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현(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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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석현(李錫玄)
출생일1951년 3월 16일
출생지전라북도 익산시
본관전주 이씨(완창대군파)
가족2남 1녀 중 장남[1]
최종 학력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소속 정당더불어민주당
종교천주교(세례명: 임마누엘)
약력(현)제20대 국회의원
(전)제19대 국회 국회부의장
(전)제14, 15, 17, 18, 19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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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3일 6선 당선 직후 지지자들과 환호하며. 부천 오정 대왕 원혜영, 의정부 대왕 문희상에 이은 안양 동안 갑 대왕!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으로 1951년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임마누엘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 완창대군파의 후손이다.

1.1 생애

익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의 증언으로는 당시 특별한 집안 형편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평범한 농부였지만 동네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면의원을 하던 아버지의 '너는 커서 무조건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와 그에 따른 영향으로 2남 1녀 중 장남으로써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학창시절 내내 전교 1등을 거의 놓친 적이 없다고 하며, 1등을 한번만 놓쳐도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아이큐 147이 나와서 학교에서 별명이 이천재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원래 중학교에 못갈뻔 했다고 한다.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해야만 전액 장학금이 나와서 갈 수 있었는데 2등을 하는 바람에 반액 장학금만 나오게 되었고 집안 형편상 못 갈 위기에 처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때 담임선생님이던 분이 그 입학등록금 절반을 내 줘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학창시절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2] 더더욱 항상 1등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고교시절에는 한시를 공부하기도 하여 성인이 된 지금도 한자실력이 뛰어나서 국회에 써 있는 한문들은 전부다 읽고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며,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동화책도 출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중고교 시절 계속 전교 1등을 유지한 관계로 서울대학교 공대에 합격했다가, 학생운동에 뜻을 두고 민중을 돕기 위해 법을 공부하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재수를 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사회과학연구회라는 모임과 가톨릭학생회라는 모임을 통해 운동권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지하신문 횃불을 발행하며 이후락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교련 반대와 징집 거부로 기소된 적이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특별히 운좋게 은사 양승규 교수(서울대 법대)가 그의 사건 담당 검사와 판사의 대학교 은사이기도 해서 그들을 설득하여 징역형을 받지 않도록 하고, 선고유예 겸 군입대로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군입대를 통해 후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는 건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군대를 갔다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나름 편안한 생활을 잠깐 하려 하던 중 운동권 시절 선배와 동료들이 찾아와 "지금 편안하게 살 상황이 아니다"라며 설득하여 운동권 생활을 병행하게 된다.

배기선, 문희상 등과 함께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즉 연청회를 만들어 1980년 시국사건에 연루되게 된다. 체포 후 보안사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다행히 구속은 되지 않고 풀려나게 된다. 운동권으로 쫓기고 고문받는 생활에 질리기도 하며, 자신이 장남이라는 것 때문에 가족을 돌보는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3], 다시 회사생활로 복귀하여 살고 있었으나, 대학선배 겸 고향선배였던 이협 전 의원이 그를 다시 설득하게 되었고, 일주일간의 고민 후 1984년 회사를 아예 그만두고 운동권의 길로 완전히 뛰어들어,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을 만들고 온전한 운동권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후 1년간은 수입이 없어 배고픈 생활을 했다고 한다. 운동권 선배들이 쥐어주는 뒷돈[4]으로 겨우 먹고 살았다고.

