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1 개요

유고슬라비아를 직역하면 "남(南)슬라브인의 땅". 보통 줄여서 '유고'라고 불렀다.

1918년부터 2006년까지 동유럽 발칸 반도 서부에 위치했으며 지중해(좀 더 정확하게는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던 국가[1]. 수도는 베오그라드.

2 역대 국가(國家)

2.1 유고슬라비아 왕국

2.2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 유고 연방)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구성 공화국 목록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2.3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 연방)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3 국가(國歌)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가는 세르비아의 국가인 《정의의 하느님(Боже правде)》, 크로아티아의 국가인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Lijepa naša domovino)》, 슬로베니아의 국가인 《전진하라, 영광의 깃발을 향해(Naprej, zastava slave)》,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세르비아의 국가인 《정의의 하느님》을 각 4행씩 조합한 것이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 유고)과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국가는 《슬라브인이여(Hej, Sloveni)》였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폴란드 국가와 거의 같다.

나라가 분리된 지 얼마 안 되는 경우 개별 대표팀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분리 전 같은 나라였던 나라들이 단일 팀을 구성하기도 하는데[2] 보통 단일 팀 국기나 국가는 임시로 만들어 쓴다.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단일 팀(대회 도중 분리)은 구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국가와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4 유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고슬라비아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 자리를 놓고 구 유고 국가 사이에 논쟁도 만만치 않다. 일단 세르비아의 경우, 수도 베오그라드가 있어서 붕괴 전 유고 연방의 정치적, 외교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수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잡은 나라가 바로 세르비아라면서 유고의 승계국은 세르비아라고 주장하고 있다.[3] 그러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경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국부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을 명분삼아 유고슬라비아의 승계국가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라며 세르비아의 승계국 주장에 반발하고 있다. 이 밖에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등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승계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4]

만약 이 지역이 조각조각 떨어져 독립하지 않고 그대로 유고슬라비아로 지속되었더라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떡밥은 축구팬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이 되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유고 연방에 속하는 국가들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1980~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었기 때문이다. 선수 목록을 살펴보자면,

사페트 수시치(Safet Sušić) - 보스니아 [5]

흐리스토 비다코비치 사비치(Hristo Vidaković Savić) - 보스니아
다르코 판체프 (Дарко Панчев) - 마케도니아
네나드 마슬로바르(Nenad Maslovar) - 몬테네그로
데얀 사비체비치(Dejan Savićević) - 몬테네그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Predrag Mijatović) - 몬테네그로
드라간 스토이코비치(Драган Стојковић) - 세르비아
고란 부녜브체비치(Горан Буњевчевић) - 세르비아
고란 조로비치(Горан Ђоровић) - 세르비아
슬라비샤 요카노비치(Славиша Јокановић) - 세르비아
시니샤 미하일로비치(Синиша Михајловић) - 세르비아
블라디미르 유고비치(Владимир Југовић) - 세르비아
드라간 판텔리치(Драган Пантелић) - 세르비아[6]
보라 밀루티노비치(Бора Милутиновић) - 세르비아[7]
밀린코 판티치(Милинко Пантић) - 세르비아
즐라트코 자호비치(Zlatko Zahovič) - 슬로베니아
알렌 부치시치(Alen Vučkić) - 크로아티아
다보르 슈케르(Davor Šuker) - 크로아티아
즈보니미르 보반(Zvonimir Boban) - 크로아티아
로베르트 야르니(Robert Jarni) - 크로아티아
로베르트 프로시네치키(Robert Prosinečki) - 크로아티아
이고르 슈티마츠(Igor Štimac) - 크로아티아
드라잔 예르코비치(Dražan Jerković) - 크로아티아

등등... 이외에도 많다. 이들이 유고슬라비아라는 한 국가 아래에서 뛸 수 있었다면 적어도 유로컵이나 월드컵 등 주요대회 우승은 한 번 차지할 수 있었겠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다. 실제로 당시 이들이 활약했던 1980년대~1990년대 초반 유고 대표팀 및 유고 청소년 대표팀은 공포의 대명사였다.[8]

그러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1992년 유로컵이나 1994년 월드컵을 비롯해 90년대의 주요대회에 유고팀이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차례로 독립하고 결국 나중엔 몬테네그로도 떨어져나가면서 유고 축구팀은 완벽히 해체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보스니아 내전. 내전이 시작하자마자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의 NATO 가입국들의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신 유고 연방에 대한 경제 재제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신 유고는 UN 회원자격도 박탈되었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분은 스포츠 부분이었다.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도 경기 출전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것.

그렇게 벌어진 1992년 유로컵은 안습의 극치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1991년 조별예선에서 7승1패 승점 14점으로 1위를 차지했으나 이듬해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모든 국제활동이 금지되면서 유로 출전권을 박탈당했다. 당시 같은 조 2위는 6승1무1패 승점 13점[9]이던 덴마크였는데, 대회개막 1주일을 앞두고 잉글랜드와 친선전을 가지려던 덴마크는 갑작스런 통보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여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을 차례로 따돌리고 동화같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나마 1998년 월드컵 때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 유고 연방과 크로아티아가 각각 월드컵에 진출했고, 이 대회에서는 크로아티아가 4강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긴 했다.

