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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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18년 만에 돌아온 타이거즈의 수호신

역대 포스트시즌 최고령 세이브이자 타이거즈에서 6,927일(약 19년) 만에 포스트시즌 세이브를 달성한 모습.

KIA 타이거즈 No.12
임창용 (林昌勇 / Chang-Yong Lim)
생년월일음력 1976년 6월 4일[1]
신체182cm, 80kg, O형
출신지광주광역시 남구
학력광주대성초 - 진흥중 - 진흥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 입단1995년 고졸 연고 자유계약
소속 팀해태 타이거즈 (1995~1998.12.14)
삼성 라이온즈 (1998.12.15~2007)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8~2012)
시카고 컵스 (2013)
삼성 라이온즈 (2014~2015)
KIA 타이거즈 (2016~)
등장곡N.E.X.T - Destruction of the shell : 껍질의 파괴[2]
응원가Downstait - I Came to Play[3]
보유 기록
1998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2004년 2015년 한국프로야구 세이브왕
1999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평균 자책점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4]하지만 사실은 방향보다는 한방이 더 중요했던 모양인 듯...
성구회
회원번호기록가입년도비고
8375 세이브[5]2014년최초의 세이브 기록 가입자

1 개요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사이드암 투수이자 세이브 관련 기록으로는 최초로 성구회에 가입한 대표적인 마무리 투수. 한국인 투수로서는 가장 많은 세이브 기록을 갖고있는 선수였다.[6] 아래 투구 스타일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우타자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특유의 직구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가진 공을 슈트라고 하여 변화구로 구분하고 있다.

대표적인 별명은 창용불패(昌勇不敗), 애니콜[7]이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노예이기도 하다. 좌완 최강 노예 겸 중무리 투수가 구대성이라면 우완 최강 노예 및 중무리 투수는 임창용이라 할 수 있겠다.[8] 1995년 입단 때부터 2007년까지 제대로 된 관리를 받기는커녕 혹사를 당하며 선수생활을 평탄하게 해 본 적이 없다. 일단 한, 미, 일 프로야구 기록을 모두 합산하여 역대 한국인 투수 중 가장 많은 경기(930경기)에 등판한 투수이며, 그 동안 먹어준 이닝이 1800이닝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노예였다. 류택현이 901경기에 등판했어도 먹어준 이닝이 600이닝대라는 점에 비춰보면 임창용이 얼마나 국내에서 빡세게 굴렀는지 알 수 있을 듯.

2012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함에 따라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이상훈과 함께 한, 미, 일 프로야구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2014년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하면서, 국내로 복귀하였고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법칙을 증명했었다. 그러나 고령에다 급하게 영입되어 제대로 시즌을 준비할 수 없었던 탓에 2014년 5~6월 사이 블론세이브를 세 번 기록하는 등 많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며, 9월까지 이 모습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한물갔다는 평가까지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시즌을 준비하고 나온 15시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게 무엇인지 보여주며 나이 40 넘겨 구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2015 시즌 투수로서 활동하는 선수 중 가장 먼저 프로에 데뷔한 선수이다. 로또준이 1년 먼저 데뷔한 투수 선배[9]이기는 하나(.....) 지금은 통산 300홈런을 넘게 쳐낸 베테랑 타자이기 때문에 투수로서의 이미지는 거의 없다.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태평양 돌핀스 같은 팀과도 붙어보았을 정도로 커리어가 오래 되었다.

해태, 삼성의 양 팀이 한창 강팀으로 군림하던 시절 주역으로 활동했고, 가정사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 도쿄 팀에서 연봉 60억원을 받을만큼 기량을 길렀으며, 선수생활 막바지에는 미국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해서 활약한 그의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분발하는 투혼과 함께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어야 했지만, 커리어 막판 도박이라는 너무나 큰 오점 하나로 본인 커리어에 스스로 먹칠을 하고야 말았다.


2 프로 선수 시절

2.1 KBO 리그 1기

2.1.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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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용 자신이 생각하는 리즈 시절

해태 타이거즈 시절.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지만 해태 타이거즈에서도 엄청나게 굴렀다.[10] 일례로 해태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3회에 등판하였다. 이 정도면 그냥 땜빵 선발 수준.

진흥고 시절에는 언더핸드 투수였다가 사이드암으로 전향하였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언더핸드로 던질 당시에는 구속이 130km도 채 넘지 못해서 팔을 조금 들어올렸고 그 이후로 구속이 나왔다고. 그 뒤 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해태 타이거즈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아 입단하여[11] 선발 투수와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입단 2년차인 1996년부터 1군에 올라와 나왔고 1996년과 1997년 KBO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겨 주었다. 1998년 133⅔이닝 8승 7패 34세이브로 최연소 구원왕에 올랐다. 참고로 임창용 이후 한기주가 데뷔하기 전까지 타이거즈에서 한 시즌에 세이브를 20개 이상 거둔 투수는 나오지 않았다. 임창용 이후 타이거즈 소속 선수로 한 시즌 30세이브 이상을 거둔 투수는 2015년 윤석민이 기록하였다.


2.1.2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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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에서 혹사받던 일명 애니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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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5월 25일 대구 한화전에서 최연소 150세이브를 기록한 뒤. 아니 저거슨 금일봉..?? 해태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을 삼성에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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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의 경영난이 심각해지자 1998년 시즌 후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에다가 거액의 현금을 얹어서 임창용을 상대로 맞바꾸는 트레이드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였다. 참고로 이 중 황두성은 해태 측 담당자의 착각으로 트레이드된 경우. 황두성을 두고 담당자가 '덩치 크고 밥 잘 먹는 투수'라고 말했는데, 원래 원하던 그 진짜 덩치 크고 밥 잘먹는 투수는 정현욱.


