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벨린의 발리앙

Balian d'Ibelin
Balian of Ibelin

(1140? ~ 1193)

1 개요

예루살렘 왕국 말기의 기사이자 십자군 전쟁의 주요인물.

십자군 이민(…) 1세대인 이블랭의 영주 바리장(Barisan d'Ibelin)의 막내아들로 출생연도가 약간 모호하다. 1158년에 성년이었다는 기록과 1155년에 미성년이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아마도 114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로 큰형인 위그(Hugue�s)와 작은형인 보두앵(Baudouin)이 있었는데, 위그는 1169년 사망하였고, 작은형은 당시 람라의 영주로 있었기 때문에 발리앙이 이블랭 성을 물려 받았다. 불어 Balian d'ibelin로 하면 '발리엉 디블랑' 정도로 읽힌다.

2 이블랭 가(家)의 시작

중세에 보기드문 입지전적인 가문. 겨우 2대만에 영지도 없던 가난뱅이 기사에서 킹메이커 가문으로 발전하니 철저한 혈통 중시 사회이던 중세에 참으로 보기드문 가문이었다.

이블랭가는 예루살렘 왕국키프로스 왕국의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이되지만 그 시작은 한미하기 그지 없었다. 이블랑가에서는 프랑스 샤르트르 지방의 르 퓌세 자작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후대에 날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이블랭가의 초대당주라 할 수 있는 바리장은 이탈리아 북부 투스카니 쪽에서 온 이름이었으니 사실은 이탈리아 출신 가문일 가능성도 있다.[1]

어찌되었든 이 1대 이블랭가의 당주인 바리장은 1115년에 야파 지방을 점령한 위그 1세 드 르 퓌세(야파를 제압하고 야파 백작령의 영주가 됨)의 기사로 참전했다는 식으로 처음 역사에 드러난다. 하지만 유럽에 영지와 봉토가 없음은 확실하니 귀족의 차남 이후라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경우이거나 극단적으로는 자칭 기사...일지도 모른다. 물론 자칭기사라 하더라도 말과 무장 정도는 스스로 마련해야 하니 평범한 농민은 아니었을 것이긴 하다.

이 야파 지방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공로를 세웠던 모양인지 1122년 야파 백작령의 봉신인 람라 영주의 딸인 엘비(Helvis)와 결혼하게 된다. 1141년에는 람라 남작령의 주군이자 야파 백작령의 영주인 위그 2세 드 르 퓌세 백작의 반란사건에서 왕에게 충성심을 보인 결과 예루살렘 왕국의 3대 국왕인 풀크왕으로부터 야파 백작령 내에 있는 이블랑이라는 작은 성(城)을 하사받아 영주가 되었고[2], 이후 야파 백작령은 예루살렘 국왕의 직할지가 되었으므로 이블랭 성과 람라령을 갖고 있던 이블랭 가문도 국왕의 봉신이 되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예루살렘 왕국의 야파 백작령의 안에 있는 이블랭이라는 작은 성이 바로 이블랭 가문의 시작이다.

3 본격적인 활동

바리장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 아들인 바리장이 부친과 구별하기 위해 프랑스식 발음인 발리앙으로 불렸고 바로 이 항목의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이 되겠다. 이후 발리앙의 어머니인 엘비가 람라 영지를 상속으로 물려받았고, 첫째 아들인 위그가 어머니로부터 람라 영지를, 아버지로부터 이벨린을 상속받았다. 1169년 장남인 위그가 스페인 산티아고로 순례여행을 떠났다가 죽는 바람에 둘째 아들인 보두앵이 다시 상속 받게 되었는데 보두앵은 자기가 람라 남작령의 영주가 되었고 자기 동생인 발리앙에게 이벨린 남작령의 영주 자리를 봉신의 지위로 나눠 주었다. 야파 백작령은 예루살렘 국왕의 직할지이므로 람라령주인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의 봉신이 되었고 발리앙 역시 간접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봉신이 되었다.

발리앙은 1174년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Raymond III de Tripoli)를 도와 아랍 세력과의 전쟁을 지원하였으며, 1177년에는 몽기사르 전투에 참전하여 무슬림 세력의 방어선을 박살내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모리 1세의 미망인이던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을 하였는데, 이 여인이 누군고 하면 바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조카(!) 되시겠다. 그 덕분에 1179년 살라딘과의 전투에서 형 보두앵이 포로로 사로잡혔을 때, 마누엘 1세가 직접 몸값을 지불해 줘서 보두앵이 석방될 수 있었다.[3] 오오 사돈어른 오오

물론 마리아 콤네나가 동로마 황제의 조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마리아 콤네나가 예루살렘 국왕인 아모리 1세의 아내라서 예루살렘의 왕비였다는 점이다. 즉, 보두앵 4세시빌라의 새엄마가 되겠다. 신분 차이가 꽤 컸는데도 발리앙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넷이나 두었던걸 보면 의외로 금슬이 좋았던듯 하다. 덤으로 마리아 콤네나는 아모리 1세에게 상속받은 나블루스 남작령도 가져와서 발리앙의 영지가 더 늘어났다. 발리앙이 예루살렘 왕국의 중요 인물로 등장하는 건 이 때부터다.

