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조선)


조선의 역대 국왕
21대 영조 이금22대 정조 이산23대 순조 이공
정조 , 이길범, 1989년
묘호정종(正宗)→정조(正祖)
시호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공선(恭宣)[1]
본관전주(全州)
능묘건릉(健陵)
이산→이성(李祘)
형운(亨運)
홍재(弘齋)
출생지한성 창경궁 경춘전
사망지한성 창경궁 영춘헌
배우자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양아버지조선 진종(효장세자)
양어머니효순왕후(孝純王后, 현빈) 조씨
아버지조선 장조(사도세자)
어머니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혜경궁 홍씨)
생몰
기간
음력1752년 9월 22일 ~ 1800년 6월 28일
양력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47년 9개월 21일, 1만 7460일.)
재위
기간
음력1776년 3월 10일 ~ 1800년 6월 28일
양력1776년 4월 27일 ~ 1800년 8월 18일(24년 3개월 21일, 8878일.)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태조 고황제진종 소황제장조 의황제정조 선황제순조 숙황제문조 익황제헌종 성황제철종 장황제
조선의 역대 왕세손
진종 이행 (왕세자)정조 이산문효태자 이향 (왕세자)

1 개요

수많은 암살 위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인내불굴의지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조선의 마지막 개혁 군주.

조선의 22대 임금.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며, 선왕인 영조(英祖) 28년에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년)에 세손(世孫)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에 장헌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자 조세(早世)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사망하였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2]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정조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798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여기에서 정조가 말한 ‘그 속에 담긴 은미한 뜻’이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조선사에서 성군 하면 흔히 전기의 세종대왕과 후기의 정조가 꼽힌다.

2 인 祘에 대해

정조의 휘인 '祘'은 셈할 산(算) 자와 같은 음으로 읽기 때문에 흔히 ''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산'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정조 당대에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의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보면 발음이 '셩(현대 한국어 음가로 치환하면 '성'이 된다)'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규장전운'이란 제목 앞에 붙은 '어정(御定)'이란 임금이 정한 것이라는 의미이니 이 발음사전이 다름 아닌 당시의 군주 정조에 명령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으며 정조 본인이 직접 감수까지 한 결과물이고, 또한 일제강점기지석영도 《자전석요(字典釋要)》라는 한자 사전에서 이 글자의 음을 '셩'이라고 표기한 이유로 이런 이유로 정조의 휘를 '산'이 아니라 겹홀소리의 홑홀소리되기를 감안하더라도 '성'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사실 요즘 시중 옥편에서 저 글자를 '산'이라고 표기해 놨기 때문에 흔히 '이산'이라고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 글자를 '산'이라 읽지 않았다는 것.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글 참고.

그런데 이 논란을 뒤집는 연구결과가 나왔으니, 정조 즉위 당시까지만 해도 '산'이라고 읽었으나, 즉위 20년째인 1796년에 '산'의 발음을 '셩(성)'으로 고쳤다는 결론이 나왔다.

改戶曹算學算員爲籌學計士, 改理山爲楚山, 改尼山爲尼城, 以御名音同也。

호조의 산학 산원(算學算員)을 주학 계사(籌學計士)로, 이산(理山) 은 초산(楚山) 으로, 이산(尼山) 은 이성(尼城) 으로 고쳤으니, 발음이 어명(御名)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조 1권, 즉위년, 5월 22일, 5번째 기사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80년대까진 정조의 이름을 이성으로 알았다가 이산으로 고쳤는데 이제 결론이 위와 같아졌다는 것이다.

또한 선대인 영조대의 운서에 동자 관계인 算자에 어휘(御諱)라는 내용이 있어서 이 주장에 근거를 실어주게 되었다.# 참고. 그 이유는 원래 규장전운의 해당자리에 있던 渻자를 쓰던 약봉 서성(徐渻)이 자손이 매우 많아 그를 부러워 하여 그의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채워넣은 것이라고 한다.

3 생애와 업적

할아버지인 영조와 함께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끈 임금으로 평가된다. 또한 막장 드라마나 각종 작품들의 소재가 될 정도로 인생이 상당히 다이내믹한 왕이었기 때문에 후대에도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겼다.

width=100%width=100%
정조가 유아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편지. 정조는 8세에 세손에 책봉되었으므로, 자신을 원손이라 칭하는 이 편지는 세손 책봉 이전에 쓰인 것이다. 해독은 오른쪽 이미지인데, 해석되지 않은 '상풍의'는 현대어로 옮기면 '상풍(商風)에', 즉 '가을 바람에' 정도의 의미다. 의역하자면 '날씨가 쌀쌀한데' 정도 되겠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정한 정치판에 의해 끝내 할아버지의 손에 죽는 무서운 광경을 보고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사실 이 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외갓집으로 내려가지만 곧 어머니와 생이별해 궁으로 돌아간다. 이때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에게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3]

왕세손 시절에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실록에선 단 한번도 세손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참 대조적이라서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사실 영조가 일부러 흠을 잡는다 해도 불가능할 법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잘하긴 했다. 이는 살아남기 위한 정조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살아남아서 왕위에 오르려면 영조에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게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긴 했어도 엄연히 죄인인 아버지[4]의 아들로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영조에 의해 죽은 백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계승권을 유지하게 된다.[5]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은 어렸을 때 생모를 잃은 연산군과 비슷하기 때문에 비교되곤 한다. 다른 점은, 연산군은 성종이 사실을 숨겼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세손 시절 궁료로서 주위에 둔 측근으로 홍국영[6], 김종수[7], 정민시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서명선[8] 등이 있다. 이 중 홍대용은 50대 초반에 사망하며 재위기간을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했고, 홍국영은 전횡을 부리다 정조가 주도적으로 판을 짜고 동료였던 김종수 등이 등을 돌리면서 숙청당한다.</ref>

즉위하면서 한 말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내용에서 참고 바람.

그 후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척신(홍인한, 정후겸)들에 대한 척결을 완료했다. 이후 대비의 오빠인 김귀주를 유배 보냈고, 정조 4년에는 심복이던 홍국영을 ''하였다.[9]

홍술해의 아들인 홍상범과 그의 어머니 효임 등이 강용휘와 전흥문을 포섭하여 정조가 글을 읽던 존현각까지 침투시켰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홍계능, 홍상길, 홍신해, 홍이해 등 남양 홍씨들이 집단으로 연루된 모반이 드러나면서 일대 피바람이 불기도 했었다. 이 존현각 자객 침투사건은 홍계희 계열의 숙청을 위한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임금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누가 들으라는 듯 공연히 소란만 떨다가 사라졌고 이후 경비가 삼엄한 담장을 재차 넘다 걸렸다. 이 사건으로 홍계희 계열이 말끔하게 숙청된다. 이 사건으로 정조는 자신의 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했다.[10] 이외에도 이유백, 이택징, 권홍징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조 앞에서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지 않고 나라고 하며 정조를 걸주와 같은 폭군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탕무와 같이 반란으로 정조를 쳐없앨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홍국영이 추천했던 산림의 영수인 송덕상을 삭탈관직하는 과정에서 호서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며 반발한 사건이 있었으며[11] 그 이후에도 많은 유생들이 노골적으로 정조의 뜻에 거스르는 행보를 밟다가 유배되었다. 송덕상의 제자라고 자임한 문인방이라는 자는 강원도에서 병사를 모아서 동대문을 치려다가, 박서집[12]의 고변으로 처형당했고 문양해라는 자가 가상의 신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정조에게 숙청당한 김귀주, 홍국영 쪽 사람들과 연계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13]

거기서 또 끝이 아니라서 홍국영에게 충성하던 훈련대장 구선복, 구이겸, 구명겸 등의 무장 일파가 문양해와 내통하여 상계군 이담을 옹립하려던 계획이 정순왕후에 의해 들통나기도 하는 등 정조 초반부는 거의 반란과 역모의 연속이었다. 상계군 이담은 홍국영이 축출된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하다가 정조 10년에 구씨 가문의 반란이 들키기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그의 아비 은언군 이인을 죽여야 한다는 청이 정조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정순왕후에 의해 죽는다.

각설하고 군제 개혁을 하고 수원화성을 지은 것도 이러한 반대파들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는 희박하다. 장용영과 화성은 상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호위하고 머물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 까닭은 자신의 대에 성공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추숭을 완수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순조에게 몇번이나 강조한 바가 있다. 물론 그러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긍정적인 평으로는 탕평책을 피고 학문적이고 문화적인 통치를 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는 점이다. 또한 외국의 문물을 수입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유명한 실학자들은 대부분 영조, 정조 시기에 등장하였다.

또한 초월적 군주를 자처하면서 홍문관의 기능을 분산한 학술기관 규장각을 세우고 서얼 출신(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들을 등용하여 서학을 익히게 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종로 앞 거리에 육의전이 차지하는 물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을 취급하는 사전을 열 수 있게 하여 조선의 상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만천명월주인옹', 즉 '온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는 뜻의 정조의 호가 바로 이러한 초월적 군주를 지향한 정조의 정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규장각은 후에 너무도 비대한 권력기구가 되어 홍문관을 비롯한 대간을 무력화시키고 기존의 성균관마저 유명무실화 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왕권강화를 위하여 장용영이라는 자신의 직속부대를 만들었으며, 이조전랑 추천권을 완전히 폐지하여[14] 탕평책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속대전을 보완한 법전인 《대전통편》, 외교문서집인 《동문휘고》를 편찬하기도 한 것도 업적으로 꼽힌다.

