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1951)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전 · 현직 정치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치적 · 이념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어 문서를 열람할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문서의 악의적 서술 · 편집은 민사 · 형사 상 소송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李相敦 / Lee Sang-don

파일:78527 20145 2842.jpg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법학자, 정치인이다. 종교가톨릭으로 세례명은 이냐시오 데 로욜라이다.

2 이력

1951년 6.25 전쟁부산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출생지만 부산이지 실제로 자란 곳은 서울이다. 6.25 전쟁 휴전 후 서울특별시로 재상경하여 4대문 안에 있는 종로구 체부동에서 살았다. 외조부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 고희동장면과 가까운 사이로 1960년에 4.19 혁명 이후 치루어진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하였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부,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법대에 진학했지만 고시 준비는 적성에 맞지 않았는데 대학원에 가서 책을 읽으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타임즈지를 읽고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면서 외국의 각종 학술서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국내에서 공부하던 시절 전공은 공법(헌법과 행정법)이었다. 석사 논문은 '미국 대법원과 사법적극주의'로, 이후 보완하여 1983년에 첫 저서 <미국의 헌법과 연방대법원>을 출간한다. 1991년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한병채 헌법재판소 전 재판관이 이상돈 교수의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을 34군데 이상 표절하고 각주까지 여러 군데 훔쳐갔다는 의혹을 받았고, 이에 이상돈 교수가 한병채 헌재 재판관을 상대로 한 저작권분쟁조정신청을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 제출해 큰 이목을 끌었다.

‘한겨레’는 “(한병채 재판관의 논문에는) 이씨의 석사논문을 한 두쪽씩 거의 그대로 옮겨 쓴 곳이 여러군데 눈에 뜨인다”, 또 “학술논문이 다른 자료를 인용할 때는 각주를 붙여 문헌명을 밝히는 것이 관례인데 한씨의 논문에는 물론 이씨의 이름이 한 군데도 언급돼 있지 않다”면서 이상돈 전 위원의 논문 표절 시비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당시에 이상돈 전 위원은 "나 개인의 피해를 보상받고 싶은 것은 다음 문제다. 우리 사회의 지도적 인사, 특히 국민이 헌법적 권리를 의탁한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윤리문제를 심판대에 올리고 싶다"면서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를 넘어 법정에도 이 문제를 가져갈 뜻을 '한겨레'를 통해 밝히기도 했었다. 이후 이상돈 전 위원은 2013년도에 'MBN'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논문 표절 스캔들이 결국 한병채 재판관 측에서 공식 사과하고 배상을 한 것으로 마무리됐었다며 관련 비화를 전했다.

석사 졸업 이후 해군 장교로 입대하였다. 1976년 7월 임관되어, 1979년 7월까지 복무했다. 전역 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1980년 5월에 튤레인 대학(Tulane University)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1년 5월 마이애미 대학(The University of Miami)에서 국제법과 해양법을 공부하여 비교법학석사를 받았다. 다시 튤레인 대학을 돌아와서 공부한 끝에 1983년 1월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해저석유개발에서 발생하는 해양오염의 법적 문제'이다.

1983년 9월부터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2013년 2월에 퇴직후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1995년~2003년 간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사설과 무기명 칼럼 430여건을 집필하였다.[1]

200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이회창 캠프에서 기획단 멤버로 일하였다. 당시 기획단장은 강삼재 전 의원이었고, 위원은 권선택 국민중심당 사무총장, 최한수[2] 건국대 교수, 이용재 (관료 출신으로, 세종문화회관장을 역임), 허성우, 그리고 이상돈이었다. 기획단은 창당 발기인 대회를 준비하고,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다.

