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5대 정일권6대 이종찬7대 백선엽
역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7대 김정렬8대 이종찬9대 현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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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鐘贊
1916년 3월 10일 ~ 1983년 2월 10일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친 용기와 소신을 갖춘 참군인.
독재 정권의 외압을 끝까지 거부하였던 대한민국 국군의 모범답안.

1 소개

1916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태생.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최종 계급육군 중장. 제6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1]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여 '참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한일병합 당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던 친일파 이하영[2]의 손자로 태어났다.[3] 이 '공로', 즉 매국행위로 이하영은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잘 살았다. 이종찬도 이런 가정환경에 있었기에 유복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1932년 경성중학교 4학년 1학기때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하고 1933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해 1935년 3월 졸업했다. 일본 육군 보병 제3사단 아이치현(愛知縣) 도요하시(豊橋)의 공병대대에서 6개월간 대부(隊部)실습을 거친 후 같은 해 9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해 1937년 6월 제49기로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육군 공병 소위임관했다.[4] 임관하던 해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 일대로 파견되어 일선 공병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자작 이규원의 아들로서 치열한 전장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매일신보』1938년 9월 13일자에는 본인의 사진과 함께 그의 '진중시(陣中詩)'가 여러 편 실렸다. 그 가운데 한 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병들이 왕가진을 사수하니(敵兵死守王家陣)
육탄으로 돌격한 15용사여(肉彈直入十五勇士)
화염과 폭음이 천지를 뒤흔드니(火焰爆音動天地)
그 이름 천추에 전해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네(名傳千秋答皇恩)
- 왕가진의 15용사를 읊다(詠王宅十五勇士)

참전 중이던 1938년 중위로 진급했으며 약 3년간을 전선에 있다가 1940년 겨울 후방으로 복귀한 후 1941년 3월 대위로 진급했으며 훈 6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어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공(功)5급 욱(旭)등의 금치훈장을 받았다. 조선인 출신 일본인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강점기를 통틀어 이종찬을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자랑할 것이 아니다.....[5].

1942년 초 도쿄(東京) 육군포공학교(陸軍砲工學敎)에서 수학했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뉴기니에 파견되었다. 1942년 12월 독립공병 제4중대에 소속되었고, 1943년 7월부터는 일본 육군 제17군 남해지대 소속의 독립공병 제15연대에서 복무했다. 소속 부대가 동부 뉴기니에 파견되었는데 오웬 스텐리 산맥을 통과하여 남단의 포트 모르즈비(Port Moresby) 공격 등에 투입되었다. 1943년 10월 전황 악화로 뉴기니 서부로 퇴각한 이래 종전할 때까지 남태평양 일대를 전전했으며, 12월에 공병 소좌로 진급했다. 1944년부터는 독립공병 제15연대장 대리로 복무했고 종전을 맞는다.

그는 육사 생활에서도 자기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귀족 출신들이 가지 않았던 공병을 지원하여 동기들은 졸업식 때에 가서야 그가 귀족 출신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본군 시절 행적은 홍사익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으나 완전한 민족의식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그가 기본적으로 일본 육군 시절 적극적 친일에 해당하는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보고서에서 모두 동일한 내용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소위 이상의 군인'을 모두 친일파로 규정한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나, 친일시와 금치훈장 수상 문제에서는 일단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할 수 있겠다.[6]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곧은 인물로, 뉴기니에서는 예쁜 원주민 처녀를 데려와서 차 심부름(사실상 성적 노리개 역할)을 시키려 한 사령관[7]의 명령에 이렇게 답하였다고 한다.