3.1 엄친아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스스로 학문무예를 닦는 것은 물론 냉철한 판단력과 과감한 추진력을 갖춘 노력으로 만들어진 천재.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냐"며[15]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다는 점. 조선판 팩트폭력 실제로 정조는 "경들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하면서, 임금 자신이 직접 교육시켜 중하급 관리들을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실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공부 좀 하쇼"같은 엄마 같은 잔소리 멘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단한 독서광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16]. 사관이나 승지들이 적절한 인용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으면 정조는 "어느 책 몇 쪽 몇 번째 줄에 뭐라 되어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어느 책의 몇 쪽에 몇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 적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신하들이 크로스체킹을 할 겸 직접 원문을 찾아봤는데, 왕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이런 사례는 서애 유성룡이나 율곡 이이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정조가 다른 업무로도 하루 종일 바쁜 왕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시대 왕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왕이 모든 경서를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정조다.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정조는 자신이 그 책을 암송할 때까지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저서나 기타 저서에 자신이 새로 주석을 다는 등 자신의 집필서를 묶어서 홍재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미 동궁시절 때부터 주자대전, 주자어류의 선집인 선통, 화선, 회영을 엮어내었고, 이후에는 주자가 평가한 두보와 육우의 시를 모아 두육분운, 두육천선을 엮었으며 말년에는 아송을 펴내는 등 시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특히 주자의 저서에 자신의 주석을 달았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당대의 네임드 유학자 윤휴, 박세당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설령 임금이라 해도 얼마든지 문제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무런 이야기 없이 출판까지 제대로 거친 것은 당대에 정조의 학문적 성취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7].

경연 과정에서 정조가 밝히는 유학에 대한 소견에 있어서 당대의 학자들치고 제대로 받아치거나 혹은 반론을 제기한 경우가 없다. 근본적으로 정조가 시행한 초계문신제 자체를 봐도 전례가 없는 제도로써, 이러한 제도 자체에 신하들이 완전히 제동을 걸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정조의 유학적 소양이나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서학에 대한 견해 자체도 정약용의 저서를 읽어보면, 문체반정을 일으킨 이유를 모를 정도로 개방적으로 나온다. 특히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능력 자체는 후대 사람들보다 빠르고, 이해력도 높아 아주 적극적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문체반정에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문체 반정 자체는 유교 근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장파, 남인 계열에서 서학이 유행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강조하는 측면으로써의 문체반정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세워 사학을 물리친다는 정조의 기본 방법론은 주로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인 계열 그리고 후에 시파로 분류되는 파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들은 근본적으로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다. 이러한 문체 반정과 정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방법을 통해 정조 연간에는 윤지충 사건을 제외하면 극렬한 서학 탄압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실질적으로 문체 반정 과정에서 이가환, 김조순 등이 사실상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홍재 전서 중에서는 옥편도 있다. 즉 이미 훈고학이나 고증학에 있어서도 달인. 임금이 쓴 책이라고 다 출판해주는 게 아닌 조선의 깐깐한 출판 구조와 임금이 쓴 책이라도 엉망이면 신하들이 미친 듯이 깠던 성리학적 전통을 고려하면, 옥편까지 나온 시점에서 정조의 학문적 수준의 달성은 쉽게 가늠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신하들이 아 우리 임금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셨다.라고 묘지문(墓誌文)을 적은 경우가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정조 밖에 없다.[18][19] 심지어 20자로 휘호를 정해오지 않았다고 신하들을 면박을 주고, 세조라는 시호가 왜 안되냐고 신하들을 협박한 예종조차도 자신의 부친인 세조의 묘지문에 성인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고[20], 그 이전에 세종도 그렇게 쓰지 못했다. 즉 정조가 유일무이한 셈.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백성은 먹을 것 없이는 있을 수 없으니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그러니 군주는 모름지기 군주의 하늘인 백성을 잘 섬기고, 백성의 하늘 또한 잘 섬겨야 한다.[21]
경연 신하가 백성이 상언하여 격고하는 것이 근래에 매우 외람되고 잡스럽다고 하자 하교하길 불쌍한 저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가슴에 깊이 원한을 품고도 스스로 현관에게 아뢸 수 없어 분주히 와서 호소하는 것이니,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 저들은 실로 죄가 없다. 그렇게 만든 자들이 죄인이다.

독서광이었던 것은 사실이라, '일득록'에서 그 성격이 잘 드러난다.

상이 말하길 요사이에 읽는 책이 어떠한 것이 있느냐? 라고 하자 신하들이 바빠서 읽는 책이 없다고 하자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이는 하지 않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공무를 보느라 여가가 적기야 하겠지만,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과정을 세워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 나간다면 일 년이면 몇 질의 경적을 읽을 수 있고, 몇 년 간 쉬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간다면 칠서를 두루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라든지.

작년에 보지 못했으니 올해는 두 번 세 번 본다.

무릎을 치면서 책을 읽으면 악기 연주하는 것 못지 않게 흥겹다.

등의 기록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원체 책을 많이 읽다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떻게 읽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책거리를 하는 것이 사실상 월례 행사가 되었다. 바쁜 일이 없으면 한달에 한 질을 읽었다고 하니 현대로써든, 당시로써든 희대의 독서광이었던 셈.

하지만 비판이 업이었던 대간들에 의해 황당한 비판을 당하기도 했는데 유성한이란 자가 "요즘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다고 하더이다.부끄러운 줄 아십시오!"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22] 정조는 상소를 읽다가 실실 웃으면서 "내가 어처구니가 없구나."라고 소감을 밝혔고 신하들이 "저 미친놈이 돌아도 단단히 돈 모양입니다."라고 일제히 국문할 것을 요청하여 친히 개발살을 낸다.[23] 허나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남인들이 일제히 유성한의 배후를 캐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사한 결과 유성한이 윤구종이란 자와 친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가 경종의 무덤 앞에서 예를 표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종에게 신하 노릇을 할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경종이 폐주도 아니고 엄연히 영조 자신도 황형이라 칭송한 어엿한 조선의 임금인데 자신이 악질 역적임을 자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24] 그러자 채제공이 "경종께선 4년간 조선의 임금이셨는데 경종께 충성하지 않는 놈이 영조께는 충성했겠고 사도세자께 충성하지 않은 놈이 전하께는 충성하겠습니까?"라고 사도세자 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이에 호응하여 사도세자를 추숭할 것을 청하는 영남 만인소가 올라와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를 두렵게 했다. 이에 정조는 큰 호응을 보였으나 5.22 하교란 하교를 내려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게 맞긴 하지만 시기상조니까 그냥 덮어두자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후 채제공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도세자 추숭에 승부수를 걸었다가 정조 말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25]

여기까지만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알고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를 익혀서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추었다.[26] 솜씨도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50발을 쏘면 48발,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세손 때 쏘고는 즉위 후 16년간이나 놓았는데도 50발 중 41발을 맞히었고 한번 49발을 맞힌 이후로는 어김없이 49발을 맞혔다. 이성계의 현신이란 말도 나왔다. 참고로 이성계는 실전에 70명을 연속으로 머리를 맞혔다고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이다. 물론 비단 정조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왕들은 이성계의 후손답게 명궁이 많았다.

근데 또 자상한 것만은 아니어서 성질이 불같았다.[27] 이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서 말빨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조 역대 국왕 중 언쟁 능력은 극강급. 정조와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것에 따르면 욕도 매우 찰지게 잘해서 주위 신하가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즉위 직후 치뤄진 신하들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빽으로 급제한 신하들의 답안지[28]를 전국 관아에 뿌려서 개망신을 주었다.[29] 역시 말빨 1인자. 이때가 정조의 춘추 스물넷이다.[30]다만 정조만 유난히 뛰어난 키배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고 늘어지면서 반드시 이기는 것으로는 태종이 조선시대 최강급이었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종 역시 말년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거침없이 상대방을 갈구는 것으로 유명했다.[31] 거기에 영조는 실록에 신하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라는 말이 여러 번 적힌 임금이다. 특히 숙종, 경종, 영조 모두 화술에 능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쯤 되면 유전.

