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 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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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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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8월 대한민국의 대학생 임수경방북한 사건. 당시 남북한 사회 모두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의 남북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2 임수경, 그녀는 누구인가?

1968년 11월 6일 생으로 80년대 말의 남북화해 분위기를 타고 방북한 인사들 중 한 명. 그리고 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2012년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한동안 더불어민주당에 소속되었다가 2016년 현재는 무소속.

서울특별시에서 11월 6일에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서울대 출신의 기자로, 집에 컴퓨터가 있었을 정도니 당시 기준으로 본다면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1986년 입학하기까지 운동권과 접점을 찾을 길은 없었다. 대학생 때도 운동권과는 관련이 없었고 미스코리아에 나가기 위해서 사진을 찍기도 하거나 KBS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서 김형곤과 짧은 콩트를 하였다. 이런 활동을 보면 부잣집 딸내미였고, 잘 나가는 아가씨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였고 대학생치고 사회운동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없다고 할 때였기 때문에 점점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래도 이때까지 활동은 풍물반, 학생자치회, 공정선거감시단 같은 내부적인 민주화 운동이었고 통일이나 민족운동 쪽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시대 사항을 보면 완전히 분리가 안되지만 가정형편을 봐도 그렇고 자진해서 입북할 기미는 없었다. 그런 것이 총학생회에서 일하면서 바뀌었다.

3 입북 배경 및 과정

북한은 1989년 7월 1일로 예정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 -> 조선(북한)적십자사 -> 대한적십자사 ->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 전대협의 경로로 전달되고 전대협은 축전 참가를 준비한다.[1] 총학생회에서 일하던 임수경은 당연히 '용인/성남 지역 총학생회연합 축전준비위원회'와 연결되어 일하게 되었다.

북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기에도 어려운 일이 노태우 정권 시절에 가능했던건 당시 전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남북 간에도 화해 분위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산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없는 남북대화를 주장한 7.7 선언으로 고조되었다. 더구나 한정적이지만 민주화의 성공과 맞물린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2] 즉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자체는 당시의 정부 방침에 어긋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별 제재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가 몰래 입북해서 김일성과 포옹하고 성경을 건네주기까지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다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고, 1989년 6월 6일에는 문교부 장관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불허한다. 하지만 이미 실무적인 차원의 준비는 끝나 있었고 무엇보다 정부에서 안된다고 해서 안할 전대협이 아니었다. 전대협은 밀입북을 하기로 결정한다.

4 입북 과정

대한민국에서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휴전선과 북방한계선을 제외하면 서울-베이징(북경)-평양을 거치며 가는 길이었다. 한중 수교 이전에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문익환 목사가 이 루트로 방북하는 바람에 이용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임수경은 일본-서독-동독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했다. 6월 21일 임수경은 도쿄로 출발해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른 뒤, 서베를린으로 갔다. 이후 동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간 다음에 평양으로 출발, 9일 만인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5 입북 후

5.1 북한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사실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당시 온갖 밀입북 사건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헐 이제는 꼬꼬마 대학생도 북한에 들어가네', '젖 비린내나는 기집애도 막 나대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 반면, 북한에서는 선전 측면에서 거의 핵폭탄이 터졌다. 실제로 후폭풍까지 있었다는 점에서 진짜 핵폭탄이었다. 현실에 구현된 문명 위인 문화 폭탄

