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

프로야구 30주년 Legend All-Star BEST 10
in 2011. KBO-NAVER
장효조
OF / 삼성
이순철
OF / 해태
양준혁
OF / 삼성
김재박
SS / MBC
박정태
2B / 롯데
한대화
3B / 해태
선동열
P / 해태
장종훈
1B / 빙그레
김기태
DH / 쌍방울
이만수
C /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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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한국시리즈 당시, 삼성 선수들의 유니폼 상의 왼쪽 가슴 부분에 붙여진 패치.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했다.
패치에 쓰인 숫자는 그가 남긴 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통산 타율 3할3푼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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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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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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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원하던 친정 팀 감독 유니폼을 입었지만 1년도 채 입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심판들 사이에 돌던 우스갯소리, 그만큼 선구안이 넘사벽었다는 소리.[1][2]

"나도 이승엽양준혁도 장효조 선배는 못 따라간다."

이만수

"제가 영구결번이 되고, 제가 어떻게 보면 영광을 누렸습니다만은, 사실은 그 번호는, 사실은 장효조 선배님 것입니다."

양준혁,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10인 다큐멘터리에서[3]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함학수
(1985)
장효조
(1986~1988)
박승호
(1989~1990)
이름장효조(張孝祚)
생몰년도1954년[4] 7월 6일 ~ 2011년 9월 7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부산광역시 영도구[5]
출신학교삼덕초-대구중-대구상고-한양대
포지션외야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1983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소속팀포항제철 야구단(1979~1980)[6]
육군 경리단(1981~1982)
삼성 라이온즈(1983~1988)
롯데 자이언츠(1989~1992)
지도자 경력롯데 자이언츠 타격코치(1993~1998)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2000)
삼성 라이온즈 2군 수석·타격코치(2010)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타격코치(2011)
종교불교개신교
보유 기록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고 타율0.331
역대 수상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87년 한국프로야구 MVP
1983년, 1985년, 1986년, 1987년 한국프로야구 타격왕
1983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1983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장타율
1983년 ~ 1987년 1991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1 소개

타격의 달인(達人)

삼성 라이온즈한국프로야구 좌타 라인의 초대수장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를 거쳐간 전 한국프로야구 선수. 아마추어 시절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왼손 교타자. 그리고 장효조-양준혁-이승엽-최형우로 이어지는 삼성 라이온즈 좌타계보 중 시작점.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등번호는 10번, 롯데 자이언츠에서는 20번이었다.[7] 좌투좌타의 외야수였고 지명타자로도 자주 출전하였다. 코치로서의 등번호는 83번(롯데) - 74번(삼성, 2000) - 83번(삼성, 2010~2011)

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멘터리 "타격의 달인, 장효조"

2 선수 시절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장효조
OF / 상원고
이정훈
OF / 상원고
박재홍
OF / 광주제일고
류중일
SS / 경북고
김성래
2B / 경북고
김동주
3B / 배명고
남우식경북고
송진우세광고
유지홍
1B / 선린상고
백인천
C / 경동고

아마추어 시절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원래대로라면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시즌부터 뛰어야 됐지만, 그 해 벌어질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차출되면서 프로 데뷔가 한 해 미루어지게 됐다. 아마추어 시절에 알루미늄 배트 덕분에 장타력도 출중했다. 아직도 명 승부로 기억되고 있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4번타자는 바로 장효조였다. 하나 단점을 꼽자면 큰 경기에선 약하다는 점...(반면 이해창은 빅 게임에 강해서 서로 비교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일본과의 최종전에서도 8회말 1사 1, 3루의 찬스를 2루 땅볼로 날려버릴 뻔했지만, 일본 2루수의 판단 미스로 병살타를 노리는 대신 홈으로 던져 3루주자 김재박만 잡혔고, 후속타자인 한대화의 극적인 결승 3점홈런으로 장효조의 삽질이 묻혔다. 그 외에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롯데 한문연의 플라이를 판단 미스로 만세를 부르는 통에 3루타로 둔갑시켰고,[8] 타격 또한 정규 시즌과는 딴판으로 허공만 가르는 등 한국시리즈에선 유독 재미를 못 봤다...

