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궤

張軌
(255 ~ 314)

서진의 인물,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인 전량의 시조. 전량의 시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독립하지 않았다.

안정 오씨 사람으로 장이의 17대손이고 집안은 대대로 효렴에 오르면서 유학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젊어서는 명민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중서감 장화와 함께 경서, 정사의 손익에 대해 논했는데, 장화가 장궤를 큰 그릇이라 생각하면서 안정의 중정은 재능을 찾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태자서인, 산기상시, 정서군사 등을 역임했다.

장궤는 상황이 어려운지라 하서를 점거해 보존하려는 생각을 가져 호강교위, 양주자사가 되기를 요구해 301년에 양주자사가 되었으며, 당시 주의 경계 안에는 도적이 휩쓸고 다니면서 선비질이 노략질을 하자 그들을 격파해 만 여 명을 참수했다. 또한 송배, 범원 등을 모주로 삼고 아홉 군의 자제 5백명을 불러들이면서 학교를 세워 숭문좨주, 별가 등을 두고 춘추에 향사의 예를 실시했다.

비서감 무세징은 천문을 보고 천하는 난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은 양주 땅 뿐으로 장양주(장궤)는 그것을 해낼 인물이라 했으며, 305년에 장보가 진주자사에 임명되어 진주에 도착해 천수태수 봉상을 죽여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면서 농서태수 한치를 소환했다가 그의 아들인 한박의 공격으로 장보가 살해당했다.

이로 인해 양주사마 양윤이 한치를 토벌해야 한다고 하자 장궤는 혜제에게 사자를 파견해 근왕을 위해 한치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청해 허락을 받으면서 혜제가 사마모를 사자로 파견해 검을 하사받았으며, 중독호 범원에게 2만명을 주어 한치를 공격해 항복시켰다. 얼마 후에 약라발능이 양주에 침입하자 사마 송배를 파견해 그를 죽이고 10여만 명을 포로로 잡게 되었으며, 장궤는 안서장군을 더해 1000호를 받아 안락향후에 봉해졌고 이 곳에 곳간을 만들었다.

왕미 등이 낙양을 공격하자 장궤는 독호 북궁순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경사를 호위하게 했으며, 북궁순의 군사가 왕연, 유총의 군대를 격파하자 장궤는 서평군공에 책봉되었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주, 군의 사신 중에서 경사까지 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장궤가 홀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쳐 새해와 네 계절이 될 때에 끊이지 않았다.

308년에는 중풍으로 인해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어 그의 아들인 장무가 주의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양주의 호족 장월이 장궤를 축출하기 위해 장진, 조거 등과 음모를 꾸몄다가 이 일이 드러나면서 장진이 죄를 받기를 청했다. 또한 장궤가 장식에게 명령을 내려 보병, 기병 3만 명으로 조거를 토벌해 그의 목을 베고 장월은 달아났다.

장궤는 유사에게 명해 주가 설치된 이후에 선행을 밝혀야 할 인물에 대해 보고하도록 하면서 노인들에게 축하의 뜻을 표했으며, 310년에 광록대부 부지, 태상 지우로부터 경사의 기근과 궁핍함을 알리는 편지를 받자 참군 두훈을 파견해 말 500필, 담요 3만 필 등을 헌납했다. 장궤는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의 직책이 더해지면서 패성후에 봉해졌고 다시 거기장군, 개부의동삼사를 더했다.

혜제가 보낸 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왕미가 낙양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비, 북궁순 등에게 정예 5천을 주어 보냈지만 낙양이 함락되어 이들은 붙잡혔으며, 중원에서 피난하는 자가 잇따르자 무위를 분할해서 무흥군을 설치해 그들을 거주시켰다. 312년에 양주의 주부 마방이 평양을 공격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황실을 추대해야 한다고 하자 격문을 관중으로 보내서 사마업을 높여 보필하면서 군사를 파견했다. 사마업은 사자를 보내 표기대장군, 의동삼사에 임명했지만 장궤는 이를 사양했으며, 사마업이 다시 벼슬을 내렸지만 또 사양했다.

313년에 사마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사공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했고 참군 색보가 오수전을 부활시킬 것을 건의하자 장궤가 이를 채용해 오수전을 주조해 돈을 많이 유통해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이 때 유요가 북지를 함락하자 장궤는 참군에게 3천명을 주어 장안을 지키게 했으며, 장궤는 시중, 태위, 양주목에 임명되고 서평군공에 봉해졌지만 사양했다.

314년에 조정에서 장궤가 늙고 병이 들어 장궤의 아들인 장식을 부자사로 삼았으며, 여름 5월에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힘쓰면서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자기 집안을 평안히 하라고 유언을 남기다가 20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