당시에 온갖 남한 인사의 방문으로 정신없으면서도 즐거워하던 북한 입장에서도 임수경의 방북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격이었다. 당시에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남자들로 남한에서도 제법 명망을 지녀서 함부로 하기 어려운 이들이 많았지만, 임수경은 중산층 자제에 아직 앳된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거기다 임수경의 모습은 노동운동이나 민족운동에 투신한 투사의 모습이 아닌 발랄한 남한 대학생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당장에 북한의 관심은 임수경에게 집중된다. 오죽하면 북한 언론이 김일성보다 더 많이 취재하려고 했던 유일한 인물이란 평가까지 있었을까. 살벌한 사회통제가 당연시 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동원하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모조리 마비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인만큼 북한에서는 선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상투적인 선전 방문을 준비한다. 그런데 임수경은 북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수경의 돌출행동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처음에 와서 한 말이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였고 사람들만 모이면 원고없이 즉석 연설을 하는 등 통제가 안되었으니 선전 담당자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급인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컴퓨터를 보고는 "어,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네?"(…) 같은 걸로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주었다. 북한이 불쌍해 보인다. 특히 앞서 말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 역시 결코 빈말이 아니라, 세습정치까지 물고 늘어져서 주변의 안내원들을 경악시켰다. 사실 북한의 세습체제에 대해서는 소련을 비롯한 다른 공산권 국가에서도 엄청나게 씹어대는 단골 소재였다. 독재라는 측면에선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다른 공산 국가들은 집권세력 내부적으로나마 경쟁을 거쳐서 정권을 장악하는데 북한은 그냥 부자 지간에 권력을 물려주는 체제였으니...

특히 북측이 미리 준비해둔 조선은 하나다라는 선전문구를 끝끝내 거부하고 조국은 하나다로 고치게 만들었다. '조선'이란 공식 국호를 쓰고 있는 북의 입장에서 '조선은 하나다'는 한마디로 우리가 정통이고 남한은 사이비 짝퉁정권이란 주장이다. 임수경은 이걸 거부하고 민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잇는 '조국'을 사용한 것이다. 출발 직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도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훗날 2012년에 탈북자를 향한 취중 망언 역시 자신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임을 강조했다. 정확히는 근본없는 탈북자 주제에 어디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에게 개겨?

거가에 북의 학생들이 선물해준 스카프도 버리고, 집단체조 관람중에 퇴장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문도 '다른 행사도 있는데 거긴 왜 가요?'라고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뜻을 보인걸 북측 실무자들이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방문했다고 한다. KBS인물현대사에 출연해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임수경은 북쪽 실무자들한테 만경대가 세계청년학생축전의 행사중에 하나냐? 거기 가는게 그렇다면 내가 가겠다. 나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러 온 사람이지, 만경대에 가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을 방문한 고위인사들은 만경대를 방문하는 게 공식행사라는 북쪽의 설명을 듣고 결국 만경대를 방문했고, 이는 귀환 이후 지금까지 극우세력들이 임수경을 공격하는 단골소재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적이거나 도발적인 발언보다는 젊은 여대생의 존재 자체에 북한 사람들은 엄청나게 열광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임수경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임수경은 인기 정상의 아이돌이었다고 했다. 당시 임수경은 전형적인 새내기 운동권 여대생의 복장(하얀 티셔츠에 긴 청바지, Gee복장 맞네 운동화)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미지부터가 북한에서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던 것. 당시 남한 여대생 임수경의 당돌한 모습과 산뜻한 패션은 북한에 충격을 안겼지만, 반대로 "남남북녀라더니 맞는 말이긴 하네..."라는 수근거림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대학생의 이미지라고 하면 그저 시커먼 옷을 입고 당의 규율이나 주체사상만 외워야만 했던, 수동적이고 암울한 이미지였는데 작고 당돌한 여성캐주얼한 복장으로 통일 통일을 외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북한 대학생들은 몰래 모여서 "남조선의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라고 한탄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었다고.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려고 난리치고 환호하고,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종종 노래해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전대협진군가> 같은걸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이 두 노래는 북한에서 유행한다. 오죽했으며 이런 예상하지 못한 임수경의 선전전(?) 덕분에 의도치 않게 이득을 본 남한 정부에서 뜻하지 않게 공을 세웠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할까.

다만 다분히 자유의 열사라고 하기에는 오류가 있는데 이 부분은 하단에 비판 부분 참고.

