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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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시대 위, 오나라의 인물 張儉

생몰년도 미상

220년에 위나라에서 조조가 죽고 조비가 조조를 대신해 승상, 위왕이 되었다가 연호를 고쳤는데, 장검은 남양장사로 있다가 가을에 매부의 지시로 오나라에 사자로 파견되어 손권에게 몸을 의탁해 보살핌을 받게 해달라고 청했다.

손권은 귀순을 받아들였고 이 때 장검이 매부와 함께 오나라에 귀순하면서 남양군의 음, 찬, 축양, 산도, 중려 등 다섯 현의 백성 5천 호가 와서 오나라에 귀속되었는데, 이 다섯 현 중에 후한서 군국지에는 중려현은 남양군이 아닌 남군에 해당하고 찬현이 나와있지 않는데, 중려현, 찬현이 항복한 것으로 볼 때 행정 구역의 변화로 중려현이 남양군이 되고 찬현이 신설되었거나 또는 중려현 등 남군의 일부에서 오나라에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2 후한 말의 인물 張儉

생몰년도 미상

자는 원절(元節). 장성[1]의 아들, 장이의 후손.

산양 고평 사람으로 165년에 적초의 부탁을 받고 산양의 동부 지역의 독우가 되었으며, 중상시 후람의 가속들이 백성들에게 잔혹하게 굴자 장검은 후람의 죄상을 열거한 상주문을 올렸다. 후람의 집안의 무덤, 집을 파괴하고 재산을 몰수해 진상을 구체적으로 갖추어 상주문을 올렸다.

169년에 제2차 당고의 금이 일어나면서 주병이 동향 사람 24명과 장검이 도당을 이루고 있다고 모함하자 장검은 도주했으며, 장검은 아는 집을 찾아가 숨어지내면서 떠돌아다녔다. 동래, 북헤, 어양, 노국 등으로 도피했고 장검이 거친 곳에서는 중형을 받은 사람들이 십 수 명에 달하고 연루되어 고문받은 자들이 천하에 두루 퍼졌으며, 그 친척들은 모두 다 죽게 되고 군, 현은 이 때문에 부서지게 되었다.

184년에 당인들에 대한 금고가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훗날 위위가 되었고 84살에 사망했다.
  1. 張成, 강하태수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