이석현의 본격적 정치입문은 김대중의 동교동계 생활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 연청회 시절에 잠깐 봤던 게 다였고 제대로 대화도 못해봤던 김대중이 1985년 미국에서 돌아온 지 몇달 안 된 어느날 이석현을 동교동 자택으로 불렀고 단둘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 얘기를 하다가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자네가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사회 각 부분에 대해서 일주일동안 보고서를 써서 정리해 오게."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민주화의 거성이던 김대중 선생의 요구였으니, 이석현은 당연히 정성껏 일주일동안 자필로 언론환경, 노동권, 재벌, 군부, 정당 등에 대한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한다. 그러자 3일 뒤 김대중이 그를 비서로 채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1985년에 김대중의 비서가 되어 동교동계 막내로 정치인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3년간의 비서 생활 끝에 1988년 13대 총선에 평화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며 첫 공식 정치행보를 하게 된다. 당시 평민당이 87년 대선 이후 김대중-김영삼 단일화 실패에 대한 비난으로 홀대받던 시절이라 출마하려던 사람들이 적어서 40살도 안 된 정치신인이던 그도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당시 공천담당자가 김영배 사무총장이었는데 나이 어린 이석현의 공천신청을 탐탁치 않아해서 다른 후보 공천신청을 기다리던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달 넘게 계속 공천을 안 해주는 것에 화가 난 이석현이 찾아가서 "저 공천 안 받을랍니다.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가는 게 낫겠습니다."고 불만을 표출하자 깜짝 놀라서 달랜 뒤, 바로 다음날 공천을 해줬다고 한다. 그후 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사실 그가 나간 안양시 을 지역이 가능성 없다고 생각해 포기한 평민당에서 그에게 별로 지원도 안 해주었는데, 그랬던 것에 비해 그가 높은 득표율을 얻고 2위를 한 것에 대해 공을 인정받아 평민당 부대변인이 되어 당내 주요직을 맡게 된다.

낙선 직후 부총재가 "이동지, 하마터면 당선될 뻔 했어. 좀 더 당에서 지원하면 좋았을 뻔 했네."라며 아쉬워 하면서도 격려해줬다고 한다. 이석현 본인은 이 얘기를 듣고 속으로 "아니 당선되면 좋은 건데, '하마터면 당선'될뻔 했다는게 무슨 말이지?"라고 좀 어이없는 느낌도 받았다고 한다. 그가 30년 가까이 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당시 부총재가 실제로 '하마터면'이라는 말을 쓴 게 사실인 듯.

그 뒤로, 안양시 지역구 관리를 꾸준히 하여 지지율을 올렸고, 92년 총선에서 당시, 3당 합당으로 괴물당으로 불리던 민주자유당의 폭발적인 의석 독점[5]에도, 안양에서만큼은 그가 어렵지 않게 큰 득표 차이로 당선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국회의원 인생이 시작되었다.

2 국회의원 경력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안양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6]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명함의 한자 南朝鮮 표기 논란으로 새정치국민회의를 탈당하였다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복당하였다. 그는 이에 대해 중국인들이 인식하기 쉽게 표기한 것이라 해명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심재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부터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2016년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국회 부의장의 존재감을 확실히 과시했다. 일명 힐러 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를 거두고, 본인도 6선에 성공하며 20대 국회의장의 유력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야당의 최다선 의원 중 한명인데다 계파색이 강하지도 않고, 부의장을 경험했기 때문. 게다가 필리버스터 정국당시의 활약에 힘입어 야권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석현 의장론이 힘을 받고 있다. 다만 그의 나이가 2016년 기준 60대 중반으로, 20대 국회를 끝으로 정계 은퇴[7]를 하기엔 살짝 미묘한 나이긴 하기에, 21대 국회까지 남아있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럼 관례를 깨면 되잖아

그러나 정세균 의원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국회의장직에 선출되었다.

3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국회는 성스러운 곳도, 속된 곳도 아니며 그냥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은수미 의원에 버금가는, 필리버스터가 낳은 최대 수혜자[8]
"미스터 마국텔"
야권 의원들의 든든한 선배 부의장
미국에는 힐러리, 한국에는 힐러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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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3일부터 열린 제340회 국회(임시회) 제7차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이 상정되자 발동된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의장직을 수행할 때마다 여당 의원들의 고성을 막아주며 야당의 힐러로 활동하고 있다.힐러 리를 경배하라!!!

26일 새벽 더민주 김경협 의원은 10번째 주자로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던 중 네티즌들이 테러방지법을 국민스토킹법, 빅브라더법, 유신부활법 등으로 부른다며 댓글을 읽어내려갔다. 그러자 조원진 의원이 의제와 관련 없는 내용이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사회를 보던 더민주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테러방지법에 대해 국민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관계가 있는 내용"이라고 일축했다.