상관의 명령은 천황 폐하의 명령으로 알고 따르라고 배웠지만, 천황 폐하라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리라 봅니다.[8]

이런 말로 거부했다가 최전방 요새 섬으로 전출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강직한 인물이었다고 한다.[9] 거기에 창씨개명도 끝까지 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 자작 작위도 습작하지 않는 등 어느 정도의 의식은 있었다. 다만 이종찬의 아버지가 사망한 시점이 1945년 4월(패망 4개월전)이라 전선에서 복무중이던 이종찬으로서는 일본의 패망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습작을 거부했다는 비판론자들의 의견도 있다).습작거부 이전에는 일본 귀족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 했다던지와 같은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을 비판론자들은 근거로 삼고 있다.).[10] 이것이 이후 그의 참군인 행보로 이어지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2.2 8.15 광복 이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현지에 억류되어 있다가 1946년 6월 귀국하였는데, 다른 일본 육군 출신 동료들이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에 속속 들어가 간부가 되었을 때에도 자신은 민족의 죄인이니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여 군 입대를 거부하다가 1949년 6월 입대하여 공병대령으로 임관한다. 이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지만, 그 개인이 악질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던 것은 없었고, 무엇보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습작을 하지 않았던 점 등이 인정되어 특별히 처벌은 받지 않았다.

2.3 6.25 전쟁

그는 6.25 전쟁 중에 제3보병사단을 역임하여 영천 사수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38선을 최초로 돌파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최대한 전쟁에서도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 그의 직속 상관이었던 김백일 군단장영덕군을 공격하고 있던 그의 부대가 읍내 시가지에 틀어박힌 북한군의 저항에 의해 고전하고 있자 '읍내에 직접 포격도 하고, 불도 지르고 해서 빨리 진입하라'고 명령했을 때 '그런 마적단 토벌 방식을 같은 동포가 사는 곳에 어떻게 쓸 수 있느냐'고 항명하기도 했을 정도.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9월에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북한 영내로 북진하고 나서도 북한 내 공산당원이나 인민군에 앞장서 협력했던 자들에 대해 휘하 지휘관이 즉결처분을 하려고 하자 '아무리 그래도 비전투원을 그렇게 재판도 없이 처형할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저들이 인민재판으로 우리 양민들을 마구 죽인 것을 어떻게 비판하겠는가? 즉시 경찰에 넘겨 법에 따라 처벌받게 하라' 고 명하여 학살을 막기도 했다. 그 밖에도 북한군 포로를 끌고 다니기 힘든 휘하 지휘관들이 그들을 모두 죽여버리려고 하자 역시 이를 막아 포로에 관한 국제법 규정대로 수용소로 후송하도록 명령하기도 했을 정도로 원칙을 철저히 지킨 인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건진 북한군 중좌 하나는 '아니, 남조선에도 너 같은 장군이 있느냐?'며 감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이종찬은 병기행정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최전선을 떠나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복무하게 되며,[11] 그 후 육군종합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51년 6월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물러난 정일권의 뒤를 이어 제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되었고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흠좀무한 건 이 당시 그보다 계급이 높은 장군들도 존재했었다는 것. 그 정도로 그의 인망과 능력에 대한 신임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결혼을 하게 되는데, 상대 여자의 집안이 형편없다는 것을 문제삼는 모친께 효자였던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습작을 거부한 친일파였던 이 집안이 과연 그렇게 잘났던가라는 식으로 항변하자, 모친이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참고 링크

2.4 독재정권에 반대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참군인' 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바로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부산 정치파동' 당시 그의 행적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여 대통령으로 재선되기 위한 시도를 하였는데, 이때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때 이종찬은 이른바 '육군 훈령 제217호'를 내린다.[12]
그 내용을 간단하게 줄이면 '군은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 는 것.
즉 이승만의 계엄령 자체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때 국방장관육군본부측에 내렸던 파병 명령도 거부했다.
당연히 이승만은 대노했고, 심지어 당시 유재흥 육군참모차장에게 '이종찬을 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려다가 유재흥의 설득으로 그 명령을 철회했다고 한다. 4.3 사건때도 그렇고, 유재흥은 전투 이외의 행적은 모범적이다 이후 이종찬은 이 때문에 이승만의 미움을 샀고 결국 참모총장직에서 13개월만에 해임되었다.[13]