2.1.2.1 1999~2004년

1999년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도 레전드급의 활약을 선보이며 그해 138⅔이닝 13승 4패 38세이브 평균자책점 2.14로 당시 규정 이닝을 채웠기 때문에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였고, 창용불패라는 별명까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창용불패의 신화 이면에는 애니콜이라는 달갑지 않은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애니콜이라 불린 이유는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온다 해서. 마무리 투수가 규정 이닝을 채우고[13], 그럼에도 팀 내 다승 2위까지 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서정환 감독에 의해 1999년 정규 시즌에 워낙 무리한 탓에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결국 무너졌다.

이렇게 해태 시절을 포함해 1997년~1999년 3년동안 중무리 투수로 뛰며, 이런 혹사에도 매해 2점대 초반 이하 방어율에 40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방어율만 보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활약이 느껴진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2위, 2위, 1위의 방어율을 기록했는데, 1997년의 방어율왕은 바로 구원 20승 신화를 이룩한 김현욱. 게다가 1998년에 방어율 1위를 차지한 정명원과 임창용은 그 이후 류현진이 1점대를 찍을 때까지 12년 간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1점대 방어율의 주인공이다. 또한 99년은 한국프로야구계에서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으로 기록된 시기인데[14], 이 시기에 2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2000년에는 서정환 감독이 물러나고 김용희 감독이 부임하자 전년도인 1999년에 비해 그나마 조금 관리받으며 등판할 수 있었다.[15][16]

2001년 외국인선수 벤 리베라[17]를 전문 마무리로 영입하며 선발로 보직을 전환, 그해 14승을 따내며 단연 1선발로 등극했다. 2001년 6월 26일 대전 한화전에서 데뷔 첫 완봉승을 거두기도 하였다.[영상 참조] 그러나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2002년에는 36경기 중 29경기를 선발로 나오고 204⅓이닝이나 던지며 17승을 따내는 등 2002년 삼성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2002년 말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타진하며 포스팅을 신청했으나 제시받은 포스팅 비가 기대치에 못 미치는 65만 달러에 불과하여 국내 잔류를 선택했다. 이후 2003년에도 13승을 따내며 배영수와 삼성 선발 한 축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에 그는 간통죄를 저질렀고 이것 때문에 한동안 곤욕을 치뤘다. 이 때문에 생긴 별명이 임간통.[18][19]

2004년 해태 시절 선배였던 선동열이 삼성 수석코치로 부임한 후 노장진과 보직을 맞바꿔 마무리로 돌아왔고, 그해 36세이브를 올리며 구원왕을 수상했다.


2.1.2.2 2005~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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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해외 진출에 실패하고 귀국한 임창용이 선동열 당시 삼성 감독과 겸언쩍은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엄청 어색해 보인다

2004년 이후 FA 자격을 얻은 뒤 삼성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해외 진출을 시도하였고,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당시 신생팀이었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임창용에게 관심을 보였고 이중 라쿠텐은 2년 5억 엔을 제시했으나 최종 협상이 결렬되었고,[20] 지바 롯데는 막판에 1년 1억엔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와중에 메이저리그까지 노크하였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보스턴 레드삭스가 임창용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했으나, 정작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와중에 삼성 감독이 된 선동열은 임창용보고 [20억도 아깝다]라고 하여 논란이 있었다.

사실 2005년~2007년은 임창용의 흑역사.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21] 결국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삼성 라이온즈와 2년 간 옵션을 포함해[22] 총액 18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 임창용의 아버지는 삼성에게 계약을 취소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삼성 구단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신임 김응용 사장은 계약을 물러주느니 차라리 임의탈퇴시켜버리겠다며 격노했다.[23]

김응용 감독이 사장으로 승진하고 선동열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뒤 마무리를 권오준에게 넘겨주고[24] 1년 만에 다시 선발 투수로 전향했으나, 5승 8패 평균자책점 6.50이라는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결국 그 동안의 혹사 후유증이었는지 2005년 말 팔꿈치 부상으로 인대접합 수술을 받고 재기를 꿈꿔 오던 그는 2006년 시즌 막판에 1군에 복귀해 그해 1경기 등판에 그쳤으나 그 1경기 등판한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며 프로 통산 100승을 이루기도 했고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며에서는 지연규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던져(!)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제몫을 했다. 2007년에는 5선발로 자리잡았으나, 5승 7패 평균자책점 4.90으로 부진하며[25]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간은 한물 간 퇴물이라는 평가만 받았다.

결국 2007년 시즌이 종료되고 아무도 모르는 새 일본프로야구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이 당시에는 임창용의 선수 생활이 거의 끝났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삼성과 FA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선수가 원하면 해외 진출을 허락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꿈을 위해 간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장이었던 김응용과 감독이었던 선동열과 불편 관계에 있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임창용은 KIA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삼성과의 불편한 관계를 숨기지 않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선뚱이 기아에 있잖아? 안될거야 아마...하지만 2016년 임창용은 KIA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래도 선동열과 김응용이 모두 팀을 떠나고, 프런트 수뇌진과 감독이 바뀐 이후로는 삼성과의 관계도 양호해진 듯하다. 삼성의 스프링캠프에도 자주 찾아오고 같이 훈련도 받으면서 류중일 감독님과 같이 야구하면 야구할 맛 나겠다는 등의 표현까지 하였고, 2014년에 실제로 복귀를 하였다.