나중에 나이 들고 나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니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라고 조롱했다.[32] 이런 불같은 면모는 할아버지 영조와 증조부 숙종에게서 잘(?) 물려받은 듯. 안타깝게도 정조의 아들 순조는 세도정치에 휘둘렸다.[33]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본인이 직접 자신의 에 처방을 했을 정도동의보감이 부실하다고 직접 보강을 하기도 했다. 이 쯤 되면 정조가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대목.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한의사들 간 의견이 갈린다. 일부에선 처방이 과격하지만 효과는 볼 수 있는 극약처방을 자주했지, 크게 틀린 게 아니라고 하는 편과 반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술을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게 잦은 정조에게 그러한 처방은 위험하다 정도로 나뉘는데, 이는 최후의 순간에 내린 처방과 연훈방 논란으로 이어진다. 헌데 이러한 과격한 처방은 허목에 연관된 일화에서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사약에 들어갈 만큼 극한재료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당대에 유행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때문에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입장에선 연훈방 처방이 처음에 효과를 봐 두 번째로 시도할 때 누군가가 독을 넣어 연기에 독성을 띠게 했다는 것. 아무튼 정조가 의학을 공부한 것은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어의에 의한 독살의 위협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으나 정작 정조 본인은 일득록에서 "대저 의학서라는 것은 옛 경서와 큰 차이가 없어 누구나 공부하고 익히면 쉽게 배울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한마디로 정조 본인은 단순히 잡기를 익히는 수준에서 공부하다보니 의서에 정통하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정조의 책을 읽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일단 정조는 책을 초록한 다음 다시 초록본을 읽으면서 원본과 대조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의견을 수렴한 다음 다시 재록을 하고 이걸 가지고 책을 완전히 외울 때까지 위 작업을 반복한다.

또한 자신의 무예실력과 장용영의 특수성이 있었는지 몰라도 《무예도보통지》라는 종합 무예 서적을 발간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요즘도 조선시대 군인의 복식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책을 바탕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이나 치러지는 행사도 많다.

3.2 정조 시대의 한계

정조의 정치에는 비판도 존재하는데,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간 세도정치의 바탕을 만든 인물이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바로 정조라는 점이다. 본래 세도 정치란 "어진 임금이 임명한 어진 재상이 바른 세상의 도(世道)를 일깨워주는 것"을 뜻하나, 정조는 집권 초반 측근인 홍국영에게 권력을 너무 몰아주어 세도정치의 폐단을 만들었으며 특정인들만 요직에 앉혔다. 이는 국왕-집권 붕당-비집권 붕당 간의 삼각 상호견제 체제를 통해 돌아가는 조선의 합리적 통치 체계를 망가트리는 행위였다. 이미 숙종 대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구조는 정조 대에 들어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붕괴하고, 결국 정조가 죽고 난 후 잠시동안은 평안한 듯 했으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뒤이어 정조의 사돈 집안인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순조 대에 세도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은 시파였던 데다가 곧은 성격이여서, 오히려 정조의 유지를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워낙 권력을 크게 가진 탓에 아들인 김좌근 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흔히 아는 막장이 시작되었다. 곧 世道가 勢道로 변질되자 조선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정조의 전체적인 정치 방식 또한 논란이 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당파라는 이름 아래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으로 억눌렀을 뿐, 실제로는 흥선대원군 때까지도 노론, 소론, 극소수의 남인 당파까지도 살아있는 등 당파 자체를 뿌리뽑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이 당파의 뿌리가 무지막지하게 깊었으니 정조가 어떻게 할 수 있던게 아니며, 남은 당파의 뿌리도 어떠한 의리를 가지고 뭉친 것은 아니었다. 정조의 정치는 당파들을 고루 등용하면서도 영조 때처럼 표면적인 구색맞추기 탕평을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34]

조금 더 정확히하자면 영조 말기에 척신정치에 노론 1당으로 귀결된 정치에서 척신들을 척결하고 건전한 붕당정치를 다시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소론 서명선, 이시수, 이병모 등을 등용하고 채제공, 이가환을 비롯한 남인 세력도 대거 끌어들여 당파 다운 당파를 만들었다.

동시에 정조의 정치 방식에 맞은 사람들은 조정에서 힘을 얻었지만, 이에 반대파도 생겨나 찬성파와 대립하면서 시파(노론 온건파 + 남인, 소론 잔당)와 벽파(노론 강경파)로서 제 2의 당파 싸움을 벌였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그렇기에 노론 벽파를 제외하고는 당파의 의리 자체를 붕괴시켜 이후의 세도정국을 낳은 측면도 있다.

정조의 정치가 왕권과 왕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이건 정조 자신이 너무 먼치킨이라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초계문신제라는 인재 등용 제도를 보면, 하급 관리들에게 1차 필기 시험을 치르게 하고 2차 필기 시험을 치르게 하고 그 중 유력한 사람을 골라 면접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왕 자신도 여기에 참여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렇게 발굴해 낸 인재 중 한 명이 바로 정약용.

정조가 현대적 시각에서 과연 '개혁적인' 군주였는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한다. 정조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체반정을 일으켜 고문을 따르라고 하는 등의 행위를 보면 개혁적인 군주라고 볼 수 없는 면도 분명 있다. 때문에 정조의 행위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서양 문물의 수입과 서학도 이게 다 패관잡문이나 읽어서 그러니 순정고금체만 쓰라는 명령을 내려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조는 스스로를 조선 유학의 대통으로 칭하는 등 전형적인 유자의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문체반정의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조가 추구한 궁극적 목표는 후대의 흥선대원군이 지향한 목표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정조의 정책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런데 세도정치의 원인이 된 정조는 '개혁군주'로 추앙받는데 반해, 세도정치를 반 이상 박살낸 흥선대원군은 '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 참고로 정조도 이양선이 오면 물, 식량만 제공하고 쫓아보냈다.[35]

또한 정조 15년부터는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다. 그리고 알려진 바처럼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정치를 하였다. 경연은 왕이 공부하는 면도 있지만, 신하들과 소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통 어째서 보통 신하들과 소통하는 장인 경연은 폐지하고, 임금이 권신들과 막후정치에만 몰두하였는지 모르겠다. 말기에 와서 특히 심해진 그의 마키아벨리적 사고관으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다.[36]

배병삼 교수는 정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조의 통치 행태는 권모와 술수였다. 연전에 발굴된 영의정 심환지와의 비밀편지 속에서 그의 마키아벨리적 면모가 잘 드러났다. 정조가 죽자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기의 경직된 반동정치는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 처지로 몰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영·정조 대의 짧은 황금기를 내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짧은 막간은 정조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지시하는 '헤드십', 이른바 카리스마 콤플렉스가 잉태한 추락이었다."[37]

3.3 문체반정

정조 시대를 얘기하는데 있어선 문체반정 얘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조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문체반정은 북학이나 청나라 문물,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새롭고 신선한 문체에 관심을 보이던 조선의 젊은 선비들을 탄압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 중에서 문학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이옥에 대한 탄압은 너무나 심했다. 이옥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문체 때문에 정조에 의해 꼴찌로 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는다. 후에도 이옥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자 정조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옥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옥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게 되면 그 또한 문제가 된다는 맹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박지원이나 김조순 같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타협을 하지 않은 이옥 본인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는 셈.

애초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조는 문체반정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신해통공으로 왕이 노론을 타격 → 천주교 신앙을 문제삼아 노론이 정조 측근 남인 시파들을 공격 → 이걸 다시 문체반정으로 박지원[38]이 포함된 노론에 재반격한 형국. 그리고 정조가 죽은 후에 이에 대한 벽파의 반격이 신유박해라고도 하는 신유사옥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이해한다면, 박지원의 실학적 측면이나 문체반정이라는 명분은 의미가 약해지고, 대신 정치적 의미만 더 강해진다. 애초에 문체반정 자체가 청나라에서 유행한 문체와 유사한 박지원의 그것과 기존 노론의 대의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적 사상간의 괴리를 찔렀기 때문에 성공한 측면이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애초에 반동적이냐 아니냐도 아리송하긴 하다.

문체반정을 보는 시각 중, 철저하게 보수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정조의 성향이 문체반정의 중요한 요소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정조가 자신의 일기에 "나는 본래 책을 읽어도 성현의 말씀만 읽었으며, 패관잡기에 대해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 쓸데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대목을 보면 정조는 진심으로 유학 경전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에는 매우 적대적이었던 유교근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당시 사상계에서는 중국의 양명학, 고증학 등이 들어와서 성리학의 한계를 공격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흐름이 원칙주의자 성리학자였던 정조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가 오늘날의 소설 격인 패관문학을 무척 싫어하여, 당시 소설 중독(…)에 빠진 관료를 징계한 사례가 있고, 김조순도 숙직 중 연애소설을 읽다가 걸려서 청나라 사신단에 포함되어 가는 길에 반성문을 써야 했다. 심지어 정조가 파발까지 보내 '반성문 내놔!'라고 독촉했을 정도. 그 반성문이 명문이라 왕을 감동시켰고 왕과 사돈지간이 된다. 유교 문화권에서 글이라는 것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옥의 경우, 문체 교정 안 하면 평생 과거금지 라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39] 그래서 그는 온건한 분서갱유라 할 수 있는 문체반정을 한 것 같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정조는 문체 면에서는 노론, 그 가운데서도 벽파였다. 세손에서 즉위하여 척신과 홍국영을 물리칠 때까지 김종수를 위시한 노론 벽파와 정조는 사실상 동맹관계였으며,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는 "우리 벽패는"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노론 정체성을 강조했다. 송시열에게 송자라는 호칭을 내리고 《송자대전》을 편집하게 한 사람도 그다.

