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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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이상향을 꿈꾸었던 구한말혁명가.

1 소개

全琫準[1],1855 ~ 1895. 조선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1980년대 교과서나 위인전에선 1854년생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다만, 정작 전봉준 본인은 동학교도가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

전봉준은 천안 전씨 시조인 전섭(全攝)의 53대손이다. 전봉준의 선조 가운데 종6품 선무랑, 정5품 통덕랑의 벼슬을 지낸 인물도 있지만 전봉준의 증조부인 전도신(全道臣) 이후로는 관직을 지낸 인물이 보이지 않고 서당,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몰락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彰赫), 형호(亨鎬), 승록(承祿) 등의 이름과 함께 족보명은 기창(基昶)으로 나오고,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彦陽)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고창 당촌마을에서 서당 훈장, 고부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또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과 비슷)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 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라는 별명을 들었다.

2 젊은 시절

전봉준이 젊었을 때 가정생활은 상당히 곤궁했다.〈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에 보면, 땅은 논밭 합쳐 3마지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 마지기는 약 6백평(0.19ha)에 해당하는 면적으로, 당시 빈농층의 일반적인 소유 면적 수준이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모자란 면적이다.

고창 당촌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전봉준은 가세가 기울어짐에 따라 순창, 임실 등을 떠돌다가 서른 살 즈음 고부마을(지금의 전북 정읍시 소재)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주기도 했다.[2]

30대에 동학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약 2년 남짓 흥선대원군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훗날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소통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전봉준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3 개혁의 꿈을 품다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 군수 조병갑[3]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고 부조금으로 2000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부친이 항의하다가 곤장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분노한 그는 이때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큰 뜻을 품게 되었고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정부에서는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안핵사(대책본부장 격)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이용태의 횡포도 극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놈이 그놈.어휴 그 전에 왔던 새 군수 박원명은 그래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그냥 답이 없다.

4 동학농민운동

이에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교도와 농민 1만여 명을 모아, 동학군을 조직하여 그 유명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다. 이때 동학교도 중심의 북접은 폭력에 반대하여(여기에는 교주 최제우의 명예 회복에 누가 될 것을 우려한 이유도 있다) 동학농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학군은 전주성을 함락하는 등 세력이 확대되었고 조선 조정이 깜짝 놀라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그 때는 이미 조정이 파병을 요청한 청군과 톈진조약을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이미 조선땅에 들어온 뒤였고 이들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잠시동안의 평화는 깨지고 만다.[4]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군대를 보내 도성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면서 멋대로 개화정책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이번에는 척왜근왕을 외치며 농민군을 모았고 북접도 이에 합류하면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한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조직력을 갖춘 조선-일본 연합군에 참패했고 순창으로 퇴각해 다시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부하 김경천(金敬天)[5]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된 후 사형당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사형당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도는데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참고로 재판을 받고[6] 교수형당했는데 오랫동안 동학혁명군 강경파 지도자였던 김개남의 효수된 사진이 전봉준의 시신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7]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은 이 항목에 첨부된 사진으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것이다.

애초에 관군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들을 사형시킨 뒤 시신들을 유족에게 넘기지 않아서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한성에서 사형당한 전봉준의 시신은 현재 단국대학교 야산에 버려졌고 김개남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임실군 학암리 야산에 버려졌다고 전해지며 그 외 손화중, 최경선 등의 경우는 아예 행방이 묘연하다. 그대로 암매장했기 때문으로 추정. 이런 까닭에 현재 정읍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의 무덤이 있지만 모두 시신이 없는 가묘이다. 김개남의 경우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임실군 학암리 야산 일대에서 2010년과 2011년 시신을 찾기 위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갈가리 찣겨 버려졌으면 들짐승에게 먹히거나 해서 뼈도 남을 리가 없다

2016년 9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전북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에 있는 전봉준의 추정 묘역을 발굴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은 주민들 사이에 전봉준 장군의 묘라고 전해져 왔고, 30여년전 '將軍天安全公之墓'(장군천안전공지묘)라고 쓰여진 1미터 높이의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8]

5 그의 가족

전봉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의외로 없다. 본인의 자료가 남아있는 게 없고 가계에 관한 1차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차 재판 기록에서는 부인과 2남 2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장남 전용규은 후손 없이 사망, 차남 전용현은 행방불명이 되어 남계 후손은 단절되었다. 여계 후손으로는 장녀 전옥례는 아들 둘, 차녀 전성녀는 딸 하나를 뒀다고 알려져 있다. 전옥례의 경우 15세 때 아버지가 사형당한 후 화를 피하기 위해[9] 마이산 금당사로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로 지내다가 23살 때 결혼해서 두 아들을 뒀다고 한다. 전옥례는 1963년 갑오 동학 혁명제가 열리자 세상에 전봉준의 딸이라고 나타났으며 1970년 사망했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 가족 관계를 증명할 기록과 증언을 할 주변 인물들이 사라지면서 이 사람이 전봉준의 후손이라는 증거는 없고 따라서 전봉준의 후손은 현재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특별법 제정에 따라 유족이라는 사람이 4~5명이 유족 신청을 했으나, 전봉준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 유전자 감식이 불가능하고 관련 증빙 자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했다. 확실한 후손들이 남아 있어 유족으로 지정되고 제사도 받고 있는 다른 동학 간부들과 달리 전봉준은 후손이 불명확하여 천안 전씨 종친회에서 1954년 제사를 대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봉준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별도로 제사를 지내고 있긴 하다.

