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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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유봉팽양요립이엄위연양의유염

劉封
(? ~ 220)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 유비의 양자.

2 정사

본래 성은 구(寇)씨였지만 유비의 양자로 입적 뒤[1] 성이 유씨가 되었다.[2] 다만 유봉이 완전히 유씨와 무관한 것은 아니며, 장사(長沙) 유씨(劉氏)의 조카라는 기록도 병기되어 있다. 즉, 유봉 역시 모계로는 유씨의 혈통을 이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는 외가에 들어가서 씨를 잇는 것 역시 드문 일은 아니었으므로 유비가 양자로 들여 유씨로 삼은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장사 유씨는 광무제, 경시제를 배출한 가문이므로 혈통적으로는 전한계 왕족의 후예인 유비보다 후한계 왕족에 더 가까울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유봉의 이름인 봉(封)은 유비의 친자 유선의 선(禪)과 더불어 봉선(封禪).[3] 봉선은 천자(황제)의 제사였는데 여기서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유비의 야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유비가 정말 봉선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사실 유봉은 양자 출신이므로 애초에 봉은 유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사에서는 유봉이 먼저 양자로 들어온 뒤 유선이 출생하였으나, 연의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도 미묘한 일이라며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의에서 순서를 바꾸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역시 근거는 없다.

유비의 입촉 당시 20여 세의 나이로 가는 곳마다 제갈량, 장비와 함께 승리를 이끄는 등 여러 가지로 군공을 세웠고 맹달과 함께 상용을 점령하고 수비하게 된다. [4] 하지만 맹달과 화합하지 못해 서로 다투었고 결국 맹달의 군악대를 몰수하여 맹달이 위나라에 투항하게 되고 상용을 공격해온다.[5] 그 전에는 관우가 죽는 원인을 제공한다. 일단 맹달을 공격하려 했지만 신의가 배반하여 전세가 기울어짐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성도로 도망쳐온 유봉은 맹달을 욕보인것을 문책당했으며 또 과거에 관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원군요청을 거절한 것도 문책당했다. 또한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후 유봉이 강맹(剛猛)[6]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보고 후환이 될 것을 걱정했고 유봉을 제거할 것을 권한다.[7] 결국 유비는 유봉을 자결케 한다. 유봉은 죽기 전에 "맹달의 말[8]을 듣지 않은 게 한스럽다"라고 했다고 한다.

유비는 유봉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비와 유봉은 입양관계긴 해도 부자지간이었는데, 상식적으로 마음에 들지도 않는 젊은이를 자신의 양자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유비 역시 유봉을 양자로 삼을 당시에는 유봉을 상당히 전망있게 보고 호감을 가졌을 것이고 유봉이 주변인과 반목하는 사납고 굳센 성격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때는 그렇게 마음에 들어해서 자신이 아들로 삼은 청년이 자신의 양자라는 입장이 작용해 한 순간의 실수로 오히려 목숨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되었으니 실로 씁쓸했을 것이다.

유봉의 아들 유림은 촉에서 아문장군까지 지내며 멸망때까지 살아 남았는데 그 후 하동 지방으로 이주했다. 참고로 맹달의 아들 맹흥도 동시에 부풍으로 이주한다.

3 평가

최후를 보건대 유봉의 입장에서는 유비의 양자로 들어온 것이 결과적으로 불행이 되었다. 물론 상용을 잃고 관우를 지원하지 않아 전사하게 만든 책임은 있었지만 후계자 문제가 얽히면서 죽음에 이르렀으니.

진수의 평가는 매우 짜다. 팽양, 위연, 양의, 이엄 등과 한 권으로 묶어놓고, 자신들이 화를 초래했다는 공통된 평을 내린다.

연의에서는 양자 시점이 유선이 태어나는 장면보다 늦게 기술되어서 순수한 의리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형태이지만 실제로는 유선 탄생보다 이른 시기이다. 정황상 후계자로 영입되었다가 적자 유선이 태어나면서 새 된 케이스로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후 유봉의 입자는 굉장히 애매해진다. 정식 후계자가 태어나기 이전에 입적한 양자. 유선이 후계로 서기 위해서는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정리를 해야하는 위치였다.