어찌됐건 임창용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2.2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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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미스터 제로라 불리웠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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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입단식에서.

모두 임창용이 곧 국내로 복귀하거나 일본에서 은퇴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러나 여기부터가 임창용의 진정한 전설. 2008년 1승 5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3.00이라는 성적을 기록하게 되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떠올랐다. 참고로 일본 데뷔 첫 탈삼진을 이승엽에게 빼앗았다.[26]

2009년 5월 15일과 16일에는 이틀 연속으로 최고구속 160Km/h의 공을 날리면서 한신 타이거즈 타선을 꽁꽁 묶는 등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스토퍼로 주목받았다. 야쿠르트의 상대 팀 팬들은 9회말 임창용이 나오면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런 덕분인지 야구팬들한테나 2ch에서나 칭찬을 많이 받는 편이다. 오죽하면 "야쿠르트와의 경기에는 9이닝이란 게 없다." 라고 했을 정도. 이제는 한신이 9회가 없어질 차례 였고 다음은 카디널즈닷!!!

참고로 160km/h을 넘긴 일본 리그 소속 선수는 마크 크룬과 사토 요시노리, 임창용 단 3명 뿐. 2011년 기준으로 마크 크룬이 찍은 162km가 일본 최고 구속. 그런데 임창용은 속구를 던지기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사이드암[27] 그에 비해 마크 크룬은 속구를 던지기에 유리한 오버핸드다.

그 후 임창용은 2009 시즌에 이시이 가즈히사가 세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팀내 연속 무실점 기록인 19이닝의 벽을 넘어 20이닝 연속 무실점의 대기록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그 뒤 바로 팀 동료 이가라시 료타가 재경신하긴 했지만.

이렇듯 일본 2년차인 2009년 시즌은 그야말로 후덜덜한 활약을 보였다. 개막전부터 7월까지 단 한 개의 자책점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야쿠르트 구단 기록을 갈아치우는 대활약을 한다. 이때의 별명이 미스터 제로 그냥 언플이아니라 진짜 0... 하지만 7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 9회 말 등판에서 포수의 도루 허용과 희생번트, 이어지는 희생플라이로 역전을 허용하면서 결국 첫 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후 후반기 체력 소진 등으로 페이스가 약간 떨어져서 5승 4패 28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점 2.05, WHIP 1.04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또한 2009년 시즌부터, 진구구장 홈 경기 한정으로 야쿠르트 구단에서 임창용이 등판할 때만 나오는 PV를 만들어 방영하는데 가히 폭풍간지다. 이가라시 료타의 경우도 비슷한 PV가 있지만, 배경음 덕분인지[28] 간지는 오히려 임창용쪽이 훨씬 좋다. # 2011년버전 게다가 PV를 틀어주기 전에 응원석에서 외쳐주는 "창용불패!" 는 정말 멋있다.[29]

초기에 연봉 30만달러에 2년+1년 옵션으로 계약하고, 2009년에는 50만달러를 받았는데 야쿠르트 입장에서는 이게 초대박이 터진 셈. 이 때문에 200만달러 이상(300% 이상)의 연봉 상승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건 시즌 초반의 이야기. 하지만 뛰어난 평균자책과 WHIP, 그리고 초반의 추세를 생각한 구단 덕에 임창용은 160만달러(220% 상승)에 야쿠르트와 재계약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박.[#]

2010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니, 엄청난 구속으로 돋보였던 2009년보다도 좋은 활약이다. 구속을 낮춘 대신 제구력과 기술을 가다듬었다는 평가. 9월 16일 30세이브를 돌파했으며, 9월 26일 기준으로 ERA 1.34 33세이브를 기록하며 일본 진출 이후의 본인 기록(2008년 33세이브)과 타이를 찍었다. 후반기가 됨에도 불구하고 ERA가 오르지 않는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리고 이혜천은 또 곁다리로 기사 하단부에 등장. 이 쪽은 1군에서 계속 버티면서 위기 상황마다 진화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 결국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35세이브/노 블론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재계약 과정 중 한때 교섭이 결렬되었을 정도로 진행에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3년 총액 15억 엔이라는 초대형 계약으로 야쿠르트 잔류가 결정되었다.

이렇게 재계약한 임창용은 5월 3일 일본 통산 99세이브를 기록하여 과거 선동열의 한국인 일본프로야구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고 바로 다음날 100세이브를 기록했다. 2011시즌 최종성적을 보면 투고타저의 리그에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64경기에 나와 61⅓이닝 4승 2패 32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2.20 68탈삼진을 기록했지만 5블론세이브를 기록하여 다소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요미우리와의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는 공 1개로 세이브를 기록했지만 2차전에서는 ⅔이닝 동안 2개의 안타를 맞고 4실점했다.[30] 경기 직후 임창용은 구위 문제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오가와 준지 감독은 제구, 구위가 모두 불만스러웠다면서 마무리 보직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감독의 이야기와는 달리 클라이맥스 파이널 시리즈 3차전에 나와 세이브를 기록했다. 준지 감독의 발언은 현재 그저 언플&선수 관리 차원의 발언인 것으로 보인다. 퍼스트 스테이지 3차전 이후 준지 감독은 경기에서 선발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김성근 감독마냥 투수를 팍팍 내리고 주전 타자들도 가차없이 교체하면서 이기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팀은 주니치에게 패퇴. 결국 임창용은 2011시즌을 다소 아쉽게 마무리지었다.