5.2 남한

방북 자체야 임수경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했지만, 문익환 목사 같은 명망있는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대학생 운동권의 핵심인사도 아닌 평범한 여대생의 입북은 남쪽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TV 대담토론에서도 거론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치기어린 여자애의 행동으로 취급되었고,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해 남한이 뜻하지 않게 선전 효과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라도 썩 나쁘게 평가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이 발표된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임수경이 직접 기초했다는 이 선언문은 당시 화해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협정 체결, 남북 불가침 선언처럼 상식적이며 누구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중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꼭 북한의 주장을 따라서만은 아니었고, 당시 전대협 역시 주한미군이 자주통일의 방애물이라는 이유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수경은 단계적이란 용어를 빼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긴 했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는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3]. 탈냉전 분위기가 강해지는 중이었다곤 해도, 당시 남한에서 주한미군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나라를 구해준 군대'였다. 거기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강하게 부르짖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도 거는 일이었다.

덕분에 남측에서 임수경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1984년 군 복무시에 총기사고로 이미 죽은 오빠는 염세주의로 자살했다고 했고[4], 10촌 이내 친척 가운데 월북자가 8명이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를 근거없는 기사가 나왔다. 임수경의 어머니는 막내딸인 임수경을 학생운동에서 떼어놓기 위해서 억지로 신청해서 1988 서울 올림픽 우정의 사절로 뽑혔다.

6 귀환과 그 이후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한다. 이것도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는데 단식투쟁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귀환 이후에는 안기부로 가서 조사를 받은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3년 5개월간 복역 후 1992년 2월 가석방되었다.

7 후폭풍

7.1 북한

위에서도 설명했듯 당시 북한 사회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임수경이란 인물 자체가 당시의 북한의 젊은층에게 굉장한 충격이었기 때문. 바로 이 때문에 북한에서 임수경은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다. 방북 후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원래는 금지된 미국의 상징인, 임수경과 같은 면티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 일명 림수경 복장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전대협 진군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북한 전역에서 유행했다.

또한 북한은 중산층 자제인 임수경을 통해서 남한이 어떤 사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었다. 즉 임수경의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제적 여유를 통해 남한의 경제적 수준과 남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 덕분에 북한에서 사상투쟁(사실상의 사상통제)을 하느라고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임수경의 가족들도 뜻하지 않게 북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 회담이 열렸을 때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걸 믿지 못한 북한 기자방문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통일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는지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에서였다. 헌데 임수경의 집에 들이닥쳐보니 임수경의 가족들은 정말로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임수경 가족의 생활상까지 북한 TV로 방영(사실상 생중계)되었다.

남한기준에서 보면 임수경 가족들의 처지는 그렇게 편하지 않았다. 임수경의 언니는 직장에서 짤렸고, 서울지하철공사 간부였던 임수경의 부친은 직장에서 사직 종용과 해고 협박이 난무했고 밤낮으로 협박전화가 걸려들어온 나머지 결국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정권과 타협했다가, 결국 시간이 흐른뒤에 자의반 타의반 그만둔다.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 모두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누군가가 밀입남했다가 돌아올 경우 본인은 사형, 가족과 일가친척들은 수용소로 들어가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판이었으니 임수경의 가족들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런 범죄자의 집안에 그 귀한 컬러 TV, 소파, 냉장고 등 온갖 가전제품이 있고(임수경은 당시 남한 기준으로도 잘사는 집안임을 감안하자)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 등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갔다고 한다[5]. 체제경쟁에서 졌다는 걸 TV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며 망했어요.

이건 임수경의 재판에서도 이어졌다. 북한은 로동신문을 통해 임수경이 15년 구형에 5년 징역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한국 정부를 비판했지만, 제대로 된 재판을 열고 사형이 아니라 15년형을 구형받고, 겨우 5년형만 받았다는 사실이 북한에서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3년 반만에 출소했다는 사실까지 북한 언론에 보도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반역자를 가석방하는 남한 정권이라니...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휴전선을 넘어 돌아갈 때 죽으려고 돌아가는 줄 알고 슬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다 감옥에서 편지일기를 쓰고 책도 읽는다는 등 하나하나가 충격이었다.