다만 이것이 전적으로 유비의 잘못이나 실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봉을 양자로 들인 207년 무렵 당시 유비는 이미 40대 중반으로 나이가 많아 아들을 다시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사 얻는다해도 당시 유비의 세력이 유표의 지원으로 근근이 꾸려나가는 군벌 수준이라 성년까지 무사히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었다.[9] 여러모로 어려웠던 사정을 생각하면 유봉을 양자로 들인 것은 보험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후 유비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고 새로 태어난 유선이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유봉의 입장이 실로 애매해졌다는 것이다.

만약 유선에게 약점이 전혀 없었다면 양자라는 약점이 뚜렷한 유봉의 입장이 좀 나아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선 역시 친아들이라곤 해도 적자(嫡子)가 아닌 서자(庶子)이며 나이가 어리고 무능하다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었다.[10] 양자라고는 해도 이미 장성했고 개국과정에서 공적이 있는 유봉은 유선의 제위 계승에 방해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유비 본인은 유봉을 자식으로 여겼다. 유비는 유봉에게 상용을 맡기며 중용하였다. 상용은 땅 크기는 작지만 익주와 형주를 잇는 요충지이며, 독립하기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만한 곳이기 때문에 유봉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죽음은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봉과 맹달의 마찰, 그리고 관우의 죽음과 상용의 상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등의 책임이 매우 컸고 덧붙여 유비의 아들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되어버렸다.

유봉을 제거를 권한 제갈량이 비판받는 부분이 있다. 제갈량의 법가적 태도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정도. 하지만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후계자 문제 때문에 망해버린 원소유표의 전례를 생각하면 유봉을 내버려둘 경우 촉한은 유봉파와 유선파로 나뉘는 사태를 우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촉한보다도 컸던 세력인 원소도 후계 문제로 원담원상이 서로 대립하다가 세력 자체가 박살난 것을 보면 유봉을 죽인 것이 극단적인 결정을 했을지는 몰라도 국론분열은 최소한 막은 셈. 거기에 맹달 말 따라 가뜩이나 유선이 태자에 올라 유봉의 처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형주, 상용 상실과 관우의 전사 등 유봉이 책임질 문제가 상당히 컸다. 어떻게 보면 뒤로 가면 후계자감 찾으려고 손권이 벌인 끔찍한 짓에 비하면 정말 양반이다.[11]

여담이지만 차후 유선의 삽질로 인해 유선이 장판파에서 죽었다면 양자 유봉이 제위를 잇고 촉나라의 부흥이 오래 갔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와 더불어서 유봉이 재평가 받기도 했다. 물론 우스갯소리이고 무리수가 많은 주장이므로 한 귀로 흘리자.[12]

4 연의

연의에서는 관우가 "왜 이미 자식이 있는데 또 (양)아들을 두십니까"라고 했지만[13] 유비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관우에게 있어 재앙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연의에서는 양아들이 되어 유비 밑으로 들어가는 것까진 동일하다. 하지만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의 둘째 친아들조창, 일명 "황수아"[14]라이벌 구도가 서게 된다. 다만 이 구도를 만든 건 조창이 아니라 조조다(…). 유봉이 선봉장으로 나오니까 "가짜 아들이 어디서 설쳐, 우리 황수아한테 발리기 전에 돌아가!"라고 모욕을 준 것. 정작 조조 본인의 아버지도 환관의 가짜 아들이란 사실은 넘어가자

이후 그럭저럭 활약을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초반에는 관평과 주로 세트짝을 이뤄 활약했으나 후반에는 일시적으로 맹달과 짝을 이뤘다.