당시 이상돈 교수, 전원책 변호사, 류석춘 연세대 교수가 이회창을 지지하고 합류했다. 이상돈 교수는 이명박 후보를 막기 위해서 그 대안으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유선진당 창당 직후 공천 갈등과 신당을 창당하면서 사람을 무분별하게 이리저리 끌어모으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전원책과 함께 탈당하였다. 출처

2011년 12월부터 2012년 5월 동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역임하였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의 개혁 3총사로 이상돈, 김종인, 이준석이 거론되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기간 새누리당 정치쇄신 특별위원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이명박 정부와의 선긋기를 주문했고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 전격 비판하고 친이계 용퇴론을 주장했다. 개혁적, 합리적 보수로 평가받으면서 박근혜 정권 총선, 대선 승리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물론 전통적 보수층과 친이계로부터는 공격을 받았다.

2016년 2월 2일 국민의당 합류를 발표하였고, 국민의당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출마한다. 당선 안정권으로 평가되는 4번을 배정받았으며, 당선하였다. 20대 전반기 국회에서는 본인의 전공인 환경법, 환경분야이기도 하고 4대강 사업 등에 대해서 비판운동을 벌여 왔기 때문에 환경노동위원회에 지원해서 배정되었다.

3 사상적 영향

미국정치사, 미국헌정사, 보수주의 사상에 깊은 관심이 있다. 본인은 미국의 보수주의의 ‘지적 운동(Intellecrual Movement)’을 전개한 윌리엄 버클리와 ‘사법 보수주의(Judicial Conservatism)’를 주창한 알렉산더 비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토마스 소웰, 러셀 커크와 같은 보수적 지식인의 영향 또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뉴딜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공황과 세계대전을 극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트루먼, 아이젠하워, 레이건, 조지 허버트 부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닉슨,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제3의 길을 주창하고 노동당을 현대적으로 개혁한 토니 블레어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4 대통령 평가

2009년 중반, 박정희 대통령을 ‘보수주의자’로 보는 것은 일종의 ‘넌센스’ 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보수주의자라기 보다는 '반공을 내세운 국가주의자라고 말하였다.박정희 대통령은 '보수' 였나? 물론 이상돈 교수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발전과 국가방위, 의료보험제도 도입,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린벨트와 조림사업, 치수사업 등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또한, 18년 장기집권한 박정희 정부와 그 이후 5년 집권한 정부와는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전두환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 시절 직접 겪은 80년대를 회고하며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추악한 인권유린이 가득했다고 하면서, 요즘 청년들이 전두환을 높이 평가한다하는데 이는 순 거짓으로 우리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3]

노태우 정부는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노태우 대통령 개인보다는 노태우 '정부'의 업적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입장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으나 공로가 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신망이 높은 강영훈 총리를 내정하고, 정해창, 노재봉, 김종인, 김종휘, 김학준로 청와대 참모진을 꾸리고 나중에 총리가 된 이홍구 교수는 통일원장관으로 한반도 통일에 관한 기본 구상을 완성했다고 평가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북방외교, 인천공항과 경부고속철도 건설, 신도시 건설,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 역할을 잘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불법비자금과 군사정변 전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고 노태우 대통령을 가장 유능했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보수의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현실이라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 보다는 김영삼이란 인물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학 교수 시절 환경분야 연구업적을 인정받아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청와대에서 직접 만나 식사를 같이한 적도 있다고 한다.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는 1990년대 세계화 추세에 치밀한 준비도 없이 나서다가 1997년에 흔히 ‘IMF 사태’라고 불리는 경제위기를 초래해서 국가적 재앙을 불러왔다는 비판은 김 전 대통령에게는 가장 뼈아픈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민주화 투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룩하고 군의 정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서 차후의 정권 교체를 가능케 했으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긴 김 전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분열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않았으며,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갖추었던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민주화 공로를 언급하며 존경받을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이만섭, 이종찬, 박태준, 김중권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인사 및 보수 인사까지 포용하고 통합의 정치를 펼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손꼽히는 비판가였다. 대단히 비판적 스탠스를 취했는데, 나중에 그는 "반정부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노 대통령 사망 후에 마음의 부채를 느낀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출범 이전부터 대운하 사업은 실패할 것이라 내다보고 비판적이었다.[4] 서울시장 재직시절부터 이미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2008년 촛불집회, 미네르바 사건 등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칼럼이나 토론회 등에서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 임기내내 이명박 정부 실정에 목소리를 높인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사람이었다. 이 일로 이름을 얻어 박근혜 대선 캠프에 합류하게 된다.