4 왕위 계승 분쟁

1183년 나병으로 죽어가던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가 5살짜리 조카 몽페라토의 보두앵(Baudouin de Montferrat)을 공동 국왕으로 앉혀서 왕위계승을 시키려 하였고, 보두앵과 발리앙 형제를 통해 동생 시빌라의 남편이자 섭정인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리고 1185년 보두앵 4세가 죽고 뒤를 이어 5세가 왕위에 오르자 발리앙 형제는 5세에게 영원히 왕을 위해 봉사하고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보두앵 5세는 이듬해 사망하였다.

당시 왕위계승을 노리던 기를 물먹이기 위하여 발리앙 형제는 마리아 콤네나의 딸이자 발리앙의 양녀인 이사벨라를 왕위계승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사벨라의 남편이 기에게 충성서약을 하면서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아오 저 사위새끼 사위야 뭐 하는 짓이냐 왕위를 계승중입니다 장인어른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시빌라가 기를 배우자로 간택하면서 결국 왕위는 뤼지냥의 기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보두앙은 기에게 충성서약을 거부하고 자신의 아들과 영지 람라를 발리앙에게 위임한 후 안티오키아로 떠났으며, 발리앙은 마지못해 기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고문역을 맡았다.

5 하틴 전투

그 해 기와 동맹관계인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âtillon)이 무슬림 상단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살라딘은 보복을 선언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였다. 기는 병력을 소집하여 이에 맞서려 하였으나 발리앙은 강대한 살라딘의 군대와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라면서 반대하였고, 역시 같은 의견을 지닌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가 나서서 중재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르노의 처벌을 요구하는 살라딘과 그럴 수 없다고 맞서는 기의 의견차이로 인해 중재는 대실패. 결국 이런 대치상태는 1187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발리앙은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시동의 르노(Renaud de Sidon)과 함께 트리폴리로 향하였다. 하지만 5월 1일 크레송 전투에서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살라딘의 아들 알 아프달에게 발렸으며, 뒤늦게 도착한 발리앙은 패전사실을 듣고 즉시 생존자들을 수습하고 철수하였다. 역시 패전사실을 보고받은 레몽 3세도 뒤늦게 뤼지냥의 기와 손을 잡고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4]하기로 하였다.

기는 살라딘의 병력을 쫓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북부로 진군하였으나, 황량한 대지였던 까닭에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지속적인 공격으로 고전하였다. 결국 기가 이끄는 예루살렘군은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에게 포위 섬멸당해 기(Guy)는 포로로 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는 발리앙도 참전하고 있었으며 에데사의 조슬랭 3세(Josselin III d'Édesse)와 함께 후미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패배하였고, 패색이 짙어지자 레몽 3세, 시동의 르노와 함께 티레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것이 발리앙이 위치한 후미에는 집중적인 공격으로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격전중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발리앙은 그걸 뚫고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전술적 능력을 엿볼수있다. 그리고 보두앵 5세의 삼촌인 몬페라토의 콘라드와 협력하여 티레의 방어를 맡게 하였다.

6 예루살렘 방어전

발리앙은 살라딘을 찾아가 예루살렘에 있는 아내와 자식을 트리폴리에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고, 살라딘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자 주민들과 주교 헤라클리우스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방어전을 지휘해달라고 애걸하였고, 결국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고 살라딘에게 요청하고 살라딘은 발리앙의 상황을 이해한다며 그걸 또 받아준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시빌라 여왕이 남아있었지만 방어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전권은 발리앙이 쥐고 있었으며,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와 함께 식량과 장비, 병력을 확보하는 등 방어준비에 박차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사가 부족하자 60명의 사람들을 임의로 선발하여 기사로 서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 사이 예루살렘 왕국의 다른 영지들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한 살라딘은 비록 발리앙이 약속을 어겼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트리폴리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아예 호위까지 붙여주는 대인배스러운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치열한 공성전이 전개되어 살라딘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지만 발리앙이 이끄는 방어병력에 격퇴당해 도시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발리앙이 살라딘을 만나 30,000 베잔트의 금액과 도시를 살라딘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7천명의 기독교도 남자들의 안전을 보장받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50일 이내에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었다. 당시 살라딘은 협정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5], 발리앙이 나와서 "ㅅㅂ 계속 쥐어패면 성지고 나발이고 다 때려부수고, 이슬람교들을 다 죽이고 같이 자살해버릴테다!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협박해서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협상이 주로 살라딘의 자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만 알려지긴 했지만, 실제로는 발리앙이 살라딘의 전략적 문제를 극한으로 활용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세시기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군사동원은 봉건적 의무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그 이상을 넘어설 경우는 봉신들이 동원에 응할 의무가 없었으며 주군은 동원을 유지하기 위해 금전을 지급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살라딘은 자신의 자비로움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으며 하틴의 뿔 전투 이후 계속된 진격으로 가신의 동원기한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공성전의 지속은 발리앙이 예루살렘의 자체적 상징성과 군사동원기한의 문제를 이용하여 가능한 관대한 조약을 얻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 함락 이후 살라딘의 동원력은 크게 낮아지고 3차 십자군이 도착할 때까지 티레 공성전이 이어지게 되었다.