2012 시즌은 안타깝게도 2군에서 시작하였다. 이후 [또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일단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년 정도의 재활 기간을 가졌다.

2012년 9월 11일경 [재계약이 불투명하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때문에 국내 복귀의 가능성도 생겼다. 일본 진출시 임의탈퇴를 거쳤기에, 국내로 복귀한다면 삼성 라이온즈로 가야만 한다. 마침 눈엣가시도 없겠다 일단 류중일 감독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지금은 대답할 상황이 아니다][31]

2012년 11월 15일 결국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퇴단을 발표하여 방출이 공식화되었다.

2.3 2009년 WBC 2회 대회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때 10회초 2사 2,3루의 상황에서 스즈키 이치로와의 맞붙어 정면 대결하였고 결국 결승타를 맞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을 아깝게 놓치게 되자 한국에서 욕을 좀 많이 먹게 되었다. 그래서 붙었던 별명이 임완용M창용. 덕분에 한일양국에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당시 상황에서 김인식 감독이 고의사구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알려지고, 임창용의 감독으로 있었던 김응용, 선동열이 관련 인터뷰에서 임창용이 지시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려 승부를 한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더더욱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러나 2014년에 나지완을 거르지 않고 상대하다 역전타를 쳐맞는 것을 보고 이 부분은 재조명받게 되었다

참고로 실제로 결승타를 맞기 직전 2사 1,3루 상황에서 1루수가 베이스에서 떨어져서 1루 주자가 견제 없이 2루로 뛰게 놔두었고, 도루 상황에서 포수도 2루로 공을 던지지 않았다[32]

임창용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 가운데 일본의 "카리스마 백서"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분석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고, 그 프로그램에 의하면 당시 투수코치인 양상문이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임창용에게 고의사구 사인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다른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인식 감독과 양상문 코치는 프로그램이 자신들이 실제로 한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방송을 했다며, 통역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이거나 일본 취재진이 내용을 왜곡한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양 코치는 "내가 감독님의 지시를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으며, 김감독은 "양코치에게 어렵게 승부하라는 지시를 두번이나 내렸고, 이 내용이 전달됐는지 확인까지 했다. 고의볼넷을 내주라는 의미는 아니었으나, 승부가 여의치 않을 땐 정면대결을 피하고 볼넷을 내주라는 의미도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당시 정면대결의 원인에 대한 논란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게 되었다. 훗날 하일성 전 KBO 사무총장이 KBS 아침마당에 출연,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김인식 감독에게 어떻게 지시했냐고 묻자 그가 말하길 "내가 일어서서 적극적으로 거르라고 지시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모두 내 탓이다." 그런데, 강민호가 [3년이나 지나서 자기 잘못이라며 자백했다.]


2.4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에서의 새 시작

2012년 12월 13일, 어느 100년 동안 우승 못 하는 팀과 계약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컵스와의 계약서에 사인하게 됐다. [#] [#]인터뷰 조건은 1+1년, 옵션이 다소 복잡하게 얽혀있는 스플릿 계약으로 보장 금액은 계약금 10만 달러에 추가 금액은 메이저리그에 승격됐을 때 연봉 500만달러를 기준으로 일할 계산 후 지급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인 후지카와 큐지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것보다도 다저스의 류현진,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한 추신수와 함께 오래간만에 한국 선수들의 대대적인 메이저리그 러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2.4.1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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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문서로.


2.4.2 2014년

2014년에는 자신을 논텐더시킨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했다. 연습 경기와 시범 경기를 통틀어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하고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구위와 제구력이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였다.

이 와중에 인터뷰에서의 발언으로 컵스와의 계약 문제로 전 에이전트한테 사기를 당했다는 의혹이 퍼지기도 했다. [임창용 인터뷰]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젊은 선수들이 많은 컵스 조직 특성상 25인 로스터 진입을 위해서는 특별히 더 좋은 모습을 보어주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개막 로스터 진입에 실패하여 마이너리그 캠프행 통보를 받았다. 결국 3월말 방출되었는데, 임창용 스스로 방출을 원했다고 한다.임창용보다 1살 많은 우에하라 코지는 작년에 대활약했는데!

4월 20일 네이버 이영미 칼럼에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여기서 임창용은 컵스가 불펜에 좋은 선수가 많으니 불펜이 약한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을 알아보고 싶어했지만, 컵스가 임창용을 25인 로스터에 넣긴 그렇고 다른 메이저리그구단에 내주긴 아깝다는 심보임창용의 에이전트를 거치지 않고 삼성과 연락을 취해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설명했다. 컵스가 갑인 만큼 을인 임창용으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2.5 KBO 리그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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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왔지만 다시는 볼 일 없게 된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2.5.1 2014년

창용불패에서 창용불=패로, 그리고 다시 창용불패로 끝난 국내 복귀 첫 시즌

유독 삼성 프랜차이즈 배영수를 집중으로 하는 블론이 많았지만, 배영수의 FA우선협상 결렬이 난 이후로 재평가를 받았다.[33]

그리고 전설의 9블론세이브

해당 문서로.

2014의 마지막은 빙구(..)의 모습으로 삼적화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면서 끝냈다.