5 상세

참여정부 시기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앞장서서 비판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고, 보수적 시민사회의 젊은 주자로서 주목을 받았다.[5]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햇볕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런 논설로 인해서 참여정부 일부 인사는 실제로 낙마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사학법을 전격 비판하였다. 그는 TV토론에 출연하여 "보수는 도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당선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가는 시점에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선언을 하면서 정치활동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 이상돈은 한창 주목받는 신인 정치인으로 자유선진당의 중역도 맡을 뻔 하였으나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당시 이상돈은 이명박 후보는 선거에선 승리해도 실현 불가능한 한반도 대운하 계획 때문에 결국 국정운영에선 실패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MBC 100분토론에 종종 출연하였으며, 2009년 5월 11일 방영된 토론에서는 전원책 등과 함게 '한국의 보수' 논객으로 출연했다.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되거나 혹은 표방하는 지식인들과는 선을 긋고 그들을 비판하였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그는 4대강 사업을 매우 집요하게 비판하였고 ‘4대강 사업 위헌·위법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환경법 전문가로 4대강 정비 사업과 관련된 교수, 전문가, 공무원 등을 잘 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일때, 그 사람들이 모두 눈치만 볼 뿐 입을 열지 않는 현실에 무척 당황해하다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그 사람들이 결국에는 선후배 관계나 지역 연고 등을 따라 똘똘 뭉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배타적으로 보호받는 대신, 정부의 실정을 앞장서서 감추고 있다며 이는 일본의 조선 병탄부터 무려 100여년이나 이어지는 역사로 보인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하였다.

이후 개혁성향의 시민운동단체, 환경단체 및 진보인사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보수도 비판 받을 것은 비판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보수진영의 모순적 언행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2008년 초 촛불집회에 벌어졌을때 이를 비하하는 보수 인사들을 향해서 사립학교법 개정 때에 촛불을 든 자기들 얼굴에 침뱉는 격이라며 비난할 자격이 없다라면서 다른 보수논객과는 정반대 태도를 취했다. 2008년 말 두바이를 본받자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두바이는 왕조국가인데 왕조를 본받자고 하는 건 어리석다. 게다가 거긴 석유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부다비에게 의존하기에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선견지명을 보이며 비난했다.

이상돈은 '국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시민적 경제적 자유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보수주의’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는 "노무현 대통령은 신화(myth)가 되었다."라고 평하였다. 그러면서 "신화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신화를 까부술수 있다 이를 debunking[6]이라고 한다." 라고 말하였다. 보수세력은 그의 이런 발언을 공격하였고, "보수에게 공격 받는 보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상돈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당시 한나라당 정치인들에 대해서 비판할 점은 강도 높게 비판했고, 보수적 시민사회 운동의 모순된 점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출범 이전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동안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잠시 돕기는 했지만 이후 자신이 기대했던 길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보수 개념은 전술하였던 바와 같이 수백년 역사를 가진 미국식 정통 보수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2008년 그는 블로그에서 "명색이 보수주의자인 나는 ‘대의민주주의’를 생명처럼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데도 "보수적 신념 때문에 의회 다수당이 대의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제정한 사학법, 신문법 등에 반대했다."고 하였다. 그는 "노무현 정권 5년 내내 (자신은) 대의민주주의를 부정하였다."고 고백하면서, 촛불시위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는 보수 진영의 다른 인사들도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고 말하였다.인터뷰