물론 그렇게 징계한 관료들이 자기 뜻에 맞게 반성하면 나중에 중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조순이 반성문 잘 써서 정조의 용서를 받고 정조의 사돈으로까지 정해진 게 그 예. 실제로 정조는 문체가 난잡해진 원흉으로 지목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에게도, 옛 고문 문체로 '반성문' 쓰면 크게 중용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과거를 보지 않은 음서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종2품 벼슬인 문임직을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당연히 박지원 주위 문인들은 기뻐하며 그들이 나서서 글 쓸 자료를 모아주겠다고까지 했으나, 박지원은 '나 같은 못난 놈의 못난 글에 전하가 관심 보이시다니, 더 이상 못난 글로 반성문 써서 전하의 눈을 썩게 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 없어염. 전하께서 반성문 쓰면 중용해 준다는 말은 사실 나보고 반성하라는 이야기일 뿐인데, 눈치없이 반성문 써내서 벼슬 달라는 눈치없는 짓은 할 수 없잖아염? 그래도 혹 모르니 그나마 볼만한 글 몇 편 모아놓고 있다가, 전하께서 또 반성문 내라고 제출하시면 그때 그거 낼 거임.' 이라는 반응으로 반성문 작성조차 회피하는 기염을 토한다.(…) 사실 계속 회피하기만 한 건 아니고, <과농소초>라는 농서도 지어올리는 등 나름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바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학에 관해 정조와 채제공 이하 신하들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채제공"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데 하는 소리가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그냥 불교의 한 별파라 하겠고[40],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니, 어떤 멍청이가 그걸 믿습니까?"[41]라고 하자 정조가 "이게 다 패관문학을 하도 보니까 그따위 황당무계한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니 이제부턴 순정고금체만 쓰라!!"고 했다.[42]

여담이지만 소설을 싫어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후궁 의빈 성씨는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소설 애호가였다. 물론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는 1773년(영조 49년)으로 문체반정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3.4 서체반정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개혁 정책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즈음 되면 거의 이건 여자가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양난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4 정조의 비밀 편지들

사람은 구업(口業)으로 한 때의 쾌락을 얻으려 해선 아니되느니, 나는 천한 마부에게라도 일찍이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人不可以口業取快於一時,子雖予僕御之賤,未嘗以這漢那漢呼之也。


정조 이산 어록 중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어찰첩》을 보면 '학자군주'답지 않게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43]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랑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44] 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나서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자식"이라든지.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거나 맘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다만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 기분이 틀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하들의 유배 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45] 실제로 당하관 대신 중 한 명이 전하의 업무 처리 방식은 매우 글러먹으셨는데, 이건 전하의 급한 성질머리 때문으로, 요즘 옥체가 자주 편찮으신 것도 그 때문인 줄 아뢰오란 식의 내용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내용의 상소였고, 중신들도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으나 정조는 끝내 그 신하를 용서하고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세시까지 잠 못자고 이러고 있다.'란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46] 요즘으로 치면 "ㅋㅋ"나 다를 바 없는 표현. 이런 걸 보면 초성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창제할 때 집현전 학자들과 신명나게 논쟁을 벌였던 전례도 그렇고, 조선 왕실 혈통에는 어쩌면 키배의 재능이 흘렀는 지도 모른다.

htm_20090210034946a000a010-001.JPG

그 외 이 편지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어떤 편지에는 한자로 쓰다가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갑자기 한글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 되었을 때는...)[47]라고 쓴 표현도 있고, 심환지 본인에게도 "갈수록 입조심 안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라고 면박을 주는 편지도 있다. 한자로 쓴 편지에도 한국어에서 표현하는 속담을 자주 한자로 옮겨서 인용하고, 이두식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정조 자신이 소설 장르를 탄압하고 이를 따라하는 신하들에게 바른 문체를 강요했다는 점을 생각하다면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인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지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신하에게 이런 편지를 썼을 때 신하는 편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리는 게 예의였다. 한 마디로 심환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보험을 들기 위해 남긴 편지, 혹은 정조의 약점으로 잡으려 남긴 편지가 그대로 내려와 현대에 발견된 것. 그러나 사실 군신 관계라는 게 항상 불안정한 정치적 관계이고, 특히 정조처럼 왕이 다혈질일 때에는 신하 입장에서 불안감이 생기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해 보험을 들어 놓는 일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영원한 제국 이후로 심환지는 정조를 죽인 역적 쯤으로 취급당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편지가 남아있었다는 게 후손들 입장에선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한편 이 어찰첩은 독살설이나 노론 만악 근원설을 논파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첫째,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눈이 너무 침침해져서 책도 읽을 수가 없다'라거나 '어디가 아프고 언제 약을 얼만큼 먹고 있는데, 아파 죽겠도다' 하고 병세의 위중함[48]을 호소하는 대목이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49]
둘째, 그동안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영수들은 정조의 답이 없는 정적 쯤으로 치부되었지만, 이 서찰을 통해 노론 역시 정조의 국정 파트너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실 우습지도 않은 독살설 따위보다 이 점이 더 의미가 있는 편.

정조가 쓴 편지글의 자세한 내용은 《정조어찰첩》이란 제목으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했으니 그 쪽을 참조하길 바란다.

5 가계

  • 정비 : 효의왕후 김씨 (양력 1754~1821)
    • 자식없음
  • 승은후궁 : 의빈 성씨 (1753~1786)
    • 장남 : 문효세자 (1782~1786)
    • 장녀 : 옹주 (1784~1784)
    • 셋째 : ?[50] (1786년 9월 14일, 복중 사망)
  • 간택후궁 : 수빈 박씨 (1770~1822)
    • 차남 : 이공(李玜) (1790~1834) - (23대 순조)
    • 차녀 : 숙선옹주 (1793~1836)
  • 간택후궁 : 원빈 홍씨 (1766~1779)
    • 자식없음
  • 간택후궁 : 화빈윤씨 (1765~1824)
    • 자식없음

5.1 병오년(1786년)의 변고

임오화변으로부터 24년 뒤인 1786년(정조 10년, 병오년)에는 유독 정조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이 죽었다. 5월 11일, 맏아들 문효세자가 홍역이 발병한 지 8일만에[51] 훙서했으며, 7월에는 계조모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죽었다. 9월 14일, 셋째를 임신 중이던 후궁 의빈 성씨가 졸하였고, 11월에는 조카 상계군 담이 의문사했다.

야사에 의하면 정조는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자리가 흉지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사도세자의 무덤을 천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2 여성관

1775년(영조51년) 2월 16일, ‘후비(后妃)는 관저(關雎)[52]의 덕이 있고 후궁(後宮)은 아름다운 얼굴을 나무라는 이가 없다.'는 대문을 강론했는데, 동궁이 이르기를, “여자를 사랑하는 해독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여색이란 진실로 가까이할 것이 아니로군.” 하매, 홍국영이, “여색은 가까이해야 될 때도 있고 가까이해서는 아니될 때도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고만 말씀한다면 불도(佛道)가 될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요사스러운 여색은 진실로 멀리해야 하지만 만약 어떤 여색이든 통틀어 가까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인륜(人倫)이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하니, 동궁이, “전혀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오. 만약 소위 후비(后妃)처럼 관저(關雎)의 덕이 있다면 난들 어쩔 수 있겠소?” 하였다. 홍국영이, “후비의 덕 또한 군자(君子)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부인 치고 어찌 감화(感化)할 수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하니, 동궁이, “집안 다스리는 책임은 진실로 남자에게 있는 것이나, 부인의 성질과 행실이 끝내 감화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있겠소.” 하였다. 나(홍대용)는, “남자로서도 능히 요순(堯舜)과 같은 자가 드문데 여자로서 임사(姙姒)와 같은 자를 어찌 얻기가 쉽겠습니까? 소위 ‘후비(后妃)가 관저(關雎)의 덕이 있다.’는 것 또한 그 인품(人品)의 고하에 따라 안에서 도우고 집안을 바로잡음에 있어 각각 자기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뿐입니다.” 하였고, 홍국영은, “부인이 설령 어질지 못하다 하더라도 남자로서 집을 다스리는데 진실로 그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면 어찌 감화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동궁이, “이것은 통하지 않는 이론이오. 가령 여후(呂后)ㆍ무후(武后)ㆍ포사(褒姒)ㆍ달기(姒己) 같은 자도 또한 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오.” 하매, 홍국영은, “포사와 달기같은 이는 진실로 별도로 논해야 마땅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후[한고조의 처, 여치]는 한 고조(漢高祖)가 살았을 적엔 감히 악한 짓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폐출되지도 않았으니, 어찌 한 고조의 집안을 잘 다스린 힘이 아니겠습니까?”하였고, 이진형은, “신의 생각에는, 포사와 달기란 천백 년 만에 한 번쯤 있은 여자입니다. 그 드물기로 말한다면 5백 년 만에 한 번 나는 성인(聖人)과 다를 것이 없으니, 포사와 달기의 일은 논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으며, 홍국영은, “신의 의견은 결코 남자로서 진실로 옳은 도리만 다한다면 여자를 감화시키지 못할 이치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였다. 동궁이, “이것은 끝내 통할 수 없는 말이오.” 하매, 나(홍대용)는,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부터 감화시키기 어려운 부인이 또한 한 둘이 아니었는데, 어찌, 하나만 고집하여 논할 수 있습니까? 지지리 못난[下愚] 여자가 아니라면 남자로서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잡는 도리를 힘껏 다하고 은의와 위엄을 아울러 행해서 감화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끝내 감화시킬 수 없다면 또한 처리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내 충후(忠厚)한 뜻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뿐입니다.” 하니, 동궁이, “말한 것이 진실로 좋으나 이 말은 그만 두는 것이 옳겠소.”[53]

정조가 24살이던 1775년, 홍대용이 쓴 《계방일기》에 그의 여성관이 잘 드러나있다. 함께 대화를 나눈 홍국영이나 홍대용과 비교해봐도 상당히 비관적이고 보수적인 여성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정조에게는 후궁이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다 거절당하긴 했지만(...)