2.5.2 2015년

리그 최강의 사이드암 마무리 투수
삼성의 수호신이 돌아왔다. 내가 작년에 9블론을 했던건 올해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경기를 나올 수가 없다 오승환 삼성와도 자리없다 삼승락찾던 놈들 다 튀어나와라 다시 필요하다 하지만 손승락은 롯데로 갔잖아? 안될거야
최고령 30세이브 달성
최고령 세이브왕 등극

그런데..... 현재 2015년 [[TV조선 단독 임창용 '원정도박' 거액 입금 확인]], [임창용·윤성환·안지만 원정도박 정황 확보…검찰도 수사 착수] 도박혐의로 검찰에 조사를 받고 있으며 결국 도박사실을 시인했다[#]. 자세한 것은 2015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문서를 참조 바람.[34] 결국 시즌 뒤 방출되었다. 그런데 다른 선수는 전지 훈련에 참가한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2015년 12월 31일 임창용 선수가 대리인을 통해 [팬들에게 사과문을 남겼다.]

해당 문서


2.5.3 2016년 : 다시 고향팀에 돌아오다

해당 문서로.


3 평가

창용불패(昌勇不敗) 이 별명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35]

선수 초중기 엄청난 혹사를 당하고도 지금까지 활동 중이며, 고무적인 것은 2016년 기준 커리어 22년차인 노장인데도 140~150Km을 넘나드는 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30대 중반에 160Km의 강속구를 던지기도 했다.[36] 타자에 비해 투수의 수명이 짧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놀랍다고 볼 수 있다.[37] 게다가 2001년~2003년은 선발로도 뛰었었다!

그의 속구는 뱀직구라 불리며, 속구를 던지면 심한 테일링이 걸리면서 공이 뱀 같이 들어온다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게다가 제구까지 되니 무시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덕에 전성기 때는 오승환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특급 마무리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당대 최고의 마무리라 불리던 진필중에 대적했던 유일한 마무리 투수였기도 하다. 다만 전성기 중무리 활동과 선발 전향으로 인해 세이브 수에서 꽤 손해를 보았다.

그리고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정도이면 그의 자신감과 실력 또한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1경기에 그치긴 했지만 그래도 출전한 게 어디야...

KBO 리그 선수들 사이에서는 사이드암의 전설 그 자체로 통한다. 이는 많은 사이드암 투수들이 임창용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이 잘하면 제2, 제3의 임창용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원판 임창용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흠이 있다면 사생활. 신인 때서부터 사생활 관리에 약점을 보였고[38], 2003년 급기야 간통 사건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국 2015년 큰 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3.1 투구 스타일

사이드암(팔을 옆으로 돌려 공을 던지는 투구폼) 투구폼으로 150km대의 강속구를 던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강속구가 나올 때 팔이 로우 쓰리쿼터 높이까지 올라간다. 로우 쓰리쿼터를 넘어 하이 쓰리쿼터로도 종종 던진다. 이 투구폼의 궤적과 빠른 강속구가 합쳐져 만들어진 일명 뱀직구는 임창용의 대표적인 전매특허 구질이다. 이 공을 처음 본 일본, 특히 2ch 사람들은 '이건 뭐 파워프로(실황 파워풀 프로야구)냐?'라고 말할 정도. 사실 일본 야구에서는 이런 테일링 무브먼트를 가진 투수가 드물다. 애초에 이런 무브먼트가 있어도 잘못된 것이라고 교정하는 판(…)[39]. 2013년 기준으로 국내에서 이와 비슷한 무브먼트를 갖고 있는 선수는 한화 이글스의 칰창용정재원이나 삼성 라이온즈의 심창용심창민 정도. 박 모씨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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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용의 전매특허 뱀직구 직구인데 궤적이 휘는 것이 포인트. 원래 직구라고 해도 똑바로 날아가지는 않는다. 야구의 구질 참조. 단 임창용은 휘는 정도가 엄청나게 심할 뿐. 지금도 보면 사이드암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갔다.

한물 갔다고 평가받았는데 일본에 가서 이처럼 화려하게 부활한 이유로

  • 혹사가 없어짐
  • 동기부여
  • 일본프로야구의 철저한 몸 관리 시스템

이렇게 셋을 들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뛰었기 때문에 공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또한 프런트나 감독과의 불화설도 종종 보도되었고, 개인 사생활 측면에서도 물의를 빚는 등 야구 내외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일본 진출 직후 '모든 것을 잊고 야구에만 전념하겠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그 말 속에 일본에서의 호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농담으로 도는 얘기로 2005년에 토미 존 수술을 받았는데 실은 이게 부상 치료용 수술이 아니라 신체 강화 수술이 아니였냐는 소리도 있다. 이 당시에 배영수의 10km/h를 훔쳐갔다는 우스개도 한다. 배영수는 같은 수술을 받은 뒤 시속 150km에 육박하던 속구 구속이 10km/h 이상 떨어져 긴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배영수가 1년 늦게 수술했으므로 도둑질이란 건 농담. 같은 시기에 했다면 도둑질 맞다 아니면 임창용이 대출해간 10km을 배영수가 대신 갚았다거나 하지만 배영수가 재활 뒤 복귀한 2008년에 좀 모자란 듯한 성적을 낸 반면 같은 해 임창용은 일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다시 태어나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2009년에는 배영수가 직구 구속이 135도 못 넘을 정도로 아예 충격적으로 몰락한 반면 임창용은 160km/h를 찍는 등 날아다녀 대비되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문가은 임창용이 한국 나이로 이제는 만으로도 40대의 나이에도 150km/h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뿌려대는 비결을 유연성으로 보고 있다. 투구 시 테이크 백, 스트라이드, 릴리즈 까지의 동작이 매우 빠르고 역동적인데다가 유연성이 뛰어나 젊은 투수들 보다도 더 많이 뒤로 젖혀지고 스트라이드 동작의 폭이 크기 때문에 공이 많은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에 가뜩이나 횡방향의 회전이 많이 실리는 사이드암 스로(Side-arm throw)인 것에 더해 더 많은 회전을 추가해 뱀처럼 휘어들어가는 뱀직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도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트레칭과 런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웬만해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웨이트로 인해 근육이 붙어버리면 유연성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기사 참조]