특히나, 김경협 의원의 발언 당시에 지속적으로 조원진 의원이 비격식적인 발언[9]을 하자, 격노한 이석현 부의장이 국회법 제145조[10]에 따라 퇴장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의장직을 걸고 말하건대 관계가 있습니다. 퇴장시키기 전에 들어가세요!"라고 일갈하며 조원진 의원을 데꿀멍시켰다. 힐러를 화나게 하면 킬러로 변신한다. 그러나 조원진 의원은 그 후에도 떼쓰다 마지 못해 자리로 돌아갔다.

나중에 밝혀진 속기록에 따르면 조원진 의원은 부의장인 자신이 의사진행을 하고 있다는 이석현 부의장에 대해 "저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개인의원이 아니고 원내수석부대표로써 말씀드리는 겁니다." 등 이석현 부의장의 의사진행권에 대해 정면도전및 경고하는 듯한 언사를 하여 이석현 부의장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속기록 517쪽 참조 자리로 돌아간 조원진 의원은 얼마간 국회법 책자를 뒤적였다(…).

또한 정청래의원의 필리버스터 시간 중간에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당시 7시간을 넘게 한 자리에서 연설 했던 정청래에게 화장실에 다녀오도록 권유하면서 방광지키미 요정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달라"[11]고 했고, 정청래가 지금은 괜찮고 나중에 본인이 요청하면 허락해 달라고 하며 사양하자 이를 받아들이며, "소변 안 보고 연설하느냐, 소변 보고 연설하느냐는 진실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껍데기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한국 정치 필리버스터 역사의 또 다른 레전드 어록이 생겼다

이학영 의원의 필리버스터 도중에 이학영 의원에게 잠시 운동하라며 2분간 인사말을 했는데 그 인사말이 감성적이다.

"국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목화 송이처럼 소담스런 함박눈이 내려서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습니다. 이 순백의 도화지 위에, 만일에 여러분이 새로운 세상을 그린다면 무엇을 먼저 그리시겠습니까? 저같으면 앞에 있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뒤에는 파란 뒷동산이 있는 그런 아름다운 마을을 먼저 그리겠습니다.그리고 그 뒷동산 위로는 일곱가지 색깔이 영롱한 무지개를 또 그려놓겠습니다. 국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 그리겠습니까? 저는 국회도 그려 놓겠습니다. 무지개 빛깔처럼 서로 다른 스팩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이해하면서 또 존중하고, 그리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그런 국회를 그리고 싶습니다. 또 국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국민들의 기쁨과 아픔을 내 피부처럼 느끼는 그런 국회를 그려 놓겠습니다. 이런 필리버스터도 있고 또 그런 껍데기 국회보다는 사람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추구되는 그런 국회를 그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말한 이 상상의 국회가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저희 국회가 여야를 초월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학영 의원의 필리버스터 도중에 한 인사말 -

이석현 부의장 감성 발언

2016년 2월 29일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의장직 수행 중, 새누리당 하태경, 홍지만 의원이 계속 반론하고, 발언 중인 홍종학 의원도 계속 반박하자, 여기는 바로 묻고 답하는 대학교 강단이 아닌 국회라며, 국회법 99조[12][13]를 들며 중재에 나섰는데, 이 때 두 의원이 계속 멈추지 않자, 토론 신청을 하고 발언하라 말하며[14] 데꿀멍(...)을 시전한 것도 모자라, 가까이에서 크게 말해 신경쓰인다고 디스, 또한 재적 중인 의원들에게 수고가 많다면서도 두 의원에겐 "안 들으려고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면 그것도 큰 고통이거든요"이라고 디스(...)했다. 홍종학 의원도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발언을 재개했다. 영상보기 스프라이트 제조기 크으, 시원하다! 그리고 같은 날 오전 2시경, 하태경 의원과 홍지만 의원이 계속해서 앞자리에서 발언을 이어나가자 앞에 시장이 있는데 뒤에서 암시장 하는 거랑 같은 겁니다. 세금 내고 발언하세요. 라면서 저지했다.

2월 29일 새벽 1시 정갑윤 부의장 시간대에 의장석에 앉았다.[15] 이에 대해선 아무런 입장이 없는 상태이다.[16]

같은 날 저녁 10시 47분 경 다시 한 번 방광요정 재출동 무제한 토론 중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언급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미국과 달리 발언자가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규정된 게 없는데, 이석현 부의장은 의장의 동의를 얻었을 경우에는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떠냐며 의견을 표했다. 이에 나경원 의원이 의장으로서 적절한 발언이 아니었다고 항의했다. 정갑윤:?

