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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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후배이기도 한 염경엽 전 감독과 커플룩[1]

이름이강철(李强喆 / Kang-chul Lee)
생년월일1966년 5월 24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광주광역시 북구
학력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동국대
포지션투수
투타우언우타
프로입단1989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소속 팀해태 타이거즈 (1989~1999)
삼성 라이온즈 (2000~2001.7.31)
KIA 타이거즈 (2001.8.1~2005)
지도자 경력KIA 타이거즈 투수 코치 (2006~2012)
넥센 히어로즈 수석 코치 (2013~2016)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김만후(1987~1988)이강철(1989~1999)박충식(2000~2001)[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이복연(1998)이강철(2000~2001)이준호(2002)
KIA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성영재 (2000)이강철(2001)[3]홍찬영(2002~2003)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박충식(2000 ~ 2001)이강철(2002~2005)신용운(2006~2007)
KIA 타이거즈 등번호 72번
이강철(2006~2007)장재중(2008~2011)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조계현(2003~2005)이강철(2008~2012)김종국 (2013~2014)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9번
팀 창단이강철(2013~2016)현직
해태 타이거즈 역대 주장
이순철
(1994~1997)
이강철
(1998)
이호성
(1999~2001)
역대 수상
1996년 한국시리즈 MVP
1992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
보유 기록
10년 연속 두자리승[4]1989년~1998년

1 소개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의 투수이자 전 넥센 히어로즈의 1군 수석코치.

역대 타이거즈 투수 중 최다승 투수.[5] 2,000이닝 투구한 투수들 중 평균자책점 1위를 마크하고 있다.(3.29)그리고 길고 긴 이승엽 홈런 레이스의 시작[6]

2 프로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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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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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사상 최고의 언더핸드 투수[7]

현역시절 등번호는 19번(해태) - 16번(삼성) - 13번(KIA) - 19번(KIA), 코치로서는 72번 - 77번 - 89번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90년대 내내 규정이닝을 거르지 않고 채우고 3점대 이하의 평자와 10승 이상을 보여준 선수다.

한희민-이강철-박충식-김병현-정대현으로 이어지는 한국프로야구 언더핸드 투수 계보의 한 축. 전성기 적 주무기는 슬라이더커브.[8] [9]

그리고 대한민국 언더핸드 투수 중 가장 장수한 선수다. 그것도 선발로.[10] 굳이 언더핸드로 한정하지 않아도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손가락에 꼽는 대투수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한국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10년 연속 두자리 승수 및 세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한 투수다. 또 250경기 선발등판 기록도 있다. 덤으로 크보 통산 가장 많은 몸에 맞는공을 던진 투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독보적으로 폭투가 적어서 크보에서 타자를 가장 많이 상대한 30걸 투수중에 1위(19개).등번호가 19번이었던 이유는 폭투를 딱 19개만 던지기 위해서였다.

이강철은 팀 내에서 선동열이나 조계현, 후반에는 이대진에 밀려서 2인자 이미지가 있다. 전체 KBO 리그에서 본인 커리어를 보면 딱히 2인자라고 보기 힘들다. 한국시리즈 우승[11] 경력과 위의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10년 연속 두자리 승수 및 세자리수 탈삼진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 기록. 정민철을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민철은 일본으로 진출하는 통에 8년 연속 두자리 승수에 그쳤다. 이강철은 152승, 정민철은 161승이라고 하나, 정민철이 2~3년정도 선수생활을 더 해서 그렇고 연평균 승수는 이강철은 9.5승, 정민철은 8.94승으로 이강철이 앞선다. 게다가 탈삼진 수에서도 이강철이 정민철보다 우세하며 부진했던 정민철의 일본리그 시절 기록을 제외하고도 이강철이 평자책 3.29 정민철은 3.51으로 이강철이 앞선다.