6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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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 교과서 등에 자주 나오는 전봉준의 모습이 찍힌 유일한 사진. 왼쪽에 있는 제복 입은 인물이 개그맨 정만호를 닮아 화제가 된 적 있다(...).맨 앞에 추성훈? 이 사진은 1895년 2월 28일 즈음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으로 이감될 때에 찍힌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전봉준이 가마를 타고 있는 이유는 체포될 때 구타 때문에 정강이가 부러져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은 이 사진을 보고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 시는 그의 등단 작품이다.
  • 전봉준의 봉기와 실패는 조선 민중들의 기억에 남았고 그것을 가지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 민요가 바로 파랑새이다. 전라도 지방에선 해방 후에도 자주 불려졌다고 한다. 들어보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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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딜 가나 다 같은 사람이지만, 초목과도 같이 땅에 그 뿌리를 두는 까닭에 자기 땅을 떠나면 사람이 바뀌거나 시들고 마는 법. 나는 죽는 날까지 조선의 농민으로 살고 싶네. 그런데 젊은이, 아까 그 이야기 말이네만 나라의 이득이나 겨레의 형편을 넘어서는 도리가 있음을 자네는 믿는가?[11]
  • 일본만화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 등장한 전봉준. 위 장면은 왕도의 개 4권에 나오는 장면으로 동학농민운동도 작중에서 묘사되고 있다. 작중에서 작가는[12] 동학농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편이다.[13] 이 만화에서는 단순히 등장한 정도가 아니라 주인공인 카노의 사상에 김옥균 다음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특히 반제국주의라는 대의를 카노에게 심어주는 인물.
  • 홈경기장이 전주에 위치한 전북 현대 모터스의 서포터들이정몽준이 아니라[14] 전봉준의 얼굴이 그려진 게이트기를 걸기도 한다. 한때 대전, 인천과 더불어 강성 서포터 3대장이었던 MGB가 김개남 장군을 걸지 않는게 이상하지만 포항의 박태준 걸개와 같이 지역, 팀의 특성을 살린 좋은 걸개.
  • 후대에서는 위의 사진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상투머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아기들의 윗올림머리나 여성들의 소위 똥머리를 전봉준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폄하는 아니지만 뭔가 죄송하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이름에 관해서는 전병호(全炳鎬), 전철로(全鐵爐)라는 기록도 있다.
  2. 동학교주 최제우와 비슷한 처지로 보인다.
  3. 양주 조씨 가문으로 영의정을 지낸 백부 조두순의 빽을 믿고 날뛰었다.
  4. 얼마전 발굴된 '일청전쟁 선전조칙 초안' 에서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도 선전포고 대상에 포함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뒤통수
  5. 연해주 빨치산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김경천(金擎天) 장군과 햇갈리지 말자. 시대도 다르고 한자도 다르다.
  6. 재판장이 갑신정변의 주역 서광범이었다.
  7. 한 때 위인전에도 버젓이 사진이 실려 있었다(그나마 측면에서 찍은 걸 기재). 게다가 출판사(특히 금성출판사)에 따라 김개남의 생전모습도 같이 실려있는 것도 함정.
  8. 전성옥 (2016-08-23), "녹두장군 묘일까"…동학혁명재단 '전봉준 추정 묘역' 발굴조사, 연합뉴스.
  9. 연좌제가 폐지되어 동학 간부의 가족들에게 법적인 해는 없었지만 양반들의 공적이나 다름없던 전봉준의 가족이 무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10. 70년대에 녹음해서 컴퓨터로 옮긴 것. 녹음 또는 파일 변환 때 문제가 있었는지, 소리를 아주 크게 해놔야 겨우 들린다.
  11. 왕도의 개 4권에서 볼 수 있는 장면. 피신을 권유하는 주인공 카노의 말을 거절하며 한 대사다. 이 질문에 카노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전봉준도 "나도 믿네.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12. 동학농민운동에 일본군이 개입한 것을 일본 극우들은 "동학폭동을 막고자 정당하게 끼어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 해당 만화인 왕도의 개는 극우라든가 혐한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니 오해하지 말자. 오히려 이 작품은 일본의 팽창정책에 대단히 비판적인 작품이며 작중에서 동학농민운동을 극우들의 해석처럼 "폭동"으로 규정한 게 아니라 진정성과 대의가 있는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13. 그런데 실제 동학농민운동 중에 일본 낭인들 중 급진적 이상주의자들의 단체인 천우협이 동학군에게 근대적 전술훈련과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접촉한 적이 있고, 후일 이 인연을 바탕으로천우협이 발전한 조직이 그 악명높은 흑룡회 동학 지도자들 중 일부가 친일파로 변해 일진회에 참가하게 되는 뒷사정이 있다.
  14. 정몽준의 현대중공업은 울산의 스폰서를 맡고 있다. 울산의 스폰서는 현대그룹의 사정에 따라 여러 번 복잡하게 바뀌었으나, 전북의 스폰서는 줄곧 현대자동차였으니 굳이 따지자면 정세영 정도를 기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물론 지금에서는 의선 느님을 걸어야 맞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