7.2 남한

물론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남한에선 임수경 방북 사건을 북한에 비해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였다. 북한에서 임수경이 했다는 남한 정부 비판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당시 남한의 넉넉한 경제력과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상 그리고 자유로움을 선전하는 뜻하지 않는 기회를 가지는 등 이익이 더 컸기 때문에 이적행위보다는 북한에 변화의 바람을 약간이라도 불고 온 통일의 기수라는 면이 더 강조되었다.

그렇다해도 당시 노태우 정부가 임수경에게 압박을 가한 건 사실이고, 보수 측에서 엄청 욕하긴 했다. 결정적으로 임수경 방북 이후에 8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쉴새없이 온갖 사건이 몰아쳤기 때문에 재판 이후에는 금세 잊혀졌다.(...) 그러다가 2012년 임수경의 '탈북자=변절자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잠깐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8 비판

강철환씨는 자신의 저서 <수용소의 노래>에 당시 임수경을 본 충격을 그대로 적고 있다. 강철환은 임수경의 방북으로 남한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라디오를 몰래 청취하다 탈북했다고 밝히고 있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근무하다 탈북한 완전통제구역의 저자 안명철씨는 경비대로 근무하던 시절 임수경의 자유분방함에 놀랐고 이후 임수경이 그 끔찍한 국가보안법에 걸려 죽을 것이 분명한데도[6]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북한 체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임수경씨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술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임수경 방북 사건 자체는 그로 인한 부정적인 문제보다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고 봐야함에는 이견이 별로 없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긍정적인 효과였느냐하는 것과 그 행위 자체가 옳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임수경씨가 세운 공을 생각해 보면 투옥하지 않았어야 맞다든가 아예 이런 효과를 노리고 자유롭게 방북을 허용해야 한다거나 하는 의견들이 눈에 띄는데, 이런 것은 긍정적인 효과를 냈으면 행위도 정당화된다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효과는 긍정적이더라도 행위 자체는 비판받을 수 있다. 일단 임수경의 방북 자체는 북한의 내부적 붕괴와 대한민국 실체에 대한 대중의 파악을 노리고 간 것이 아니었다. 되려 임수경씨가 정말로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방북을 한 것이라면 탈북자 증가와 북한 내부 붕괴 효과는 그녀가 원하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긍정적 효과와는 별개로 방북 행위나 의도 자체는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다.

당시 PD측도 임수경의 방북을 비난했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임수경의 방북 투쟁 문제를 두고 PD와 NL 간에 논쟁이 일었는데, 당시 PD 계열은 임수경의 방북을 반대하면서 "반파쇼 투쟁에 깃발을 내린 민중에 대한 반역행위이며, 어떠한 수단으로도 평축에 참가하고자 하는 무원칙적 투쟁이자 개량주의적 통일운동이며, 적이 파 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 어리석은 투쟁."이라고 개탄했고, 1989년 7월 5일에 서울대학교 교내에 게재된 대자보에서도 "임 양의 평양 행적은 평축참가만을 목적으로 하는 '만남 이상주의'에 경도되어 현 정권(노태우 정권)이 휘몰아치는 매카시즘을 자초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결국 민주노동운동, 반민주악법 개폐투쟁 등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민중 역량을 한꺼번에 꺾어버리는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라고 비판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임수경이 평축 참가로 분단의 벽을 넘어섰다는 전대협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임수경의 언동은 북한 편향주의에 매몰되어 한국에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강화시켜 5공 청산, 광주학살 문제 해결, 악법개폐 운동을 통한 노태우 정권 퇴진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80년대편(4권)>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결정적으로 만일 그녀가 북한체제의 붕괴나 민주화를 목적으로 방문했다면 탈북자를 배신자로 지칭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발언 때문에 한 때 탈북자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임수경의 이미지는 그녀가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퇴색될 수 밖에 없었다.

