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평

李雄平(1954년 9월 28일[1] ~ 2002년 5월 4일)

1 개요

이웅평
1954년 ~ 2002년
복무대한민국 공군
기간1983년 ~ 2002년
임관특별임관
최종계급대령
최종보직공군대학 교관

이웅평 대령북한 평안남도 대동에서 출생하였다. 김책공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조선인민군 1비행사단 책임비행사였다. 상위 시절 전투기를 몰고 탈북했으며, 북한이탈주민이라 볼 수 있다. 탈북자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 케이스인데, 그 이유는 북한 공군 장교가 자기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드문 사례중 하나 이고(4건), 한국에 가져온 기종이 MiG-19기로 동기종 최초였으며 그가 탈북할 때 북한군의 기습공습인 줄 알고 전국에 공습경보가 발령 되었기 때문이다.[2]

2 귀순 원인

그는 어느날 북한 원산의 군관휴양소 근처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떠밀려 나타난 이상한 비닐 봉지를 줍게 됐다. 그것은 삼양라면 봉지였다. 당시 그는 라면이 무엇인지 몰랐고, 국수라고 생각(삼양라'면'이니까)하면서 포장지에 적힌 글을 읽어나갔는데 봉지에 적혀 있던 글귀는 이웅평 상위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판매나 유통과정에서 변질, 훼손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읽고 그는 "남조선은 이런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소비자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구나. 그렇다면 인민의 지상천국이라던 우리 공화국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결국 삼양라면이 북한을 엿먹인 셈 그때 만약 삼양라면을 대북전단살포로 했다면...

그 당시 자신은 인민들이 부러워하는 비행군관으로 근무하였지만, 퇴근하면서 며칠 전에 배급받은 석탄가루를 물과 찰흙에 섞어서 얼굴과 손에 검정을 묻히며 연탄을 손수 만들어내야 불을 피울 수 있는 신세였다. 그는 공산주의가 절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으며 자신이 수령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살 곳은 공화국이 아니며 인민을 진정으로 배려해주는 남조선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믿고 따른 수령이 자신을 배신했으니 자신이 수령을 배신해도 죄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비행기 라디오로 남한의 방송을 듣고 남한의 자유로움에 매료됐다고 한다. [3]

그리해서 그는 곧바로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4]

3 귀순 당시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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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25일 당시 한국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되었다. 이에 북한에서는 준전시상태에 해당하는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날 훈련을 위해 오전10시 30분쯤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MiG-19 편대 중 그의 전투기는 편대를 이탈하여 자유를 갈구하며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추격하는 북한기들을 따돌리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였다.

MiG-19기는 곧 해주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입했다. 이에 초계비행 중이던 한국의 F-5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이에 MiG-19기는 날개를 흔들어 귀순의사를 밝혔다. 이에 F-5가 미그기를 유도해 제10전투비행단(수원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공산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에 따라서 MiG-19기로 무려 15억 6천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5] 이는 현재가치로 대략 70억원 수준이다. 4월 14일에는 여의도광장에서 무려 130만명이 운집한 귀순환영대회도 열렸다.

이 사건으로 남북한 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달 뒤 한국 공군의 소령으로 특별임관된 그는 다음 해에 공군사관학교 교수의 딸과 결혼도 하는 등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하지만 2남 5녀중 맏아들이던 자신의 망명으로 인해 고통받을 가족 생각에 괴로워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북한 정부는 그의 부모와 누이들 등 가족들을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하였다. 부모와 아들은 완전통제구역, 누이들은 혁명화구역으로 보내졌으며, 부모는 끝내 처형되었다고 같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모 탈북자는 증언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도 대단히 두려워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한국 공군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1996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공군대학 정책연구위원 및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2002년 5월 4일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하였다. 북에 남은 가족들의 생각에 지속적으로 폭음을 한 것이 을 망가뜨린 원인이라고 한다. 그전에도 간이 상당히 안 좋아서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간 이식을 받고 종교에 귀의했었다. 하지만 이식받은 간의 거부반응으로 사망했다.

48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것을 감안하면 최초의 탈북자 출신 장성으로 진급할 가능성도 있었다. 2014년 현재는 1996년 귀순, 특별임관한 이철수 대위가 2010년 공군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므로 장성 진급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1964년생이기 때문에 계급정년까지도 다소 시간이 있는 편이다.

