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대한민국 역대 영부인
4대 공덕귀5~8대 육영수권한대행 박근혜
10대 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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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陸英修. 1925년 11월 29일 ~ 1974년 8월 15일(향년 48세).
박정희의 부인으로,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의 어머니. 종교불교이며, 법명은 대덕화[1]이다.

2 결혼 이전

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갑부 육종관의 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육인수가 있었다. 경성부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2]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고,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3] 결혼식 사진을 보면 육영수의 얼굴이 부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전날 육영수가 위경련을 겪어서 생긴 일시적인 후유증이라고 한다.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허억 대구 초대 시장[4]이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근데 주례 선생님 성함도 만만치 않으십니다 [5] 또 결혼식에 쓸 예물반지를 가지고 있던 육영수의 사촌오빠가 결혼식날 반지를 잃어버려 부랴부랴 반지를 사왔다고 한다. 다사다난한 결혼식

당시 군인이었던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결사 반대했던 아버지 육종관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청와대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일설에는 육영수가 박정희랑 결혼하면 육영수가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다고. 흠많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라고 한다. 결국 육종관은 결혼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사실상 의절을 했다. 그러다가 1965년 죽기 직전에 병문안을 온 사위 박정희에게 자신이 부덕하여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사과하였다.

3 결혼 이후

결혼 후에는 당시 군인 월급이 박봉이었던 터라 구멍가게를 열었다고 한다.[6] 6년 후에 서울특별시 신당동에 집을 마련하였는데 당시 대문이 낮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했던 박정희를 보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며 대문을 개조하였다고 한다. 키를 생각해보면 자신이 불편해서인지도 모른다.[7]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서는 첫째 박근혜, 둘째 박근령, 셋째 박지만 총 1남 2녀가 태어났다. 첫째 박근혜는 한국 18대 대통령(임기 2013~2018)으로 당선되었다.[8]

육영수가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의 이후 행보가 극단적으로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이 그런 시각을 가진 책 중 하나인데, 육영수에게 아닌 것 같지만 내심 굉장히 의지하던 박정희는 육영수가 암살당한 뒤 마음이 약해지고 결국 차지철 같은 사람에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3.1 영부인으로서

남편의 행적과는 별개로 영부인으로서 대단히 모범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편 박정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사람들도 육영수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정부에 비교적 비판적 논조를 보이던 'TBC 석간'의 진행자 봉두완[9]의 회고에 따르면 TBC나 DBS 동아방송이 정부비판적 보도를 하여 관련자들이 고생할 때 옆에서 견제하며 뜯어말리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봉두완, 박정희, 육영수가 3자대면한 적도 있다고. 이런 부분은 연합통신/동아일보 출신 이만섭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도 교차 검증된다.

이렇게 남편을 다독이다 보니 그녀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

항상 한복 차림과 매우 꼼꼼하고 소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 고아원과 보육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1971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를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육영수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하고 직접 봉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1973년 한센인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1971년 전남 나주의 한센인촌, 1972년 전북 익산의 한센인촌을 방문하는 등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고, 이후 1974년 소록도 양로원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그 해 8월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출처 이후 2000년대에 이희호가 영부인으로서 소록도를 방문하게 된다. 출처

당시의 박정희의 권위,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좋지 않았던 인식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육영수의 행보는 대중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환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한 점은 아직도 소록도에서 회자되며, 덕분에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우세당이었던 민주당인 만큼 1,839개의 투표소 중에 1,838개의 투표소가 문재인 후보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으나 유일하게 소록도에 있는 도양읍 제7투표소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62.65%의 지지(득표수는 박근혜 270표 문재인 158표)를 받는 등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그렇다 보니 박정희는 까도 되지만 육영수를 까다간 SALHAE 당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이게 농담도 아닌게 실제 박근혜가 정계에 들어온 후 박정희의 행적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고, 야당이 정치적으로도 이용해 먹었지만[10] 육영수에 대해서는 고요할 정도로 언급이 없다. 실제로 박정희 싫어도 육영수 때문에 박근혜에게 표줬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니...