탈북대학생에게 "근본도 없는 탈북자XX들이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어. 이 변절자XX들아."라고 막말하여 논란이 되었는데#임수경 "탈북자 XX들" 욕설...논란 일파만파 탈북자단체는 분노하며 '의원직 사퇴 요구' 움직임을 보였다.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해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등 심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탈북 대학생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게 아닌 심한 막말로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은 쉴드쳐줄 건덕지가 없다. 게다가 명색이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 말이다. 특히 민주당은 입만 열면 사회적 약자 외치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면서 100년전 일제에 의해 탄압받은 조선인 인권에 대해 울부짖으면서, 정작 바로 눈앞에서 탄압받고 있는 조선인 인권엔 침묵하고 되려 변절자라고 욕하며 짓밟는 행태엔 뭐라 할말이 없을 지경이다.

애초에 임수경이 북한 인민들을 탈북시키기 위해 갔던 것도 아니고, 임수경이 가서 한 것이라곤 '미국과 노태우 일당은 통일이란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미친듯이 발광을 합니다.'라거나 '외세에 억압받고 있는 조국'이라며 미국놈을 몰아내자라는 둥, 철저히 북한의 선전선동에 이용당하고 왔을 뿐이다. 임수경이 지옥같은 북한을 탈출하라거나 자유를 쟁취하라거나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북한 가서 남한과 미국 디스했을 뿐인데 그걸 본 일부 주민들이 임수경의 옷차림이나, 임수경이 남한에서 안죽었다란 사실에 눈치 깐 것은 그들 스스로의 눈썰미가 대단한 것일 뿐이지 임수경이 의도한건 아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어떤 사건을 조작해서 발표했는데 너무 티나게 조작해서 정부의 음모를 간파한 사람들이 일부 있다면 그 사람들의 눈썰미가 대단한 것이지 사건 조작한 행위 자체가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발표한 조작된 사건을 그대로 믿는 국민들도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조선 대학생' 임수경이 남한과 미국깐 것을 보고 '역시 남조선과 미제는 나빠'라고 생각하는 북한주민들도 많을 것이다. 만약 북한과 중국 깠어도 북한 주민들이 열광했을지 생각해보자.분단의 원흉 중국 몰아내자!!! 한중FTA반대 촛불집회 하는 소리 하지마

전술했듯 당시 임수경의 북한 내부 행보가 북한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자유의 열사라고만 볼 순 없으며 임수경의 행보가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임수경의 방북시 발언 전문을 그대로 받아적으면 다음과 같다. 다만 반미감정은 저 당시에는 급진적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지기도 했다. 시대상을 감안하면서 보자.


  • 공항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임수경입니다.

전대협은 평양축전에 참가할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조국 통일 투쟁 만세! 감사합니다.

남한에서는 통일은 곧 좌경이고 용공입니다.

미국과 노태우 일당은 통일이란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미친듯이 발광을 합니다.
지금 제가 평양에 도착한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아마도 지금 굉장히 고민하면서 제가 돌아올 때 '어떻게 하면 전대협이란 조직을 와해시킬까' 라고 생각을 할겁니다.

  • 조선학생위원장 공동선언문 발표(1989년 7월 7일 평양에서)
여러분들께 전투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
남과 북의 우리 청년학생들은 '조국은 하나다'라는 외침으로 이 선언을 시작한다.
우리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한다.
우리 모두 서로 어깨걸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진군하자!

  • 국제평화대행진 연설(1989년 7월 25일 백두산~판문점)
미국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이땅에서 45년간 우리 민족에게 범행을 저질러온 미국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미국놈을 몰아내자!절대 중국 욕은 안한다. 6.25때 압록강 중국 국경까지 북진하여 완전한 남북통일을 거두려는 순간에 중국군 개입으로 통일 못한건 비밀. 중국은 북한 살린 은인이고 미국은 남한 살린 은인이니 미국때문에 통일(적화통일)안된건 맞고 미제 몰아내자는건 적화통일하자는 소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흘리며 장렬히 산화돼가신 항일 열사들의 넋을 따라 아직도 외세에 억압받고 있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힘차게 투쟁하겠습니다. 억압받고 있는게 맞긴 맞다. 바로 김씨 에게 억압받고 있는 것이다.
  • 평양시 환송 군중대회(1989년 8월 14일 평양)
허리가 잘려왔어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자들이여! 분단의 꼭두각시 놀음 속에 부귀와 영화를 자랑하는 자들이여! 우리의 만남을 막으려는 너희들의 장벽은 단단하고 두터웠지만 그러나 보라. 조국통일의 함성으로 일제히 일어서는 7천만 겨례를 하나의 삶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9 그 이후 임수경

임수경은 이 일이 있은 후 한참 뒤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민주통합당비례대표로 출마하여 당선된 후 국회의원이 되어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통일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백지연의 끝장토론에 출연해서 한 발언
왕재산 (간첩) 사건도 기획 사건이다.

