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순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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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순공주(義順公主)

1635 ~ 1662년

조선 효종의 양녀로, 병자호란 때 조선 공격에 앞장선 인물 중 하나인 청나라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에게 시집갔던 비운의 인물. 본래는 성종의 서자 익양군의 후손인 이개윤의 딸로, 이름은 이애숙(李愛淑)이다.

1 오랑캐에 시집가다

청나라가 당시의 섭정왕[1]이었던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새 왕비[2]조선공주를 맞이하고 싶다며 적당한 나이의 공주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효종은 자신에게 혼인적령기의 딸은 물론이고 조카딸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며 거절했다.[3]

그러자 청나라에서는 왕에게 딸이 없다면 종친의 딸이라도 괜찮으니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이개윤의 딸을 효종의 양녀로 삼아 '의로운 일에 순응한' 이라는 뜻의 의순공주(義順公主)로 봉해서 청나라로 보냈다.

2 환향녀가 되어 돌아오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국, 그것도 병자호란 때문에 조선인들이 무척 증오하던 외국으로 시집가게 된 것만으로도 기구한 팔자라 할 수 있는데... 혼인하고 겨우 7개월만에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고, 남편의 조카와 재혼했다. [4] 그러나 두번째 남편 역시 일찍 죽어서 이역만리에서 혼자가 되었다.

훗날 의순공주의 아버지 이개윤이 청나라에 요청해서 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 올 수 있었지만, 고국에서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던 그 시대의 분위기에, 청나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까지 겹쳐서, 사실상 강제로 혼인했던 것인데도 의순공주를 오랑캐에게 두 번이나 몸을 더럽힌 여자로 매도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리고 조선 조정에서도 도르곤이 죽어 정치적 가치가 없어진 그녀를 공주로 대우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다행히 효종이 그런 조정의 의견에 따르지 않아서, 효종이 재위하던 동안에는 조정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쌀을 지급받았다. 하지만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의순공주에 대한 조정의 박대는 노골화되었고, 조선왕조실록에 의순공주라고 쓰지않고 '이개윤의 딸'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나중에 공주 지위를 박탈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한스러운 삶을 살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자세한 것은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항목 참조. 해당 항목의 '5. 이야기 거리'에 의순공주의 혼인 과정 및 귀국한 후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나와 있다.
  1. 그 때 청나라 황제 순치제가 나이가 어려서 섭정을 받아야 했다.
  2. 단 청나라는 일부다처제라 왕이 정실부인에 해당하는 왕비를 여럿 두었고, 그런 여러 왕비 중 하나를 의미하는 것임.
  3. 실제로는 효종에게 왕실 여성의 혼인적령기에 해당하는 10세를 넘긴 딸이 2명이 있었고, 일찍 죽은 소현세자의 딸인 조카딸 중에서도 혼인적령기에 이른 사람이 1명 있었다. 효종은 딸과 조카딸을 청나라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혼인시켰다.
  4. 이게 웬 엽기적인 행태인가 싶겠지만, 만주족 사회에서는 형사취수의 풍습 때문에 누군가의 아버지나 형 혹은 친척이 죽으면 그 처첩을 자기 처첩으로 맞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만주 왕조였던 고구려, 부여도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