또한 1973년 육영수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익에도 신경을 썼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2014년 경향신문에 올린 본인의 글에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역대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해당 글에서 육영수가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나 육영수의 사후 1977년 박정희가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24) ‘퍼스트레이디’ 육영수][11]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고 만화잡지 보물섬을 발간한 것으로 유명한 육영재단이나 어린이회관을 짓는 등 아동복지와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 [12]

3.2 암살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박정희 저격 사건에서 문세광에게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두부관통상이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회수된 6발의 총알 중 육영수의 머리에 맞은 총알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넘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탄환이 우뇌 깊은 곳에 박혀서 탄을 꺼내려면 시신 훼손이 심각해지기에 탄을 꺼내지 않고 장례를 치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탄환과 함께 묻혀있는 셈이다. 박정희도 10.26 사건으로 인해 서거했기에 내외가 흉탄에 유명을 달리 하였다. 문세광 저격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다. 다음 링크의 영상이 가장 대표적인 음모론을 소개하고 있다.#

육영수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조문객 수만 20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75년에 정부에서 추모사진집을 만들었고 학교에 배부한듯 하다.
육영수의 사후 영부인 역할은 그의 첫째 박근혜프랑스 유학 중이었지만 귀국해서 대행했다. 2016년 육영수가 암살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추모공연인 백목련이 열렸다..

4 트리비아

키가 170cm로 역대 영부인 중 가장 키가 크고[13], 한복에 어울리는 체형이었다고 한다. 이후 영부인이 되는 이순자의 흠좀무(...)한 한복 센스 때문에 더 부각된 면이 있다. 박정희보다 키가 컸다. 참고로 박정희는 165cm로 역대 남자 대통령들 중 가장 신장이 작다.[14] 딸인 박근혜는 162cm. (동년배 평균보다 조금 큰 편이다.) 이거 때문에 부부가 같이 참석할 땐 행사 주최측에서 육영수 쪽이 키를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게 하려고 신경 썼다는 말이 있다. 다만, 박정희 본인은 굳이 키를 크게 보이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서 굽이 높은 구두나 깔창을 쓰지 않았고, 어떤 자리에서는 주최측이 박정희의 의자에 올려 놓은 두툼한 방석을 던져버리기까지 하였다고.

한 때 "푸른 기와집에 정희와 영수가 사는데,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게?"라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매우 유치한 농담이긴 하지만 "대통령 부부가 싸우는 걸 3글자로 줄이면?"이라는 농담도 있었다. 정답은 "육박전". 박정희와 육영수 부부는 이 농담을 듣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지만, 이 농담을 맨 처음 고안해서 써먹은 전유성은 즉각 출연정지를 먹었고 코렁탕은 다행히 먹지 않고 프로그램은 폐지되었다. PD는 회사에 끌려가서 개발살이 났다. 재미있다면서 밑에 놈들이 알아서 긴 거겠지. 즉 과잉충성이지. 정작 이 농담은 대통령 전용기의 스튜어디스에게서 들었다고... # 스튜어디스 배짱 좋네

2010년 들어서 퍼스트 레이디란 제목으로 그녀에 대한 영화가 기획되었으나 번번히 무산되고 있다. 주연으로 내정되던 감우성[15]을 비롯한 배우들이 각본 등의 여러 이유로 거부하였고, 제작비 투자도 부진한 상황이라고 한다. 거기에 청와대에서 국비 지원한다는 헛소문까지 돌아서 감독이 불쾌감을 보인다는 소문도 있으나, 투자 설명회에서 나온 각본이나 설정이 그야말로 유치찬란한 수준이라 투자자들이 멍때리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가운데 변호인이 대박을 거두자 이 영화 제작투자가 다시 활기를 띤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오래가지 않아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1970년대에 유행하던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반장역을 맡은 최불암이 극중에서 담배를 줄이게 만들었다.[16]