4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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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수이지만 발이 대단히 빠른 걸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부터 삼성 시절까지 기회가 되면 대주자로 나오곤 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편.[#1][#2]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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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승민, 권오준, 삼적화 되기 전의안지만, 심령사진김진웅 등 후배들과 함께. 2014년 현재도 삼성 라이온즈 투수들은 임창용을 존경하고 따른다고 한다.그래서 안지만하고 임창용하고 쌍으로 2014시즌 초반을 말아먹었나 보다,과연 현재도 믿고 따르는지는 추가바람

뽀뽀하려는 남자그럼에도 무표정한 한 남자가 사진의 포인트. 다른 의미로 전설이 사진.

  • 삼성에 있을 적에 프런트나 감독과 불화설이 있었던 것과 달리 정현욱, 권오준,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 등의 삼성 시절 후배들은 임창용을 많이 따른다. 특히 이들 중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과는 비시즌 기간에 같이 여행을 가거나 당구치면서 밥값 내기를 한다고. 다만 이승엽과는 2000년대 전반기에 사이가 안 좋았다는 설이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나돌고 있다. 임창용이 중무리 투수로 고생했는데 스포트라이트는 홈런왕인 이승엽이 더 많이 받았다는 점을 들어서이다. 그러나 2014년 현재 하는 모습을 보면 둘이서도 그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은듯.
  • 자신의 전성기가 해태에서의 4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연도를 적자면 1995~1998년. 또 삼성으로 이적한 뒤 2~3년간도 페이스가 좋았다고 언급했다. 해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8년을 포함해 1998, 1999, 2000년 동안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하기도 했었다. [#] 기사 말미 참조. 동시에 김응용 전 사장이나 선동열 전 감독도 구위만 따지면 대한민국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날아다닌 걸 보면 일본 시절이 진짜 전성기 같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임창용의 보직이 중무리 투수였다는 점. 야쿠르트에서처럼 철저하게 1이닝 마무리로서 관리를 받으며 등판하는 것과 비교하기 힘들다. 일본의 야구 팬들은 임창용의 대한민국 시절 스탯을 보고 저렇게 혹사를 당하고 부상을 안 당한 게 이상하다는 반응이 대다수.
  • 해태에서 고작 4시즌밖에 안 뛰었지만 여전히 고향팀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다. 생애 첫 FA 요건을 갖춘 2004년에는 소속팀 삼성과의 불화도 아랑곳 않은채 시즌 내내 KIA 타이거즈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았으며 시즌을 끝낸 뒤의 협상 과정에서도 삼성과 2년 18억원의 계약을 맺은 뒤 KIA로의 트레이드를 요구하는 등의 돌출 행보로 구설수에 올랐다. 결국 임의탈퇴 위기까지 몰리고 KIA 또한 FA 시장 철수로 인해 임창용의 영입을 거부했지만 이후 일본에 진출하여 화려하게 재기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인 셈. 2011년에는 "가능하다면 마지막 시즌을 KIA에서 보낸 뒤 은퇴하고 싶다."는 말로 다시 한 번 고향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뒤 마침내 고향 팀에 돌아왔다.
  • 일본 진출 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부처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유는 임창용의 성인 '임'을 일본어로 イム라고 적는데, 이를 합치면 일본 한자로 부처{仏(佛)}를 의미하는 글자가 되기 때문. 그리고 이 루트를 같은 임씨 성의 한국 출신 2D 아이돌이 그대로 탔다. 2채널의 응원 스레드에는 임창용이 등판할 때 イムイム...로 도배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통칭 미스터 제로로 통한다고. 야쿠르트에서 미스터 제로라 불릴 수 있는 선수로는 2008년에 히어로즈에서 잠시 뛰었던 타카츠 신고뿐이었다. 참고로 임창용(林昌勇)이라는 이름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하야시 마사오'라는 평범한 일본식 이름이 되는데 일본시절 동료들이 매직으로 그의 모자에 ハヤシマサオ라고 카타카나로 써주면서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고...
  •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시락에 동그랑땡을 싸온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친구가 동그랑땡만 자꾸 먹어서 그만 먹으라고 했더니, 반찬에 침을 뱉고 도망치길래 화가 나서 포크수저를 던졌는데 그만 포크수저가 친구 머리에 꽂혀버렸다(...). 그걸 본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올래 야구할래라고 물어서 부모님을 모셔오기 싫었던 임창용 어린이는 야구를 선택했다고(...). 오오 인생초구 포크볼 오오. 오재원의 머리로 견제구를 날리자 이 일화가 재평가 됬다.
  • 임창용의 별명 중 하나로 "창드"가 있는데 이는 진갑용의 G드래곤 조어방식으로 만들어진 별명인 갑드와 마찬가지로 잘한다는 의미에서 용을 드래곤으로 표현한 별명. 하지만 이름에 쓰인 한자는 龍이 아니라 勇이다. 2012년에 심창민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자 일부 삼성 팬들은 시속 150km대의 속구를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라는 점과 이름에 창이 들어간다는 점 등을 임창용과 연관지어 "심창드"라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칭찬하는 뜻. 사실 한국프로야구 사이드암 투수 중에선 거의 전설적인 존재라서, 딱히 삼성 투수들 말고도 사이드암으로 누군가가 조금만 잘던지면 순식간에 그 선수는 XX의 임창용, X창용이 된다. 물론 그 중에 원판을 뛰어넘은 투수는 지금까지 없다.
  • 2003년에 이혼을 한 적이 있다. 이모씨와 2003년 1월에 혼인신고를 했고, 2월에 이혼신청을 한것.[이혼소송 관련 기사]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카더라]들이 있지만 적당히 걸러 듣자.