알루미늄 배트가 나무 배트로 바뀌면서 장타력은 줄었지만, 1983년 데뷔 첫 시즌부터 타율 1위에 안타를 117개나 쳐내는 등[9] 기록을 쏟아냈으나, 이미 성인무대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한 상태에서 입단했으므로 신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10]는 다분히 역차별적인 이유로 신인왕을 OB박종훈한테 넘겨줘야 했다.[11] 훗날 1991년에 벌어진 한일 슈퍼게임에서 선수소개 때 가장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던 건 선동열도, 이만수도, 장종훈도 아닌 바로 장효조였다. 일본의 올드 팬들이 그때까지 장효조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아마추어 시절에 장효조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데뷔시즌의 장효조가 얼마나 어마무시한 기록을 남겼냐하면 타율이 0.369에 홈런도 18개다. 클래식 스탯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타격이었으나, 더 흠좀무한건 세이버스탯. 출루율이 0.475, 장타율이 0.618, OPS는 무려 1.093, RC/27[12]의 경우는 99이승엽, 03심정수, 94이종범과 동급이다. 비록 당시의 게임수가 100경기에 불과하여 누적스탯에선 밀리지만, 비율스탯에선 역대 그 어떤 타자에도 밀리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장효조가 날뛰던 시절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투고타저 시절이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스텟인 시즌 조정 OPS가 역대 최고다.

이후에는 타율이 3할 이상에 오르며 4차례나 타격왕에 오르는 등. 안타 제조기, 타격의 달인, 타격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죽하면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라는 말도 있었으니...... (교과서적인 타격을 한다고 우타자 김종모와 함께엮어 '좌효조 우종모'라는 말도 있었다) 다만 수비는 정말 안습 만세를 몇 번을 불렀던가... 홈런을 제외하면 타율은 1987년 0.387[13], 안타수는 1985년이 129개[14]가 커리어 하이. 경기수 출장은 롯데 시절인 122경기로 한해 최다 출장을 기록했다.

프로 생활 10년 통산타율이 무려 0.331, 5년 이상 규정타석을 채운 한국프로야구 선수 중 최고. 통산 OPS는 0.886. 특히 선구안이 매우 좋아 통산 BB/K는 1.75(!), 출루율은 0.427(!)에 달한다. 남들 평생에 한번 하기도 힘든 3할7푼대 이상을 무려 3번이나 기록했다. 또한 당대 최고의 투수인 최동원에게 통산타율 3할 8푼 6리로 굉장히 강했다.

더구나 프로 입단호적상으론 27세 때지만, 사실은 29세(...)였다. 즉, 대한민국 나이로 30세 때부터 프로에서 뛰었다는 것. 무슨 중남미 선수도 아니고[15][16]흠좀무.
장효조 이후의 한국프로야구 왼손 대두 교타자 라인은 이정훈 - 양준혁 - 장성호 - 이진영 - 김현수/손아섭[17]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8년 12월,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좌완투수 장태수와 함께 외야수 김용철, 투수 이문한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됐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의 횡포에 의한 보복성 트레이드의 피해자인 셈이다.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에는 주로 지명타자로 활동했고, 홀수해(1989, 1991)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격년제 징크스'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 롯데는 최하위권을 맴도는 부진을 겪었고, 이로 인해 "팀 공헌도는 적으면서 타율 관리에만 신경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1991년의 경우는 이정훈, 장종훈과 함께 시즌이 끝날 때까지 타격왕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2위를 기록하여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출루율 1위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장효조가 프로 선수로서 수상한 생애 마지막 개인 타이틀이었다.

이듬해에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시즌 타율 0.265, 54안타라는 프로 데뷔 이래 최저의 성적을 기록하며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허나 지금 롯데 팬들의 경우 최동원이나 박정태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언급할 뿐이지 장효조의 경우 연고지인 부산 출신임에도 타 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언급이 잘 되지는 않는다. 본인도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스카우트로 복귀할 때 굉장히 기뻐했던 것을 보면 엄연한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애정은 삼성에 대한 애정보다 많이 떨어진 듯하다.[18]

3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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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한 뒤에는 롯데 자이언츠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일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떠난 뒤 잠시 야구계와 거리를 두었지만, 2004년에 스카우터로 복귀했으며(동시에 삼성 리틀야구단 감독도 맡았다.) 2010시즌부터는 2군 수석코치와 타격코치를 겸하게 되었다. 공석이 된 스카우터 자리는 우용득이 하게 되었다. 말이 수석코치지 사실상 1군 감독이 2군을 총괄한다는 의미의 직책이기에 2군 감독이나 다름없었다.

류중일 감독이 부임한 2011 시즌부터는 2군 감독 직함을 달게 되었다. 여전히 타격코치도 겸하고 있었지만 8월 10일 강기웅이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하며 짐을 덜게 되었다.