약속이 이행되는 동안 몸값을 마련하지 못한 기독교도의 학살을 방지하고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총대주교 헤리클리우스와 함께 인질이 되겠다고 자청하였으나 살라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며, 오히려 살라딘은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대납해주는 대인배 행보를 보여주었다.어차피 살라딘이 이슬람측의 군주인데 몸값을 대납해주면 다시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오는 것 아닌가? 몸값 대부분은 살라딘 본인의 차지가 아니라 휘하 귀족, 장병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므로 대인배가 맞다. 그리고 11월 20일 마지막으로 떠나는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출발하였으며 발리앙은 가족들이 있는 트리폴리로 돌아갔다.

7 3차 십자군과 그 이후

이후 1190년 예루살렘 왕국의 남은 땅인 아크레 공성전에 참가하였고 리처드 1세가 도착한 이후 3차 십자군에 참가하며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이 기간에 여왕 시빌라가 사망하자 또다시 왕권분쟁이 벌어졌다. 발리앙의 양녀 이사벨라가 이번에도 후보로 올랐지만 기가 왕위를 내놓지 않았고, 장인과 아내를 또 배신한 파렴치한 남편 [6] 역시 기에게 충성을 계속 맹세한 까닭에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발리앙과 마리아가 이사벨라를 설득하여 남편과 이혼을 하게 하였고 올레!, 콘라드와의 재혼을 주선하였다. 이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의 왕권을 다시 한 번 주장하게 될 수 있었으나 당시 3차 십자군 원정대를 이끌던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기를 지지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콘라드를 지지하면서 대립각을 세운 까닭에 왕권분쟁은 쉽사리 해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1192년 선거를 통해 콘라드가 차기 왕으로 선임되었지만 공교롭게도 며칠 후 무슬림 암살단 어새신에게 암살[7]당했다. 이후 이사벨라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샹파뉴의 앙리 2세(Henri II de Champagne)와 재혼하였고, 이에 따라 발리앙은 앙리 2세의 고문역이 되었으며 야파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나중에 리처드 1세의 사절로 임명되어 살라딘과 만나 람라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를 통해 원래 영지인 이벨린은 영구히 상실하게 되었지만, 살라딘은 리처드 1세가 탈환한 해안가 지역을 기독교도의 영토로 인정하였고 그 중에서 아크레 외곽의 케몽(Caymont)과 그 인근 지역을 발리앙의 영지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된 1193년 사망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인 이블랭 가문은 발리앙의 분투와 살라딘을 비롯한 이슬람계 군주들의 호의로 예루살렘 함락 후의 십자군 국가군 중에서 꽤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가 집권하면서 십자군 국가군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가 적극적인 적대로 변하자 영지를 잃으며 다른 십자군 귀족들처럼 키프로스 왕국으로 망명하였고, 키프로스 궁정에서도 높은 위치를 향유하였다. 심지어 키프로스 왕비까지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키프로스 왕국이 멸망하자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8 평가

활동 초창기부터 보두앵 4세와 더불어 여러 전장에 나서서 공을 세웠으니 기사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리아 콤네나와의 결혼은 보두앵 4세가 주도했는데 아마도 이 때의 공적이 주된 이유라 생각된다. 예루살렘 왕국은 유럽에서 이주한 귀족들이 세운 나라인데다 유럽 국가들의 지원에 많이 의지하였으므로 권력의 주축은 유럽의 귀족 가문 출신들이었다. 또한 마리아 콤네나는 동로마 황제의 조카딸이자 전왕비이므로 누구든 그녀와 결혼한 사람은 예루살렘 왕국의 핵심권력층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발리앙도 그렇게 되었다.