"대궐 안에 있는 궁인(宮人)을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주상의 본래부터의 성념(聖念)이 미천(微賤)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54]

정조가 27살이던 1778년, 정순왕후가 후궁 간택령을 내리면서 정조는 궁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 간택령으로 간택된 후궁이 바로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뜻이 본디 공검(恭儉)한 때문에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성색(聲色)과 진기한 노리개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이라고 봐 주지 않는다."[55]
"나는 음악이나 여색,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은 천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아 멀리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멀리하게 되므로, 여가 시간에 책이 아니면 즐길 것이 없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양견(良犬), 준마, 음악, 여색(女色)을 즐긴 적이 없었다. 어진 사대부를 친견(親見)할 때가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친견할 때가 적어야 합니다 했는데, 나는 이 한마디 말에 있어서 거의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겠다. 무(武)를 숭상하던 분위기를 문화적인 것으로 바꾸고 현자(賢者)는 높이고 척신(戚臣)은 낮추며,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은 멀리하고 어진 사대부를 가까이하고 있다."[56]

정조가 마흔 살이 넘었을 때인 1795년1799년의 기록을 봐도 정조는 궁첩이나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5.3 기축별감사건(1769년)

정조가 18살 때인 1769년, 여동생 청선공주의 남편 정재화, 그리고 별감들과 함께 술집, 기생집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이를 염려한 혜경궁 홍씨가 아버지 홍봉한에게 부탁해 홍봉한이 별감들을 모두 귀양보냈다고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5.4 15년을 기다린 사랑

앞서 여러 기록에 나오듯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왕이었다. 그런데 로맨티스트적인 모습도 보이는데,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그 일화가 전한다.

정조는 15살이던 1766년, 당시 어머니 혜경궁 홍씨 처소 궁녀였던 의빈 성씨(당시 14살)에게 승은(왕이 궁녀와 합방하는 것)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당시 14살)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울면서 못한다고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궁녀였던 숙빈 임씨에게 승은을 내리고 은언군을 얻은 일로 영조의 노여움을 샀던 것을 생각하면, 정조 역시 이 일로 영조의 미움을 샀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의빈이 승은을 거절하여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이후 후사 문제 때문에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윤씨)을 뽑았고 다시 의빈에게 명하였지만 또 사양했다. 또 사양한 이유는 안 나와 있지만 그 때까지도 효의왕후가 임신하지 못했으니 효의왕후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정조가 남자로서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왕의 여자'인 궁녀가 승은을 거절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고, 결국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고 나서야 명을 따랐다고 한다.[57] 다혈질이었던 정조가 당사자인 의빈에게는 끝내 벌을 내리지 않은 것을 볼 때, 의빈을 상당히 총애했던 것 같다.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조가 15년이나 기다려 취할 정도면 의빈 성씨는 상당히 재색을 갖춘 여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요리도 잘하고, 붓글씨도 범상하고[58], 수학도 잘했다고 한다.팔불출 그러나 의빈 성씨는 후궁이 된 지 5년 만에 죽었다. 정조는 의빈 성씨와 그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서울지명사전

5.5 상상임신

《정조실록》에 의문의 산실청 기록이 두 번 보인다. 산실청은 비빈의 출산을 돕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관청으로 보통 출산 6일 뒤에 철수된다. 《정조실록》 첫 산실청 기록은 1781년(정조 5년) 1월, 후궁 화빈 윤씨의 산실청 설치 기록이다. 10개월 뒤인 《일성록》1781년 11월에 화빈의 출산을 고대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뒤 어디에도 출산 기록은 없고, 화빈의 산실청이 무려 30개월이나 지속되었다는 기록만 보인다.

비슷한 케이스로 1787년(정조 11년) 9월, 이번에는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다. 정조는 6년 전 화빈이 임신하자마자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출산에 이르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해산달에 산실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했고, 결국 1788년(정조 12년) 12월, 산실청을 철수했다.

이들의 경우 공통적으로 산실청이 1년 넘게 지속되었으나 어디에도 출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임신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상상임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6 어진

정조는 평생 동안 어진을 3번 그렸다고 하는데, 정조의 어진을 포함한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에서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리고 정조의 어진을 건저내지 못하여 모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전쟁이 종료된 이후 서울로 복귀한 뒤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어진을 가지고 오지 않고 부산 피난시 임대한 창고에 그대로 두고 있다가 창고에 불이 나서 없어진 경우이니 전쟁 중에 탄 것은 아니다.

276x368px
정조의 표준영정구군복 차림의 영정

이 그림은 현재 표준영정으로 공식 지정된 이길범 화백의 정조 어진이다. 현재 어진박물관에 안치되어 있고 방송이나 왕실 관련 행사에 공식적으로 쓰인다.

300px
선원보감에 실린 정조의 초상화열성어진에 실린 정조의 초상화

좌측에 있는 초상화가 바로 세손시절 정조의 실제 어진이라 전해지는 것으로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에 싣기 위해 어진을 보고 베낀 것이라고 한다. 후술된 순조의 회상과 일치하는 외모로 뭔가 야성적인 얼굴인데 후대에 상상으로 그린 위의 모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 화백은 이 어진을 바탕으로 정조의 얼굴을 묘사했다. (그런데도 많이 준수하게 그려졌다. 가져온 것은 각진 과 짧은 텁석부리 수염 정도...) 몇몇 사람들은 드라마영화에서 귀공자훈남으로 묘사되곤 하는 정조에 길들여져 있다가 이 초상화를 보고 "나의 정조대왕은 이러지 않아!", "내 정조대왕이 이렇게 험상궂을 리가 없어!"라며 당황해 하는 사람도 있는 듯. 특히 철종 항목에도 나와 있는 어진과 선원보략 초상화를 비교하면서 "정조도 이런 얼굴은 아니었을 거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정조 어진 상상화 1정조 어진 상상화 2

위에 있는 두개의 어진은 후세의 상상도들인데 정조 표준영정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린 것이다. 좌측의 어진은 1989년 9월 26일에 수성고등학교가 수원 화산릉 행차 행사에서 사용된 정조의 얼굴을 상상하여 그린 어진이고, 우측의 어진은 경매장에 나온 어진이라고 한다. 수성고등학교에 모셔진 어진이 실제 얼굴과 가깝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7 그 밖에

어릴 적 스트레스로 인해 어딘가 비뚤어져서(?)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술의 경우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번씩 먹었는데, 이 어쩌다 먹는 술이 어느 정도였냐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정도였다고. 또한 술버릇은 다른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술버릇 중 하나인 '다른 사람에게 어거지로 술 권하기'였다고 한다. 그냥 직장 선배가 그래도 피하기 힘든데, 하물며 왕이... 여담으로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시장(남문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 사실 증류주이든 발효주이든 곡식으로 술을 만드려면 엄청난 양이 소모된다. 막걸리 한잔=백성들의 밥 한끼였고 이런 현실 때문에 흉작이나 나라가 어려워질땐 항상 금주령이 내려졌었다.
이는 서양도 똑같다. 와인이나 꼬냑이 고급술로 취급되는 이유가 있다. 먹고 살기 힘들때 엄청난 양의 과일을 썩혀서 만들었으니까...

게다가 담배 예찬론자여서 담배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거나 소화에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고 극찬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까지 쓴 적도 있다. 문제는 그의 아들 순조는 지독한 혐연주의자였다는 거... 더불어서, 왕으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안경을 애용하기도 했다.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정약용 같은 문약한 선비들을 하루 종일 손이 부러져라 쏘기를 시킬 정도로 가혹했던 인물. 정약용에게는 이외에도 술을 옥으로 만든 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종용했을 정도다. 이 시절 필통은 붓 몇 자루가 들어가는, 현대 기준으로는 바가지만한 크기였다(…). 게다가 왕이 직접 하사하는 술이니 흔해빠진 탁주일 리는 없고, 삼중소주(三重燒酒)를 하사했다고 한다. 술을 세번 증류해서 만든 술이니 얼마나 독할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때 하도 고생했는지 이후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최대한 술을 마시지 말고 특히 '원샷'을 피하라고 강조한다. 이때 위의 옥필통 일화를 언급하며 '나는 오늘 죽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편지에 나와있는 표현 그대로다.)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다가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이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不醉無歸)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조금만 번안하면 요새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거기다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 대에 여기 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술 다섯 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라며 흐뭇해했다.

증조인 숙종과 조부영조를 이어서 이순신을 높이는 사업을 계속했는데[59] 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이순신에 대해 정말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은 이충무공밖에 없다."라든지, "그가 만약 고대 중국에 태어났으면 제갈량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어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발간케 하는 등[60] 재위 기간 내내 이순신 기념, 추모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다.

