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호(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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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守鎬
1931년 12월 16일 ~ 2015년 11월 7일

1 개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법조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켰던 판사 출신 정치인.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

2 생애

1931년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에서 태어났다.[1]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2] 195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55년에 졸업하였다. 1955년에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으며, 1960년 육군법무관 대위로 군복무를 마친 뒤,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1973년 판사 재임용에 탈락한 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85년부터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2015년 11월 7일,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2.1 판사 시절

1960년 대구지법 판사, 1966년 대구고법 판사, 1968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70년 부산지법 부장판사를 역임하는 등 법조계에서 승승장구하였다.

부산지법 부장판사 시절인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4.27 개표조작 사건'[3]의 주범인 윤동수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는 박정희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음을 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 판결은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 이후 어수선하던 당시 정국을 완전히 뒤흔드는 빌미가 되었다.

두 달 뒤에는 박정희 정권 퇴진을 부르짖으며 반정부 시위를 주동한 당시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정길에 대한 구속적부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김정길을 석방하였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단단히 찍혔으며, 그 후 제1차 사법 파동이 일어나 박정희 정권이 사법부를 본격적으로 손보기 시작하면서, 1973년 목요상처럼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 후 대구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고, 대구고려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일하였다.

2.2 정치인 시절

박정희에게 단단히 밉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에 경상북도 대구시 동구-남구 선거구로 공천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이효상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5년 경북고등학교 동기인 노태우, 김윤환, 정호용와의 인연으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한병채 대신 대구직할시 중구-서구 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김현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시절 소탈하고 대범하면서도 의리 있는 정치인으로 통하였다. 여당 의원이었지만 강단이 있어서 정부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4]

1990년 3당 합당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에 이종찬 전 의원 진영에 섰다. 그러나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992년 10월 박철언, 김용환, 장경우 의원 등과 함께 민자당을 탈당하고 이종찬 의원이 주도하는 새한국당에 합류했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새한국당이 정주영 전 회장이 대표로 있는 통일국민당과 통합을 할 때, 새한국당의 통합 협상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통일국민당으로 들어간 후 정주영 전 회장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92년 대선 몇일 앞두고 불거진 초원복집 사건 때에는 통일국민당쪽 고발인으로 활약하였다.

정주영 전 회장이 대선에 패배한 뒤 통일국민당은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이 되었는데, 이때 유수호 역시 신민당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1994년말 신민당을 탈당하였고, 1995년 초 자유민주연합이 창당할 때 합류하였다.

자민련 의원 시절이던 1995년 김영삼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선언하고 12.12. 주역 처벌을 위한 5.18. 특별법을 제정하자, 친구 노태우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특별법은 헌법위반이라고 한 사람들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이제 와서 헌정질서를 바로잡겠다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이냐. 특히 전 대통령들 밑에서 공천 받고 녹 먹은 사람들이 자기 보스를 잡아넣겠다는 것이 도의적으로 맞는 말이냐."는 발언을 하였다.[5]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더 이상 정치를 해야 할 명분과 사명을 찾기 어려운 이때쯤 정치를 마감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판단했다. 천직인 재야 법조인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면서 정계를 은퇴하였다.멈춰야 할 때를 알고 물러서는 모습이란..... 이후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3 가족관계

부인 강옥성과 함께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 유승정(1955년생)은 경북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서울 남부지법원장까지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법무법인 바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사위 김진기(1949년생)는 경북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구고등법원장까지 역임하였다.

차남 유승민(1958년생)은 경북고-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제17대, 18대, 19대 국회의원(한나라당, 새누리당)을 역임하였다. 아버지가 의리를 중시하는 호인형인 데 반해, 차남은 원리원칙적인 성격이며, 아버지가 가치보다 사람을 더 중시했던 반면에, 차남은 사람보다 가치를 더 추구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어쨌든 부자지간에 한 가닥씩 한다는 거

국회법 개정과 관련하여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과 마찰을 빚은 것을 두고, 아버지인 유수호 전 의원이 판사로 재직하던 박정희 정권 때 유신정권에 반대되는 판결을 했다가 면직된 전력이 있어 2대에 걸친 악연(...)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1. 다만 일가는 대구광역시로 이사해서 유수호 전 의원의 자택은 대구 남구 대명동에 있었다. 그렇지만 사후 영주에 안장되었다.
  2. 노태우와 동기동창이다.
  3. 윤동수 울산시장과 울산시 공무원들이 개표를 조작하는 등 선거부정을 저질러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시 득표율이 76%에서 81.2%로 상승하게 만들었던 사건
  4. 이만섭국회의장이 한 말이다. 매일신문 2011년 7월 9일자
  5. 동아일보 1995년 12월 12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