[마구마구 선수정보]

  • 마구마구2 for kakao에서 14년도 선수가 추가될 때, 14 임창용은 처참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최고등급 8볼 플래티넘으로 나왔다. 흠좀무
  • 마찬가지로 마구마구 에서도 14 임창용이 레어로 추가되었다. 하지만 팀에게 너무 퍼주는게 아니냐고 유저들이 반발하였지만, 수정따위 그런 거 없다.
  • 전성기였던 1999년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진필중과 비교된 적도 있었는데, 그해 중무리를 한 임창용은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지만 역시 중무리로 돌던 진필중이 구원승을 더 따는 바람에 임창용은 세이브포인트 딱 1p 차로 구원왕을 놓쳤다. 그러나 서로 거의 비등비등했던 1999년 외에는 정확하게 비교가 불가능한데 1998년까지 진필중은 선발을 겸업했으며, 이후 2002년까지 진필중이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반면 2000년에는 임창용이 안식년을 가졌고, 2001년부터는 선발로 전향하였다. 그리고 임창용이 다시 마무리로 전향한 2004년 진필중은 먹튀가 되어있었다. 확실한 건 이후의 행적까지 비교하면 진필중이 임창용에게 캐발린다는 사실이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 투수 기록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95해태 타이거즈1429⅓020005.8337081619191.432
199649
(4위)
114⅔77000.5003.22918447848411.125
199764
(4위)
13514
(3위)
826
(4위)
00.6362.33
(4위)
9364212044350.956
199859133⅔8734
(1위)
00.5331.89
(2위)
9044214135280.898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99삼성 라이온즈71
(4위)
138⅔13438
(1위)
00.765
(4위)
2.14
(1위)
91103614133330.865
20005288⅔5430
(3위)
00.5561.52582319519150.902
200130184⅔
(5위)
14
(3위)
6100.700
(3위)
3.901692579136
(4위)
88801.251
200236204⅓
(2위)
17
(3위)
6200.739
(3위)
3.08
(3위)
1882458160
(4위)
82701.086
20032814713
(3위)
3100.813
(2위)
3.5514115598563581.259
200461672436
(1위)
00.3332.01514266719151.090
20052991⅓58030.3856.5011011517067661.599
20061210001.0004.503010112.000
20074011957030.4174.901389546268651.525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08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54511533
(5위)
00.1673.00556145018171.314
200957575428
(3위)
50.5562.05404255215131.105
20105355⅔1235
(2위)
60.3331.463231953990.880
20116562⅓4232
(5위)
40.6672.17402286815151.043
20129700030.0000.006027001.143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13시카고 컵스6500000.0005.406095332.600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14삼성 라이온즈4944⅔5431
(2위)
00.5565.84504255233291.590
201555545233
(1위)
00.7142.83452167117171.074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16KIA 타이거즈3435331500.5004.37455143818171.57
KBO 통산(16시즌)6721589⅓11775247
(2위)
60.6093.34140012962413326545891.16
NPB 통산(5시즌)2832331113128210.4582.09173158823157541.082
MLB 통산(1시즌)6500000.0005.406095332.600
  1. 양력 1976년 6월 30일
  2. 오승환에 이어 임창용도 넥스트의 곡이 등장음악으로 정해졌다. 등장 음악은 전주 부분을 따로 편집한 듯 하다.
  3. WWE 프로레슬러 더 미즈의 등장음악이다. 이 노래의 후반부에 맞춰서 응원구호를 외친다. 창! 용! 불! 패! 창!용!불!패!
  4. 사실 이 말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했던 말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저서로도 알려져 있지만 원조는 괴테가 먼저이다.
  5. KBO 리그 247 + 일본프로야구 128
  6. 오승환이 MLB에서 클로저를 맡게 되며 세이브 수가 역전당했다.
  7. 아래 내용에도 있듯이 연투와 선발과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던지는 경우가 있었고, 그래서 감독이 부르면 언제든지 올라온다고 해서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삼성전자가 삼성 갤럭시 시리즈를 생산한 이후로는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갤럭시라고도 부른다.
  8. 혹사도만 따지면 넘사벽 of 넘사벽인 장명부가 있지만 장명부는 자의로 등판한 것이기 때문에 노예라는 호칭을 붙이기엔 좀 그렇다. 게다가 임창용이 활동하던 시기는 그나마 마무리투수라는 개념이 잡혀있던 9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
  9. 공교롭게도 해태 타이거즈 선배이다
  10. 1996년 114⅔이닝, 1997년 135이닝, 1998년 133⅔이닝.