만약 구 유고 연방이 붕괴되지 않고 이 대회에 출전하여 크로아티아의 멤버 외에 다른 유고 연방 계열 국가의 멤버들이 함께 뛰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2010년대 들어서도 마찬가지라서, 한다노비치의 슬로베니아를 필두로 네마냐 비디치, 수보티치,이바노비치, 마티치,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등을 배출한 세르비아나, 다리오 스르나, 모드리치, 라키티치, 만주키치를 보유한 크로아티아, 피아니치, 에딘 제코를 보유한 보스니아와 요베티치를 보유한 몬테네그로 선수들을 조합해보면 유럽 내 어느 강호팀을 상대로도 꿀리지 않는 막강한 스쿼드를 구축할 수 있다. 또한, 제르단 샤치리 역시 2살 때 부모님을 따라 유고내전을 피해 스위스로 피난간 걸 생각하면 들어갈 수 있다.

참고로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8골이나 득점한 유일한 나라였다는 나름 자랑할만한 기록(1934년 스코어 8:4)이 있었다.#

축구 이외에도 수구나 농구, 테니스같은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유고슬라비아는 공포의 실력을 자랑했는데. 만약에 유고 연방이 붕괴되지 않았다면 축구말고도 수구나 농구, 테니스 등에서도 좋은 성적을 더욱 거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테니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 유고슬라비아도 축구 못지 않게 테니스도 강국이었다. 모니카 셀레스나 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 등등이 당시 대표적인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들이었는데, 출전 금지령 조치로 이들이 미국 등 국외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나 아나 이바노비치, 크로아티아의 고란 이바니셰비치같은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들도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아닌 유고 연방 국가 대표로 하계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출전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10]

게다가 만약에 유고슬라비아가 현재까지 여러개의 소국들로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상태로 남아있었다면 상당한 경제력과 군사력, 높은 국제적인 지위등 동유럽에서 꽤 강력한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거슨 유럽의 안보 불안!

5 분열이 예정되었던 인공 국가였는가?

분열이 예정되었던 인공 국가라는 비판이 널리 퍼져 있지만, 사실 유고슬라비아가 분열이 예정되었던 인공 국가라고는 볼 수 없다. 먼저 유고슬라비아의 건국은 1차대전 직전에 고조되었던 범슬라브주의에 따른 것이며, 훨씬 이질적인 요소가 섞였지만 그럭저럭 연방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 (예를 들어 인도,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에 비해 딱히 더 분열요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쨌든 종교만 달랐고, 이들 국가들은 동로마제국-오스만제국-오스트리아 헝가리의 틀안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이다.

유고슬라비아는 비록 종교와 문화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이 남 슬라브 민족이 차지하는 민족 구성이고 거의 차이가 없는 언어를 쓰는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었으므로 단일 국가가 되기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가 내부적 다양성이 많았다고 하지만, 유럽만 해도 스페인, 벨기에,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등 분열되기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정도의 다양성을 가지면서도 통합을 유지하는 나라도 분명 적지는 않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세르비아 주도로 통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역시 (지역 의회 결의 등으로) 이에 동의를 했다. 이 무렵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어려운 것이, 원래 영국과 프랑스는 '런던 밀약'으로 이탈리아에게 아드리아 해 해안 지대를 넘기기로 결의했고 실제로 1차대전 말기에 이탈리아는 이 지역을 점령하려했다. 유고슬라비아 통합안은 이에 대한 카운터로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도적으로 주장한 결과 받아들여진 것이므로 강대국들의 강요와 같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민족의 '자의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인들의 합의가 성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팽 하고 유고슬라비아를 승인해주었다. 중동전쟁을 부른 아랍국들이나, 아프리카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이나 베트남과는 이런 측면에서 동일시 할 수 없다.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무렵에 이탈리아의 야망 때문에 각 지역이 충분한 합의를 거치지 못하고 급히 통합되어야 했던 탓에 세르비아의 폭주를 유발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권 국가들을 별개의 독립국가로 독립시키지 않고 슬라브랍시고 세르비아로 하여금 한나라로 통일국가를 세우게 한 것만 해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던 국가였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이 방법은 불가능한 것이, 유고슬라비아가 별개의 자치국으로 독립할 수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탈리아의 야망이 주요한 원인이다. 당시 강대국인 이탈리아에 대항하려면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서 유고슬라비아 민족이 단일국가로 독립하는 제안을 내세워서 연합국의 승인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단지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에서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갈아타는 길 밖에 남지 않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남 슬라브 민족에게 다른 길을 가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건설은 당시 남 슬라브 민족의 관점에서는 '최선의 선택',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였던 정치적 대안이었다.