이후 그는 미육군지휘참모대학으로 1년간 유학을 다녀온 뒤 1953년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때 김재규와 많은 인연을 맺게 된다. 김재규와는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지만 이 때 김재규가 상관 송요찬과의 대립으로 전역을 생각하고 있을 때 이종찬이 감싸주어 육군대학 휘하에 편제 외 TO까지 만들어가며 그를 데리고 온 것. 또 김재규의 준장 진급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중에 10.26 사건이 터지자 이종찬은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는 조봉암의 감형을 이기붕에게 탄원하는 등 이승만의 독재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박정희 등 소장 장교 세력에게 일종의 얼굴마담격으로 쿠데타의 지도자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많았으나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에 장병들의 부재자 투표에서 여당 표를 찍도록 독려하라는 지시가 고급 장교들에게 내려오자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사실 이종찬은 개인적으로는 이기붕과 꽤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국민방위군 사건당시 국방부 장관이 되는 이기붕, 국회쪽 관계자로 조봉암과 신임 육군 참모 총장 신분이 되었던 위치에서 만난 인연도 있다. 위에서 소개된 이종찬의 결혼도 이기붕이 이종찬의 모친을 찾아가 일국의 육군참모총장이 총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체면상 걸맞지 않다고 설득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명령에 정면으로 항명하고도 비록 한직으로나마 군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개인적 능력 외에도 이기붕과의 친분 관계가 그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종찬은 공과 사의 구별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당시 육군대학 교관의 회상에 의하면 이강석이 1960년 3.15 선거 며칠 전 이종찬을 찾아왔을 때 '부정선거를 하게 되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지금 부정선거 지령이 내려와 있는데, 물론 나는 이박사네 아버지를 찍겠지만, 육군대학 장병들은 절대 자유 의사에 따라 투표를 하도록 하겠다. 이 따위 부정선거 지령을 누가 내렸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내가 육군대학 장병들과 같은 후보를 찍지 않더라도 만일 그들이 그 투표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그들의 투표권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1960년 최종 계급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같은 해의 4.19 혁명 발생 후에는 국방부장관이 되어 친이승만 정치군인들을 군에서 몰아내는 일에 주력했다. 이때 그는 3군 참모총장해병대 사령관을 불러 1960년의 제헌절날 헌법 준수 선서식을 거행하게 하는 등 군의 정치적 중립을 철저히 강조한다. 그러나 곧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였고, 그는 1961년부터 6년간 주 이탈리아 대사를 맡게 된다.[14]

그는 쿠데타 자체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5.16 자체는 불가피한 현실[15]로 받아들이고 처음에는 박정희 정권에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으나,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하고 10월 유신을 통해 장기 집권으로 향하자 그런 움직임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76년 유신정우회[16] 의원이 되어 제9, 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는 실은 강압에 의한 것으로 일종의 얼굴마담 격으로 군의 원로이자 참군인으로 이름높던 그를 유정회에 끌여들여 유정회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것에 이용당한 것이었다.[17]

하지만 그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기에 유정회 의원직에 있는 걸 가시방석처럼 여겼고, 실제로 국회에서는 딱 한번 발언하고는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국회의원 뱃지도 주요 공식 회의가 있을 때만 달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그러나 1979년 10월 4일 있었던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당시엔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유정회 소속으로서 조직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결의가 있기 이전 국회 석상 발언에서 유정회 의장에게 '김영삼 총재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이를 함부로 국회에서 정치적 의도로 제명해서는 안 된다.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게 되면 각하(박정희)가 불행해질 것이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후엔 재야에 있다가 1983년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비록 일본군 입대 경력 등 친일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일생 부끄러워했으며 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소신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참군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이승만 정권 당시 이기붕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발췌개헌 당시 계엄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조봉암 사형 당시 재고를 요청하거나 했다는 점이 크게 평가받는다.[18]

