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삼국지)

劉廙
(180 ~ 22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장사정왕 유발[1]의 아들 안중강후 유단의 후손이다. 자는 공사(恭嗣).

남양군 안중현 사람으로 형 유망지에게 충고했지만 듣지 않다가 모함을 받아 유표에게 살해되자 도망갔으며, 양주로 가서 조조 휘하로 들어가 승상연속, 오관장문학을 역임해 조조가 그를 인재감으로 평가해 초서로 글을 쓰도록 명했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황문시랑이 되었으며, 조조가 촉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정벌을 중지하고 10년간 내정을 다스리는 것을 건의했지만 거부되었다.

219년에 동생 유위가 위풍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이에 연좌된 것으로 처형당할 뻔 했지만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양설힐이 동생 양설호의 죄에 연좌되지 않은 것을 예로 들어 사면되었으며, 승상창조속으로 옮겨졌다가 상주문을 올려 감사를 전했다.

저서는 수십 편이 있고 정의와 형법, 예절에 관해 논했으며, 조비가 즉위하자 시중으로 임명되었다가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죽을 때 아들이 없어 동생인 유부가 후사를 이었다.

진수로부터 청결한 식견을 가져 저명했다고 평가받았다.

삼국지연의에는 화흠,왕랑 등과 함께 헌제를 핍박, 강제로 선양을 시키는 역으로 나온다.

삼국전투기에는 허벅지에 이 줄줄 흐르는 꿀벅지 유이로 나온다.
  1. 광무제의 조상이기도 하다. 다만 광무제는 용릉절후 유매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