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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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국왕
고려 34대 공양왕/조선 건국초대 태조 이단2대 정종 이경
300px
묘호태조(太祖)
시호조선
대한 제국[1]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강헌(康獻)[2]
능묘건원릉(健元陵)
성계(成桂). 개명한 이후에는 단(旦)
중결(仲潔) / 군진(君晋)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
출생지화령(和寧)[3]
본관전주
사망지창덕궁(昌德宮) 광연루(廣延樓) 별전(別殿)
배우자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아버지이자춘(李子春)
어머니의혜왕후(懿惠王后)
생몰기간1335년 10월 27일 ~ 1408년 6월 18일(72년 7개월 22일, 2만 6,532일.)
재위
기간
1392년 8월 5일 ~ 1398년 10월 14일 (6년 2개월 9일, 2,261일.)
태상왕1398년 10월 14일 ~ 1408년 6월 18일(9년 8개월 4일, 3,534일.)

틀:조선의 태상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태조 고황제진종 소황제장조 의황제정조 선황제순조 숙황제문조 익황제헌종 성황제철종 장황제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이성계
정몽주
조선 건국
이서(영의정)
원의 천호(千戶)
이자춘이성계조선 건국

1 소개

고려 말기의 명장이자, 조선의 태조.

초명은 이성계. 조선의 태조로 즉위한 이후에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다.[4]

사방팔방에서 헬게이트가 열리며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고려 말기에 반란군,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멸망한 원나라군벌, 역사상 최악의 패악질을 부렸던 왜구, 심심하면 침입했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동아시아에서 싸울 수 있었던 적들은 모조리 수만 명씩 개발살을 내버린 인간흉기다.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전횡으로 개판 5분 전이었던 현실에 불만이 폭발해버린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등 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힘을 키운 뒤 요동 정벌, 명나라 공격에 떠밀려 참전하여 압록강 위화도까지 갔던 때 반란을 일으켜 역으로 고려 조정을 공격한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우왕쿠데타로 몰아내고 4년여간 권력 장악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공양왕을 쫓아내 고려를 뒤엎고 새롭게 조선을 개국한다.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왕조 500년의 기반을 닦았으나, 후계자 문제로 아들 이방원반란을 겪고, 권력에서 밀려나 비교적 불우한 말년을 보낸 끝에 사망했다.

조선왕조에서 영조 다음으로 장수하고, 동시에 두번째로 많은 나이(64세)까지 재위한 왕이다. 숙종이 환갑, 중종이 58세, 선조는 57세, 고종세종대왕이 55세, 태종이 53세, 광해군은 49세, 정종은 44세까지만 재위했다. 영조는 32세에 즉위해서 훙서하기까지 약 52년간 호랑이 등을 탔다. 조선왕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인데, 이성계는 47세에 동북면 도지휘사(관찰사 수준)의 지위였고 이방석을 낳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개국자였기에 조선시대에 쓰여진 기록에서는 행적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신격화도 많은 편이지만, 전반적인 기록을 보면 호방하고 성실하며, 전장에서는 적조차도 자신의 친위대로 삼아버리고 정적들조차도 친구라며 쉬이 죽이지 못했던 천연스러운 인간성이 발견된다. 표독스럽다는 평을 받는 아들 이방원과는 여러모로 다른 그 인간성과 전쟁에서의 실력 만큼은 한국사에서도 압도적인 영웅. 그러면서도 잔인해질 수 있을 때는 한없이 잔인해지거나, 여러 일화나 실제 기록으로도 흡사 곰 같은 체구의 용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계산에도 능한 여우의 지혜도 갖추고 있었다.

권문세족의 전횡으로 썩어빠진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 조선을 건국했다는 점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조선의 초대 국왕이 되고 난 후 고려 왕씨를 학살하고 어린 소년왕 창왕을 모함해 잔인하게 숙청한 점, 반역으로 나라를 뒤엎었다는 점 등 여러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현대뿐 아니라 당시에도 왕이라는 특성상 대놓고 까진 못했지만 성계탕 일화만 봐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호불호를 둘째로 치더라도, 한민족 역사 이래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변방의 무인에서 시작하여, 외적과 맞서 싸워서 두각을 나타낸 끝에 결국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기까지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무협지나 드라마의 연속이었던 인물이다.

1.1 전주 이씨의 전주시절

본관은 전주 이씨.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 1권 총서 1번째 기사에서는 계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일단 실존이 확인되는 인물은 고려 중기 무렵에 나타난 무신정권의 집권자 중 한명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李璘)이다.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과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별로 내키지 않았는지, 과거 전주 이씨의 족보에는 이린의 한자가 다르게 되어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총서의 기록에서도 李璘이 아니라, 李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전주 이씨의 문중에서도 확실히 인정하고 있다.

하여간에 이린은 이의방이 정균에 의해 살해 당할때 죽지 않고 몸을 피한 듯하다. 이때 이린은 시중(侍中)이었던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였는데, 장인어른이 조금 도와주었을 수도 있다. 문극겸은 이의방이 죽은 후에도 비교적 꾸준하게 활약하였다.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이양무(李陽茂)다. 이양무의 아들이 이안사(李安社)이고, 나중에 추존되어 목조(穆祖)가 된 사람으로, 다시 이때부터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1.2 이안사의 동북면 이주

조선 왕조가 전주 이씨인만큼, 당연히 본래 이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과는 전혀 다른 함경도가 이성계의 근거지가 된 것은 조금 곡절이 있었던 까닭이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면 이안사는 그 지역의 관리와 관청에 딸린 기생의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고 한다. 여자 문제 가지고 트러블이 생겼는지 재산 관련 문제인지는 여하간에 알 수 없으나, 하여간에 사이가 더럽게 된 모양으로 문제가 생긴 관리는 윗선에 연락하고 심지어 군사까지 동원해서 이안사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안사는 그 말을 듣고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이주했다. 이때,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170여 가(家)나 된다고 하는데, 이를 볼 때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전주에서 꽤 끗발이 날리던 가문으로 보인다.

삼척으로 옮겨간 이안사 집단은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그들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안사 집단은 이때도 왜구에 대비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 이현우)

그래서 의주도병마사로 임명되었지만 이후 정세변화속에 원나라에 귀부한다.

1.3 몽골에 투항, 천호가 되다

하여간에 그렇게 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원나라의 야고(也古)라는 인물이 쳐들어올때는 몸을 피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대략 그 무렵에 새로운 지방관이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는데, 하필 전날에 문제가 생겼던 그 관리였다.

얼른 자리 털고 뜨는게 나을 것으로 보였던 이안사는 동북면의 의주(宜州)로 이동했다. 이때도 170여 가가 따라 나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장을 고려한다고 쳐도, 이안사가 상당한 수의 유이민 집단을 통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렇게 이주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해서, 그렇게 된 바에야 원나라 군사를 막으라고 시켰지만, 산길대왕(散吉大王)이라는 원나라 장수가 2차례 항복을 권유하자, 싸워봐야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 편이 떡고물이 많을것이라고 여겼는지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항복한 후 이안사는 같은 집안 사람을 산길에게 혼인시켜 서로 연줄을 만들어 놓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더 북쪽으로 가서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정착하였다. 알동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두만강 하류지역으로 보인다.

이안사는 산길의 주선으로 인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가 이안사를 위해 세워지고 이안사 본인은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 이안사의 집은 알동에 있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안사가 자신의 집단 유지를 위해 여러곳을 왕래하면서 노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안사의 집단이 여진족 거주지역에 살면서 순수 농민적 성격에서 여진족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안사가 사망한 뒤, 아들 이행리(李行里)가 그 기반을 이어 받았다. 이행리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도 참여하여, 충렬왕을 뵙고 자기가 원나라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충렬왕은 "그대 행동을 보니 마음을 알겠다"라면서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이행리의 세력이 확대되고 위상도 제법 커지자, 근처에 있던 여진 천호(千戶)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9번째 기사

이행리는 우연히 그 과정을 알게 되고 가족들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뒤를 보니 적이 무려 300여명이나 되어 추격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건너는 곳의 강이 물이 열려 자신들은 돌파하고, 다시 강이 물이 막혀 적이 추격해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과장이 있겠지만, 여하간에 다시 기반을 날리고 도망친 이행리는 여러 섬에서 조금 지내다가, 의주로 와서 그곳에서 다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1300년, 쌍성 근처의 고려인들을 관리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행리가 죽고 아들인 이춘(李椿)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춘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함주(咸州)로 옮겼는데, 목축하는데 편리해서 그랬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이씨 집안의 세력권 아래, 유목 성향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이미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춘은 쌍성 총관(雙城摠管)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로 볼 때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세력으로 보인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알동에서 이씨 집안을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춘은 직접 원 조정에 글까지 올려 사정을 설명하고 이를 막아내었다. 이런 면으로 볼때, 이춘에게 있어서 그 주민들은 경제적 기반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4 원나라의 쇠퇴와 이자춘의 고려 귀향

이춘이 사망하고 난 뒤에는 후계자를 놓고 내흥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이춘의 큰아들인 탑사불화(塔思不花)[5]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곧 죽고 말았다. 탑사불화의 아들이었던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렸는데, 이춘의 부인 중 박씨의 아들이었던 탑사불화, 이자춘의 세력에 대해, 조씨의 아들이었던 완자불화(完者不花), 나해(那海)와 누가 해먹을 것인가를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이자춘은 직접 개원로(開元路)로 나가 사정을 설명했고, 원나라에서 박씨 쪽에 손을 들어줌에 따라 이자춘이 어린 이교주 대신에 임시로 이씨 집안의 대빵이 되었다. 그 후 이자춘은 나해를 때려잡았다. 일단 기록으로는 이교주가 나이가 차자, 이자춘은 자리를 다시 넘겨주려고 했다는데, 교주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지……

여하간에 꽤 기민한 편이었던 이자춘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도 바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원제국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고, 고려의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시도하려는 것을 파악하고, 직접 공민왕을 만났다. 당연히 도움이 필요했던 공민왕은 이자춘을 대환영하였으나 당장에 받아들이지는 않고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밀지를 받고 쌍성총관부 공격에 동참하였고 그 결과, 고려는 쌍성총관부 지역을 되찾았고, 이자춘은 당당하게 고려의 공신이 되어 동북면에서 세력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되고 고려 중앙정계에도 진출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 공격에 참전한 아들이, 훗날 역사를 바꾸는 주역이 되었다.