4 유세 현장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 현장에서 유세 요원들과 함께 붐바스틱을 시전했다. 그리고 당선!

DJ 힐러 리

붐바스틱 이석현

이석현 유세단의 미친 선거운동

5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을)
평화민주당18,990 (21.76%)낙선 (2위)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을)
민주당39,146 (36.74%)당선 (1위)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동안구 을)
새정치국민회의27,330 (42.34%)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동안구)
새천년민주당61,239 (48.43%)낙선 (2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동안구 갑)
열린우리당41,913 (51.55%)당선 (1위)2004~2006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동안구 갑)
통합민주당30,852 (47.87%)당선 (1위)
2012제1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동안구 갑)
민주통합당43,869 (54.85%)당선 (1위)하반기 국회부의장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시 동안구 갑)
더불어민주당45,680 (50.05%)당선 (1위)

6 기타

  • 아직도 노총각이다. 사실, 통상적인 의미의 노총각 정도가 아니라, 2016년에 만 65세, 이제는 법적으로 노년을 맞는다. 오죽하면 이석현 의원가지고 VS 놀이 벌이는 네티즌들도 몇몇 있었다. 보통 정계은퇴가 빠를 것인가 VS 결혼이 빠를 것인가 식으로. (...) 정계은퇴 전에 결혼하세요 부의장님
  • 20대 총선에서도 원내에 진입하면서 6선으로 더불어민주당 내의 최다선 의원이 되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예상치 않은 원내 1당이 되면서 (개원일까지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1당을 유지한다면) 20대 국회의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로 꼽히고 있다.[17] 7선의 이해찬 의원이 복당하면 쉽지 않겠지만…….[18][19]
  • 2009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떡볶이집 방문을 두고 국회에서 비난한 것 때문에 사찰을 당했었다. "서민 경제에 대한 대통령의 근원적 처방이 이미지 관리인가? 떡볶이 집에 가지 마시라. 그 집 손님 안 온다. 아이들 들어 올리지 마시라. 아이들 경기한다."고 발언했던 것인데 모 매체에서 이를 '이석현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이 간 떡볶이집이 망할 거라고 했다'고 왜곡보도하여 여러 매체에서 '이석현 의원 서민 저주 발언'이라며 비난기사가 나오고 한나라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이석현 의원을 비난하게 한 사건인데, 추후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20] 민간인 사찰 수사사건에서 이석현에 대한 사찰을 지시한 메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이석현 사찰'에 대한 내용을 보도한게 조선일보였다고 한다.