만약에 아예 오-헝 제국 무너트릴 때 처럼 민족 구성 별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등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르비아에 흡수되어 유고슬라비아로 묶이지 않고 별개의 국가들로 독립했다면 발칸 반도, 동유럽 현대사는 참혹한 전쟁, 학살의 역사가 아닌 평화로운 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1, 2차 대전의 물결에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같은 소국이 평화롭게 살아남을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발칸반도의 혼란상을 고려할때 제1차 세계대전 종전후 서방 강대국들이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이탈리아처럼 쥐꼬리만한 땅만 주고 세르비아를 토사구팽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탈리아가 쥐꼬리만큼 얻고 떨어져 나간 원인이 유고슬리바아가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가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유고슬라비아에서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므로, 유고슬라비아가 없었다면 미리 맺어진 '런던 밀약'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이탈리아가 이 땅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세르비아와 이탈리아를 둘 다 팽하는 선택은 이미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죽은 이후 해체가 기정사실이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억지로 존속시키지 않는한 애초에 연합국으로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존속은 더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당시 발칸 반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남슬라브 통일 운동도 몇몇 현지 지식인들과 지도자들만 주장했고 대다수 일반 민중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민족주의 운동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일반 대중이 민족주의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주장한 지식인이 소수였더라도 결국 따라간 대중이 있으니까 민족주의 주장이 목소리를 얻은 것이다.

여러모로 따져볼 때, 유고슬라비아는 내부의 문제가 많이 있기는 했으나 실상 이 내분 요소들이 내전으로 인한 국가 붕괴를 필연적으로 부를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유고슬라비아 정도의 내부 문제를 가지고도, 내전과 학살 같은 폭력 충돌 없이 국가를 유지하는 나라들은 매우 많이 있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가 결코 처음 시작부터 잘못된 나라였다고는 볼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는 평화로운 통일 민족국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얻었으며 오히려 많은 나라없는 민족들에 비하면 강대국들의 승인을 받아서 상당한 규모의 인구와 영토를 가지고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으니 운이 매우 좋고 외부의 대우도 좋게 받은 편이다. 실제로 티토의 지도력과 공산주의 이념체계 였다는 점을 고려해도, 유고슬라비아는 수십년 동안 평화롭게 국가 체계를 갖추었으며 동서 냉전 사이에서 단독 노선을 걸으면서 독자성을 유지했고,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주축을 맡을 정도로 외교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가 냉전 붕괴 후 통합에 실패하고 국가들끼리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여러 개의 소국들로 쪼개진데에는 티토 사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프란요 투지만, 알리야 이젯트베고비치, 밀란 쿠찬, 키로 글리고로프등 민족주의, 지역주의를 앞세워 정권을 쟁취하려던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 크다. 충분히 대화로 해결하여 통합을 유지할수 있었던 사안들을 전쟁, 분리독립 이탈로 날려버린게 한 둘이 아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비참한 종말은 그 어떤 외부 요인보다도,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기보다는 사소한 차이를 빌미로 삼아 증오와 폭력을 강화시켜나며 극단주의를 추종한 유고슬라비아 인들 스스로의 잘못이 가장 크다. 어쩌면 지역감정이 초 극대화되어 생긴 비극이라고도 볼수있다.

이를 비꼬며 유럽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1914년 여름, 1차대전이 터지고 나서 유럽은 모든게 바뀌었지만 100년이 지나도 그 전쟁의 발단이었던 보스니아가 세르비아 땅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여담으로 유럽연합에는 2004년 슬로베니아가 가입했고, 크로아티아2013년에 가입했다.. 그리고 세르비아가 가입을 신청했으며, 그 밖에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의 가입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1. 사실 1991년유고슬라비아 내전 이후로는 몬테네그로 방면만 붙어 있었다.
  2. 반대 사례도 있었는데 독일 통일 직후 열린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는 구 동독과 서독 팀이 별도 참가하였다.
  3. 하지만 세르비아는 구 유고 연방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인종학살 등 전쟁 범죄 과오 등으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구 유고 연방의 정상적인 승계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4. 어느 정도 평화적으로 국가들이 분리 독립되었고 옛 소련의 승계권을 확실히 이어받은 러시아와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전쟁과 학살 등 폭력적인 과정을 겪으며 해체되었기에 어느 나라가 계승국인지는 알 수 없다.
  5. 1955년생. 아래 언급된 선수들보다는 대선배.
  6. 1951년생. 원조 골 넣는 골키퍼. 통산 A매치 19경기에 출장, 통산 2득점을 기록했다.
  7. 1944년생. 선수로써의 커리어는 미미했지만, 은퇴 후 지도자로써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코스타리카,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미국을 16강에 올려놓는 등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수완을 인정받았다.
  8. 이는 1987년 20세 이하 칠레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것으로 증명된다. 보반, 야르니, 프로시네치키, 슈케르, 미야토비치 등이 출전했다. 당시 조별예선에서 칠레, 호주, 토고를 각각 4:2, 4:0, 4:1로 가볍게 제압하고, 8강, 4강에서는 브라질과 동독을 각각 2:1로 무찌르며 결승에 진출, 서독을 승부차기 끝에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9. 당시에는 승리시에 2점, 무승부시에는 1점을 주는 제도였다.
  10. 그러나 테니스는 축구와 달리 개인 종목이라 유고슬라비아가 아닌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등 연방에서 갈라져나온 국가들도 충분히 최강급이라서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해도 현재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국가대표 선발전 난이도 역시 크게 올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