든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기원전 326년에 진나라가 빼앗아간 초, 곡옥을 돌려받았다는 기록 등이 있다.

사기의 기록이 소진의 활동시기 등 연표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므로 사기에서 위양왕이 한 것으로 나온 행적들은 죽서기년에 근거해 재위 기간을 참고한다면 위혜왕 시기의 일로 보인다.

전국책에서 기원전 333년에 소진이 조나라를 위해 합종을 성사하기 위해 유세하자 위양왕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소진의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소진을 상대한 사람이 위양왕이 맞을 수는 있지만, 년도는 틀린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22년에 장의가 위나라를 진, 한 두 나라를 연횡시켜 제, 초 두 나라를 치려 했는데, 혜시는 위나라를 제, 초 두 나라와 합종시켜 군사 동원을 저지하려 했다. 대신들이 모두 장의를 지지하자 혜시는 위양왕에게 어떤 사안에 대해 한 쪽만 지지하게 된다면 다른 견해가 전혀 용납될 여지가 없어 어느 한쪽 견해만 받아들여질 것이라면서 이는 군주의 대권을 상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고 경계한 것을 들었다.

또 동일한 해에 제나라의 세객 진진이 위나라의 공손연을 설득해 제후국들에 관한 외교를 주관하도록 해서 서수가 진진의 말대로 서수를 연, 조 두 나라에 사신을 보낼 것을 청하자 위양왕은 허락했으며, 서수가 조, 연 두 나라에 사자로 가게 된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이 이야기를 듣고 제나라가 위나라와 수교가 늦을 것을 우려해 서수에게 제후국들에게 대한 외교를 맡겼다.

제나라에 이어서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도 서수에게 맡기자 위양왕은 서수가 조, 연 두 나라로 가는 것을 중지시켰으며, 위양왕은 서수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사자로 보내지 않으려 했다가 위양왕은 서수가 조, 연, 초, 제 등 네 나라의 외교에 대한 것을 맡게 되자 위양왕도 서수에게 위나라의 외교를 맡겼다.

그런데 기원전 322년은 년도상으로는 위혜왕의 재위 기간이고 기원전 322년에 대한 다른 기록에서는 위혜왕으로 나온 것으로 보면 군주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