삼성 스카우터로 부임하기 전 코치를 하던 시절에는 선수들을 잘 지도하지 못했는데, 지도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 본인이 선수 시절 워낙 뛰어났던 탓에 선수들이 자신의 지도방식을 따르지 못한 이유가 컸다. 차범근? 난 선수 시절 이만큼 했는데 니들은 왜 그게 안 되니 스카우터로 현장직을 떠났다가 다시 현장에 돌아온 후 배영섭을 필두로 모상기, 정형식 등 2군의 여러 타자들을 키우며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3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되었고, 7월 23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식전 행사때 등장하여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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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이 팬들에게 보인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장효조가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꽃피워 보기도 전에 8월 21일 동아대학교 병원에서 투병 중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고,(당시 장효조는 자신이 무슨 병인지를 밝히지 말라고 부탁했다.#관련기사) 그의 건강 악화로 양일환 2군 투수코치가 그를 대신해 2군 감독 대행을 겸직했다. 결국 2011년 9월 7일 아침, 간암으로 향년 58세라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발견 당시 이미 간암이 위암으로 전이된 상태여서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고...

9월 9일 아침에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3가 동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발인이 엄수되었고, 금정구 두구동 소재 영락공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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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2군에서 같이 일하던 코치 6명이 고인을 운구했고 가족과 친지,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 구단 관계자 등 백여명이 운집하여 고인의 가는 길을 지켜봤다. 전설의 타자가 가는 마지막 길답게 전혀 쓸쓸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발인 당일 새벽 2시경, 광주 KIA 타이거즈전을 마친 삼성 선수단이 구단 버스로 문상을 와서 마지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이렇게 거꾸로 방망이를 들어도 3할은 친다는, 그가 치지 않는 공은 볼이라고 일컬어지던 전설의 교타자는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장효조가 타계하고 일 주일 뒤, 최동원 선수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묘하게도 최동원은 롯데에서 데뷔했지만 위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는 비슷한 시기에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명의 전설이 작고한 2011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지역 연고의 삼성과 롯데. 만약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되었다면 여러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한국시리즈가 되었을지도....
다만 당시 준우승팀인 SK의 감독이 하필 이만수라는 점에서 역시 특별하다면 특별한 시리즈가 되었다. 이만수는 장효조와 동시대, 같은 팀에서 뛰며 각각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와 최고의 중장거리 교타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동시에 지인로서는 유일하게 최동원의 임종을 지킨 절친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최동원을 추모하는 롯데와 장효조를 추모하는 삼성을 모두 상대했으니... 이만수 역시도 복잡한 심정으로 포스트 시즌을 치뤘을 듯 하다.

한국프로야구 레전드 다큐멘터리 장효조 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내레이션 by 안지환)

눈물을 꿀꺽 삼키며, 그는 떠났다.
길지 않았던 삶, 55년. 그 대부분은 야구장에서 보냈고, 그 나머지 역시 야구를 생각하면서 보냈다. 오직 야구만 생각했기 때문에 최고가 될 수 있었고, 오직 야구만 했기 때문에 더 외로웠던 사나이. 그는 이제 떠났다. 하지만, 그의 기록과 모습은 지워지지 않을 전설로 남겨졌다.

(중략)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3할 3푼 1리는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남겨진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멈추지 않는 도전과 의지, 끝을 봐야 멈출 수 있는 투지와 신념. 그리고, 오직 야구만 사랑했던 그 마음. 단순한 숫자, 그 이상의 기록.

이것이 바로, 장효조가 남긴 유산이다.