삼국지후주 유선도 높게 평가했다!조선 최강 촉빠 항목 참조.

강희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스스로 재판을 집행하여 판결을 내린 경우도 많았는데 한 번은 모함 사건을 혼자 눈치채고 옳게 판결한 경우도 있었다. 황해도에서 이가원과 조환이라는 사람이 조재항이라는 사람이 아내 윤씨를 밥에 돌이 섞였다는 이유로 걷어차 죽였다고 관에 고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가원은 윤씨의 외삼촌이고, 조환도 윤씨의 인척이었다. 관에서 즉각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시신이 죽은지 오래 되어 부패가 심했는데 등뼈에 피부가 붙었음을 근거로 타살을 확정지었다. 더불어 마을에 '나는 밥 한 사발 때문에 맞아죽었다'는 내용의 노래가 돌아 조재항의 살인 혐의는 더 명확해졌다. 형조와 황해도 관찰사는 조재항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보고 사형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계를 받은 정조는 '모름지기 그러한 노래는 원통함을 알듯말듯 숨기는 법인데 너무 정확하게 범인을 확정짓고 있으니 도리어 의심스러우므로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이가원이 노래를 지어 퍼뜨렸고, 조환이 이가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소장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가원이 조재항에게 금전을 요구했으나 조재항이 듣지 않아 무고했다는 것. 조재항은 사형 직전에 무죄 방면되었고 이가원은 종신 유배, 조환은 도형 정배에 처해졌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의하면 시짓기 시험을 내서 제 시간 내에 시를 짓지 못하는 관료를 창덕궁의 부용지 가운데에 있는 둥근 섬으로 귀양보내서 망신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22127519f6041a36dfdd3a82354b66c46c5927b6.jpg
이런 곳에 조각배 띄우고 노저어 들어가게 했다(…)

전해지는 초상화를 보면 온화해 보이지만, 이는 후대에 이길범 화백이 표준 영정으로 그린 것이다. 실제로 순조의 회상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억세고 굳건한 인물로 보인다. 그에 대한 묘사로 정조는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파오후?

이 당시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윤광류라는 농민이 운종가의 종(현대의 종로 보신각)을 멋대로 친 사건이 있었다. 운종가 종은 한양 도성의 시간을 알리는 기능을 했으므로 이는 심각한 사건. 관헌에서 당장 잡아들여서 조사한 결과 종을 친 이유가 참으로 황당했는데 이유는 정조에게 참외를 바치고 싶어서. 행위 자체가 중죄이긴 하지만 그 이유가 황당하긴 하나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어서인지 정조는 그냥 윤광류를 고향으로 내쫓았다. 신하들이 종을 멋대로 친 것은 중죄이므로 엄히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는 "영조 임금 때도 광화문 종을 친 자가 있었는데 뭔가 억울한 일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며 넘어가고 대신 종을 담당하는 관리를 파직했다. 이번 일도 그냥 모르고 한 것일 테이니 대충 넘어가자"며 사건을 흐지부지 끝냈다.[61]

능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구 태안읍 안녕리)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원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어서도 모시려고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동쪽에 자신의 능터를 잡았고 거기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이 나와서 이장 논의가 나던 차에 중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오늘날의 위치인 융릉 서쪽으로 이장,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사도세자의 능과 묶어서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다만, 위의 술 항목에 대해서는, (야사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다. 높으신 분들부터 천민들까지 한 번 마시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게 기본이라 생각할 정도. 일단 둘러앉아 작정하고 마시기 시작하면 안주도 거의 안먹으면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술상에 그대로 엎어지거나 술 가지러 가다가 술상 근처에서 쓰러져 잠들기 일쑤인데, 이렇게 아침까지 바닥에서 자다 깨서 영의정은 나랏일 보러가고, 농부들은 농사 지으러 갔다고 한다. 아무도 영의정 급이 술마시고 아침까지 널브러져 자는 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

실제로 조선을 유람하고 간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은 '술 때문에 망할 나라' 라는 얘기가 많다고 한다. 이는 '조선 놈들은 하도 많이 먹어 농사를 지어봐야 소용없다' 라는 얘기와 함께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조선 탐방 후기이다. 정조가 유독 병적이었다고 하기에는 조선의 술 문화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 근데 정승급까진 이렇게 놀았어도 왕이 이렇게 노는 건 흔치 않긴 했다(...)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다가가 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격쟁 항목 참조. 신료들이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정조는 "백성들은 나의 자식들이고 백성들이 격쟁을 통해 나에게 호소하는 건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가 잘못 된 것이다."라고 강행했다.

8 유사역사학음모론

8.1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덕일에 의해 발굴된 정조의 전율의 명대사(?)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고 한 말이다.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한 마디를 선포했다'고 알려졌다. 이덕일에 따르면 그 즉시 일성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한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으며 '14년 전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라 한다.[62]
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동북아역사재단 독도 누락 조작 사건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두음법칙 식민국어학설

사실은 이덕일의 편집과 픽션 창작에 따른 결과로, 실제로는 완전 다른 맥락이었다.

정조는 그날 '내가 비록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지만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하들이 내 뜻을 빙자하여 사도세자를 높이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률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물론 정조 자신도 사도세자를 높이고 싶은 본심이 있기는 했겠지만, 그러면 영조의 결정을 뒤집는 것이 될 테고 즉위 초부터 이런 민감한 문제를 꺼냈다간 정국이 요동치고 역풍이 불 것이 뻔했기에 원칙론을 밝히는 선에서 선언한 것.[63]

이덕일이 쓴 부분[64]은 정조실록 1776년 3월 10일 조를 보고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거기에는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해당 내용은 위와 같이 실제 이덕일이 쓴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실제로 정조의 말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화를 입었다.

이덕사, 이일화, 유한신의 경우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사형을 당했고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영조의 인산이 끝난 뒤에도 안동 유생 이응원이 비슷한 상소를 올렸지만 정조는 이응원과 그의 아버지 이도현을 죽였고[65] 아예 이 사람들이 태어난 안동을 부에서 현으로 강등하기 까지 했다.[66][67]

당연히 노론이 경악에 휩싸인 일도 있었을 리 없다. 물론 정조가 즉위하면서 임오화변의 일을 끄집어 낼까 봐 노론이 일말의 불안감을 가졌을 가능성은 있다.[68]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앞서 언급한 발언과 처벌을 통해 노론을 안심시켰고,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도 장기간에 걸쳐 노론 세력과의 협력을 약속하면서 점진적으로 시도했다.

[69]

8.2 만년 떡밥 독살설과 요절설

정조는 조선왕 독살설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몇가지 석연찮은 점과 정치적 논란 때문에 노론 지도부인 심환지정순왕후의 주도로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암살론이 제기되었으나 최근 심환지와 정조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찰이 공개되어 수그러 든 감이 있다. 사실 오회연교와 관련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본다면 심환지를 측근이라기 보다는 함께 해야할 당파의 영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하겠다.

또한 암살론 자체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정조의 사후 정약용이 직접적으로 시상. 즉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언급을 한 것이 크다. 특히 조선시대에 무고죄를 극형으로 다스린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정약용이 무슨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썻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자체도 심환지와 당시 문제의 어의인 심인이 인척 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나올만한 떡밥이긴 하다. 문제는 다른 어의들과 달리 심인에 대해서는 꾸준히 공격적인 공세가 이어진다는 점과 심환지의 졸기 등에서 사관들이 심환지를 공격하는 부분 등이 암살설의 근거가 되는 것. 정순왕후의 경우에도 기록을 잘 보면 사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죽기 직전 '수정전'(당시 정순왕후가 기거하던 대비전)을 언급해 정순왕후를[70] 오게 한 것을 보면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살론의 매력적인 떡밥 때문에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 이덕일 등의 사람들은 계속 암살론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암살 떡밥[71] 이 영향인지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독살된 걸로 진행된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외로 그 반대의 근거가 많아 그다지 가치있는 주장은 아니다.

한 가지를 들어보면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시파가 벽파를 숙청하고 집권한 병인갱화의 명분은 벽파가 순조의 대혼을 방해했다는 것인데, 정말 정조가 독살당했다면 '선왕을 시해한 대역죄인'이라는 것 만큼 정적을 제거하는데 좋은 명분을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점이다.[72] 순조 8권 6년 3월 3일 기사를 보면 정언 박영지가 심환지를 공격하면서 첫번째 죄로 심인을 천거한 점을 꼽고 있는데 이 역시 심환지가 심인을 이용해 암살을 주도했다기 보단 왕의 옥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를 공박하는 것이다.

암살론자들은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 한 다음 이어서 연훈방을 처방했을 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급사해버렸기 때문에 독살설 떡밥이 더욱 맹렬한 것.[73] 그러나 유의해야할 것은 정조가 단명한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애연가주당에 식사도 불규칙하게 했고[74] 본인 스스로도 잦은 질병을 앓고 고통스러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다가 거기에 왕을 과로사로 몰고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의 정치 체제를 충실히 따르다 못해 훨씬 과격하게 보낸 인물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75] 이로 인해 정조의 과격한 처방법을 두고 정조의 의술에 대한 논쟁도 발생했다.

