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환

이름정용환 (鄭龍煥 / Chung Yong-Hwan)
출생1960년 2월 10일
사망2015년 6월 7일
국적대한민국
포지션센터백
신장178cm
유스팀고려대학교 (1980~1984)
소속팀대우 로얄즈 (1984~1994)
국가대표85경기 3골
지도자신흥중학교 (2004~2006), 신흥고등학교 (2004~2006)
양주시민축구단 (2007~2008)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2011~2015)

정용환은 한국의 80년대를 대표하는 중앙수비수이다. 아직 동래가 부산이 아니던 시절 동래에 살던 정용환은 어려서부터 여러 운동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개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한 나머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팀이 없어졌음에도 축구를 하기로 마음먹고, 축구부가 있는 장안중학교로 진학한다. 팀에서 한계를 느낀 정용환은 친구 1명과 같이 부산진중학교로 3학년 때 전학, 대한축구협회장배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수비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는 동래고로 진학하게 된 정용환은 본인의 말마따나 운때가 맞아, 동래고 출신인 김호가 마침 동래고 지도자로 부임해오게 되어 그의 지도를 받게 된다. 전설적 수비수인 김호의 지도 아래 정용환은 기량이 부쩍 성장하게 된다.

178cm의 작은 키지만 정용환은 고등학교 시절에서부터 높은 곳에 줄로 공이 매달아져 있는 기구를 통해 연습 전 30분, 연습 후 1시간 가량 헤더 연습에 매진한다. 이뿐 아니라 항상 발뒤꿈치를 들고 걷고, 그럴싸한 높이에 있는 나뭇잎은 한 번씩 쳐 보고, 테니스장에 들어가 테니스 네트의 가장자리 높은 쪽을 뛰어넘는 연습도 꾸준히 하는 등의 노력이 결실로 이어져 독보적인 점프력을 소유하게 되고 청소년 대표로 발탁된다.

고려대로 진학했으나 구타에 신물이 난 그는 대학교 3학년 때도 얻어맞자 운동을 접을 결심까지 하지만 결국 축구와 헤어지지 못하고, 이 3학년 때 인도네시아의 마라하림컵에서 고려대가 우승을 차지하고 국가대표로까지 발탁된다. 정용환은 브라질 포르투게사와의 친선전에서 데뷔, 국가대표 데뷔골을 뽑아낸다. 또 국가대표에서 정용환은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는 것을 접하고, 이제까지의 노력을 웨이트 트레이닝에 쏟아붓는다.

대학교 생활을 마치고 대우에 입단한 정용환은 프로데뷔 첫해에 우승을 맛보게 되며, 베스트 11과 감투상을 수상한다.[1]

정용환은 85년과 86년, 대우에서 총합 5경기밖에 못 뛰는데 이동국 등이 경험했던 청대와 국대 돌림빵 때문이었다. 다행히 정용환은 이미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이 지난데다가, 웨이트를 열심히 하는 선수였고 포지션도 수비수여서 큰 부상이 없이 넘어갔다.

86년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 정말 오랜만에 진출하게 되는데, 정용환은 주전수비수로서 커다란 활약을 했다. 특히 일본과의 홈경기, 원정경기 2경기에서는 신들린 활약을 했던 것으로 회자되며, 원정경기에서는 일본 공격진들을 다 잡아먹음은 물론 선제 중거리포까지 터트리며 승리의 1등공신으로 활약했다.

월드컵 본선을 나름대로 치러낸 정용환은, 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뛰며 금메달을 차지한다.[2]

이듬해 정용환은 시즌의 반 정도는 대우에서 뛰게 되는데, 그럼에도 베스트 11으로 선정되며 대우는 32경기 20실점을 기록하는 짠물수비를 통해[3] 우승을 차지한다. 이듬해 대우는 아시안클럽챔피언십 우승을 바탕으로 1회 아프로-아시안클럽챔피언십에 출전, 우승을 거두며 2대륙 종합 챔피언의 좌를 차지한다.

정용환은 87년 세계 유니버시아드, 88 올림픽, 90 월드컵 예선, 남북 통일 축구대회, 90월드컵 본선 등등에 출전하며 국가대표로서의 활동에 매진한다. 91년 프로축구팀에 매진하게 된 정용환은 30대로 선수생활의 전성기에 접어들어, 33경기 2골을 기록하며 대우에 우승을 안기며, k리그 mvp마저 차지하게 된다. 베스트 11, 모범상까지 3관왕을 차지하며 홍명보 이전 최고의 수비수임을 증명해냈다.

92년에는 진로방해로 경고를 먹으며 프로진출 이후 최초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94년 35세의 나이로 월드컵 멤버로 선발되었으나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탈락하게 되었고 은퇴로 이어졌다. 실은 무리한 점프와 헤더 연습으로 이미 발목의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으나 이따금씩 부상으로 제외되던 것을 빼면 오랜 시간 아픔을 참고 경기해 오던 것이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이다.[4]

정용환은 선수 시절부터 엄청난 노력을 통해 육체 능력을 향상했는데, 일례로 국가대표 발탁 후 휴식시간이 주어져도 당구 등으로 모처럼 여가를 보내는 동료들과 달리, 국대훈련에서 처음 접해본 근력운동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하체(근력운동, 높이뛰기)와 상체(근력운동)가 골고루 발달해 김호 감독이 "꼭 육상 단거리 선수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을만큼 몸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 "한 때 힘으로만 승부하는 선수라 오래 못갈 것"이란 악평까지 나왔던 것도, 여기에서 기인. 하지만 세간의 무지와는[5] 다르게 발목 부상으로 국가대표를 그만두기 전까지 11년 동안 국가대표 부동의 수비수로 있었으며, 178cm였지만 197cm였던 외국 국가대표에게도 지지 않은 도약력과 헤딩능력, 그리고 유럽 선수들과도 겨룰 수 있는 탄탄한 몸은 정용환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또한 틈틈히 적어둔 연구자료를 활용하며 남다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특히 당시 한국 수비의 대세였던 대인 방어에서 당대 가장 뛰어난 한국 선수로 평가받았다. 경고를 안 받기로도 유명했다.

이후에는 유소년 대표 상비군을 지도하고, '정용환 어린이 축구교실'을 만드는 등 유소년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위암으로 2015년 6월 7일에 타계했다.
  1. 신인왕은 이듬해 만들어지며, 감투상으로는 정용환의 활약을 기리기 부족해서라는 속설도 있다.
  2. 한국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야 다음 금메달을 차지한다.
  3. 현대가 40실점으로 그 다음이었다.
  4. 수술하러 일본에 간 정용환은 의사로부터 이 사람이 인간이냐는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아킬레스건이 반 정도가 끊어진 상태로 말려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즉 이미 끊어진지는 오래 되었고, 참고 뛰다 보니 그것이 말려서 올라간 것. 정용환은 심각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참고 뛰었다고 한다.
  5. 국가대표에서는 선견(先見)적으로 근력운동을 권장했지만, 아직 국내 전반적으로는 "몸이 느려진다."는 오해로 인해, 날렵하지만 유럽 선수들과의 몸싸움에는 경쟁력이 약한 선수들이 양산되고 있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