4 기타

  • 마구마구에서는 약간 느린 발이지만, 이를 송구로 커버하는 어깨 괴수로 출현. 특히, 삼성 세트덱에서 레어 87 장효조나 엘리트 83 장효조는 레벨업시 컨택트, 스로잉이 동시에 극상을 찍는 아름다운 탭간을 보여준다.어짜피 감독훈련이랑 이것저것 다 하면 발도 빨라서 뭐... 덕분에 플라이 이후 섣부르게 뛰었다간 끔살당한다. 더욱 충격적인 건 여태까지 나온 장효조 카드의 스로잉 평균은 80 중후반대이다.
  • 대구상고시절부터 프로까지 항상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모양. 고교 시절에는 4개의 주요 대회에서 3번의 타격상을 수상하고 소속팀의 우승을 4번이나 이끌었음에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된 적이 없었다. 프로에서 와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프로 첫해에 MVP급의 활약에도 시즌 MVP는커녕 신인왕도 수상하지 못했다.
  • 고교선수 시절, 장효조에겐 또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도루가 그저 몰래 한 베이스 이동하는 기술정도로 치부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홈 스틸을 성공시킨 적이 있었다. 그 점수는 그대로 결승점이 되어 그의 모교인 대구상고에 승리를 안겼지만 정작 본인은 홈 스틸을 성공시킨 후에 체력이 다해 기절하고 말았다. #
  • 최동원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가 5년만 빨리 생겼더라면 떡밥의 단골손님. 양준혁의 통산기록은 가뿐하게 넘었을 거라는 게 올드 팬들의 생각이다.
  • 프로 현역 말년기였던 1991년 3할 4푼 7리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타율 순위 2위에 랭크됐는데 이 때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장효조의 대구상고 후배이기도 한 이정훈 한화 이글스 코치의 증언에 의하면 장효조는 실업 시절부터 매일 경기가 끝나면 자기 전에 캔맥주 2개를 꼭 마시고 잠을 자는 루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1년 시즌 중 후배 이정훈과의 타격왕 경쟁을 위해 캔맥주를 매일 즐겨 마시던 루틴까지도 끊어버리고 그 시간에 타격 연습을 했다는 후덜덜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참고로 이 당시 장효조의 나이는 한국식 나이로 무려 38세였다.[19]
  • 현역 시절 자신의 집에 수십 개의 배트를 걸어놓고 치밀하게 관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를 두고 민훈기 해설위원은 "마치 무사가 예리한 칼을 관리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통산 병살타가 31개(!)밖에 안 된다.(통산 타석수는 3,632타석) 1%도 안된다. 흠좀무!
  • 전성기 시절 높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최다안타에서는 높은 순위에 들어간적이 별로 없는데, 이는 장효조, 이만수 같은 주전 선수들은 체력 안배를 위해 삼미 슈퍼스타즈전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시절 삼미는 최약의 약체팀이었기 때문에 주전 타자들과 투수들을 쓰지 않고도 압도적으로 이겼다고 한다.
  • 한편 그가 쓴 10번은 훗날 양준혁의 번호로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2011년 10월 25일에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고인의 아들 장의태 씨가 시구를 했는데 등번호가 331이었다. 그의 통산 타율 0.331에서 유래한것. 일각에서는 331번을 영구결번 처리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20] 거기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한정으로 유니폼에 검정색 원형 패치를 달고 경기에 나섰다."효조 행님. 고마 한번만 도와주소."[21] 패치에는 LEGEND HITTER JANG HYO-JO라고 씌어 있고, 가운데에는 0.331이 씌어 있다.
  • 2011년 한국시리즈 당시 우승한 삼성 선수들은 하늘을 가리키는 세레모니를 했는데 이 세레모니는 하늘나라로 간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긴 세레모니 였다고 한다.
  • 군인, 기업가, 정치인이었던 박태준 회장이 좋아했다고 한다. 1979년 한국실업야구포철 야구단에 영입할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달라던 장효조에게 돈까지 얹어준 일화는 유명하다. 계약금 1,500만원에 집을 제공해 주는 조건이었다.