2 청년 시절

원나라에서 만호장이 되었다가 원나라가 망할 때쯤에 고려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점령하는데 공을 세우고 고려의 신하가 되었다. [6]아버지인 이자춘과 배다른 형인 이원계와 배다른 동생인 이화와 함께 였다.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후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고려의 신하로서의 충절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들들에게는 삼촌을 도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이원계의 둘째아들인 이천우가 공신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참고로 고려에서는 첫째 부인 소생이나 둘째 부인 소생이나 모두 다 적통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고 적통, 어느 어머니의 신분이 더 높다고 적통 그런 거 없다. 게다가 이름을 보았을 때 계자 돌림임을 알 수 있다. 이원계와 이성계의 사촌의 이름을 보면 마찬가지로 계자 돌림인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이화는 몰라도 최소한 이원계는 적자라는 말이다. 하지만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성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왜곡[7]이다. 아마도 고려 시기에는 원나라와 몽골 유목민족의 풍습으로 여러 부인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려시대에 지방호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호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수도에 소환해서 생활하게 하는 제도 때문에 고향의 아내인 '향처'와 수도의 아내인 '경처'가 따로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것이 후일에 그런 제도들은 사라진 뒤에 이해부족으로 그렇게 기록 된 것일 수도 있다.

젊어서 어느 절에서 쉬던 중 꿈에 무너지는 집의 서까래 세 개에 깔렸는데 깨어나 보니 등에 서까래 3개에 눌린 상처가 있어 그 절의 중이던 무학대사가 이는 왕이 될 징조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서까래 3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으니 석 삼(三)자 모양이 되고 이성계의 몸을 작대기(│)라고 하면, 둘이 합치면 임금 왕(王)자가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일화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한 점술가를 찾아갔는데 그 앞에 얼짱거지가 거지티 안 날 정도로 옷을 멋지게 입고 와 있었다. 점술가가 한자를 하나 뽑아보라고 하는데 그 거지가 뽑은 한자는 물을 문(問). 점술가가 말하기를 "문(門) 앞에 입(口)이 있으니 당신은 거지 팔자요"라고 하자 그 거지가 "나 참 딱 걸렸네" 하고 투덜대면서 쓸쓸히 퇴장한다. 그 다음 이성계도 한자를 뽑았는데 역시 문(問)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점술가가 놀라서 "이것은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 군(君)이니, 왕이 될 팔자로군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판으로, 이성계가 먼저 파자점 치는 점술가를 찾아가 물을 문(問)을 뽑았더니 점술가가 이성계에게 왕이 될 팔자라고 말해주고 그 다음 날 이성계가 근처에 있던 거지 하나를 멀쩡한 사람처럼 변장시켜서 똑같은 점술가를 찾아가 문(問)을 뽑게 하라고 시켰더니 점술가가 그 거지에게는 거지 팔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별 상관은 없지만 이런 패턴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높으신 분들보다 점술가의 지적 능력을 띄워주는 목적이 강하다.

또 다른 변주로 이성계 이후에 점을 본 사람이 거지가 아니라 이지란이며, 점쟁이의 거지 팔자 선언으로 날뛰는 이지란을(복채도 이성계의 2배나 냈다고 한다) 이성계가 말리면서 둘이 이때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 또한 있다.

3 한국사의 전설적인 무장으로서의 면모

최영과 나란히 고려의 수호신으로 통했던 한국사 최강의 맹장 중의 하나였다.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이성계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귀순했으며 귀순 후 왕의 호위직인 애마를 맡아서 했다. 고려군과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고려의 무장으로서 고려를 침략해오는 몽골, 왜구, 홍건적, 여진족과 반란군들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적을 세웠다. 당장 큰 전공만 따져도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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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벌인 전투들. 위로는 나하추, 여진족, 원나라 아래로는 왜군, 그리고 고려 중앙군까지 동북아시아 대부분 세력들과 전투를 벌였고 모두 승리했다.
  • 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였다.
  • 같은 해 10만 홍건적 침공.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이성계가 고려인과 여진족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으로 개경 탈환에 성공해서 가장 먼저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을 활로 쏴 죽였다.
  •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수만 군사의 침입을 물리쳤다.
  • 1364년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침공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섬멸시켰다.
  • 1364년 1월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반란군이 함주를 함락하자 이를 물리치고 밀직부사.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이 되었다.
  • 1370년 11월 지용수 등과 함께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함. (제1차 요동정벌)
  • 1377년 우왕 3년 왜구를 지리산에서 격퇴했다.
  • 1378년 수도 개경을 위협하던 왜구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싸우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격퇴하였다.
  • 1380년 내륙으로 진출한 왜구의 대군을 크게 섬멸했다. 이를 후세엔 황산대첩이라 부르게 된다. 황산대첩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1382년 여진족 호바투가 노략질을 할 때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지란과 함께 궤멸시킴.
  •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어 함주를 공격한 왜구를 물리침.
  •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함께 이인임을 유배시킴. 임견미, 염흥방 척살.

공민왕 시기에 이루어진 제1차 요동정벌에서는 미친듯한 활약을 보여주는데 애기살로 70명에게 헤드샷을 날리며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하는가 하면, 채명이라는 상대편 장수를 설득하기 위해 머리, 허벅지를 맞혀버리는 활솜씨를 선보이며 요동성 점령에 큰 활약을 보여준다. 다만 요동성을 함락하였으나, 요동성의 곡식창고가 불타버리고 고려에서의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아 회군하였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선배무장인 최영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며 그와 함께 이인임 일파를 척살하고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위화도 회군 이후를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해지는 부분.

3.1 세력

이자춘의 벼슬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였으며, 이성계의 벼슬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 이것이 원나라 벼슬 그대로 '만호장'이라는 뜻이면, 이성계 휘하에 1만호에 달하는 백성이 식읍과 같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태종 시기에 남아 있던 이성계 직할 '가별초'가 5백호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동북면의 상당한 토지와 인구를 '봉건 영주'처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개경 탈환에서 이성계가 동원한 사병2,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그 만한 사병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성계의 사병 규모는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정예였는데, 이성계는 외적과 싸울 때도 아낌없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했였으며 이들은 이성계의 화려한 전공을 뒷받침하는 정예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의 가별초는 조선왕조 건국 이후 왕자들에게 분배되었다가, 태종 시기에 혁파되어 일반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성계의 가산은 조선 왕실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왕들의 비자금내탕금으로 사용되었다. 명목상으로 조선의 재산은 모두 왕의 재산이었으나 신하들의 동의 없이는 세금 등을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반면 이 가산은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도전 등은 이 재산도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한 후 이 가산은 왕의 개인 재산이라고 선포했다. 왕들은 내탕금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절을 짓거나 잔치 등을 여는데 활용하였으며,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거나 땅을 사들여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함경도 땅의 3분의 1이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별도의 내시 기관인 '내수사'가 관리하였다. 내수사에서는 이 땅을 소작하거나, 소출로 이자놀이를 해 재산을 늘렸는데 소작료와 이자가 시중에 비하여 낮았으며 관료들의 수탈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앞다투어 내수사에 소작을 하거나 돈을 빌리려 하였다.

또 그는 동만주 북방 여진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일의 청태조인 누르하치의 6대조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이성계의 부하였을 정도. 당시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글을 참고하자.

3.2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우왕의 명으로 제2차 요동정벌을 위해 북상하다 역심을 품고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 최영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랬다가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폐가입진)을 하며 우왕과 창왕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한다. 그리고 최영에 이어 우왕과 창왕도 참살된다.[8]

공양왕 시기에 정몽주가 공양왕과 결탁하여 이성계 무리를 견제하기도 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참살되자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양위하고 고려는 멸망한다. 왕으로 등극한 후 명나라에 '권지고려국사'[9]로 외교문서를 보내 왕이 되었음을 알렸는데 조선이 자주국이긴 했으나 명나라로부터 고명[10]을 받지 못하면 외교적으로 '권지국사(권지조선국사)'라 하고 '조선국왕'이라 칭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위화도 회군을 참고.

4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

왕이 된 후의 평가는 업적은 많되 후계를 잘못 세우는 실수를 한 왕. 행정이나 정책적으로는 정도전을 재상으로 세우고 신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군인 출신답게 화통한 면이 있어서 조회 때에도 "번잡한 의식은 생략하고, 할 말 있는 대신은 빨랑 나와서 의견을 말해 봐"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많았으며, 소탈하고 격의없는 스타일이었다고. 왕이 되던 날 아침 식사 메뉴가 물에 만 밥 한그릇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실록에는 "평소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한번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하나의 화기(和氣) 덩어리가 되어 많은 이들이 태조를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보스 기질도 충분했고 한 나라의 창업자답게 친화력과 포용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소리.