상기하였듯 2011년부터 2012년 18대 대선까지 새누리당에서 비대위원으로 영입되어서 2012년 치루어진 19대총선의 새누리당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비대위 시절 당시 이준석, 김종인과 함께 소위 '비대위 3인방'이라 불리며, 한나라당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와 선긋기, 당의 노선 변화 등에 힘을 실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면서는 박근혜 대선큼 정치쇄신특별위원을 지냈다. 대선정국에서도 김종인과 더불어 이한구 원내대표 용퇴, 친박 주류의 2선 후퇴를 주장했고,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솔직힌 사과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박근혜 후보 당선에 큰 기여를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된 뒤 그를 더 이상 찾지 않았고 입각 제의를 하는 일도 없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부터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 서서히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이상돈은 그 후 매체에 적극적으로 출연하여 박근혜 정부에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화 한통 받지 못했다. 2014년 12월 "결과적으로 토사구팽아닌가?" 하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렇다고 볼수 있다."고 대답하였다.인터뷰 한 때 인사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를 환경부 장관으로 기용하자고 하는 아이디어는 제시된 바 있지만 실현되지 않았으며,[7] 2014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시절 새누리당 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을 타진했으나 이미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해서 기대를 져버린 이상돈은 이를 고사했다고 한다.

그는 점점 박근혜 정권의 행보에 실망하였고,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도운 것을 후회하고,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발언을 하였다. 오마이뉴스 기사 "이런 박근혜 대통령 만들어 죄송합니다". 이후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박근혜 정권에 대해 날선 비판하고 있다. 이런 행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2014년 11월 이상돈 교수의 모친상에 대통령 조화를 보내지 않고 새누리당 인사들도 빈소를 찾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관계가 상당히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박근혜 정권은 무능한 정권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에서 닉슨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숨만 붙어있는 식물정권"이라고 하는 등 비판의 수위가 굉장히 높다. 아무래도 본인이 박근혜 대통령 정권 수립에 일정부분 기여를 했었기에,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실망감과 회한이 더욱 큰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월 이상돈은 보수에 염증을 느낀다며 아래 같은 발언을 하였다.이상돈,"무슨 얼어죽을 보수? 염증느껴"

저는 탈이념, 중도, 이런 표현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왜냐면 사실 정책과 비전에서는 상당히 방향성 같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철학이 있고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본질이 아닌 것까지도 진영논리로 서로 치고받고 있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또 민주주의나 법치주의 같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 아닙니까? 그 기본적인 속성을 훼손하면서, 이게 보수라고, 무슨 얼어 죽을 보수입니까? 저는 거기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죠.

6월 14일 국민의당 김수민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와 관련, 김수민을 겨냥하며 30대 정치진입은 맞지 않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수구보수적 발상, 정동영의 노인 폄하성 발언의 다른 버전 등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 전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개인의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겨두었고, 앞뒤 맥락에서는 정당들의 보여주기식 청년비례대표 공천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더군다나 이상돈은 다른 인터뷰나 강연에서 청년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야하고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젊은 예비정치인들이 정당에 참여하고 훈련과정을 거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 국민의당 비례대표

2016년 2월 이상돈은 국민의당에 합류하였고, 총선결과 20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상돈은 4.13 총선 결과를 "수도권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한 것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민심의 심판이라고 본다.”고 평하면서,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당과도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오만과 독선으로 했던 일에 대해서는 더불어민주당과 협력할 경우가 많다고 본다.”고 말하였다.출처

이상돈은 당선 확정 된 뒤, 제일성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출처 역사인식 문제는 이상돈 교수가 꾸준히 제기해온 이슈 중 하나였다.[8]

7 선거 이력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4번)국민의당6,355,572표(26.74%)당선

8 칼럼 & 견해

4대강 사업 관련


역사교과서 & 역사 인식

9 기타

  • 묘하게 예지력이 있는 글을 쓴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이명박 정권은 대운하 정책(4대강 정비 사업)으로 실패할 것이라 내다보았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을 보면서 이런식으로는 사임(死任)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고 하였다. 2013년 박근혜정부 초반, 대통령 임기 중 정보기관의 음습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하였다. 아직 실현 안된 예언으로는 박근혜 정부 말에 김영삼 정부 말 IMF 같은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고 한 말이다.