  • 여담으로 모 팀추모경기와는 달리 삼성은 현재까지 장효조의 기일 내지는 추모행사가 있었던 경기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22] 장효조 감독이 별세한 2011년 당일 경기를 시작으로 12, 13년까지 3년 연속으로 승리를 거뒀으며, 2014 시즌은 기일에 경기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15년은 당일에는 경기가 없었으나 홈 경기였던 6일에 하루 일찍 추모행사가 열렸고 그 경기에서 승리하며 불패 징크스를 2015년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이 팀은 레전드 선수들 은퇴일, 경기, 감독님과 코치님의 기일에는 99% 진다 그러나 2016년에는 선발 요한 플란데가 불을 지르며 타선이 잘 따라갔으나 결국 큰 점수차를 뒤집지는 못 하고 패했다.
  • 대학진학 당시 집안사정이 좋지 않았다. 한양대학교가 야구 명문이긴 하지만 한양대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집, 생활비, 부속병원비 등을 전부 부담하겠다는 조건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 대구상고 2학년 때 대통령배 대회가 자신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자신감을 얻고 이후 봉황대기에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한다.
  • 육군 경리단에서 복무를 했었는데, 이 에피소드가 굉장히 골 때린다. 그 당시 군 야구단은 공군과 육군에만 있었는데 공군은 지원이고 육군은 징병이었기 때문에, 공군으로 가기 위해 시험을 쳤었다고 한다. 그 당시 육군 경리단 단장이 대령이었는데, 대통령과 육사 동기여서, 데려오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장효조 선수 본인의 표현으론 '체포해와라.' 라고. 이후 공군 입대 이틀 또는 하루 전에 헌병차에 납치되듯이 끌려가 육군 경리단에 입대했다. 그 후, 공군 VS 육군 라이벌 전에서 승리하고 3개월 특별 휴가도 받았다.
  • 1977년 4개국 대학선발 친선야구 대회에 참석하러 니카라과에 갔었는데, 대회 준비 위원회 측에서 애국가 테이프가 준비되지 않아서, 육성으로 직접 부르게 되었다. 당시 감독이 "저, 뭐냐 너 가서 불러라."라고 해서 불렀는데, 이후 대회 시작 전 나오는 애국가는 장효조 선수의 목소리였다.
  • 한양대학교 3학년 때 백호기에서 통산 5할 4푼 9리의 타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과연 타격의 신.
  • 장효조의 집이라는 가게를 했었는데, 그 당시 나이키프로스펙스가 서로 대한민국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하고 있을 때였다. 나이키에서 선전용으로 홍보를 위해 시도했었는데, 영리적인 건 없었고, 4~5개월 이후 문을 닫았다.
  • 930g 가벼운 배트를 주로 썼다. 본인이 스스로 가벼운 걸 선호한다고 밝혔다.
  • 타격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장타율출루율
1983삼성 라이온즈92317.369
(1위)
117
(1위)
19
(8위)
3
(9위)
18
(3위)
62
(3위)
61
(2위)
22
(4위)
.618
(1위)
.469
(1위)
198489309.324
(4위)
100
(8위)
19
(4위)
7
(2위)
74456
(4위)
8.498
(5위)
.424
(1위)
1985107346.373
(1위)
129
(2위)
24
(2위)
11165
(3위)
66
(2위)
17
(7위)
.543
(3위)
.467
(1위)
198695304.329
(1위)
10020
(6위)
264155
(7위)
16
(8위)
.467
(4위)
.436
(1위)
198788284.387
(1위)
110
(10위)
164
(9위)
258
(6위)
517.493
(4위)
.461
(1위)
198896283.314
(8위)
891224
(9위)
35415.413.419
(4위)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장타율출루율
1989롯데 자이언츠94333.303
(5위)
101831314012.354.407
(3위)
199096324.27589134122368.349.347
1991122346.347
(2위)
1201710
(2위)
4544511.488
(8위)
.452
(1위)
199282204.2655490025233.309.365
KBO 통산
(10시즌)
9613050.331
(1위)
10091573654437485109.459.430
(2위)
역대수상
년도수상내용
1983년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4년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5년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6년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7년시즌 MVP
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매일신문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불세출의 타격왕 장효조 上