참고로 이철수 대령은 탈북자로서 아홉번째 대령 진급자이며, 첫번째는 50년 4월에 넘어온 이건순씨로 74년에 공군대령으로 예편했으며 두번째와 세번째는 1955년에 함께 탈북한 이운용 상위와 이인선 소위이다.네번째는 60년대에 귀순했던 정낙현 대령(귀순당시 소위), 다섯번째는 65년 탈북하여 대한민국 해군 정훈감을 지낸 이필은 대령(귀순당시 북한해군 대위,80년대 초반작고), 여섯번째는 1970년에 넘어온 박순국 공군대령(귀순 당시 소좌. 1976년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중령이었으나 사후 대령으로 추서되었다는 자료가 있음 ) 여덟번째는 육군의 신중철 대령(귀순 당시 상위)이다.[6]

4 기타

귀순 당시 놀란 민방위 관계자가 그 날 오전 10시 58분경에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라는 경보방송을 울렸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무장을 갖추는 소동이 있었다. # #

당시 F-5기의 조종사로 이웅평의 귀순을 유도했던 주인공인 박종헌(당시 소령)은 이후 제32대 공군참모총장(2010~2012년 재임)을 역임했다.

사실 공군 조종사라는 직책은 그 자체로도 직업의 난이도가 높고, 해당 국가의 항공 체계 등에 대하여 중요 정보를 많이 접할 뿐더러, 귀한 항공기를 조종해야 하기 때문에 나라를 막론하고 선별된 엘리트로서 대우 받는다. 그럼에도 북한은 몇 차례 사례가 있었고, 특히 북한과 남한의 거리상 여차하면 5분내로 남한으로 돌입이 가능했다. 때문에 북한은 공군 전투기 조종사에게 사상을 유달리 강조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결국 자유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라면 봉지가 전략병기[7]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위직의 귀순이기 때문에 음해성 뜬 소문이 많이 돌았다. 폭음 때문에 이혼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북에서 귀순한 이유가 상관의 부인을 NTR해서라는(…) 이야기. 사실 이혼은 전혀 무관한 이야기이고, 가끔 남한에서 얻은 아내와 자식들과 TV 출연도 했었다. 죽기 얼마전 나왔을때는 간 질환 치료 때문에 머리가 다 빠진 모습으로 나와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김만철 일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귀화를 고민하고 있을때 설득을 하기 위해 대만으로 간적이 있다고 한다. 5시간이나 설득을 했다고 하는데 5시간이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질린(...) 김만철의 처남이 죽을꺼면 가서 죽겠다라는 심정으로 한국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이웅평 씨가 타고온 MiG-19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북한: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Su-27은 가질줄 알았어요

이웅평이 타고 온 MIG-19 실물은 전쟁기념관 야외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1. 1983년 이웅평 대령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북한 탈출 수기에서 자신의 생일을 밝혔다.
  2. 비행기를 몰고 탈북한 최초는 한국전쟁 직후 노금석 씨가 MiG-15기를 몰고 귀순한 것이다. 1960년대에 역시 정낙현씨가 귀순, 나머지는 각각 이웅평씨와 이철수씨다.
  3. 이것 자체도 꽤나 위험한 일이었다. 어릴 때 도덕 시간에 북한에 대해 배울 때 북한에서 TV나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보면 어떻게 된다고 들었던가?
  4. 물론 실질적으로는 라면 봉지 하나에 목숨을 건 도박까지 했을 리는 없고, 북한에서 받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북한 정권에 대한 염세때문에 귀순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발전했다지만 북한 역시 경제가 완전히 박살난 정도까지는 아니였고 지금처럼 대한민국의 경제가 잘 알려진 상태가 아니여서 그 때에는 아직 북한이 대한민국보다 경제가 더 발전한 상태라고 믿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었다.
  5. 프로야구 초창기라 직접 비교는 무리지만,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고 에이스였던 박철순의 연봉이 3200만 원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천만 원. 은마아파트 78채이니 이걸 2010년대로 환산하면 780억 원.
  6. 하지만 신중철 대령은 전역 후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다 중국에서 잠적하는 사고를 쳐서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1] 참조
  7.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강명도 교수는 그의 귀순으로 조종사들의 처우가 더 좋아졌고 이에 조종사들이 이따금씩 하나가 남으로 넘어가는게 좋겠다고 몰래 수근댔다고 한다. 그래서 그후에 이철수 대위가 넘어온 건지도 가위 바위 보! 이번엔 동무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