왕재산 (간첩) 사건의 관련자들이 종북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이다. 왜냐하면 제 지인들이기 때문에.

이는 백지연의 끝장토론에 출연해서 한 발언이다. 임수경은 왕재산 사건이 북한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모두가 다 저 위의 동영상에서 임수경이 직접 한 발언을 그대로 받아적었을 뿐이다.

임수경은 황길경 같은 종북주의자까지는 아니었기에 북한의 모든 선전문구를 답습하는 행태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운동권 사고의 보유자였기 때문에 애초에 불법 방북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임수경의 행보가 좋은 것만 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는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문제는 임수경 혼자 저런 건 아니라 당시 운동권에 저런 사고가 만연했으며, 아직도 저런 생각을 극단적으로 고수해 사고치는 인간들이 나온다는 것이지만...

10 참고자료

『웃음과 감동이 교차하는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글 고지운. 그림 고경일. 서울:도서출판 앨피. 2005.

탈북자 주성하 기자의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뛰는 ‘북한 신문’위에 나는 ‘북한 주민’있다. 2011. 11. 23.
임수경이 북한에 뿌렸던 금단의 열매들.. 2009. 7. 1.

한겨레신문 - 재미언론인 안동일[7]씨 동행 취재기
'하나의 조국' 역설 북한 신랄한 비판도 1989.8.17
집단체조 도중 퇴장하자 군중들 '웅성' 1989.8.18

KBS인물현대사

8회 분단의 벽을 넘어 - 임수경 2003.8.15
  1.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이 전달해준 초청장을 임수경 방북 이후 북의 사주와 지령으로 발표해서 비웃음을 자초했다.
  2. 당시는 김종필같은 보수인사들(자민련한나라당보다 원래 더 우성향인걸 생각하면...)도 국가보안법 대폭 개정을 주장할 정도였다. 이는 당시 민주화 운동세력이 주장했던 국가보안법 전면폐지 주장에 점차 힘이 실려가자, 부분적으로 양보하더라도 일단 보안법 자체는 지켜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여길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탈냉전 무드였으니까 가능한거다
  3. 70년대부터 지미 카터 대통령은 박동선 로비사건과 인권외교 등의 명목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꾸 시끄럽게 굴면 주한미군 철수하겠다능'이라며 위협을 가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면 내가 먼저 철수시키겠다'며 세게 나가는 등 주한미군 철수건은 미국-한국-북한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였다.
  4. 2001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군내 의문사로 거론된 바 있었다.
  5. 당시 북한에서 잘사는 집의 기준은 소위 '5장 6기'였다. 5장6기란 이불장, 옷장, 책장, 식장(찬장), 신발장의 5장, TV 수상기, 냉동기=냉장고, 세탁기, 재봉기=재봉틀, 선풍기, 녹음기의 6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모두 갖춘 집은 평양의 상류층 등 전체인구의 10%에 불과했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고난의 행군 당시 경제가 쇠퇴했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 이후에도 80년대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 걸 보면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남한은 저 5장6기는 당시에도 중산층이라면 다 있던 물건이다. 재봉틀은 조금 예외로, 당시에도 기성복에 밀려 쇠퇴하던 중이었다.
  6. 안명철씨는 정치범 수용소 경비대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수용소의 끔찍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남측의 인권 유린이 이보다 더 심하다고 왜곡하기 때문에 안명철씨 입장에서 보면 임수경씨는 귀국과 동시에 즉결처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7. 뉴욕세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