  1. 실제로 테드 윌리엄스도 같은 일화가 있다
  2. 마구마구에서 장효조 카드가 타석에 들어서면 이효봉 해설이 이 멘트를 날린다.
  3. 양준혁이 말하는 것처럼 팬들도 현재 10번을 공동 영구결번하자는 분위기이다.
  4. 공식적으로는 1956년 생이었으나 실제로는 2살 더 많았다. 즉 데뷔 시즌에 이미 대한민국 나이로 30세, 다른 삼성출신 타격본좌 중 늦게 데뷔한 편들인 이만수양준혁이 한국나이 25세 데뷔였으니까 장효조는 이들보다도 4년이나 늦게 프로로 데뷔했던 것이다.
  5. 그 동안 대구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매일신문에서 연재된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기사에 따르면, 출생지가 부산 영도라고 한다. 부산 영선초교(현재는 남항초교와 합병)를 다니다가 9살 때 대구로 이사와서 삼덕초교 2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6.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79년에 입단해서 1980년 9월까지 포항제철에서 활약한후 10월부터 경리단 소속으로 뛰었다.
  7. 이 당시 롯데에서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자갈치' 김민호가 10번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8. 하필이면 이 장면을 이건희 당시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 겸 삼성그룹 부회장이 잠실야구장에 도착한 순간 직관했다고 한다.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 비해 직관 승률이 지극히 낮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이건희 당시 부회장은 이날 사무실에서 TV로 경기를 보다가 삼성이 경기를 리드하자 "이쯤 되면 내가 가도 이기겠지?"라고 생각하고 잠실로 향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만세 사건'을 보고 유두열의 역전 쓰리런 홈런까지 목격하게 된다. 이날 경기 이후부터 이건희 회장이 야구장에 가는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9. 당시 1시즌 경기는 총 100경기였다(원년에 80경기, 이후 100경기로 늘어났고 증감을 거쳐 2013년부턴 128경기). 교타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해에는 18개의 홈런을 쳐서 리그 3위를 기록(이는 1991년 쌍방울김기태가 27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신인 좌타자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다). 참고로, 1983년 홈런 1위는 이만수(27개), 2위는 김봉연(22개).
  10. 오마이뉴스의 김은식에 따르면 '참신성이 없다' 라고...사실 프로에 오기 전에도 성인 야구무대인 실업 야구에서도 커리어가 쌓인 고참급 선수이기는 했다. 입단 당시 나이만 봐도 현재를 기준으로 해도 중참에서 고참으로 넘어가는 단계.
  11. 이 이유에도 나름 근거는 있는게,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사실상 전신이라고 봐야하는 실업야구에서 충분히 활약을 한 선수를 신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건데, 종목은 다르지만 프로농구에서도 이상민이 실제로 현대전자에 입단한 후 거의 뛰지 않고 바로 상무에 입대하고 프로 2년차부터 현대 다이냇 소속으로 뛰면서 MVP를 수상했음에도 불구, 신인왕 투표에선 주희정에게 밀렸던 예가 있다. 어떻게 보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일본리그출신 선수들에게 신인왕 자격을 주는것이 합당한가 하는 논란이 종종 벌어지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12. 같은 타자를 1번부터 9번까지 도배했다는 가정하에 9이닝 당 얻을 수 있는 예상 득점을 계산하는 기록, 자세한건 야구의 기록 계산법 참고.
  13. 1987년 올스타전 화면에서도 나오지만 이 해 전기리그 타율이 무려 0.419였다.
  14. 한 시즌 110경기 중에 107경기에 나와서 때린 기록. 경기당 1.2개씩은 꼬박 친 셈이다. 2016년의 경기 수준으로 환산하면 약 174개에 이른다.
  15. 장효조의 경우, 당시 대한민국이 못 살던 시절이라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죽는 경우가 많아 아이가 어느 정도 큰 후에 호적 등록을 해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가 차이가 나는 것. 그리고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로는, 지금처럼 행정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 시골에서는 면사무소까지 거리가 워낙 멀어 바쁜 시기에 거기까지 찾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1954년이면 그야말로 전쟁 직후로, 무너져버린 삶의 터전을 재건해야 하는 시기였으니 더더욱 그러한 부분을 신경쓰기 힘든 시기였다. 출생신고가 늦더라도 원래 생일로 주민등록을 하면 되긴 하지만,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에 그냥 생일을 늦춰서 신고해버린 것. 잘 보면 실제로 우리 부모님 세대를 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 이 항목을 수정하고 있는 위키러의 부모님 두 분 모두 실제 생년월일과 주민번호가 맞지 않다.
  16. 여담이지만 중남미 선수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계약금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이를 속이는 것. 예외도 있긴 한데 아드리안 벨트레의 경우 천부적인 재능을 보고 계약했지만 계약 당시 나이가 만 15세라 만 16세부터 프로 활동이 가능한 메이저리그 규정 때문에 일부러 나이를 만 16세라고 속였다. 하지만 이 페이크가 걸려서 결국 1년 정지를 먹고 진짜 만 16세가 되던 해부터 마이너 생활을 시작했다. 매우매우 희귀한 케이스.
  17. 하지만 이 경우, 투구와 일상생활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므로 엄밀한 의미의 왼손잡이는 아니다. 손아섭은 대두도 아니다.
  18. 부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삼성의 스카우트로 복귀할 때 엉엉 울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은 남편이 우는 모습을 그 때 처음 봤다고 한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는 트레이드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였기에 선수들이 트레이드된 팀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떨어졌다. 최동원은 삼성으로 이적한 후 야구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고, 김시진도 롯데로 이적한 후 마찬가지였다.
  19. 당시만 하더라도 30대 초반의 나이에 들어서면 '노장' 취급을 받았고 30대 중반에 대부분 은퇴하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장효조는 무려 39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2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455(연속경기 매진 신기록),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중계 캐스터 톰 치크의 4306(연속 경기중계 수)로 세 자릿 수 이상의 영구결번이 있다.
  21. 류중일 감독의 우승 후 실제 인터뷰 내용.
  22. 매년 6월 10일김상진의 기일만 되면 KIA는 대부분 진다. 근데 2016년에는 오랜만에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