물론 박정희 군사정권 등에 대 놓고 정면으로 항거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군 선후배로 얽혀 있었던 그의 입장상 개인적으로 정면에서 항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박정희 정권의 잘못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이다. 4.19 혁명에 참여한 세대들이 일부 박정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금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위의 군 정치적 중립을 보인 사건과 더불어, 한반도 미래를 걱정한 선각자로 호칭되어도 마땅하다. 또 개인적으로 청렴하고 도덕적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가 사망했을 때 저금통장에 고작 26만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예가 바로 이종찬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려 있다는 점이다. 친일을 했다고 해서 단순 논리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으로 학술적 색채가 강한 것이지 무슨 정치적 잣대라든가 '살생부'와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사람들 가운데서 이종찬 장군같이 양심적인 분들도 수록된 사람들도 상당하다(예를 들면 장면 총리, 송창근 목사,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반성해왔던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 현석호 전 국방부장관 등).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은 어느 한 인물에 대해 정리할때도 출신부터 일제강점기 활동, 광복 이후 활동 등 아주 자세하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정치적으로 이용할려는 세력들이 이런 '객관적 사실'을 쏙 빼버리고 정치적 제기만 하고 있으니, 그 본질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는것이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종찬은 평생 그가 친일을 했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비판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를 평생 속죄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임 당시 광복군 출신을 가능한 한 기용하려고 애썼는데,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하면서 초대 교장으로 독립군 출신의 안춘생[19] 당시 준장[20]을 기용하면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군들도 능력상 뛰어난 인물은 많지만, 적어도 육사만큼은 광복군 출신 장군이 초대 교장을 맡아야 육사의 정통성이 수립될 수 있다'고 했다.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한 것 자체는 옳을지 몰라도, 이러한 그의 생애 또한 알려서 그의 공과 과를 똑바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이 분의 사례를 가지고 절대 다수의 친일 행위까지 옹호해서는 안된다는 점. 이는 이종찬에게도 엄청난 실례가 되는 행위이다.

《참 군인 이종찬 장군》이라는 그의 평전이 1986년 출간된 적이 있는데, 이 책에 그의 행적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직 전두환 군사정권이었던 시절에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만 봐도 이종찬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다.[21]

4 이종찬을 연기한 배우

제2공화국(MBC) : 박근형[22]
제3공화국(MBC) : 권성덕[23]