그러나 맥성에 고립된 관우의 구원 요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자신의 운명도 갈리게 된다. 정확히는 요화가 밤낮을 달려 구원을 요청하러 오자 유봉은 먼저 꽤 고심을 했다. 하지만 희대의 배신자, 줄타기의 제왕 맹달이 "네가 관우를 작은아버지로 본다고 해도 관우가 너를 조카로 봐 줄까? 네가 양아들로 들어가는 걸 거부했는데?"라며 꼬드기는 바람에 모호한 이유를 대서 요화를 쫓아낸다. 결국 관우가 죽음을 맞이하자, 유비는 조조가 죽고 조비가 뒤를 이어 위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동오를 쳐서 관우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 이 때까지는 유봉에게 목숨을 부지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유봉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요화는 먼저 내부의 배신자인 유봉과 맹달을 처형하라고 간언했다. 그 때문에 유장 밑에 있던 시절부터 맹달과 한편이었던 팽양이 맹달에게 알리려다 실패하자, 맹달은 먼저 위나라로 도망갔다. 맹달은 도망가자마자 유봉에게도 배반을 권유했지만 유봉은 맹달의 권유를 거절했다. 이 즈음에서 유비는 유봉부터 죽이려고 했지만, 제갈량은 "유봉에게 맹달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세요. 실패하더라도 유봉을 죽일 수 있습니다."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유봉은 실패했고, 결국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비의 명령에 의해 사형당하게 된다. 사형이 언도된 후 내심 괴로워하는 유비에게 한 신하가 유봉이 실은 관우를 돕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맹달의 배반 공작에도 넘어가지 않았다고 하며 용서해달라고 말하자 유봉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고 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형이 집행된 후였다. 유비는 유봉에겐 큰 죄가 없고 실질적인 배신자는 맹달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최후에 노력하다가 배신자란 오명을 씻지 못하고 죽는 것은 대부분 동일하다.

삼국지연의에서 관평을 양자로 설정한 것은 유봉과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같은 양자임에도 결과적으로 의리를 지키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유봉과 대비시켜서 관평의 의리를 돋보이게 하려는 극적 장치라는 것.

5 미디어 믹스

  1. 관우의 아들 관평은 연의에서 양아들이라고 나온 것과 달리 정사에서는 친아들이었다. 그러나 유봉의 경우는 정사에서도 양아들이 확실하다.
  2. 여담으로 유봉의 어머니는 유비와 동성인 유씨였다.
  3. 흙을 쌓아 올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이 정치상의 성공을 천지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에서 행한 국가적 제전이다. 이 봉과 선은 원래 별개의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가 양자를 합쳐 봉선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지냈다.
  4. 이 때 유비의 행동이 유봉에게 군공을 주기위한 뜻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유비가 맹달이 스스로 상용을 점령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유봉을 보낸 것이다.
  5. 맹달은 서황같은 위의 특에이스급 장수를 데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유봉을 회유하려 들었다.
  6. '强猛'과 뜻이 같은데 '매우 굳세고 사납다'는 뜻이다.
  7. 이미 후계자가 정해진 마당에 공적, 군권, 권한 등이 센 다른 후보가 있으면, 굉장히 혼란스러운 정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청주자사 직함에, 독립적인 군사권, 나름대로의 지지 세력을 가진 원담만 봐도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다.
  8. '유선이 태자로 세워지니 식자들이 두려워 했다. 지금 돌아가면 이미 유비는 너와 피도 안 섞였는데 분명 너를 경계하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유비는 너를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밖으로는 의심을 하고 있다. 결국 후계자 문제로 인해 참소를 받을 것이니 위나라로 항복하라'는 권유.
  9. 당장 당양 장판파에서 조조에게 쫒기는 와중에 두 딸을 잃었고 유선도 조운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10. 유선의 어머니인 감부인은 유비가 떠돌아 다니며 아내를 여러 번 잃은 탓에 정부인 노릇을 했을 뿐 본래 첩이었고, 유선이 황제가 된 뒤에 아들의 신분을 따라 추존되었다.
  11. 손권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이궁의 변 참고.
  12. 실제로 유봉이 장군은 될 지 몰라도 군주감은 아니라는 시각을 가지는 이들도 꽤 있다. 상용에서의 맹달과의 관계나 상용 상실만 보아도 그의 지도자로서의 능력 및 성품의 문제를 알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없애 주었다는 것.
  13. 정사에서는 유선이 태어나기 전 유봉을 양자로 삼았기에 성립되지 않는다.
  14. '수염이 노란 아이'라는 뜻. 조조가 붙여준 별명이다. 바다로 나갔으면 황색 수염으로서 활약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