따지고 보면 정조는 가장 평균적인 조선왕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조선의 왕은 평균 만 23세에 즉위해,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2개월[76] 평균 수명은 만 46세였는데 정조는 만 24세에 즉위해, 24년을 재위하고 만 47세(한국 나이 49세)에 훙했다. 더군다나 원손, 세손, 사실상의 계승자, 대리 청정 등 기본 코스는 모두 밟았으며, 조금만 더 살았어도 상왕까지 거칠 수 있었다.[77] 즉 엄밀히 따지자면 평균적인 삶을 살았지 요절한 것은 아닌 셈.

여기서 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정조의 성격도 요절설,독살설에 의혹을 지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다.재위기간 24년 동안 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 논쟁만 해도 5~6차례나 될 정도다.현대 사회에서도 극심한 스트레스는 건강에 매우 안 좋은데 정조의 경우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으니 48살에 죽은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가령 양력 1800년 5월 30일에는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 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한다. 이 말인즉슨 갈등의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며 정조가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약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승하하게 된다. 승하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논쟁에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을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9 창작물에서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정조 본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따지고 보면 정조 본인보다 그의 주변 인물들, 즉, 영조, 혜경궁 홍씨, 홍국영 등의 인생이 훨씬 드라마틱하다. 또한 정조를 다루기 위해선 사도세자를 절대 빼놓을 수가 없었는데, 그럴 거면 그냥 사도세자를 주인공으로 하면 되지 뭐하러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겠는가?

사실 창작물로 만들기 위해선 대중의 관심이나 인지도가 필요한데, 이 무렵까지 대중들의 정조에 대한 인식은, "사도세자의 아들", "할아버지의 탕평론을 계승" 정도일 뿐 정조 본인의 업적이나 생애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그런데 1993년에 노론메이슨의 시초라 할 만한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이 발간되면서부터 상황이 변했다. 이 소설의 대흥행 덕분에 정조는 "아깝게 일찍 죽은 절대 개혁 군주"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상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모든 정조 캐릭터의 이미지는, 영원한 제국의 정조를 재탕 삼탕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게다가 타이밍 좋게도 1990년대와 2000년대는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창작물에서 정조 열풍은 그야말로 대유행.

그러나 201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턴 이런 유행도 어느 정도 사그라든 기세. 일단 정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중 2008년 이산 이후로 딱히 성공했다고 할 만한 작품이 없다. 사실 모든 작품이 "개혁 군주 정조가 노론과 싸우며 고군분투한다."는 천편일률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는데, 대중들이 질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한글화되고, 위에서 언급된 심환지와의 서찰이 발견되면서 실제 정조와 그가 실제로 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 이해가 깊어진 상태. 한마디로 떡밥이 쉬었다. 가장 최근작인 2014년 역린(영화)의 경우,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아예 대놓고 역덕들의 비웃음꺼리가 되는 상황(..).

정조 유행은 오래 전에 끝났어. 그냥 멍청한 제작자 놈들이나 돈이 될 줄 알고 찍어대는 거지. 그러니까 그 엿같은 본방사수, 극장 직관이나 열심히 하라고

참고로 사무라이 스피리츠 섬의 배경 시대가 정조의 재위기간인데, 그 때문에 김해령 관련 설정이 고증 오류에 가까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9.1 정조를 연기한 배우들

추가시 되도록이면 년도 순서대로 맞춰주시길 바랍니다.

  • KBS 2TV 하늘아 하늘아 - 이민우(유년기),조경환(성년기)
  • MBC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 - 장덕수(유년기), 전호진[78](성인)
  • MBC 조선왕조 오백년 '파문' - 김용건
  • KBS 1TV 왕도 - 강석우
  • 영화 영원한 제국 - 안성기
  • 영화 귀천도 - 이기열
  • KBS 2TV 소설 목민심서 - 김흥기
  • MBC 홍국영 - 정재곤
  • 2007년 KBS 2TV 한성별곡正 - 안내상: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정조는 작품 속 왕의 모델이지 작중에는 정조 본인이라고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마르고 신경질적인 이미지로 나오는데 (물론 연기는 명연기였다.) 실제 정조의 모델과는 맞지 않는다. 이 모습으로 바로 직전 영화 《음란서생》에도 왕으로 나왔다는 게 압박.
  • 2007년 MBC 이산 - 박지빈(유년기), 이서진(성인) : 임오화변을 시작으로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다뤘다. 전체 77회 중 대부분이 세손 시절, 45회 이후부터가 재위 시절을 다룬다. 의빈 성씨(한지민)와의 로맨스도 극의 큰 축을 이뤘다. 최고시청률 35.5%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 CGV 정조암살미스테리 8일 - 박건태(유년기), 김상중(성인)
  • 2008년 SBS 바람의 화원 - 최수한(유년기), 배수빈(성인) : 소재가 도화서이다보니 실제로 어진화사가 에피소드로 등장했고, 덕분에 실제 배우의 얼굴을 기반으로 전신 어진이 그려진 게 남았다. 스토리 상으론 임금의 손을 드러나도록 어진을 그린 게 트집잡힌 후 이를 그린 신윤복(문근영)이 자기 손으로 직접 찢어버렸다. 이러니 당연히 대역죄가 되어 참수형...을 당하게 생겼는데, 정조의 기지 덕에 죽음은 면한다. 어전회의가 있는 날 출입구 앞에 문제의 찢어진 어진을 깔아 신하들이 밟고 들어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데, 이후 신하들에게 '너희가 밟고 들어온 이 그림이 어진인가 아닌가. 이것이 어진이라면 신윤복 이전에 너희들이 대역죄로 참수를 당해야 할 일이고, 어진이 아니라면 신윤복은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냐'라고 추궁했고 신하들은 꼼짝없이 버로우.
  • KBS 1TV 거상 김만덕, 성균관 스캔들 - 조성하
  • 영화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 남성진
  • SBS 무사 백동수 - 홍종현
  •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백광두
  • 영화 역린 - 현빈
  • SBS 비밀의 문 - 이도현(유년기), 이제훈(성인): 이제훈은 이선 역과 더불어 1인 2역을 맡았다. 성인 정조는 마지막회에서 단 한번 나온다.
  • 2015년 영화 사도(영화) - 소지섭 : 영화 자체는 임오화변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소지섭의 정조 역할은 까메오에 가깝다.
  • 2016년 수원시립공연단 창작 뮤지컬 《정조-만천명월주인옹》- 이재식, 박성환

9.2 소설

9.3 만화

  • 야뇌 백동수》에서도 등장. 노론의 음모로 익위사세마인 김종수의 음모에 따라 암살당할 뻔 하지만 홍국영이 암살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면서 목숨을 구한다.