정몽주에 대한 처우도 그렇다. 태종이나 다른 가신들이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말했지만 태조는 정몽주와의 인연으로 신진사대부에 들어간 것이며 정몽주와 정치를 논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일등이 잦았고 그래서 끝까지 정몽주를 포용하려고 했다. 여러 기록이나 태조의 말로 미뤄 보면 정몽주 정도는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정몽주와 태조는 친밀한 관계여서 그런 탓도 있었겠지만. 또한 자기 주관도 너무나 강한 나머지 한양 천도도 자신의 강력한 입김으로 강행했으며 1년 만에 도성의 공사를 완료했을 정도였다.

장수로서 인기를 얻었던 것과 달리, 왕위에 오른 후 이성계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빴는데, 이는 즉위 후 지방 곳곳에 산재하던 개성 왕씨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죽인 왕씨 몰살을 벌였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사성정책으로 고려에 수많은 왕씨들이 생겨나 고려 인구에서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말에는 전체 인구의 상당수가 왕씨들과 친인척으로 엮여 있었다. 고려왕조가 후삼국시대 말기 신라를 흡수, 병합한 이후 신라의 전 왕실 가문이었던 김씨나 박씨 등을 대대로 우대했던 것과는 대비된다.[11] 특히 고려의 중심지였던 개성에서는 말 그대로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아서[12] 500여년이 지난 구한말까지도 조선과 이성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빴다는 당대 외국인들이 기록이 남아있다. 이성계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담아 성계탕, 성계육 하며 대놓고 사람도 아닌 짐승에 빗댈 정도.

태조 치세 중에는 3차 요동정벌이 제기되었던 적이 있다. 명실록에는 주원장이 "조선의 20만 강군이 요동을 치면 맞설 방법이 없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받고 우려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태조는 요동정벌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요동정벌을 반대한 조준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태조는 1차 요동정벌에서 요동공략 중 식량 부족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후퇴하기도 했고 2차 요동정벌 때도 작은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것의 위험성을 들어 극렬반대하고 위화도 회군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요동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당시 조선도 실제로 동원가능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터이므로 학자들 가운데서도 진짜로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하려고 했다기 보단 사병을 억제하고 중앙군권을 강화하려 한 시도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당시 조선은 고려말부터 홍건적, 왜구, 여진족 등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고, 주원장이 저 말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당시 조선이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문제는 주원장이 저 말을 하는 당시에도 한반도 남부는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5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4, 7년 8월 26일 기록 中 (정도전박위가 참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아마도) 매핵기 증세를 호소하며)

하지만 말년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데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려다 1차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킨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 영락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세운 데는 어느 정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13]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으로 들였다.(숙의 지씨, 성빈 지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고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그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에 이르면 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14] 이러한 혼맥은 변방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태조 입장에서, 구 왕조와의 온전한 결별을 위해선 이때까지 혼인하지 않았던 방석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게다가 방석은 현 왕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 정도 예우하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15]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 태조 입장에선 왕의 아들이자 살아있는 왕비의 아들인 방석의 세자 책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바로 그 인척 관계 때문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게다가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정통성에도 흠결이 생겼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릉인 정릉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세자-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16]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세자와 왕손이 장성하고 기반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종친, 구 세력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태조도 나름대로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방과, 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17][18]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중 이성계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19] 방번이 넘겨받는다. (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왕실 집안싸움이 되다보니 병사들도 혼동이 왔고 아우 이화나 조카 조온, 정도전과 절친한 사이였던 이무 등 친위세력이 되어 줘야 할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되었다. 성품 문제는 있어도 방석의 동복형이니 나을 거라 믿었던 방번은 무인정사를 수수방관해 버렸고 이화의 교란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키려 했던 이제까지 행동에 나서지 못하면서 방석을 지킬 방패는 한없이 얇아져 버렸다.

6 최후와 능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70이 지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는다." - <태종실록> 태종 6년(1406년) 4월 4일, 연회 중 태상왕 태조의 발언

아들을 둘이나 보내버리고(이방원도 차마 이방간은 죽이지 못하고 유배를 보냈다)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꼴도 보기 싫었는지, 이성계는 1401년 11월 한양을 탈출하여 소요산으로 행차한다. 함흥이라고도 한다. 아래 설명할 함흥차사와 연관이 있는듯. 다음해인 1402년 이성계의 묵인 하에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조사의의 난이라고 불리지만, 실질적 주동자는 이성계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이미 기반을 갖출 만큼 갖춘 상태였으므로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고, 이성계는 그 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와 아들과 화해하게 되며, 그 뒤 절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그로부터 6년 뒤인 1408년에 생을 마감했다.

함흥차사는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기 전 이방원이 이성계를 모시기 위해 여러 사람을 보냈으나 이성계가 모두 활로 쏴서 죽여버려 돌아오지 못하자 무학대사를 보내 설득하였다. 무학대사는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이성계가 뜻을 꺾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야사에서 비롯되었으며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이지만 정사는 아니며 사실 함흥에 차사로 갔다가 이성계의 활 맞아 죽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함흥차사로 갔다가 죽었다는 인물중 송유나 박순은 조사의의 난에 휩쓸려서 죽었고, 성석린에 애초에 함흥에 간 적이 없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없는데, 반대로 차사로 갔다가 살아왔다는 사람은 무학대사 제외하고도 많다. 애초에 태종이 차사로 보낸 사람이 엄청나고, 이중 반란에 휩쓸린 사람 제외하고는 다 살아왔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참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고려를 위해 함께 해왔던 정몽주와 자신의 원훈인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형제인 이방석, 이방번까지 참살한 나쁜 놈이자 동시에 자신의 왕조 창건을 도운 일등 공신이자 명군으로 그 자질을 인정받은 애증이 교차했을 아들인 태종 이방원. 죽기 직전에 이성계는 이 심해서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태종이 청심원을 직접 아버지에게 올렸지만 이성계의 기력이 다했는지 이를 삼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서는 '눈을 들어 왕(태종)을 다시 쳐다보더니 이에 승하했다'고 이성계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이 뒤늦게나마 화해한 건 물론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성계는 아들들이 서로 죽이는 걸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 했는데 그 꼴을 본 사람들은 그가 왕씨들을 잔혹하게 다뤘기에 자기 아들들의 죽음으로 천벌을 받은 거라고 여겨 동정하지 않았다. 이성계도 이 때문에 왕씨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뤘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나 함흥으로 쫓겨나게 되자 사람들은 이성계를 동정하고 이방원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버지를 외면했던 이방원은 뒤늦게나마 화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성계 입장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후계가 없었다. 아들들 대부분이 죽거나 유배되거나 무능력자로 판명난 상황에서 그나마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이미 왕좌에 앉은 다섯째 아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왕권을 튼튼히 다져 놓으며 흔들리던 왕조를 안정시킨 일등 공신이었으니, 자신의 분노만으로 아들과의 화해를 끝내 거부한다면 결국 나라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더 큰 대의를 위해 화해를 한 것이다.

왕릉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처음 죽기 전에 "나를 고향 함흥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태종은 나라의 창업자인 자기 아버지를 함흥에 묻는 것은 왕실의 위엄이 서지 않고 제사도 힘들다 생각해서 도성 근처에 모시고자 했다. 이에 잔머리 대왕 태종은 여기서도 머리를 써서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태조의 능에 심어놓았다. 그래서 다른 조선 왕릉들의 봉분이 잘 정돈된 것에 반해 태조의 건원릉은 지금도 억새풀이 무성해서 매우 투박한 느낌을 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덤 주인 이성계의 이미지와 잘 부합하는 왕릉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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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건원릉. 지금도 억새풀이 무성한 투박한 왕릉이다. 하지만 동구릉에 가면 이 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없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억새풀이 무성해서인지 건원릉은 벌초도 안 하고 방치한다는 이야기가 옛날부터 떠돌고 있는데(심지어는 네이버 지식인 등에서도 이 이야기를 떡하니 말하는 사례도 많다.) 비슷한 루머로 궁궐관리가 귀찮아서 기와 테두리에 시멘트를 발라놨다는 루머가 있다. 이건 지붕 용마루에 석회로 마감한 것이 매연으로 회색빛이 돌자 생긴 억측이다. 근데 한국 건축에서 사용하는 석회 마무리는 석회에 흙, 잘게 찢은 한지, 느릅나무 진 등을 섞어서 쓰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보면 시멘트가 맞긴 하다.(...) 참고로 석회를 주성분으로 다른 물질을 섞어 물에 개어 사용하는 원시적 형태의 시멘트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억새풀 얘기 역시 당연히 사실이 아니고, 능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이 억새풀을 유지하기 위해 건원릉의 벌초는 1년에 딱 한 번만 한다고 한다.

7 시호, 묘호, 휘

원래 정식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대한제국이 되면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증되었다. 함흥본궁의 위패 역시 태조고황제라 쓰여있다. 또한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인 '강헌(康獻)'이 빠지면서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왕건과 마찬가지로 본명이 매우 대중에게 익숙하다. 그래서 대중적으로도 이성계나 태조 이성계라 많이 부른다. 오늘날에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태조(李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는데, 오늘날에도 장년, 노년층에서 이성계를 이태조라고 부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이태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고려 태조 왕건을 가리켜 '왕태조(王太祖)'라고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어감영 좋지는 않지만 일본어 잔재론 같은 명칭은 아니다. 다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 좋다.