정민철의 통산스탯이 안 좋은 것은 KBO에 재복귀한 2002~2005년까지 성적이 크게 나빴기 때문인데[12] 이때는 타고투저로 리그 평균 자책점이 4점대 초중반이였기 때문에 이 평가는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강철도 삼성 트레이드 이후 2000~2001년 타고투저 시절에 평자책이 6~7점(...)까지 오르는 등 성적이 크게 나빴던 시절까지 넣고 계산 한 것이다. 참고로 두 사람다 2000년대 중반쯤 둘 다 귀신같이 부활한다.[13] 빙그래팬들에게 이강철보다 정민철이 우위였다고 각인된 이유는 정민철의 커리어하이가 94년이였고 반대로 이강철은 94년에 FIP이 4.48 조정 FIP이 85.7[14]으로 폭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만 보면 거의 크보 레전드급인데 별로 사람들 뇌리에 남지 않는 이유는 같은 시기에 시기에 선동열, 조계현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묻힌 감도 있다.[15] 어떻게 보면 선동열에 의한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잘 던지다가 4이닝 원아웃 내지는 투아웃에 선동열 등판으로 인해 승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승수는 많았지만,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96년을 제외하면 큰 경기에서 타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팬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도 있으며, 정작 커리어하이인 92년과 이종범의 일본진출로 해태가 망해갔던 98년을 제외하면 그가 팀내 최다승을 못거두었다는 점도 있다. 선동열이 부상으로 이탈했던 92년에는 팀내 최고 에이스 자리를 맡았지만 혹사 여파인지 93~96년에는 조계현에게 한참 밀렸고, 그때 조계현은 4년간 60승을 거두며 해태의 에이스자리를 꿰찼으며, 조계현의 경우는 당시 2년간 왕좌를 양분하였던 LG 트윈스에게 12연승을 거두며 절대 에이스로 자림한 탓도 있다.

또한 의외로 송진우와 라이벌 구도가 있다. 1992년에 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했는데 하필이면 송진우를 밀어 주는 바람에...본인이 회상하길 처음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아깝다고 얘기를 하니 허탈하고 눈물도 나고 그랬다고.[16] 그 해에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지만 1992년 당시에는 탈삼진 타이틀이 없어서 타이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바로 그 다음 해인 1993년에 탈삼진 타이틀이 신설되었다. 아아...)또 12년 뒤 선동열의 통산 최다 탈삼진을 경신했지만 그마저도 회장님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이때 희생양은 강커태 하지만 이거랑 상관없이 통산스텟은 이강철이 송진우보다 낫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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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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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1998 시즌 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고 1999 시즌을 통째로 쉰 후[18], 2000 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3년 간 8억 원의 조건으로 FA 계약을 맺고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했다.[19] 그러나 무릎 수술 후유증과 노쇠화가 겹쳐 2000 시즌에 1승 7패에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후, 김응용 감독이 왔지만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2001년 7월 30일 2억 원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KIA 타이거즈로 돌아갔다. 역시 타이거즈가 어울렸어! KIA 타이거즈로 돌아온 이후 불펜의 핵으로 자리매김했으며 2005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20] 다만 그의 마지막 전성기인 2004년의 마지막 등판인 준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홍성흔에게 만루홈런, 안경현에게 투런 홈런을 맞은 것은 본인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덕아웃에서 누군가가 빵을 먹기 시작하는데....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구속은 언더핸드로써는 빠른 편인 130km/h 중후반대까지 나왔다. 당시 해설자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이강철의 직구가 속도는 느리지만 우완 정통파 투수의 140km대 직구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을 정도로 위력적인 직구를 뿌렸다. 또한 언더핸드 답게 공끝의 움직임이 상당히 지저분 했으며 그의 슬라이더(커브라고도 했다)는 당대 최고의 구질 중에 하나였다.

이강철의 슬라이더는 살짝 떠오르면서 우타자 바깥쪽(혹은 좌타자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이강철이 선발로 롱런했던 이유도 이 슬라이더가 좌타자에게 잘 먹혔기 때문이다. 또한 슬라이더의 구속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기도 했다.

또한 직구의 구속도 조절했다. 완급 조절에 있어서는 리그 최강의 투수중에 하나. 실제 전성기 시절 이강철의 투구를 보면 공이 배트를 피해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언더핸드의 필수 구질이라는 싱커를 많이 던지지 않았던 이유도 다른 구질이 워낙에 좋았기 때문에 굳이 싱커를 던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더핸드하면 땅볼 투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강철은 슬라이더와 직구의 완급 조절을 이용해서 삼진을 많이 잡아내던 투수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동열, 정민철, 주형광 같은 괴물 같은 탈삼진 능력을 가진 투수들이 리그를 호령하던 90년대에도 심심챦게 탈삼진 순위에 이름을 올리던 투수였다.

해태팬 한정으로 기복이 심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3점대 평균 자책점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안정적인 투수였다. 다만 피홈런이 많았고 그 피홈런이 결정적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 기억이 있는 것. 게다가 해태의 경우 모든 투수들이 선동열과 비교 당할 수 밖에 없는데 선동열과 비교해서 기복이 심하지 않았다라고 할 만 한 투수는 전성기의 최동원, 김시진 뿐이라....