10 관련 문서

  1.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2. 따라서 실록의 제목 역시 '정종대왕실록'으로 되어 있다. 후술하듯이 훗날 황제로 추존되어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지만, 실록명은 그대로 남았다.
  3. 사실 영빈 이씨의 역할에 대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쩌면 영조가 시켰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4. 거기다 사후 세자로 추봉되기는 했지만 폐서인되기까지 했었다.
  5. 그래서 정조는 즉위 이후 정통성 확보를 위해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했다. 친부는 끝내 추증하지 못했는데 양부는 거의 즉위하자마자 추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고종 대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6. 이쪽은 정조의 경호실장격의 역할을 했다.
  7. 이쪽은 세손시절 사부
  8. 홍인한 탄핵소를 올려 대리청정저지기도를 막았다. 때문에 서명선이 상소한 12월 3일 정조는 자기를 도왔던 이들을 모아 동덕회라 이름짓고 모임을 가졌다.
  9. 그러나 사실 홍국영이 까놓고 팽당할 짓을 했다. 왕이 자신을 믿고 의지 했다는 것과 즉위 후에도 최측근으로 두어서 기고만장해서는 나이 지긋한 신하가 와도 개판으로 맞이 했다고 한다. 정조가 자신과 관계없는 아들을 세자로 세우는 게 보기 싫다고 자신의 누이인 원빈이 일찍 죽자 정조의 섭생을 대놓고 반대하는 미친 짓을 했고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을 데려와서 완풍군으로 삼고 자신의 조카라고 선포했다. 이러니 박살 안날 수가 있나... 게다가 완풍군으로 삼은건 자신의 누이의 양자로 만든건데 누이의 남편이 정조임을 감안하면...
  10. 정조는 사사하기를 원치 않았는데 신하들이 끈질기게 주장해서 그랬다고 한다.
  11. 왜냐하면 송덕상은 송시열의 후손인데 송시열은 서인-노론의 영수였음을 감안하면 호서의 유생들이 반발할 이유가 된다.
  12. 당시 송덕상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올렸다는 죄로 유배된 평산 유생 신형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인물이다.
  13. 김귀주 쪽 사람인 이율은 서울에서 내응키로 했고 홍국영의 사촌인 홍복영은 백칸짜리 집과 소금 천 포를 내놨었다.
  14. 영조 때 완전히 혁파한 것을 부활하려고 했지만, 또 다시 폐단이 일어나자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
  15. 세종대왕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반박할 때 이런 적이 있다.
  16. 다만 암살을 피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했다는 설도 있다.
  17. 본인 스스로가 조선의 학통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할 정도면 이단이라 욕할 수도 없다.
  18. 정조의 묘지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왕은 성인이셨다.'
  19. 다만 묘지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송시열도 현종 때 효종을 대 성인 이라고 칭하는 등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얘기하는 게 가능했던 모양이다.
  20. 당연하겠지만 세조가 성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짓을 한건 아니다.
  21. 앞의 말은 정조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이전부터 비슷한 말이 있었다.
  22. 정당하다면 몰라도 둘 다 사실이 아니고 근거도 없으며 신하들 모두가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인데도 올린 거다! 이쯤 되면 저 상소 쓰기 전에 유서부터 쓰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
  23. 연산군 같았다면 개발살 정도가 아니라 개발살 내고도 그 사람의 집안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개발살 내버렸을 것이다.
  24. 요약하자면 '나 제발 죽여주세요' 라고 빈 셈이다.
  25. 하지만 채제공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왕 또한 당연히 추숭을 하고 싶고 이 마음을 채제공이 눈치는 챘는데 좀 앞섰다고 하는 게 좀 더 옳을 듯하다. 실제로 승부수를 걸었을 때 김종수가 "아니 5.22 하교를 들은 신하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왕이 채제공에게 금등을 내리셨는데 상소의 구절 중 하나가 그 금등 안에 있던 어서에 있던 문구였는데 지금 죽기 전이니 진실을 얘기한 거다."라며 처벌을 내리는 데에 적극 반대했다.
  26.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병서와 무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게 죽음을 부르기도 했지만...
  27. 다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 받았지 눈 밖에 난적이 거의 없었다. 영조의 사람 재는 기준이 깐깐하다 못해 병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자기 조절과 처신이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애시당초 그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왕의 정통후계자 임에도 비참하게 죽은 것은 영조의 병적인 결벽을 견디지 못해 엇나간 것이 큰 이유였는데 그런 영조 밑에서 20년 이상을 총애받은 정조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내내 궁궐에서만 산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 청소년 시기는 홍봉한의 집에서 오래 지내었다. 2009년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심씨 문중에서 모아 보관해온 어찰첩에는 정조의 불같은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다.
  28. 처음에는 심지어 백지였고 이후에는 말도 안 되는 삼행시였다고 한다.
  29. 실록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해당 내용의 정확한 출처를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30. 정조가 즉위하던 해의 춘추이다.
  31. 아주 좋은 예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만리를 비롯한 창제 반대 세력에게 신랄하게 디스를 한 것을 들 수 있다.
  32. 하지만 대사헌은 요즘으로 치면 검찰총장에 대응하는 상당한 중책인데 그런 자리에 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을 올린 걸 보면 마냥 쪼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33. 다만 순조도 자기 가족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변했다. 생모인 가순궁의 추숭과 상복 문제 가지고 대간이 그래도 첩인데 예가 지나치다고 비판하자 입 닥치지 못하겠니? 하면서 단칼에 씹어버렸고 비판이 나오면 예는 정에서 나온다고 하며 공자의 어록까지 인용해가며 미친 듯이 깠다.
  34. 실제로 정조식 탕평은 당파 없애기보다는 당파 간 세력 조율하기정도에 가깝다.
  35. 이것도 흥선대원군과 같다.
  36. 정조 못지않게 급한 성격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영조조차도 스스로 군사(君師), 즉 백성들의 임금이자 스승을 자처하며 말년까지 경연을 쉬지 않았다.
  37. 정조를 성인으로 존경했던 정약용도 정조의 정책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참고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규장각, 초계문신, 장용영의 존재 이유를 모두 부정했다.
  38. 박지원 특유의 비주류-실학자 성향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는데, 박지원은 당시 노론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히던 반남 박씨 가문 출신이다.
  39. 여담으로 패관문학체는, 소설을 즐겼던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40.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그걸 떠나서 불교천주교나 교리 자체는 다 좋은 말들이니 거기서 거기로 보일 수밖에.
  41. "그 책에 '하느님이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에 (堯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 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단 채제공은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上帝]이 굽어살피시어 사람들의 좌우에 오르내리신다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 "다만 그 인륜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배반하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는, 저들이 높이는 대상이 하나는 하느님[玉皇], 하나는 조물주[造化翁]이고, 제 아비는 3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42.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천주교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문장은 나라를 세운 이후로 모두 육경(六經)과 사자(四子)에 오랫동안 노력을 쌓은 속에서 나왔으므로, 비록 길을 달리한 때가 있었지만 요컨대 모두 경학(經學) 문장의 선비들이었다."
  43. 구상유취라는 사자성어에서 따온 욕설이다.
  44. 의역이 아니다. 원문에 쓴 글자도 새부리 훼(喙)자를 썼다.
  45. 반면 할아버지인 영조는 상과 벌이 밥먹듯이었다. 영조 48년엔 3명을 번갈아 총합 10번이나 영의정을 갈아치울 정도였다.
  46. 중국에서는 呵의 발음이 ke라고 한다 크어, 크 정도로 발음이 된다. 발음때문에 현대중국어에서도 웃길때 자주쓰는 말이다.
  47. 위 이미지의 본문 왼쪽에서 세번째 줄 가장 아래에 있다.
  48. 정조의 공식 사인은 종기로 되어 있으나, 어찰에 적어놓은 정조의 말에 따르면 온갖 종류의 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읽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지경이다.
  49. 사실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딱히 심환지에게만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는 점과 정조 본인이 고의적으로 병을 키워서 적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환지를 측근이라기 보다는 같이해야할 한 당의 영수. 로 봤다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50. 손이 귀한 왕실이라 태어나기만 했으면 왕자든 옹주든 금이야 옥이야 자랐을텐데 엄마 뱃속에서 세상 빛도 못 보고 죽었다.
  51. 우연의 일치이지만, 사도세자도 뒤주에 갇힌 지 8일만에 죽었다.
  52. 시경 주남(周南)에 나오는 노래로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한 여성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53. 홍대용, '계방일기'
  54. 1778년, 정순왕후의 후궁 간택령(조선왕조실록)
  55. 정약용, '부용정 시연기'(1795)
  56. 정조, 홍재전서(1799)
  57.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 어제 의빈 묘지명
  58. 실제로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전10권에 달하는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했다.
  59.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충사를 확장하고 숙종 본인이 직접 이순신의 제문을 지었다. 영조는 추승자체보다도 정작 신하들을 까는데 이순신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박문수. 사실 비단 영조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의 왕들이 이순신과 신하들을 상호 비교하면서 까는 통에 피해자들이 좀 여럿 있다 특히 더 두드러진 것은 유명수군도독을 사후 유일하게 열거한 것. 숨덕을 넘어 대놓고 덕질. 즉, 대표 대덕이다...
  60. 여기엔 왕의 사유재산인 내탕금까지 투입했다.
  61. 정조실록 16권 7년(1783 청 건륭 48년) 8월 2일 3번째 기사
  62. 사도세자의 고백 345쪽
  63. 정확히 말하자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먼저 밝히고 나서 얘기했다.
  64. 사도세자의 고백 345쪽
  65. 이떄 그 두 부자를 외로운 새새끼,썩은 쥐새끼라고 깠다.
  66. 정조실록 1776년(즉위년) 4월 1일, 8월 6일 및 8월 19일 조
  67. 이런 조치는 대게 강상을 범하거나 역모를 일으킨자가 나오는곳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다.
  68. 이후에도 추숭 반대를 외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69. 참고 문헌: 사료 -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디지털베이스 / 단행본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4 / 논문 - 정병설, 길 잃은 역사대중화
  70. 정조가 정순왕후를 부른 이유는 불확실하다. 정황상 정순왕후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
  71. 다만 심환지가 비밀 어찰을 어명대로 태우지 않고 숨겨두었다는 것 자체가 심환지가 정치적으로 정조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암살론을 100% 반증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72. 대혼저지로도 벽파를 몰아냈는데 선왕 시해는 아예 멸문시켜버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73. 그런데 효종 역시 얼굴에 종기가 생겨 신가귀가 침으로 따자 나아졌다가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죽었다. 때문에 막연히 운이 나빴다. 라고 볼 수도 있다.
  74. 식사는 꼬박꼬박 챙겼고 반찬을 줄이는 철선도 계획적으로 했던 할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식사를 소홀히 한 편이다. 거기다 《한중록》에 따르면 아침에 약해서 아침을 잘 안 먹었다고 하지만 한중록 자체가 원체 혜경궁 홍씨의 입장이 강하고, 정조 실록이나 일득록과 차이가 꽤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75. 세종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도 너무 지나치게 부지런해서 탈이 생겼다.
  76. 단 폐위되거나 (광해군, 연산군) 물러나거나 (태조, 정종, 단종, 순종), 요절한 임금(문종, 예종, 인종, 경종)을 빼면 평균 재위년은 28년, 영조를 빼면 26년이긴 하다.
  77. 물론 상왕이 된 왕은 초반기 4명 즉 태조(조선),정종(조선),태종(조선),세조(조선)이다.
  78. 이름이 비슷한 배우 천호진이 맡았다고 알려져 있는곳도 있는데 확인결과 전호진이라는 다른 배우가 맡은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