왕이 되면서 피휘 문제 때문에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 이성계의 성(成)자는 원래 이름으로 꽤 잘 쓰고, 일상적으로도 너무 자주 쓰이는 글자라서 아예 왕 본인이 갈아버린 것. 아침 단(旦)을 쓰고 있는데 조선에도 아침 조(朝)가 붙은 걸 보면 노린 듯. 피휘로 인해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단(旦)자의 日과 一 사이를 연결하는 짧은 획을 하나 더 썼고, 함부로 글자를 고칠 수 없는 경전에서 이 글자가 나올 때에는 원래 음 대신에 됴(=조)로 독음을 달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조차 군주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도 금기시 하기에 거의 불리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인 것은 구한말의 일로 피휘를 할 필요가 없던 서양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소개할 때 이단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오랜 피휘의 역사 때문에 이단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역시 이성계라는 이름으로 주로 쓰인다.

8 배우자와 자녀들

8.1 정비 : 신의왕후 한씨

  • 정비 : 신의왕후 한씨(韓氏)
    •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 태조 2년(1393년) 졸.
    • 영안대군(永安大君) 이방과(李芳果) - 조선 제2대 국왕 정종
    •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 -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 덕안대군(德安大君) 이방연(李芳衍)
    • 경신공주(慶愼公主), 하가(下嫁)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
    • 경선공주(慶善公主), 하가(下嫁)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

8.2 계비 : 신덕왕후 강씨

  • 계비 : 신덕왕후, 대한 신덕 고황후(神德 高皇后) 강씨(康氏)
    •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
    •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
    • 경순공주(慶順公主), 하가(下嫁) 개국공신(開國功臣)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

8.3 후궁 및 자녀 들

  • 후궁 : 성비 원씨(誠妃 元氏)
  • 후궁 : 정경궁주 유씨(貞慶宮主 柳氏)
  • 후궁 :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下嫁)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
  • 후궁 : 찬덕 주씨(贊德 周氏)
    • 의령옹주(宜寧翁主), 하가(下嫁)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

9 어진

9.1 청포 어진

대한민국의 국보
316호
완주 화암사 극락전
(完州 花巖寺 極樂殿])
317호
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
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
(浦項 中城里 新羅碑)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조선태조어진
한자朝鮮太祖御眞
영어
분류번호국보 317호
소재지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0
분류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시설1폭
지정연도2012년 6월 29일
제작시기조선, 1872년

국보 제317호 태조 이성계 어진
전북 전주시의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어진.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시대 어진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어진이다. 왕실에 전해지던 원본을 고종황제 대에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에게는 보통 청룡포를 입은 어진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홍룡포 버전도 있다.

9.2 홍포 어진

파일:Attachment/이성계/태조홍포어진.jpg
현존하는 다른 조선시대 어진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부산에 옮겨져 있던 중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타버렸다. 그래도 태조는 위의 어진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얼굴은 그대로 옮겨서 그릴 수 있어서 붉은색 용포 버전의 어진은 복원할 수 있었다.

2011년 위를 복원한 태조의 홍룡포 어진.
원본은 위에 나온 청포 어진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조선 후기에 가면 실록에 "왜 태조대왕께서는 곤룡포가 청색이시지?" 하고 후대 임금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이 간간히 보인다. 당시에 신하들이 내놓은 답은 "아마 고려의 곤룡포를 입으셔서 그런듯 합니다"였고, 그래서 1837년에 헌종이 이 그림을 그릴때 조선의 곤룡포인 홍색 용포로 바꿔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네이버캐스트 자료

9.3 함흥본궁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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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본궁에 봉안되어 있 태조 어진. 위의 어진보다는 이전 시기에 그려진 듯한 모습이며, 곤룡포에 가려져 있지만 기골이 가려지지 않아 역전의 용장 포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20] 이 어진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함흥본궁이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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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위를 복원한 태조의 홍룡포 어진.

10 전설적인 무용담

왕이 되기 전의 무용담은 조선왕조 측의 과장이 있을 것을 상당부분 고려해도 굉장한 수준이다. 국내에 침입한 왜구, 여진족, 원나라 잔당, 홍건적 등과 싸워서 전승했으며,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공민왕 때의 제1차 요동정벌 때 요동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고려조 이후의 한국사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마지막 장군이다. 특히 이성계 최대의 전역인 황산대첩 때에는 왜구의 피로 바위가 피로 물들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 했을 정도로 왜구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시기의 왜구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냐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수준이었다. 명장 이성계의 눈부신 전공 3

그 뿐만이 아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그 당시에 상당한 네임드였던 나하추를 우주관광 태워버렸다. 이때 나하추는 장수 중 가장 뛰어난 자에게 붉은 기를 주고, 이걸 가지고 나간 장수는 관우 앞의 안량과 문추 꼴이 되었다.(...) 이에 열받은 나하추는 다음 날 장수 5명을 출진시켜서 이성계를 공격했는데, 5명 모두 올킬. 원사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이 상황이 벌어지자 나하추는 병력을 모두 평야로 이끌고 나왔으나 오히려 이성계의 거짓패퇴에 휩쓸려 완패한다.

또한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개경이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적을 대파했다.

1364년에는 최유가 덕흥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쳐들어오자 이때 당시에 이성계는 기병 천명을 이끌고 구원을 갔는데 패한 장수들을 무시하자, 그들이 그럼 네가 한번 해봐라. 하면서 중앙, 좌, 우 군의 삼군의 모든 선봉을 이성계 군이 맡게 된다. 다만 정말 이성계의 부대만 움직인 것은 아니고 이성계가 종중의 원로들과 아버지 때부터 수하로 있었던 원로 가신들에게 사정해서 보다못한 그들의 군세도 움직였다고 한다. 그래도 대단한 거지만.

한마디로 엿을 먹어보라는 거였지만 문제는 저런 정신나간 상황에서도 이겼다는 것.

하지만 이후 이성계의 오만한 행동은 줄어들게 된다. 눈 앞의 적보다 등 뒤의 아군이 등을 돌리면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요한 경험이었던 셈.

아마 우왕 때의 2차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 물론이고(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실패했어도 비극적으로 장렬히 전사한 희대의 영웅, 명장으로 추앙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대부분의 전주 이씨가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만.) 아무튼 살펴볼수록 어마어마한데, 후대에 명장 소리 듣던 신립같은 경우와 비교하면 이성계의 전공들이 얼마나 사기적인 수준인지 알 수 있다.

10.1 불세출의 신궁

전공도 전공이지만, 이성계의 활실력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정말 무서운점은 그 충격과 공포의 활실력이 야사가 아니라 정사에도 많이 기록되었다는 것.

거기다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 멀리서 저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말을타고 돌격하면서 근접백병전으로 활을 써서 적들을 갈아버린적도 꽤 된다는 것(...). 사실상 중국 역사상 최강의 인간병기로 손꼽히는 항우급의 인간병기다.

기록에 나타난 이성계의 활실력에 관한 일화들 몇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정사인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조선시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세운 왕조에서 쓰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때문에 아래의 일시오조와 같은 이야기들은 적절히 필터링할 필요가 있다.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펼친 묘기들이 점점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이성계의 활솜씨를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중국의 정사인 원사이나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일부 교차검증이 되기에 최소한 당대 최고의 활잡이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런 걸 보면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동영상을 보면 날아오는 화살을 화살로 맞출 정도인데, 지금과 달리 활이 더 중요하던 때이고, 이성계는 그 때 당시 동아시아 전역에서도 손꼽을 만한 신궁이니...

이성계와 랄스양반을 비교하는건 좀 무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현대 숙련된 남성 궁사들이 평균 50파운드 장력의 활을 사용한다. 반면 라스는 20파운드의, 현대 궁사들이라면 장난감처럼 느껴질 활을 사용한다. 영국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의하면 그 시대 롱보우는 150파운드의 강궁이었고 한국의 각궁도 현대의 활보다 매우 강했을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라스가 평가절하되기 보다는 이성계 쪽이 말도 안되는 괴물이라고 생각하는게 편하다.