물론, 영민한 군주로 평가받는 보두앵 4세가 이런 상식을 모를리는 없었다. 그런데 보두앵 4세는 이런 중요한 결혼 카드를 유럽에 빽도 없고, 영지도 왕국내에서 제일 후진 축에 속하는 발리앙과의 결혼에 사용한다. 이것은 보두앵 4세가 발리앙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 이외에는 달리 이유를 찾기 힘들다. 군사 능력이 뛰어난 발리앙의 권력을 강화해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는 방패로 삼고, 당시 가장 강력한 귀족이었던 레몽 3세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8] 발리앙 입장에서도 보두앵의 이런 호의는 감사해 마지않을 입장이었고 실제로 보두앵의 유지를 끝까지 받든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발리앙이 보두앵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묘사되는데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이후 하틴 전투에서의 퇴각에서나 예루살렘 전투에서도 적지 않은 공적을 세웠다. 리처드 1세와는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로 마찰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가장 중요한 살라딘과의 평화 협상을 발리앙에게 맡겼으며 살라딘 또한 전쟁 이후에도 발리앙의 영지를 인정해 주는등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여러모로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콘라드를 예루살렘 국왕으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무리를 한 일도 있고 이 때문에 특히 유럽에서 건너온 3차 십자군의 일원들에게는 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콘라드는 리처드가 여러번 요청했음에도 아크레 전투 이후 티레에 머물면서 3차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리처드와 유럽파 십자군의 눈에는 상당히 안 좋게 보였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9] 반면에 원래 예루살렘에서 살던 귀족들은 기 드 뤼지냥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대부분 콘라드를 지지하긴 했지만 말이다.

9 기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올랜도 블룸이 연기를 하였으며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다만 실제 인물과는 달리 영화에서 상당히 각색되었다. 예컨대 위에서 말한 '60명의 사람들을 임의로 선발하여 기사로 서임'하는 장면은 그냥 주위에 있는 병사들을 죄다 기사로 서임해버리는 대인배 행보로 처리한다던가...또한 사생아라는 설정이나 시빌라와의 로맨스도 픽션이다. 영화에서는 미화된 부분도 많지만, 반면에 생략된 공적도 많으니 무조건 수혜자라고 보기도 어려울지도.
  1. 학자에 따라서는 위그 드 르 퓌세의 형제였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지만 1115년 이전 기록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2. 이블랭성은 아직도 잔해가 조금 남아있는데 탑이 겨우 네 개 있는 작은 성으로 성이라기보다는 요새에 더 가까울 정도. 오늘날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남동쪽 15km 정도 떨어진 Yavne(야븐)이라는 작은 도시가 이블랑이 있던 곳이다.
  3. 발리앙이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함에 따라 둘째 형인 보두앵도 예루살렘 왕국에서 꽤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어 한때 시빌라의 결혼 상대로 거론될 정도였다. 발리앙은 마지못해서라도 기 드 뤼지냥에게 충성서약을 했지만 보두앵은 이를 거부해 안티오크로 쫓겨나서 거기서 죽었다.
  4. 당시 레몽 3세는 알 아프달이 트리폴리 백국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알 아프달의 군대가 영지를 통과할 수 있도록 승인한 상태였다.
  5. 도시내로 진입한 부대가 격퇴당했다고는 하지만, 예루살렘 정도의 대도시에 대한 공격으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성벽이 뚫렸다는 것만으로도 거의 함락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유럽에서는 성벽이 뚫린 이후에는 항복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6. 이사벨라의 남편, 토롱(Toron)의 옹프루아는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아내, 이사벨라와의 사이도 매우 좋은 편이었으니, 오히려 장인인 발리앙이 사위와 양녀를 배신하고 강제 이혼을 시킨 것에 가깝다. 게다가 옹프루아의 양아버지는 바로 위에 언급된 샤티옹의 르노였으니, 왕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파벌에 대한 배신행위일 수도 있었던 것. 단 옹프루아 자신은 정치적인 욕심이나 호전성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발리앙의 입장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 옹프루아와 이사벨라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것. 이사벨라가 살아남은 유일한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위험요소였다. 결국 옹프루아와 이혼한 이사벨라는 33살에 죽을 때까지 재혼만 3번을 하게 되는데, 심지어는 전 남편이 죽은지 8일만에 전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재혼을 하기도 한다.
  7. 여기에 리처드 1세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지만 진위여부는 불분명하다.
  8.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티베리아스와 보두앵 4세의 관계가 아주 우호적으로 그려졌으나 실제로는 보두앵 4세가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인 레몽 3세를 다소 견제하는 입장이었다.(물론 적대적인 관계까지는 아니었다)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의 결혼도 이 때문이었다.
  9. 일설에는 3차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는대신 예루살렘 왕으로 인정해달라며 리처드 몰래 살라딘과 비밀 교섭을 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