마지막이 제일 무서운 예언 같은데 퉁치면 반 쯤 된 거로 볼 수도 있다

  • 노무현 정부 시절 손꼽히는 극우 논설인이 현재는 개혁적 성향의 야당 정치인이 되었다. 솔직하게 본인의 견해를 바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왜 과거에 같이 비판하던 자들은 지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가? 하며 과거 자신과 같이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던 이들이 모른체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2004년 가을 노무현 정부가 사립학교법 개정을 추진했을때 미래한국[10]에 기고한 칼럼을 직접 읽고 판단해보자. 사악(邪惡)한 사학법 -공산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
  • 2014년 10월 "공부하는 보수"를 출간하였다.[중앙일보 "한국의 보수 무엇이 문제인가" 통렬한 반성문]
  • 2007년 1월 이상돈은 햇볕정책북핵의 연관성을 규명하여야 한다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비판하였다.동아일보 그리고, 2014년 9월, 이상돈은 "노무현 前 대통령 사망 후 황망했고 부채감 느낀다"고 하였다. 그는 이상돈은 햇볕정책에 대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말기에는 햇볕정책은 이적행위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명박 정부 말기, 박근혜 대선후보 시절에는 이명박 정부가 초기에는 북한에 강경했지만 뒤로 갈수록 햇볕정책처럼 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정부를 띄우는데 열심히였다.[11] 16년 북핵 사태 이후, 국회의원 후보 시절에는 햇볕정책은 실패했다고 발언하여 대북 포용적 정책을 내세운 국민의당과 불협화음을 내는 듯 했다. 곧이어 그 발언은 북한이 핵 실험을 했으므로 그 부분에서는 수정할 것이 있는게 사리에 맞다는 의미라고 언급했다.
  1. 이 당시 조갑제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2. 충남 예산 출신. 한나라당 소속으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송파(을)에 출마했다가 새천년민주당 김성순 후보에 밀려 낙선한 전력이 있다.
  3. 이상돈 홈페이지의 글은 09년 어느시점에 대대적으로 리뉴얼 되어 과거의 많은 글이 삭제되었다. 추후 찾으면 출처 보완.
  4. 그렇지만 한나당 당내 경선 당시는 이명박을 옹호하며 당내 경선 문제에 '역사적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5. 1951년 생으로 당시에 이미 50대였지만, 소위 애국보수라 자처하는 우익조직들이 대부분 다들 머리 허연 노인들 뿐이라 당신만큼 젊은 사람이 없다고 반가워 하였다고 한다.
  6. 한국어에 없는 개념인데, 공개된 장소에 잘못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거나, 평판을 고의적으로 떨어뜨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이른다. 가장 비슷한 단어가 폭로전술.
  7. 이 당시 김기춘은 이상돈을 왜 기용하지 않느냐 하는 기자의 질문에, 알려진 것과 다른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 하는 말을 했다. 물론,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도 계속 편향된 인사 패턴 논란을 있었기 때문이다.
  8. 이상돈은 2008년 초반 뉴라이트가 이명박 정부 전면에 등장할 당시부터 뉴라이트 사관 교수들을 불편하게 보며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은 하지 않았다. 2015년 말,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당시 이상돈은 이를 주장하는 자들의 집안 내력과도 관계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9. 이 두명은 1960~70년대 경기침체, 베트남전, 68혁명, 제3세계의 부상 등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보수이념을 1980년대 다시 되살려서 전세계적으로 신보수주의의 물결을 퍼트린 인물이다. 보수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만한 대상. 또한, 이상돈이 한창 공부하여 학위를 딴 시기와 겹치고 있다.
  10. 이곳은 뉴데일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보면 된다.
  11. 그 정도로 박근혜 대선 후보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