  • 젊었을 때에는 훗날 정빈 김씨로 추봉되는 이자춘의 첩이자 여종이었던 김씨(의안대군 이화의 어머니)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태조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태조가 한 번의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히자, 김씨는 태조에게 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데에도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출처는 태조실록 1권 총서.
  • 보통 사람이 쓰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강궁을 썼는데, 이자춘이 이 활을 보고 사람이 쓸 물건이 아니라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편전(애기살)을 이용하여 성의 병사들 얼굴에 70발을 쏴 70명 모두 맞혔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하여 도망갔으며, 성안의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을 하였다. 적장이 활 시위를 한번 당길 때마다 아군이 하나씩 저승길. 그것도 현대전이라서 저격수에게 맞은 것도 아니고, 냉병기로 저 정도 전과다. 상상해보면 굉장히 무섭다 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1만 여 호나 되었다. 출처는 태조대왕실록. 당연히 정사다. 왕조차 함부로 못 읽던, 그리고 바로 그 이성계가 몇 번 읽어보자고 뻐꾸기를 날렸는데도 당당히 거부하던 조선왕조실록의 보안 수준을 생각해 보면 저것을 쓰던 사관들이 곡필을 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고려사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1차 요동정벌 항목 참조.
  • 동녕부의 오녀산성을 점령한후, 요동성 전투에서 처명이라는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서 한발은 머리에, 한발은 허벅지에 맞힌 후 "마지막 한발은 니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갓어!"라고 하자 용맹한 처명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항복한 처명은 이후 이성계 막하에서 부장으로 활약하여 황산 대첩 때에도 참전했다.
  • 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구리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일본 투구에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인 멘구(面具)라는 부품이 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가 떨어지면 이지란이 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물론 위대하신 이성계님께서는 투구꼭지를 맞히었으나 투구가 기울어질 뿐 떨어지지 않았고, 아기발도가 다시 쓴 투구를 이성계가 다시 맞히어 투구가 떨어지자 이지란이 얼굴을 쏴서 죽였다고 한다.
이 무협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먼치킨 스토리가 야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사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흠좀무. 그런데 일본 갑옷의 투구를 보면 이성계가 맞히었다는 정자 부위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투구는 그 부분이 상당히 작으나 일본 투구에는 화려하다 못해 너무 크다 싶을 정도인 장식이 달렸기 때문에 정자도 크다. 그렇다 해도 전투 중이라서 필시 움직이는 상태였을 상대를 2번 다 같은 위치에 맞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이건 현대 저격수들도 어려운 일이다.
  • 이성계는 왜구와의 격전을 앞두고 150보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놓아두고 3번 쏴 3번 다 맞히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보가 대략 1.8m니, 270m 거리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 사거리는 웬만한 초기 화약병기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한 가지고 있던 화살 20개중 17개를 쏘아 모두 맞히었는데 모두 왼쪽 눈초리에 명중했다고 한다. 출처는 역시 태조대왕실록.
참고로 초기에는 총기보다는 활이 강력했다. 사거리도 그렇고. 다만 조총과 달리 활은 실력자를 육성하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는 점에서 불리했다. 그래서 장마철은 화약무기인 조총에게도 불리하나 조선의 활이 약해지는 시기이기에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시기를 여름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보(18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떨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다.

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 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背)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 정종 이방과)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서 보겠다" 하면서, 이에 휘하의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은 마땅히 뒤따라 올라올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역사(歷史)

이 이야기는 정도전(드라마)에서 황산대첩 직전에 각색이 가해져서 재현되었다. 사실은 황산 대첩 3년 전에 있었던 일화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
  • 또한 어느 날 신하들이 공민왕 앞에서 활을 내었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쏴 다 맞히어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거기다 원나라에서 활을 잘쏘기로 유명한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이성계와 함께 활을 쏜 적도 있었는데, 족히 수백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 때 황상은 50발을 연달아 맞힌 후 맞히기도 하고 못 맞히기도 하였다. 이것도 굉장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국궁 승단체계에서 45발 중 39발을 맞히면 9단이며, 9단인 명궁은 극소수에 불가하다. 그런데 이성계는 (수백 발)전부 다 맞혔다고 한다.
  • 여진정벌 당시에는 여진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으며, 온 몸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달려오자 투구를 쏘아 맞혔는데, 그 장수가 놀라서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화살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 그 외에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 여진족과 싸울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 위에서 모두 피해냈다고 한다.
  • 이지란이 길거리를 걷는 아낙네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에 구멍을 내자 솜을 끼운 화살을 쏴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야사의 기록이지만...그런데 정사에도 있다.
  • 야사에는 활 3발을 한 번에 쏴 모든 과녁에 명중, 그것도 마상궁으로 해냈다는 기절할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인만큼 반 정도는 깎아서 접수하도록 하자. 그런데 정사에 실려 있다는 얘기들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다.

기록에 따르면 활솜씨만이 아니라 검술(劍術), 마술(馬術)에도 능했던 듯 하다. 척준경까지는 아니지만 적병 7~8명 정도는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몇군데 있다.

퇴마록 국내편 3권에서 이성계가 화살이 없이 기(氣)만으로 활을 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의 인식도 대부분 명궁이라고 알고 있고 아는 사람들의 인식은 신궁. 가히 한국사 최강의 보우마스터. 다른 나라 역사하고 비교해도 안 꿀린다. 오히려 꿀리게 만든다

원래 무골(武骨)이라서 그런지 노인이 되어도 정력이 강건하기 그지 없어서, 60대 중후반 쯤에 딸(숙신옹주)을 하나 낳았다.(…) 또한 훗날 나이가 들어 태상왕 시절 밖에 놀러 나갔다가 만취해서 가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올 때 주위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말 타고 갈거니까 당장 말 가져와!"라며 징징댔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태조의 그림(위)을 보아도 어깨가 떡 벌어진 강인한 체격임을 알 수 있다.

10.2 사용한 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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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사용했던 어궁구(御弓具)는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었던 흔치 않은 활유물이었으며 사실상 조선 최고의 명궁으로 알려져 있다. 어궁구는 함흥의 조선 왕실 사당인 함흥본궁(咸興本宮)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불행히도 한국전쟁 중 함흥본궁이 불타버린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되었다.


이성계의 칼로 알려진 전어도(傳御刀)가 지금도 남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자루 부분의 길이가 길어서 사진으로 보면 어째 단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길이가 150cm에 육박하는 대검이다. 길이 중 1/3가량, 약 50cm가 자루부분이라 이라기 보다도 폴암 같은 느낌. 더불어 일부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역날검은 아닌데, 칼날은 일반적인 환도처럼 휘어진 바깥에 있고 칼끝만 반대 방향으로 생긴 것. 칼끝 부분에는 양쪽에 날이 있는지라 일종의 펄스 엣지(False Edge)형 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지금 전해지는 유물은 실제 이성계가 쓰던 칼은 아니고 이방원이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레플리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 검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나옹대사와 무학대사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알게 된 명당자리에서 얻게 된 것을 아들에게 준 것이라고 하며, 이 칼로 명당자리를 지키던 괴물을 죽이고 묘를 이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죽일 때 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 검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어도와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만큼 믿거나 말거나…

여튼 개성있고 뽀대 나는 외형에 여러가지 전설까지 양념처럼 버무려져있고 특히 한국 대중문화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사진참사검과의 연관성까지 있는데다, 전설적인 무용을 자랑하던 창업군주의 칼이라는 점에서 안유명한게 이상할 정도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용자가 보우마스터라… 안습.

또한 정사가 아닌 야사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성계의 화살보다 빠른 말도 있다. 내용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갈고 닦을때 어느 연못에서 튀어나온 한마리 용마가 있었는데, 이 용마는 몹시 사나워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이성계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아무도 길들이지 못한 말을 길들이기에 성공해 자신의 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로 무예 연습을 계속하다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기위해 과녁에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을 따라잡기로(...)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전력질주로 과녁에 도착하자 화살이 이미 박혀있는걸 보고 말이 화살보다 느린것에 빡친(...) 이성계는 말을 곧바로 죽여버린다. 하지만 과녁에 박혀있는 화살은 예전에 쏜 화살이었고, 말을 죽이자 자신이 쏜 화살이 날아와 과녁에 꽂히게 된다. 이걸 본 이성계는 자신의 급한 성격을 고쳤다는 훈훈한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는 견훤의 설화로 상주시에서, 김덕령의 설화로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8마리의 애마들도 확인된다. 이름은 각각 유린청, 황운골, 추풍오, 현표, 발전자, 용등자, 응상백, 사자황이다.

11 이성계 여진족설

위화도 회군을 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기 때문에, 고려빠와 재야사학계의 철천지 원수다. (그런데 이성계가 왕이 못 되서 조선왕조가 열리지 않았다면 세종대왕한글을 못 만들었을 테니 우리는 한자를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진족설, 달단족설, 화교설 등이 나돌고 있다. 특히 여진족설은 혐한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단골 소재다. 일본어 위키페디아의 이성계 항목에도 매우 자세히 나와있다. 사실 혈통과 관련한 한국 재야사학계 학설 상당 부분이 일본이 출처다. 동아시아의 어떤 인물의 혈통 대한 학설은 일본에서 최초로 많이 나오는데 칭기즈칸처럼 명확한 근거는 없고 추측이다.

하지만 이 설들은 근거가 빈약하고 감정적으로 다뤄지는 면이 크다. 본 항목에서도 감정적인 서술로 수정전쟁이 몇 차례 일어났을 정도다.

이성계의 혈통이 여진족이라는 주장은 전혀 문헌 근거가 없다. 이성계의 혈통은 상당히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안사에서 이성계로 이어지는 혈통은 심지어 외가의 외가 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의 혈통은 고려인 혈통으로만 이어졌다. 이성계 이전에도 금사, 송막기문 등에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6대조는 김함보라는 신라-고려 교체기 시절의 인물로 그 계보가 기록되어있는데, 이를 보면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일으킨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여진족들은 이성계 일족을 다른 족속으로 여기고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통두란의 예에서 보듯이 우호적인 교류도 했겠지만, 고려인과 여진족이 서로를 다르게 보았다는 문헌적 근거가 있다.

여진족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의 근거는 고작 당시 정황상 북방에 여진족이 살았다는 것 뿐이다. 쌍성총관부가 있는 동북 지역은 중부 지방과는 달리 여진 역시 꽤 많이 살기는 했다. 사실 이 지역 함흥은 험한 산과 바다로 막혀 지리적 접근성은 떨어지는데, 그 지역 자체는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자연환경, 함흥 평야 지역이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여러 민족이 거쳐간 지역으로(옥저가 있었던 곳이 여기) 시대에 따라 옥저, 고구려, 여진, 고려 등이 경합하는 지역이었다.