코리아게이트(SBS) : 이낙훈
  1. 창군 초기엔 계급 체계나 군 체계 자체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소장, 중장이 참모총장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일례로 창군 초기엔 대령 사단장도 있었다. 백선엽 장군이 한국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었다는것을 상기할것.
  2. 대한제국 시기 외부 관료로 1910년 경술국적 가운데 하나인 매국노.
  3. 호러스 뉴턴 알렌과 만난 인연으로 통역 관련 때문에 벼슬자리 간 점이 윤치호에게는 우습게 보였는지, 그가 사망했을 떄 로또 당첨된 듯한 투로 서술하는 것이 윤치호 일기에도 나온다.
  4. 졸업식 때 이종찬이 귀족이 있는 자리에 가는 바람에 일본인 동기들이 그가 조선인 귀족 집안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일본이 2차대전 웨이크 섬 전투를 통해서야 불도저를 알게 된다는 점과 더불어 제대로 된 건설분야에 대한 이해인식이 미국에 비해서도 확연히 부족한 점을 지적될 수 있다.
  5. 다른 한 명은 김석원.
  6. 이 부분은 이종찬 장군 스스로도 변명을 하려 들지 않았다.
  7. 참고문헌의 원문에는 深堀 소장으로 되어 있고, 1943년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으므로 정황상 육군소장 후카보리 유우키(深堀游亀) 장군으로 추정된다.
  8. 『참군인 이종찬 장군』, 동아일보사, 1986, 강성재, P.116
  9. 근데 이게 정상이다. 그만큼 일본군이 엉망으로 돌아갔다는 증거. 하지만 그 천황 폐하께서는 사이판 전투 막바지에 일본인들에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린게 함정
  10. 이 부분은 다른 '조선귀족'(매국노들)들의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대개 조선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은 자들의 자손들이나 후손들은 귀족 작위를 물려받으면서 평생 떵떵거리고 살아왔었고, 오늘날에도 '선조의 땅이나 재산을 찾겠다!'면서 소송을 거는 등 병크짓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이종찬 장군의 경우 이를 수치로 여겼을 정도이니, 이는 진정 대인배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행보이다. 이종찬의 아버지인 이규원이 사망한 것이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있던 1945년 4월이었는데, 아버지의 부고와 습작하라는 통지서를 받은 이종찬은 가족들에게 습작하지 말라고 연락해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족들 입장에서는 대놓고 총독부에 '습작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뭔가 뒤끝이 안 좋을 것 같고, 그렇다고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습작을 하는것도 그렇고 해서 그냥 총독부에는 아무 회답도 하지 않은 채 넉 달을 버텼다고 한다. 전쟁이 점차 막바지로 접어들자 총독부에서도 습작 문제 따위로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별다른 독촉 요구는 없었고, 결국 습작하지 않은 채로 광복을 맞이했다는 것. 만약 이때 습작했다면 이종찬은 육군의 요직에는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습작을 한 정도의 거물 친일파는 친일파고 뭐고 등용했던 이승만 측에서도 100% 쉴드를 쳐주기엔 무리였기 때문에….
  11. 박훈산 시인의 회고에는 이때 피난 와있던 문인들이 모여서 건군기념예술제전의 명목으로 김영수 원작의 '고향 사람들'을 상연하고, 이종찬이 공연에 배우로 참가했던 문인들에게 뒤풀이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참석한 문인 대부분이 육군종군작가에 공군종군문인단 소속으로, 술자리에서 "우리 군의 혁혁한 무공으로 말미암아 전국은 안정되어간다"는 뜻의 발언이 나왔는데, 듣고 있던 조지훈 시인이 "오로지 그 공은 이름도 없는 산야에서 헤아릴 수 없이 이슬로 사라져 간 무등병(無等兵)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자 장내가 그만 찬물 끼얹은 듯이 잠잠해져버렸다. 이에 이종찬은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기 어깨에 붙은 별 세 개 계급장을 떼어버리고는 "자, 이제 됐지요? 나도 이걸로 무등병입니다."라고 웃으며 대답했다고.(출처: 박훈산, <대구 피난시절의 문우들, 그 기이한 생활들>
  12. 여담이지만 이 훈령 내용을 기초했던 게 박정희이다. 자기가 써놓고서는 자기가 갈아엎는 언행불일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의 하나.
  13. 일군육사 파벌 최고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던 이종찬이 총살된다면 그 날로 일본육사 파벌은 군 권력다툼에서 밀려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 유재흥 역시 일본육사 출신이었다.
  14. 여담이지만 이종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당시 스페인 유학생 아가씨와 연애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15. 사실 5.16 쿠데타 직전의 사회상은 워낙 혼란스러워서, 초기만 해도 쿠데타 차제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물론 군인들이 내세운 공약인 '즉시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겠다'란 말을 믿고 말이다. 이런 의견을 보인 사람 중에는 장준하 선생도 있었다!
  16. 정식명칭 유신정우회. 대통령이 지목하는 방식이다 보니, 이종찬이 유정회 의원이 된것은 자의적이 아닌 타의적이었다고 보는게 옳을것이다.
  17. 이종찬은 이때 한 번 정도는 박정희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해서 감수하려고 했는데, 10대 유정회 의원 명단에 또 자기가 포함되어 있는 걸 알자 친분이 있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하여 '왜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또 넣었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뜻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18. 지금은 블로그가 폐쇄된 이준님은 그가 세운 공로가 군이 정치를 통치하는 것을 10년 이상 막았다는 것이라고 이종찬 관련 포스팅에서 서술하였다.
  19.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이다. 근데, 똥군기 대표 인물... 병영부조리참고.
  20. 육군사관학교의 역대 학교장 명단에는 그가 제9대 교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946년 5월 1일 개교한 조선경비사관학교부터 육군사관학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기 때문. 정규 4년제 사관학교로 개교된 것은 1951년 10월의 일로, 이때의 첫 교장이 안춘생이다.
  21. 한편으로는 전두환이 육사의 정규 4년제를 받은 첫 세대라는 자부심을 자주 내세웠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러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평전 출판을 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전두환이 체포되어, 서울로 올라가던 도중, 독립기념관을 자기가 세웠다며, 형사들에게 이야기하는 증언도 있었으니, 아무래도 권력욕을 감추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런 것들을 사용한 흔적들도 그 외에도 많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전두환 정권 자체가 아닌 전임 군사정권인 박정희 정권, 특히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허용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속내야 둘째치고 어쨌거나 전두환 본인이 7년 임기만 채우면 확실히 물러나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내세우려면 그 이전 정권의 일부분을 비판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22. 제3공화국(MBC)에서는 박종규 역을, 제4공화국(MBC)에서는 김재규 역을 맡았다.
  23. 이승만 전문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