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국지)

李進

1 후한 말 조조 수하의 인물

생몰년도 미상

승씨현 사람으로 가을 9월에 조조가 견성으로 돌아갔는데, 여포가 승씨현으로 오자 여포의 군사를 격파했고 이로 인해 여포가 동쪽으로 가서 산양에 주둔했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 부분을 서술한 부분 중에 관본 고증에 따르면 송본에서는 계진(季進)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고 하며, 노필은 이전전에서 언급된 것을 통해 송본에 서술된 이름에 대해 부정했다.

이전의 숙부인 이건이 빈객 수천 가를 모아 승씨에 머물렀는데, 여포가 군사를 일으키자 조조가 이건을 승씨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이전의 종족과 부곡 3천여 가는 승씨에 거주했다가 부곡, 종족 만 3천여 구를 옮겨 업에 거주하게 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李)라는 성씨는 승씨의 대성이라 했다.

노필이 본 송본, 원본 등에는 성이 이(李)씨로 기록되어 있기에 관본에서는 무엇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으며, 송본의 오자는 따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정사에서는 짧게 언급되는 인물이지만, 여포를 격파했다는 사실이 어느정도 이펙트가 있어서인지, 가끔씩은 2차 창작물에서 은둔고수 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다.

2 후한 말 교주자사

생몰년도 미상

교주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교주로 부임해 자사가 된 자들은 그 지역의 명주, 취우, 서상, 대모 등 기이하고 향기로우면서 아름다운 재물이 있던 탓에 대부분 깨끗한 행실이 없었으며, 재물이 가득 찼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옮겨갈 자리만 구하는 까닭에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반감을 품어 오랫동안 교주가 혼란했다.

이진은 이주한 한인이었지만 교주 출신 중에서 최초로 자사가 되었으며, 200년 5월에 조정에 오른 선비들은 모두 중원의 선비이니, 먼 지역의 사람들도 중용해달라는 글을 전했는데, 글의 뜻이 감응함이 있었고 정성스러워 끌어당기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헌제가 이를 허락했고 이진은 효렴을 천거하는 것은 12주의 박사들과 함께 인재들을 뽑게 해달라고 하자 유사에서 먼 지역의 사람들이 배반할 것을 우려했는데, 이금 등 교주 사람들이 이에 대해 청하자 교주 사람들도 한나라 조정에 등용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