특히 고려는 이 지역의 여진족들을 회유하고 귀화시키거나, 다른 지역의 고려인들을 이주시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중요하게 여겨왔다. 공민왕이 함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본래 고려 영토"임을 확실하게 선언한 것도 이런 상황탓이다. 이는 조선에 들어와서 마찬가지였는데,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귀화를 받아들이고 조선인과 결혼시켜주는 등의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성계 일족의 함흥 이주는 이러한 과정에서 정책적,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이다. 전혀 특수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 일족의 이주는 달랑 한 가족이 혼자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만 천호이며, 이안사 휘하에 있던 고려인은 거의 수천호가 된다고 한다. 전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 중앙보다는 민족색이 얕아질지 몰라도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충분히 간직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의 고향인 고려는 바로 이웃에 있었으며, 비록 주권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선지와는 이래서 다르다.)

이런 이주는 당대 상황에서 이성계 일족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보면, 무신정권을 전후로 해서 고려 사회의 막장화가 가속화하면서 백성들이 유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선조처럼, 자기 동네 향리나 지방관과의 마찰이 이주의 원인인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한다. 고려시대 자체가 주현이 따로 있고, 속현이 따로 있는 시대로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 시절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이성계 일족은 조선 말에 간도이주, 개척 시기에 그쪽으로 흘러가 현재 중국의 조선족이 된 사람들과 비슷한 경우였다. 이들은 해방 후 60년이 지났지만 자치구를 유지하고 있으며, 장기간에 걸쳐 자신을 민족적으로 여전히 '조선계'인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동화되는 중이다. 의무교육을 비롯해 각종 정책으로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현대 중국에서도 이런데, 전근대의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여진-고려 관계에서는 그 속도가 더 느리고 영향력도 적을 수밖에 없다.

또한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의 멸망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라 종족적으로 고려 이상으로 안습해졌다. 나라도 없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어,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가진 민족도 아니고, 문화적인 헤게모니도 상실했다. 그저 몽골의 지배 아래 있는 여러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심지어 고려 북방 지역에서도 야인(野人)이라 불리는 여러 종족 가운데 한 부족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여말선초의 문헌에서 이 지역의 부족들은 '여진'보다는 '야인'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부족 이름을 '여진족'으로 삼는 종족만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북방 야인들이 '여진'-'만주'라는 정체성으로 통합되는 것은 후백년 뒤 후금의 건국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당시에 중심이 되는 문화는 원제국으로서 패권을 잡고 있던 몽골 문화였다. 여진족도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청나라 시대까지 몽골어가 널리 쓰일 정도였다. 고려인 역시 몽골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성계 일족도 몽골 이름을 쓰는 등 몽골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드러냈다. 이 때는 고려 본토 역시 몽골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 자체가 몽골의 부마국이고, 고려왕은 몽골 황실의 외손이었으니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이 지역의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은 서로를 혼동하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이성계 일족은 자기들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점. 일부의 편견과 달리 여진족과 한반도의 사람들은 고대부터 그 정체성이나 언어가 확실히 구분되는 별개의 민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 가족이 실제로는 여진족이면서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 애초에 이들이 여진족이었다면 공민왕을 편들어 쌍성총관부를 고려에 바칠 이유가 희박하다.

따라서 여진족 설은 조선 왕조에 대한 어떤 감정적인 해석, 혹은 만주 지역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상에 따른 해석에서 비롯된 낭설로 봐야 될 것이다. 사실은 고려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리는 상상에 불과하다.

색이 옅다는 것으로 따진다면 타국인과 교류하며 지냈던 국경 지방이나 외따로 떨어진 제주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하는 것, 경상도 해안지방에 왜관이 있었다고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성계 여진족설과 같은 논리로 보면 마찬가지로 쌍성총관부에서 99년이나 살았던 한양 조씨들도 여진족이라는 말이 된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쌍성총관부를 몽골에 넘긴 반란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고 다시 고려에 귀화시킨 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할 때 도움을 줌으로써 고려 정부에 출사하게 된다. 조씨 가문이 저렇게 상반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세대가 흐르면서 쌍성총관부의 관직세습 때문에 가문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본인들의 주장 중 하나를 대충 소개하자면 여진족이 만주 지역만이 아니라 한반도 북방에도 꽤 살았다는 것과 으레 나오는 과거 족보의 신뢰성을 걸고 넘어지는데, 태조 총서의 기록에 李璘, 李隣 등으로 조상의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는 혼선이 있고 족보의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갑자기 동북면 쪽이 근거지가 되는 행적을 증명하는 증거의 신뢰성이 약하기 때문에 이씨족보[21]를 구매했을 것이라는 썰 같은 것들이 나온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이다 보니 과학기술적 증거를 남기는 게 쉬운 편이 아니고 대체로 빈약한 근거들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일본은 섬이라는 한정된 지역에 있어서 단일한 혈통 같은 것들을 강조하는 면이 강한데 정말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고대 대륙 국가들을 보면 처음부터 딱히 다 같은 민족이었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국가들의 역사[22] 계승권을 세계에서 부정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조선의 정당한 계승자가 달리 없는만큼[23] 이성계 여진족 썰은 실질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12 이야깃거리

