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현

鄭光鉉
1902년 생 1980년 몰 대한민국 친족상속법의 비조(鼻祖)이다.
190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을 아버지가 세운 사립학교에서 마쳤으며, 평양고보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하여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된 정광현은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정광현은 정칙영어학교에서 중학과정을 마친다음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제6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수학을 잘하여 이과(자연계)를 지망하였지만, 색맹 때문에 문과(인문-사회계)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 후 정광현은 동경제국대학 영법과에 입학하였고, 1930년 졸업하였다. 그 후 1년 정도 경제학과에 학사편입하여 공부하다가 평양에 소재한 숭실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어 귀국하였다. 정광현은 윤치호의 딸인 윤문희와 결혼하였다. [1]

그 후 정광현은 이화여자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에서 법학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흥사단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경찰의 취조를 받는 곤욕을 치루었다. 장인인 윤치호가 아니었으면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정광현은 어떤 논문을 통해 창씨개명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방법을 설파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정광현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전공은 친족-상속법과 한국 법제사였다. 당시로선 많은 나이임에도 정광현은 친족-상속법과 관련된 여러 업적을 말그대로 '쏟아내었다.'

인재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우리나라 친족-상속법의 대가인 김주수 교수와 한국 법제사의 대가 박병호 서울대학교 교수가 정광현에게서 배웠다. 정광현은 대학원생을 엄격하게 트레이닝시켰는데, 어떤 제자가 죽여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흠좀무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한 정광현은 1970년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0년 메릴랜드에서 세상을 떴다.

  1. 윤문희가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봉직하였다는 내용의 인터넷 글이 나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오류는 윤문희의 이력을 정광현의 것과 혼동한데서 비롯되었다. 윤문희는 엘리트 코스와 전혀 거리가 먼 가정 주부로 생애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