4 지도자 시절

4.1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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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2005 시즌 끝나고 은퇴했으며[21], 은퇴 후 KIA 타이거즈에서 불펜코치와 투수코치를 맡았다. 특히 옆구리 투수 키우는 데 일가견이 있어, 불만 질러대던 손영민을 필승조 불펜으로 키워내는데 성공했고 2009 시즌 유동훈을 언터쳐블 클로저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기사보기 다만 2009년 유동훈의 무시무시한 성적(대표적으로 0점대 방어율)은 다른 시즌의 성적과 비교해봤을 때, 플루크에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BABIP 수치가 유독 낮게 나왔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아 타이거즈의 몸에 맞는 공 숫자로 대표되는 제구력 문제는 그것이 비록 고질병이라고 할지라도 이강철 코치도 책임을 면하기 힘들다는 평이 대세.

4.1.1 2010 시즌

불펜코치를 맡다가 데스기모토. 즉 스기모토 타다시가 2군으로 내려가자 1군 투수코치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후반기에도 불펜진이 여전이 엉망이어서 스기모토와 함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코치로 승격되자마자 8월 1일 인천 SK전에서 선발투수 로페즈가 4회말 투구 도중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나광남 주심에게 항의하고 계속 궁시렁대자 마운드 위에 올라가서 진정시키고 공수교대 이후 또 덕아웃에 내려와서 궁시렁대자 락커룸으로 로페즈를 끌고가서 뭔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순한 양을 만들어 곧바로 진정시켰다.(...)

이 경기 이후 이순철 MBC ESPN 해설위원의 트위터에 올라온 내용에 의하면 그날 락커룸에서 로페즈에게...

야이 개새끼야!라고 우리말 육두문자를 시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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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2011 시즌

2011 시즌을 앞두고 그대로 1군 투수코치를 맡았는데, 불펜진이 '완전히' 붕괴되고 치솟은 방어율과 미친듯이 늘어나는 볼넷과 피홈런수때문에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올드 타이거즈 팬들의 본거지인 호사방에서까지도 예외는 아니였다.

결국 건강을 이유로 야구계에 은퇴하여 일본에서 요양중인 칸베 토시오 전 기아 투수코치가 무너진 기아 투수진을 살리기 위해 투수 인스트럭터로 방문하여 일시적인 성과는 냈으나 칸베옹의 귀국 뒤 다시 원상복귀. 준PO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4.1.3 2012 시즌

하지만 감독이 선동열로 바뀌었음에도 살아남았다. 사표를 냈었지만 선동열이 만류하고 같이 하자고 했다고. 현역시절에 원정을 가면 숙소에서 항상 선동열과 같은 방을 쓰던 방장-방졸관계라 워낙 둘이 친한 측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군 불펜코치로 2012년 시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작부터 기아 투수진이 붕괴되자, 4월 25은 선동렬 감독은 다카하시 미치타케 투수코치를 2군으로 보내고 이강철을 1군 투수코치로 발령.

2012년 신인드래프트 중하위 픽이었던 홍성민을 잘 굴려 1군에서 요긴하게 써먹는 모습을 본다면 분명 언더투수 육성 능력은 있지만, 역시 문제는 그것 말고는 투수코치로서 이렇다 할 강점이 없다는 것. 그나마 선동열 감독이 투수진을 직접 관리해서 그런지 2011년보다는 욕을 덜 먹고 있는 상황였이다.

헌데 시즌이 끝난 후 뜬금없이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 2012년 시즌 종료 후부터 넥센의 감독을 맡게 된 염경엽과 광주일고 선후배 사이라는 친분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22] 대부분의 기아 팬들은 그렇게 실컷 욕하고도 막상 간다고 하니 또 서운하다는 듯. 말 그대로 서운할 뿐이지 잡고 싶다는 마음은 안 든다는 게 함정

4.2 넥센 히어로즈 시절

4.2.1 2013 시즌

2013 시즌 시작전 투수총괄 겸 수석코치의 보직을 부여받았으나 사실상 투수쪽으로는 사이드암 선수들만 신경썼을뿐 투수에 대한 운영은 최상덕 코치가 했다.

시즌 초반 옆구리 김병현한현희는 확실히 작년보다 좋아진 모습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결산을 하자면, 한현희는 완전히 필승조로 자리를 잡았고, 마정길은 쏠쏠하게 전천후로 역할을 맡아주었지만 김병현은 결국 후반기 이후 모습을 감추었다. 2013년 열린 제2회 슈퍼게임 9회초에 등판하여 평균 100km/h의 흑마구로 일본 레전드들을 멋있게 능욕했다.