  11. 놀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입단 초에는 2군을 밑돌던 날라리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었다. 방황하던 임창용을 다잡아준 이는 김성근 당시 해태 2군 감독. 체력적인 부분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성근 2군 감독은 갓 스물이 된 임창용이 여러 유혹에 이기지 못하자 30일동안 여관에서 숙식을 같이 했다고 한다.
  12. 2007년 8월 18일 잠실 LG전에서 9회초 대주자로 출장한 모습이다. 오른쪽은 당시 주루코치였던 류중일 현 삼성 라이온즈 감독.
  13. 마찬가지로 특급 중무리였던 진필중도 1999년 최다 세이브포인트 경쟁에서 이겼을 때 규정 이닝에 조금 모자란 114이닝을 던졌고, 구대성도 다를 바가 없었다.
  14. 이 시기에 30-30 클럽 선수가 3명이나 나왔고 홈런왕 이승엽이 54홈런을 기록했으며, 해태 타이거즈는 팀홈런 210개로 2003년 삼성 라이온즈의 213개에 이어 한 시즌 최다 팀 홈런 2위를 기록했다.
  15. 근데 그나마 관리받은 게 88⅔이닝...
  16. 만약 임창용이 2000년마저 1999년처럼 철저히 굴려졌으면, 일본프로야구나 메이저리그 진출은 고사하고 아예 재기불능 상태로 망가져 버렸을 지도 모른다.
  17. 2001 시즌 중반까지 21세이브를 올리며 잘 나가다가 개인사로 시즌 중 임의탈퇴되었다. 김진웅이 벤 리베라를 대신해 마무리를 맡았고, 2002 시즌부터는 노장진이 마무리를 맡게 되었다.
  18. 당시 부인의 말에 따르면 팬티 한 장까지 명품이냐 아니냐를 따졌다고까지 했고 그때까지 보수적이었던 국민성에 의해 비난도 엄청났다. 그럼에도 성적이 곤두박질치지는 않았다. 사건 하나 터지면 멘탈에 상처를 입어 성적이 눈에 띄게 하락하는 2010년대 선수들을 생각해보면... 하지만 재판이 석연치 않게 끝난데다 임창용의 부인 측이 지나치게 언플을 활용하다 모순되는 말을 했다는 점, 등 간통 여부에 대해선 아직 논란점이 많다
  19. 비슷한 시기에 간통을 저지른 김동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묻히는데, 그 이유는 2009년 이후 프로야구의 부흥때 임창용은 해외리그에서 활약한지라 잊혀진 것이 크다.
  20. 대신 라쿠텐은 그해 두산에서 뛰었던 게리 레스를 데려갔다.
  21. 임창용에 따르면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해외진출 에이전트를 너무 많이 선임했다고 한다. 여러 명의 에이전트가 너도나도 본인이 임창용의 에이전트라며 주장하고 각자 다른 계약 조건을 들이밀었고, 이로 인해 임창용만 허공에 붕 떠버린 셈.
  22. 선발 10승 혹은 마무리로 30세이브 이상 거두지 못하면 연봉 5억 중에서 3억을 구단에 반납하는 마이너스 옵션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23. 선수가 임의탈퇴 신분이 되면 원 구단은 물론 다른 구단으로 들어가는 길이 완전히 봉쇄되어 프로 무대에서 뛰지 못하게 된다.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나는 셈.
  24. 2005년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권오준이 마무리를 맡았으나, 마무리로 나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후반기부터는 그해 입단한 대졸 신인 오승환이 마무리를 맡았다.
  25. 이 당시 선동열 감독과의 사이로 인해 일부러 태업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26. 여담으로 두 선수간의 사이가 일본에서 벌어졌다는 내용의 카더라가 이 당시에 돌았다.
  27. 허나 임창용이 160km/h를 기록한 팔 각도는 쓰리쿼터이다.
  28. 007 제임스 본드 테마 음악이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쓰던 배경음이다.
  29. 외치지 않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임창용이 나왔다고 좋아하는건 다를 게 없다.
  30. 당연히 분식회계.
  31. 류중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이승엽이 일본에 있을 적에 국내 복귀를 두고 지나가는 말로 '복귀하면 좋지'라고 말했다가 그게 실제로 기사로 나오자 난처했다고. 자팀 전력이 늘어나는 차원에서는 좋지만 반대로 현재 자팀 선수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에 선수들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
  32. 당시 1루 주자였던 이와무라는 "고의4구를 내는 분위기라면 굳이 자신이 도루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33. 이로 인하여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임창용을 다크 나이트라고 불렀다.
  34. 1억5천을 두 차례에 걸쳐 딴 걸로 알려져 있다.
  35. 불패의 별명을 얻은 선수는 이제까지 구대성, 임창용밖에 없다.
  36.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37. 여기에는 유연성을 중시하는 특이한 자기 트레이닝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말이 있다.
  38. 당시 해태 2군 감독이던 김성근이 임창용의 사생활을 고치기 위해 한 달을 같이 먹고자며 훈련했다고 한다.
  39. 때문에 실제로 파워프로에서는 '슈트 회전'이라는 페널티 어빌리티로 구현돼있다. 효과는 발동시 상대타자의 비거리 강화.
  40. 투수 대주자라 하면 해괴망측하게 생각 할지도 모르지만, 항상 러닝 훈련을 소화하는 투수들이 보통의 야수보다 발이 빠른 선수가 많다. 다만, 임창용은 발 빠른 야수와 비슷한 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여담으로, 투수 대주자의 경우 다른 팀에서도 가끔 가다 볼 수 있다. 단적으로 602 대첩의 임정우이진영을 대신해 주루플레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