  •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야사에서 유래한 듯 하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고 장난 삼아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이는구려."라고 놀리자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소승은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허허, 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왜 나를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이지요"(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라고 받아쳐 이성계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 이 외에도 앞에서 설명했던 그 유명한 '집 무너지는 꿈'의 해몽 이야기 등으로 무학대사와 평생 동안의 우정과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역사상으로도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좋은 상담자이자 벗이었고 이성계에 의해 유교 국가 조선에서 고려의 불교제도인 '왕사'로 무학대사를 임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도 한양의 위치를 정할 때 둘이서 같이 골몰하기도 했다. 봉우리가 딱 1백개였는데 하루아침에 하나가 그냥 언덕으로 닳아버려서 명당에서 탈락했다는 원통이 고개 이야기도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주인공이다.
  • 덧붙여 이성계는 돼지 띠다. 민간설화 등을 보면 묘하게 돼지와 연관되곤 한다. 꿈에서 자를 문 돼지가 이성계의 꿈에 나타났다는 설화가 있고, 개성에서는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이성계를 두고두고 깠다는 민담도 있다. 그리고 그 돼지고기로 끓인 탕을 성계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미륵신앙/반정부 승려조직인 당취(땡추)들은 아예 주기적으로 돼지를 죽인 뒤 그 생고기를 씹으며 이성계를 저주하는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또한 조랭이 떡은 이성계의 개성에 있는 고려 왕씨 일족을 몰살하는 행각에 분노하여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떡이다. 흠좀무.
  • 주원장 비슷하게 무학대사가 종묘를 28간만 짓게 해서 조선이 28대까지 갈 것을 예언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뻥이다. 종묘는 처음 지을 때 제후의 예법에 따라서 7간으로 지었고, 이후 정전을 확장하고 별전인 영녕전까지 지어서 지금은 추존 군주까지 포함하여 38군주 1황태자를 모시고 있다. 1980년대에 국내에 단전호흡 붐을 일으켰던 소설 <단>에서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 최소 30년은 된 도시전설이다.
반면 조선왕조의 멸망은 필연이었다는 일제의 선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왕조 관련한 어떤 모 역사책에선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양[24]에 자리잡으려 할 때 그 일대를 가리키며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약 5백년 정도는 갈 것입니다"라고 이성계에게 말했고 태조는 이에 흡족해하였다 이런 내용도 있다고...
  • 아들인 태종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편이었지만 실록을 보면 연회를 가지거나 같이 식사를 하는등 나름대로 화해를 하고 어느정도의 부자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 보인다. 실록을 보면 태종이 임금자리에 오르고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돌아온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록을 살펴 보면 수라를 헌수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드리거나, 놀러 나갔다가 궁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마중나가거나 하는 일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후 끌려오다시피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는 태종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다시피 했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에도 온천에 요양을 가거나 왕실의 원찰(대표적으로 양주시회암사) 등 사찰로 행차하는 등 야외 활동을 한 여러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 함흥차사 야사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함흥에서 돌아올 때 마중나온 아들 태종을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유명하다. 태종이 이성계를 마중나가기 전 아버지를 맞고 나서 열 연회의 가건물을 설치할 때 태종의 참모인 하륜이 태종에게 건물의 기둥을 굵게 할 것을 주문했고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이성계가 도착하고 태종은 절을 올리려 했는데 이성계는 갑자기 활을 들어 아들을 향해 쏘려고 했다.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피했는데 화살은 굵은 기둥에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
  • 그리고 연회를 여는데 하륜이 또 귓속말로 태종에게 "전하께서 태상왕께 직접 술을 올리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통해 올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태종은 그 말을 따라 아랫사람을 시켜 이성계에게 술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철퇴를 품 속에서 꺼내 상에 올려놓더니 "이 모두가 천운이구나"라며 허탈하게 웃었다고 한다.[25] 야사의 기록이고 실은 조사의의 난 이후 얌전히 돌아와서 편히 살았지만 이 이야기는 실은 아들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 조사의의 난 전 이야기지만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연회 중에 태종과 신하들이 "불교를 좋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불공을 꼭 밖에서 드리셔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여 태종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태조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대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번과 방석, 사위인 흥안군 이제)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서방정토로 가고 있다!" -《태종실록》태종 2년(1402) 1월 28일
어쩌면 이성계가 불교에 매달린 것은 모든 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교리에 감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기야 변방에서 장수가 되어 조선을 개국했는데 아들내미와 싸우고 감시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게다가 이안사가 함흥으로 이주할때부터 고려인이던 이씨 일가의 종교는 불교였다. 이는 고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주위 여진족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비록 조선이 숭유억불을 기치로 삼았지만 이는 전조 고려에 대항하기위한 구실이었고 실제로는 이 당시 원 황실로부터 들어온 티베트 불교의 잔재가 일소되고 고려 본래의 선종중심의 불교로 일신되었다. 승려로서 조선왕실의 국사가 된 무학이 바로 이런 저류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이성계는 조선왕실의 원찰이면서 행궁 역할도 가능한 회암사를 건창하므로서 이런 친 불교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즉, 그 당시 사대부들처럼 외적으로는 왕도정치ㅡ도학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집에서는 시침떼고 불교를 숭상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업보를 받았느니, 그래서 불교를 믿으며 참회했느니 하는 다양한 해석도 있다.
그래도 말년에는 왕실에서 더 이상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랬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태종이 왕실의 사돈이었던 이거이 부자를 숙청할 무렵, 이를 태상왕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뜻대로 결정했겠지만, 회안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이 이미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 네가 그들을 보전하면, 국가의 재앙이나 천변(天變)·지괴(地怪)가 적어질 것이다. 이 일은 큰 것인데, 나는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10월 20일
  • 위에서 '네 뜻대로'는 의역이 아니다. 실록 원문에도 '너 여(汝)'자를 쓰고 있다. 태상왕 태조는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태종을 '주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태종을 사가에 있을 때처럼 격의 없이 '너'라고 부르기도 했던듯. 저 말은 "방간이는 폐인 됐고, 방의는 죽고, 방과는 찌그러져 있는데, 우리 친척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그래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은 친척 뿐이야. 사돈네도 살려줘야지 나라에 나쁜 일이 안 생길 거야"라는 요지의 훈계. 3남 이방의는 이 해 9월에 이미 병사한 뒤였다.
참고로 이성계의 아들 8명 중 5명이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남 이방우는 술병으로 죽었고 6남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요절했으며 7남 이방번과 8남 이방석은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 이래저래 자식복은 없었다. 태조의 이 말을 들은 태종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실록의 이 날 기록은 전한다. 결국 이거이 집안은 폐서인이 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데 그치는데,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은 태조의 절절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26]
사실,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비통한 절규나 그래도 어려울 때 믿을 사람은 친족뿐인데 친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훈계(또는 호소)는 자신의 육친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 데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성계의 성장기반을 볼 때 아주 실용적인 처세원칙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성계는 변방 국경의 반독립적 호족 출신이고, 게다가 국경 밖에 살던 이들은 주로 유목민(반유목민)이었으며, 이성계의 일족 자신도 그 영향을 어느정도 받았다는 점, 그리고 고려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한 나머지 주변의 여진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단 유목민의 경우 떠돌아 다니며 방목하는 특성상 지연이나 학연 등의 의미가 없고,[27] 따라서 사회적으로 혈연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한번 갈라주면 끝인 토지와는 달리 유목민의 재산인 가축은 형제가 많으면 각자의 몫이 좀 줄어들더라도 잘 키우면 쑥쑥 새끼를 낳아서 불어나기 때문에[28] 형제간의 유산갈등이 농경민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 때문에 거친 유목민 사회에서는 유사시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친족[29]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시하게 되는 것. 더구나, 주변의 여진족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기 쉬운 변경의 호족 입장에서는 그만큼 친족들의 강한 유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성계가 함부로 다른 장수들을 무시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준 것도 종중의 다른 어른들이 보내준 병력이었고, 그의 아들들 역시 군사활동이나 개국 과정 전반에서 아버지의 심복 부하로써 큰 활약을 했다.
결국, 이성계의 세력 기반은 일족 공동체였고, 이 '이성계 일족'은 전주 이씨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고려계 유이민들이 뭉쳐 있는[30] 형태였다는 것. 이런 집단의 경우, 친족간의 유대가 극히 중요할 뿐 아니라, 친족의 수[31]가 그 일족의 세력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자춘이 유목민의 풍습을 받아들여 여러 부인을 맞아 많은 자식을 둔 것 역시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보면, 왕권을 탐내 서로[32] 죽여대는 아들들의 행태는 이성계가 성장하고, 활약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미친 짓이고, 당장 배고프다고 제 살 깎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인 셈. 육친이 육친을 죽이는 것도 끔찍한 짓이지만, 그렇게 끔찍한 짓까지 해 가면서 일족의 자멸을 위한 최선의 노력까지 하는 꼬라지로 보일만 하다.
예를 들어, 이런 일족 공동체에서는 다른 형제에게 가장 자리가 넘어가더라도 그냥 덮어놓고 협력하는 쪽이 현명하다. 내분을 벌이면 일족의 힘이 약해지고, 그만큼 외부의 위협에도 취약해지겠지만 계속 힘을 합치고 있으면 형제계승이나 숙질계승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조선왕조는 그 후 500년 이상 유지되었고, 그 기간동안 조선 왕실의 정치적, 사회적 논리는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일족 논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 이성계의 젊은 시절 때, 그는 명마를 얻어서 열심히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활터에서 자신이 활을 쏘고 달려서 만약에 화살보다 늦게 오면 목을 벨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화살을 쏜 다음 말을 몰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화살이 먼저 꽂혀 있었다. 자신이 화살보다 늦게 온 줄 알고 그는 약속대로 명마의 목을 베는 순간 화살이 과녁에 꽂혔는데 알고 보니 다른 화살이 꽂힌 걸 늦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그는 성급한 자신을 후회하며 명마를 고이 묻어주었으며, 그 뒤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도 이 일을 잊지 않고 말 묘비를 세워준 곳이 오늘날의 파주의 치마대가 되었다는 일화가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가 됐다.

13 대중문화 속의 태조 이성계

13.1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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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에서의 태조 이성계(故 김무생).

워낙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고 한국사의 왕조 창업 군주들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사람인지 이성계와 그의 시기는 사극에서도 자주 다뤄졌다. 고구려의 고주몽, 백제의 온조, 신라의 박혁거세, 발해의 대조영, 고려의 왕건등도 있지만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 비하면 이들 한국사 창업군주들은 단 한번 밖에 사극화되지 않았거나 사극화되지 않고 있는 등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다.(그도 그럴것이 조선 이전 시대는 정확한 사료가 거의 없으니..) 다만 분명히 모든 중요한 결정을 본인이 주도해서 했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지가 없으면 시체나 다름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의 눈물 이후의 사극들은 하나같이 정도전에게 모든걸 맡기고 뒤에 앉아있는 허수아비 군주로 묘사되기 일쑤.

개국에서는 임동진이, 용의 눈물에서는 김무생이 열연했다. 특히 김무생dms 용의 눈물은 물론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도 태조를 연기할 만큼 이성계 전문배우였다.[33] 김무생 의 태조는 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아들인 이방원을 향한 무한한 혐오감이나 정도전과의 우정 등 인간적인 태조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다. 김무생 씨의 카리스마는 유동근의 태종 이방원과 더불어 용의 눈물을 압도하여 지금도 이성계하면 고 김무생이라고 할 정도이다. 태조 어진과의 외모상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기도 했고. 가히 레퍼런스급의 명연기를 보여주었기에 지금도 고 김무생을 뛰어넘는 이성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이성계(용의 눈물) 참고. 허나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된 이후로는 유동근이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김무생이 열연한 이성계는 수많은 명장면이 있다. 그 중에서는 조사의의 난에서 진 태조가 돌아와 태종의 문안을 받으며 춤추는 장면이 있다. 태종은 "아바마마! 소자의 춤을 보시옵소서" 하면서 통곡하고 태조도 이내 슬퍼하며 태종을 끌어안는 장면은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기도 한다. 드라마 속에서는 야사의 이야기들도 거의 재현하고 있다.

무학대사와의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일화도 나오며 태종을 죽이려고 천막에 대고 화살을 쐈지만, 미리 하륜의 충고에 따라 기둥을 준비한 태종이 기둥 뒤로 숨고, 태조가 쏜 화살이 기둥에 박혀 태종이 살아남자, 나중에는 술자리에서 소매에 숨긴 작은 철퇴를 휘두르지만 태종이 피해내는 모습을 보고 "천운이로고"라며 체념하는 장면은 조선 개국왕조의 비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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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유동근이 이성계 역을 맡았다. 유동근이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의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들 태종(이방원)을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최강의 배우개그. 헌데 포스가 故 김무생이 연기했던 이성계와 필적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유동근은 이성계 역을 맡으면서 故 김무생 선배 생각이 난다며 감회가 새롭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이성계(정도전) 항목 참고.

조부까지는 몽골의 천호로서, 아버지 대부터는 고려의 장수로서, 확실한 고려인도 몽고인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한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의 반영으로 작중 북방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일단 4회 예고편에서는 실제 출신 지역인 동북이 아니라 서북 방언을 쓰고 있다. 제작진이 그것을 모를리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동북 방언을 쓰는 것도 시대상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동북 방언서북 방언이 섞인 괴악한 북부 방언을 사용한다.

기본적으로는 서북 방언의 어휘를 사용하나 ~했지비, ~했슴매라는 어미도 사용한다. 동북 방언 항목에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했지비, ~했슴매는 동북 방언에서 주로 쓰이는 어미이다. 다만 이 어미는 만주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여진족과 가까운 동북면의 특성상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동북방언을 복원할 수 없는 여건상 어휘는 같은 북부계통인 서북방언에서, 어미는 여진어의 영향을 받은 현 동북방언에서 취하는 것이 그나마 택할 수 있는 길일지도.