4.2.2 2014 시즌

2014년 4월 25일 5.2이닝 12피안타 2피홈런 3볼넷 11실점을 기록하며 내려간 문성현을 조련하여 6일만인 5월 1일 6이닝 6이닝 무실점 퀄리티 스타트, 82구 4피안타 1볼넷 4K을 던지는 투수로 변신시켰다. 구속도 5km/h 넘게 올라가서 최고구속 148km/h를 찍었다. 문성현의 투구폼을 미세조정하여 하나 '두울' 셋의 리듬으로 던지게 하고 여타 세세한 것을 조정한 것이 큰 효험을 보였다. 팬들은 이강철이 투수코치까지 겸해 달라며 기쁨의 환성을 올리고 있었는데... 문성현5월 7일에 등판하여 2이닝 12실점하였다. 이강철도 투수코치로 좋은 평을 못 들었던 이유가 있었고 문성현답이 없다.

5월 중순 이후 6월까지 넥센 투수진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팬들의 비판도 슬슬 늘어나는 추세다.

6월 11일 재활코치로 있던 류영수 코치[23]가 1군 메인 투수코치로 올라오게 되면서 수석코치의 본 임무로 돌아갔다.

6월 13일 "요즘 투수들은 요령이 없어" 라는 인터뷰를 했다. 기사

8월 이후 언더핸드 김대우가 평자 2.70을 찍으며 선발진에 안착하자 다시 넥센 팬들의 호감이 상승하고 있다.

김동수 배터리코치가 친정 팀 LG 트윈스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복귀하면서 이강철도 두산 베어스 이적설이 기사로까지 나왔으나, 구단과 본인이 낭설이라고 밝혔다. 내년에도 수석코치로 염경엽 감독을 보좌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혀갤에서는 두산의 영입 시도 자체는 사실이나 염감에게 의리를 지켜 남은 게 아니냐고 추측.특히 코시 끝나고 흘린 염감의 눈물에 고교 선배로서 마음 약해진 게 아니냐고들 하고 있다

4.2.3 2016 시즌

2016년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사이드암 투수 신재영에게 불펜코치 박승민과 더불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시즌 시작 전 언더투수코치가 없는 삼성으로 이적한 김대우가 폭망하면서 이강철의 코칭 능력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염경엽 감독이 사퇴된 이 후 심재학 수석코치로 내정되어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