7 논란

이미지와 달리 2015년 12월 1일 국회에서 종교인 과세에 대해 "재벌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감세해주는 정부가 신앙인이 하나님과 부처님께 바친 돈에까지 세금을 물린다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분들을 뵐 것이냐"라고 발언#하는 등 종교 편향적 발언을 여러 차례 하였고 그리하여 종교자유정책연구원에서 20대 총선 낙천요구대상자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정부에게 '만만해보이는 종교인 과세 하기 전에 법인세부터 제대로 걷고나 그래라.'라는 우회적 비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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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생들과는 나이 터울이 있는 편으로 당연히 본인을 빼고 다 결혼을 했으며 조카는 5명이라고 한다(...)
  2. 1960년대 당시에는 시험 성적이 높으면 장학금을 주는 학교들이 많았다.
  3. 그는 이 시기에 결혼을 못한 것이 평생 결혼을 못하게 된 요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고 한다. 당시 결혼을 하면 무조건 여자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운동권 생활을 하며 도망도 다니고 잡히기도 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본인의 삶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하여 여자를 행복하게 할 준비가 안 되어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연애를 할때에도 항상 결혼얘기를 못 꺼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였던 배기선 의원은 이석현과 함께 도망자 생활을 할때 하숙집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음악인 이경애 씨)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고 한다. 안습
  4. 한달에 30만원. 지금 물가와 다른 시절이지만 그렇다고 여유있는 돈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석현은 본인이 운동권생활을 하면서 남들보다는 운이 참 좋은 편에 속했다고 회고한다.
  5. 299석 중 149석을 가져갔다. 민자당 쪽에서는 절반이 1석 차이로 안 된 것에 대해 실패로 보기도 했지만 다당제 상황이던 당시에는 최강의 제1당이었다. 특히 경기도 쪽은 전체 상황보다 심해서 58%가 민자당 후보들 당선 지역이었다.
  6. 상술된대로 지원을 못 받은 것에 비해 높은 득표율로 2위가 된 공을 인정받아 당에서 평판이 확 좋아지는 바람에 평민당 부대변인이 되었고 당내에서 인정받는 위치가 된다.
  7. 국회의장은 해당 회기를 마지막으로 정계 은퇴를하는 것이 관례기 때문
  8. 5시간 쉬고 2시간 앉아 있는 걸 계속 반복하는 부의장 업무를 200시간에 육박하는 8일 연속으로 수행했으니 사실 진짜 체력 소모는 60대 중반의 고령이었던 이석현 부의장에겐 장시간 토론을 하고 쉴 수 있던 야당 국회의원들 못지 않게 컸을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항상 토론 방해를 막고 토론을 계속 잘 진행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으니 이미지가 좋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 중간중간 방송에서 의장석을 비출때 의자에 등을 대고 쉬는 자세를 취하거나 하지 않고 바른 자세로 꼿꼿이 앉아서 경청하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어서 이미지가 좋아지는데 큰 몫을 했다.
  9. 하술됐지만, 본 회의를 주재하는 국회부의장을 상대로 "저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개인의원이 아니라 원내수석부대표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라며 이석현 부의장의 의사진행권에 정면도전하는 말을 한 게 결정타였다.
  10. ① 의원이 본회의 또는 위원회의 회의장에서 이 법 또는 국회규칙에 위배하여 회의장의 질서를 문란하게 한 때에는 의장 또는 위원장은 이를 경고 또는 제지할 수 있다. ②제1항의 조치에 응하지 아니한 의원이 있을 때에는 의장 또는 위원장은 당일의 회의에서 발언함을 금지하거나 퇴장시킬 수 있다.
  11. 화장실에 갔다 와도 필리버스터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례를 만들기 위한 목적을 의미한다.
  12. ① 의원이 발언하려고 할 때에는 미리 의장에게 통지하여 허가를 받아야 한다.
  13. 이석현 부의장이 언급한 1번 부분 외에도 두 가지 조항이 더 있다. 출처
  14. 하태경 의원은 새누리당내에서도 찬성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으나 당론에 막혀 토론에 참여하진 못하긴 했다.
  15. 원래 순서는 정의화-이석현-정의화-정갑윤 순이다
  16. 정갑윤 부의장이 편향적 발언으로 의장진에서 배제된 줄 알았으나 복귀했다.
  17. 국회의장은 관례상 원내 1당의 최다선 의원이 하게 되어있다.
  18. 사실 유력한 후보라 하기에는 어려운 게 경쟁자가 너무나 걸출하다. 물론 이석현 의원 본인도 국회의장을 노리는 거물 야당 정치인이긴 하지만 복당을 하려는 7선의 무소석 이해찬은 물론이고 새누리당이 무소속 의원 복당을 당연히 허락한다면 "8선"의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이 국회의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 또한 같은 6선 의원인 더민주 정세균·문희상도 무시할 수 없다.
  19. 이석현에게 유리한 점이라면 국민의당과의 밀월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에서 국회의장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이해찬의 복당이 불투명하다는 점(그리고 이해찬은 복당하여 김종인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당적을 가질 수 없는 국회의장이 되면 다소 머리가 아프기도 하다). 필리버스터 당시 부의장 역할을 잘 수행하여 높은 평가를 얻었다는 점과 다른 의원들에 비해 계파색이 옅다는 점이 있겠다.
  20. 이명박 정부때 생긴 공직자 비리 조사 기관이다. 구성원도 일부 밖에 공개되지 않았으며, 당시 출범직후 공직 비리 조사 명목으로 (검찰도 영장없이 할 수 없는) 공무원 사무실 압수수색을, 허가없이 잠긴 사무실 문을 맘대로 열고 들어가 했을 정도로, 조사권한을 남용하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공직사회 쪽에서는 '관가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악명높은 곳이다. 그런데 민간인까지 사찰한 정황이 발견되어 큰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