현재의 동북 방언은 놀랄만큼 동남 방언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드라마 시점에서 후대인 세종대왕 시절 4군 6진이 개척되며 시행된 사민정책으로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함경도 지방으로 넘어와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천호진이 맡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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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 장영실(드라마)에서 김기현이 맡고, 7화에서 한컷으로 등장한다.

13.2 게임

코에이의 원조비사와 징기스칸 4에서도 등장. 원조비사에서는 최영과 더불어 전투치 A를 받고 있고, 특히 ,이성계는 다른 능력치도 준수해 고려의 먼치킨 무장으로 포진하고 있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와 4에서 등장. 시나리오 2에서는 등장시기도 늦고 능력치가 전부 70대(라고는 해도 이 게임에서 능력치가 70대를 찍으면 준먼치킨이다.)지만, 시나리오 4에서는 전투치가 80대로 올라 있으며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연사 특기에 능력치가 업그레이드되며 화공 특기까지 보유하게 되어 궁병이나 궁기병을 이끌면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공성전에서 적으로 만날 경우 상대하기 대단히 껄끄럽다. 어쩐 일인지 수군 적성도 A라 해전에서도 엄청난 면모를 발휘한다.

이 게임 전 시나리오 통틀어 고려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먼치킨으로 명의 서달이나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츠 등과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다. 코에이에서 고려 장수에게 이 정도 능력치를 준 것도 나름의 배려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족, 몽골족, 여진족, 왜구와 모두 싸워서 이겼던 이성계가 완전 '국내용' 장수였음에도 전투치가 90대 중반을 찍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비교하자니 불만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등용' 특기가 없다. 참고로 능력치 총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동일하다 요리토모가 정87 전68 지 76으로 총합 231, 이성계는 정 76 전83 지72로 역시 231. 파킷포함 능력치 총합으로는 요리토모와 함께 공동 41위이다.

여하간 시나리오 1~3의 고려와 달리 시나리오 4의 고려가 안습을 벗어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장군이다. 코에이가 한국 인물에 이 정도로 대우를 해준 건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이와 비슷한 대우를 받은 건 삼국지 시리즈에서 역사 무장으로 등장한 이순신 정도지만 삼국지 장수들보다 낮은 능력치를 받는 역사 무장들의 한계상 -물론 이순신 장군은 그중에서도 강한 편이지만- 가장 좋은 대우를 받은건 이성계다. 특히 일러스트가 가상인물이 아니고 시나리오4 설명에서 중요한 장수라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징기스칸4의 특징인 왕조창업자 버프가 한몫을 한듯하다.

플스판의 시나리오 2에선 다른 건 다 원판의 능력치인데 전투만 85로 파킷때보다 더 올라갔다.(...) 수군 적성이 A인지라 일본의 공략 페이지에선 무로마치 막부에서 쳐들어오면 바다에서 다 요격하라고 써져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열풍전 PS판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 85 무력 74 지력 70 정치 72에 외교와 배락 특기를 가졌다. 적성은 수군 A, 족경 B, 기마 D, 철포 E. 주로 육전에서 말타고 이민족을 쫓아내던 무장인데 수군이 A고 육군은 바닥을 기고 있다. 징기스칸4에서도 그렇고 코에이가 또 조사를 대충 한듯하다. 왜구를 쫓아낸것을 크게 평가한 모양이지만 이성계군의 주력은 여진+고려인으로 이루어진 친위 기병대였고 전투양상 또한 고려 내륙으로 침투해온 적들을 요격하는 형태였다. 특이하게도 열전을 보면 고려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잘못된 열전과 별개로 역사적으로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낼때 조선국왕을 조선황제또는 고려황제라고 표현한경우가 종종있다.

13.3 소설

고려 말을 무대로 하는 작품에는 무조건 등장한다.

13.3.1 조선태조 이성계

김성한 작가 한국사 역사소설
요하#s-2왕건이성계7년전쟁

김성한 작가의 소설 조선태조 이성계에서는 주인공. 작가의 역사소설중 1960년대 말에 완성된 최초 작품이다. 고려 공민왕 10년 박의의 난을 진압하는 모습부터 등장하며 왕자의 난으로 양위를 하고 물러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다. 이성계뿐 아니라 여말선초의 많은 인물들의 시각에서도 전개된다. 절판 및 재출간을 반복하다가 최근 2014년 재출간되었다.

13.4 총평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흠좀무한 활솜씨와 용병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고려의 운명을 수없이 돌려세운 무적의 장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세출의 명장 이미지'보다는 '조선을 세운 임금' 이미지가 강하여 서브컬처쪽에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온갖 편견(+ 덤으로 근현대사의 군사정권에 대한 반동까지) 때문에 현대인에게 이미지가 안 좋게 박힌 것도 한 몫한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성계의 무시무시한 전적과 무력이 알려진 덕에 척준경과 함께 현재는 한국사 사상 최강의 무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잘 살펴보면 고대의 신화나 영웅담에나 나올 법한 위인이다. 한 나라를 멸망시킨 역적인 동시에 또 다른 한 나라를 세운 건국자, 외침과 내란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한 구국의 영웅, 무장형 군주, 불세출의 활 실력, '전어도'라는 크고 아름다운 명검 보유, 주몽에 비해 훨씬 방대하게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 일화(게다가 무섭게도 그 일화들 대부분이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라는 점), 30년동안 전장에 나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전적, 게다가 마냥 해피엔딩은 아닌 어느 정도 비참한 노년까지 합쳐지면 그저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굵은 부분은 대한제국 때 올린 시호
  2. 대한 제국 출범 후 삭제
  3. 흔히 함흥으로 착각하는데, 정확하게는 함흥 인근의 화령(현 영흥군)이다. 그래도 함흥이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것은 사실.
  4. 왕의 이름은 피휘를 해야 하기에 자주 쓰지 않는 한 글자 이름으로 바꾼 것.
  5. 몽골식 이름. 고려식으론 이자흥(李子興)
  6. 이들의 행보는 좋게 말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배신자인 거다.
  7. 이방원이 벌인 짓이다.
  8. 우왕과 창왕이 가짜라는 것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성계 스스로 왕이 되는 역성혁명의 주요 명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조선 500년 동안 우왕창왕은 당연하게 신돈의 아들 취급당했고 의문을 가진 선비도 간혹 있었지만 나라와 왕가 정당성의 뿌리를 흔드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회분위기상 본격적으로 억울설을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고려사에서도 우왕과 창왕을 세가가 아닌 열전, 그것도 반역전에 신우, 신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자유로워진 현대에 들어서는 어느 쪽이 맞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정황상 군사정변의 부족한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모략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용의 눈물 등 여말선초를 다룬 창작물에서도 왕씨 겨드랑이의 용의 비늘 야사를 통해 사실 우왕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희생된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다.
  9. 또는 권서고려국사
  10. 왕위의 사후 추인
  11. 다만 조선도 초기에만 탄압했지 나중에는 탄압을 중지하고 왕씨들을 복권해주었다. 하지만 그게 문종 때였고 이미 죽일 사람은 다 죽이고 철저히 몰락시킨 다음이었으니 별 큰 의미는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한국에서 김씨나 박씨, 이씨와 왕씨의 위상 차이는 비교도 안 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유명한 여성 배우 전지현은 본명이나 집안 가문이 왕씨라고 화교중국인 취급을 받았을 정도였다.
  12. 물론 조선시대 내내 왕들의 중시조였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않고 간접적으로 디스했다.
  13.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다고 나오며,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정식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받으면서도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14.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
  15.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
  16.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버리고 석물을 청계천에 처박은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을 한 것이다.
  17.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
  18.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이는 곧 방우의 맏이로서의 위상을 그 장자 이복근에게 계승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19.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
  20. 이성계가 태조가 됐을 때 나이가 40대 후반이라는 것과 당시 평균 체격을 감안하면 무인으로서는 축복받은 체격.
  21. 당시 성씨는 그 가문의 봉토와 귀족의 증거라 성씨를 가진 고려인이 몽골에 귀화하면 반드시 자신의 성씨는 남겨 놓았다.
  22. 특히 아직까지도 민족과 유전자를 다 섞거나 통합하지 못한 국가들도 있다. 인도 공화국이나 나이지리아[1]
  23. 설마 여진족이 조선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4. 원래 한양 전에 충청도 어디로 잡았다가 취소시키고 왕십리 일대로 수도를 재선정
  25. 철퇴가 아니라 던지는 무기인 철구(鐵球 : 쇠공)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26.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태종의 외척 가문인 민씨 집안은 이거이 입장에서는 본인과 네명의 아들이 모두 폐서인된것이 다행일정도로 박살났다.
  27. 지연은 물론이려니와 학연은 거의 없다. 학연이라봐야 자기 부족 내에서 말은 이렇게 타라 하는식의 교육뿐이니...
  28. 물론 한파라도 찾아오면 확 줄어들기도 하고
  29. 특히 형제등의 가까운 친족
  30. 이들 유이민 집단중에서 이씨는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신들이 나왔을 것이다.
  31. 특히 제몫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수
  32. 그리고 역시 중요한 혈연동맹인 사위까지
  33. 뿐만 아니라 김무생은 1967년 TBC에서 방영한 이성계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극본은 신봉승, 이 드라마는 방영된 지가 오래 되어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김무생이 당시 어떤 배역을 연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방원을 연기 했을거라 추측된다. 그 드라마에서 이성계 역은 김성원이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