5 기타

  • 2013년 정규리그가 끝나고 KIA의 차기 감독 후보군으로 분류되었다. 염경엽 감독 옆에서 수석코치를 하고 있는 이강철이 메리트를 가질수 있다는것. 김평호 기아 코치도 팬들과 소통을 잘하고 평가도 괜찮아 감독 후보로 거론되지만 외야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투수 출신인 이강철이 더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다.결론은 각동님 1년 연장 후 눕동님
  • 여담으로 현역 시절에 달았던 19번은 그의 은퇴 이후 이강철이 키워낸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 투수가 가장 달고싶어 하는 번호가 되었다. 신용운손영민이 이 배번을 달았었다. 그러나 이강철이 넥센으로 가면서 언더핸드와 사이드암이 아닌 뜬금없는 좌완 손동욱이 달더니 이젠 노장 우완 최영필이 다는 중. 한편 넥센에서도 한현희가 이 번호를 달았지만 19번을 달았던 언니가 돌아오면서 한현희는 원래 달던 63번을 달게 되었다.
  • 장채근이 말하길 동료시절, 자주 자신의 피부를 유독 좋아 했다한다.(...) 장채근 자신이 상의를 탈의하고 있으면 자신 곁으로 와선 “형 피부가 너무 뽀얗고 부드럽다”며 몸 구석구석을 만지곤 하던 이상한 녀석이라고.(...)#역시 이 양반은 넥센에 올 운명이였어. 이가Ang철 그래도 장채근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고 성적취향이 남다른건 아니다. 강철이는 분명한 사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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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 무등산에서 해태선수들과의 야유회에서 장채근과 요염하게찍은 사진.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ERA경기완투완봉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
1989해태 타이거즈3.23368315850195 1/315313769137
19903.1444101161050220 2/316324849165
19913.1936112151130214 2/3158205415193
19923.443312218900217 1/3179297116155
19933.04312110101015411396513131
19943.643351121510185 2/31501910517140
19953.302942101010150127155318126
19962.46285210910153 2/3114114713119
19972.99305211320162 2/3130146015128
19983.113132151100179 1/3165184718160
년도소속팀ERA경기완투완봉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
2000삼성 라이온즈7.30140014003745817520
년도소속팀ERA경기완투완봉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
2001KIA 타이거즈6.912700231156599201150
20023.176600521781058212361097
20031.9867006491468 1/342723857
20042.957900627785 1/368931856
20053.201800010319 2/32318415
통산-3.296026518152(3위)11253332204 2/317712187971891749(2위)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1. 두 사람은 광주일고 선후배 지간이다.
  2. 1999년 시즌후 FA로 이강철이 삼성에 가자, 보상선수로 왔다. 언더핸드라는 공통점이 있는지라, 19번을 그대로 달았다. 이강철이 2001시즌중 돌아오자, 2002시즌부터는 15번을 단다.
  3. 2001년 8월 1일에 트레이드 되서 왔다. 마침 KIA 타이거즈 창단도 2001년 8월 1일. 정확히 시즌 끝날 때까지 두 달만 쓴 번호이다.
  4. 한국프로야구 최초
  5. 해태-기아 성적만으로 150승. 2위는 146승의 선동열.
  6. 이승엽의 데뷔 첫 홈런은 1995년 5월 2일 광주 해태전에서 나왔다. 그를 제외한 허용투수들은 많다. 100호 정명원 (최연소), 200호 김정수 (역시 최연소) 300호 김원형 (세계 최연소) 한일통산 400호 이가와 게이, 한일통산 500호 밴헤켄, 한국 350호 찰리 쉬렉 (최연소&최단기간), 352호 윤희상 (KBO 최다 홈런 신기록), 400호 구승민, 한일통산 600호에 이재우, 그리고 KBO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 이정민.
  7. 김병현은 MLB에서 뛴 기간이 더 길기 때문에 한국프로야구에선 사실상 이강철이 최고의 언더핸더라고 볼 수 있다.
  8. 의외로 언더핸드 투수들의 주무기로 많이 이용되는 싱커는 별로 안 던졌는데, 많이 맞아나가서인지 당시 배터리를 이루던 장채근과의 상의 끝에 봉인했다고 한다. 정작 마구마구에서는 싱커의 등급이 높은편.#
  9. 언급된 바와 같이 싱커 구사가 적어 잠수함 투수치고는 피홈런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 수준의 체인지 오브 페이스 능력으로 잠수함 투수 가운데 이닝대비 탈삼진률이 높은 축에 속했다
  10. 그것도 기존의 언더핸드 투수들과는 달리 위의 자료처럼 왼쪽 발을 1시 방향의 크로스 형태로 내딛는 투구폼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무릎에 부하가 더 많이 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몸의 유연성과 좋은 밸런스를 바탕으로 오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11. 우승 횟수 자체는 이야기해 봤자 입만 아프고해태왕조의 위엄, 1996년 한국시리즈 MVP 경력이 있다.
  12. 이때 이강철은 이미 불펜으로 전환했다
  13. 참고로 이강철은 불펜 뛰면서 매해 100이닝씩 던졌다(...)
  14. 즉 리그 평균보다 못 했다는 소리
  15. 정작 세부스텟은 이강철이 조계현보다 좋다
  16. 하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송진우를 선배로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도 나왔다고 한다. 당사자인 송진우는 "내가 아는 강철이는 그런 말 할 애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출처 - 1992년 10월 7일 주간야구)
  17. 솔까 워낙 송진우 회장이 오랫동안 꾸준하게 잘 해줘서 그렇지 '누적 WAR이랑 누적 WAR/144만 빼면 차라리 정민철 스텟이 더 낫다.
  18. 그것은 해태 타이거즈에게 크나큰 불운이었다. 곽현희가 에이스로 11승을 거두면서 6점대 방어율을 거두었고, 나머지 투수들도 규정이닝을 채우면서 3점대를 기록한 선수는 없었다. 타선이 210홈런을 치면서 역대 최강에 근접하는 포스를 보여주었음을 생각하면 너무 뼈아픈 이강철의 부재였다.
  19. 당시 FA 보상선수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박충식이었다. 박충식은 고향 팀 해태로 이적한 후 해태의 열악한 재활 시스템에 기겁했다고 한다. 자세한 건 해태 타이거즈 항목 참조.
  20. KIA에서 불펜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던 시기는 2002~2004년인데, 이때 그는 역대 만 36~38세 선수 중 최다 등판을 기록하기도 했다. 스탯티즈만 있었어도 정확히 알텐데...
  21. 이 시즌 끝나고 베테랑 이강철, 조규제, 홍현우가 옷을 벗었으며, 최상덕+마해영은 LG로 트레이드 되는 팀 개편이 있었다.
  22. 충공깽스러운 일이지만 선동열, 염경엽, 이강철 모두 광주일고 선후배 사이다.
  23. 오랫동안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에서 투수코치 생활을 한 사람이라 분위기를 잘 아는 코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