4.1 드라마에서

제3공화국(MBC)와 삼김시대(SBS)에서는 배우 김미숙이, 제4공화국(MBC)에서는 배우 전인화가, 코리아게이트(SBS)에서는 배우 고두심이 맡았다. 고두심은 MBC 라디오드라마 격동 30년(격동 50년의 전신)에서도 육영수의 목소리를 맡은 적이 있다. 제5공화국(MBC)에서는 배우 양미경이 육영수 역을 연기하였다.
  1. 권양숙과 법명이 같다.
  2. 송재천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3. 결혼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4세, 그리고 육영수가 26세. 박정희는 재혼이었다. 자세한 건 첫번째 전 부인 김호남 항목을 참조.
  4. 이름이 허억이다. 허억!
  5. 비슷한 예로 방송에서 "육영수 여사"라고 해야할 것을 육영사 여수라고 방송사고를 낸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송사고가 난 건, 방송에서 원체 수없이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 하다보니 순간 실수한거라고 하는데 방송에서 수없이 육영수 여사라는 단어를 부를 시기, 바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벌어진 방송사고라고 한다. 히익, 코렁탕 출처는 이계진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6. 부잣집에서 자란 사람이 스스로 어렵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서는 그런 점에서 그를 고평가한다.
  7. 육영수 여사의 키는 170cm였다. 1970년대다. 당시 남성들도 170 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8.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소록도 선거구에서 박근혜가 문재인보다 더 많이 득표했는데 이는 전라도 지역에서 유일한 모습이었다. 또 충청도에서도 문재인보다 10% 정도 많이 득표했다. 이는 박근혜의 어머니 육영수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전자는 그가 영부인으로서 소록도에 지원한 것 때문일 것이며, 후자는 그가 충청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대전광역시의 정치 지형을 보면 주로 신개발지구인 서부가 진보, 구시가지인 동부가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양상이 나오는데 특히 육영수의 고향인 옥천 출신들이 구시가지에 많이 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9. TBC의 간판 뉴스앵커였고 당시 인지도는 엄기영 전 MBC 사장이나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과 거의 동급이었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국회의원을 하였다.
  10. 과거 민주당에서 영남권 인사들을 영입할 적에 박근혜도 영입 대상에 있었다. 1999년 5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잘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역사 속에서 재평가 받게 해야 할 것. 형식은 민간주도로 하고 예산은 민간 모금과 정부 재정 지원으로 해야 할 것. 기부금 모금을 허가하는 등 정부와 대통령이 앞장서면 국민호응도 클 것이고 꼭 성공할 것"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가 한나라당으로 가면서 이런 긍정론은 증발했다. 그리고 이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11. "박정희에게 매우 비판적이나, 육영수는 도저히 깔 수 없다."는 논조의 글이다.
  12. 육영재단은 손기정 선수의 메달을 기증받아 보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작 손기정 선수의 장례식 당시, 장례식을 위해 메달과 상장을 대여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밖에 청와대에 보관되어 있던 다양한 문화재들이 박정희 암살 이후 사라졌는데, 육영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13. 2016년 10월 29일 현재에도 여성이 170cm면 장신이다. 이때 170cm였기 때문에, 육영수는 거인이었다.
  14. 이 165도 대충 그렇다는거지 사진을 보면 박근혜랑 거의 비슷하다. 즉 더 작다. 뭐 이렇게 작나 생각할 수 있지만, 박정희가 태어난 시대인 1910년대는 지금과는 식량 사정이 달랐다. 박정희의 키는 당시 평균치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2010년대 기준으로 환산하면 170cm 정도? 참고로 1965년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이 168 cm다.
  15. 배우 본인이 야권 성향이 강한 서울대 미대 출신이다.
  16. 이에 대한 에피소드는 최불암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