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영화 감독)

1 개요

대한민국영화 감독. 1946년 청주 출생. 고려대 불문과 출신으로 김수용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하다가 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감독 데뷔하였다. 80년대에는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않았으나 90년 남부군을 연출해 흥행과 비평에 모두 성공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로 좋은 평을 받았으나 90년대 후반작들인 <블랙잭>이나 <까>가 화끈하게 망한 후 조금 주춤하게 되었다.

이후 10년간 연출을 하지 않다가 2011년 부러진 화살로 복귀하였고 2012년에 남영동1985를 연출하였다.

연출력 하나는 확실한지라 상도 여러번 받았다. 남부군으로 청룡영화상 감독상, 하얀전쟁으로 대종상 영화제 각색상, 도쿄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대상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로 백상예술대상 감독상과 청룡영화상 대상을, 어째서인지 블랙잭 같은 영화에서도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부러진 화살로 청룡영화상 감독상 등등...

2 병크

1988년 걸쳐 할리우드 직접배급 영화가 한국에 상영되기 시작하자 격렬히 반대했고 같은해 9월 30일과 10월 1일에 걸쳐 첫 직배영화인 위험한 정사가 상영되던 두개 극장에 난입해서 영화감독 정회영, 뱀장수 김태숙과 함께 뱀을 풀어놓는 테러를 감행했다. 나중에야 알려져 남부군을 찍던 도중에 체포되어 6개월간 철창 신세를 졌다가 보석으로 석방되어 하루 남은 촬영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꽃뱀[1], 물뱀 등 독은 없는 뱀을 골라서 풀었지만 병크인건 마찬가지. 너무 흥분한 상태였는데다가 뱀 풀기 작전을 지휘는 했어도 직접 풀진 않아서 극장에 정확히 몇마리의 뱀을 풀어넣었는진 기억이 안난다고 한다. 경찰은 코리아 극장에 4마리, 신영극장에 10마리를 풀어놓은 것으로 확인했다. 그래도 뱀들은 조용히 극장 안 구석으로 기어들어가서 관객들은 뱀이 있는 줄도 몰랐다나. 극장은 뱀을 발견은 했는데 나쁜 소문이 날까봐 이를 숨겼고, 나중에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야 경찰이 뱀을 푼 자가 불도 지른 것이 아니겠냐고 사건을 공식화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은 <부러진 화살> 개봉 기념 인터뷰에서 정지영 본인의 사건에 대한 소회.

UIP 직배 저지투쟁 때 삭발도 하고, 성명도 내고, 한달 동안 시위도 하고 그래도 언론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단신만 나오지 ‘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영화인들이 기를 쓰고 막으려하는 지에 대해 알아보려는 기사는 하나도 없다시피 한 거예요. 그러다보니 대중들은 관심도 없고. 그래서 언론의 주목을 끌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게 할 방법으로 뱀을 풀면 어떨까라는 의견이 나왔고, 그걸 조직적으로 한 게 아니라 나중에 나 혼자 다른 사람에게 의뢰해서 뱀을 극장에 풀어달라고 했던 거예요.[2] 그런데 뱀이라는 동물이 알고 보니 시멘트 바닥에서는 구석에서 꼼짝도 않고 숨어있는 습성이 있어서 누구한테 해를 끼치지도, 관객들이 있는 상황에서 소란이 벌어지지도 않고 모르고 지나가게 됐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청소부가 발견했는데 극장측은 관객이 알면 장사 안될까봐 쉬쉬하고 덮어버렸는데, 나중에 극장에 화재가 나니까 뱀을 푼 사람이 불을 지른 것으로 몰고 가려고 표적수사를 하다보니 알려지게 된 거지요. 수사과정에서 화재사건과 뱀 사건은 전혀 별개의 일이라는 게 밝혀져서 나는 <남부군> 촬영을 하러 현장으로 떠났는데 여름 장면 촬영 마지막을 하루 앞두고 형사가 찾아 왔어요. 신문에 ‘정지영 구속’이라는 보도가 나왔으니 나를 잡아가야겠다고. 현장에서 멀쩡히 촬영 중인 사람이 구속되었다는 오보 때문에 하루 남은 촬영을 미룰 수는 없길래 다 찍고 출두할 테니 하루만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길로 구속되서 재판받고 보석으로 풀려나 하루 남았던 여름 장면을 겨울에 찍었지요.

촬영 도중에 체포되서 빨치산을 다룬 남부군의 촬영 자체를 방해하려는 음모가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정지영 감독은 만약 정부가 촬영을 방해하려 했으면 아예 촬영을 못하게 하는 방법도 많았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정지영 본인이 직접 뱀을 풀지 않았단 이유로 본인은 보석으로 풀렸으나 직접 뱀을 푼 사람들은 징역형을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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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출간된 프랑스 철학자 기 소르망 저서의 ‘자본주의 종말과 새 세기’ 라는 책에서 정 감독은 이러한 성향을 드러낸 적이 있다. 본문 중 “현대화 대신 그들은 무엇을 제시하는가?” 라는 질문에 이문열 작가는 “아무 대안이 없다” 고 말했고 정 감독은 주저하지 않고 “북한” 이라고 말했다. 다만 단편적인 사실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부정하는 발언은 아니다.

북한의 잔혹한 실체를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발언을 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김근태를 모델로 하여 <남영동 1985>를 찍었고, 10월 6일 기자회견에서 “이 영화가 대선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 고 말하기까지 했다. 과거 대한민국 독재 정권에 대해서 비판적인 인물이 현재 진행형이었던 북한의 독재과 인권탄압에 대해선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겼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냥 도매급으로 그의 영화까지 매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이 시기가 1995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제주해군기지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보였고,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의혹을 내밀며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감독 본인은 “이 영화는 우리사회의 소통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힘있는 자가 (시민들에게) 의문을 더 이상 갖거나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면 소통이 막힌다. 우리 사회의 만연된 화두인 소통의 문제를 이 사건이 잘 보여준다”#라고 말했지만, 답정너식의 비과학적인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상당하다.

3 영화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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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혈목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거 독사다.
  2. 사실 중동의 테러리즘도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수차례의 중동전쟁에서 서구권 주류미디어들이 이스라엘 편향적인 보도로 일관하자, 1960년대 팔레스타인 저항조직들이 전세계에 자신들의 입장을 직접 표명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여객기 납치를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는 납치하면 TV생중계 기자회견부터 요구해서, 공항에 착륙하면 전세계 외신기자들 모아놓고 감옥에 있는 동료들 석방 요구하면서 자신들 입장 표명하는 성명서 읽고, 이런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여객기 납치 정도론 관심을 못끌자, 빈건물에 폭탄도 터트리고, 자살테러로 사람도 죽이고, 이런 식으로 점점 과격해져가면서, 여기에 이스라엘과 미국은 무차별적 폭격과 민간인 학살로 대응하고...계속되는 피의 악순환으로 9.11을 거쳐서 최근의 ISIL까지 온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