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일기

1 개요

政廳日記. 조선 선조 21년, 1588년부터 1590년까지 약 2년여간 허준, 안덕수 등의 내의원 어의들이 당시 영의정이었던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을 치료하며 매일의 과정을 기록한 치병일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저자는 확실하지 않다. 최초 정청일기의 발견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은 저자가 당연히 노수신일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연구가 지속되면서 점차 어떠한 제 3자가 병상의 노수신을 봉양하며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새로운 주장의 주 근거는 일기에서 노수신에게 진사주(進賜主)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청일기는 노수신이 영의정 및 영중추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588년 1월부터 시작하여 1590년 3월 11일까지 기록되었다. 일기의 주 내용은 노수신의 건강 상태와 아침, 점심, 저녁에 먹은 음식들, 그리고 병치료와 문안을 위해 찾아온 의원들과 방문객들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3경 내지 4경 무렵에 노수신이 마시는 약물의 이름과 양 또한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특히 정청일기의 기록 대부분은 노수신이 건강 관리를 위해 섭취했던 각종 양로 환자식들에 대해 이루어져 있다.

아침과 저녁에 먹던 밥은 난반이라는 푹 익어 부드러워진 밥이거나 수반이라고 하여 물에 말아놓은 것을 먹었다. 같이 나오던 죽, 미음류는 곡류로 이루어진 것이 많았는데 팥죽, 들깨죽, 흰죽, 우유죽, 원미죽, 율무죽, 청량미음, 청량미죽, 콩죽, 붕어죽 등이었다. 밥에는 채소 종류가 함께 올려졌는데 줄김치, 김치, 파, 숙채, 미나리 등이었다.

국의 경우 탕 종류가 많았는데 숭어탕, 생대구탕, 굴탕, 굴국, 시래기탕, 송이국, 가자미탕, 쏘가리탕, 자라탕, 족탕 등을 먹었다. 구이류로는 소 위장 구이, 두부와 굴꼬치 구이, 자라구이, 꿩구이, 돼지고기구이, 오소리구이, 갈비구이, 낙지구이, 조기구이, 굴구이, 붕어찜, 닭찜 등을 자주 먹었고 특히 오소리 고기는 흙돼지고기라 부르며 보양 음식으로 자주 먹었다.

오후에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떡 종류가 많았는데 쑥백설기, 백설기, 구운 떡, 빈대떡, 수제비, 칼국수, 만두, 운두병, 두과병, 병실과 등을 먹었다. 술의 경우 과음하지 말고 약간의 음주로 양생하라는 의원의 진단에 따라 이화주, 모주, 예주만을 마셨으며, 그 외에는 식혜, 냉차 등을 마시거나 얼음을 잘게 부수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원이 하는 진찰의 경우 처음에는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이 주로 진맥하였다. 허준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허준의 동생인 허징이 노수신의 서녀 사위라는 인척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일기 초기인 1588년 1월 12일에 허준이 진찰을 와 삼령백출산을 복용하길 권하는 것을 시작으로 노수신의 병치료를 목적으로 자주 왕래하였다. 그 외에도 중추부약방 소속의 노돈이 직접 보중치습탕을 만들어 먹이거나,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을 도왔던 이공기, 남응명 등이 진찰을 오곤 했다.

하지만 병이 악화되는 일기 후반부에 이르면 허준 대신 안덕수가 자주 문진을 오기 시작하였다. 안덕수는 이른바 양예수-허준으로 이어지는 강하고 효과 빠른 약물을 선호하는 준한 의학에 반대하며 온보 의학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어우야담 의약편에서도 두 학파의 인물이 '양예수의 패도와 같은 직접적인 투약' vs '안덕수의 왕도와 같이 느리지만 몸을 보하는 투약'을 두고 크게 경쟁을 벌이는 야사가 나올 정도로 당시 허준과 유명한 경쟁관계였다. 때문에 1588년 6월 12일에 노수신이 흉복통이 심해지자 허준과 안덕수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결구도가 짧은 구절 속에 보이기도 하고 후기에는 정탁의 요청으로 양지수, 남응명 등이 안덕수에게 처방을 묻기도 한다.

1500년대 후반 저술된 우리나라의 치병일기로, 특히 당시 환자가 매일 먹었던 환자식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한식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

3 바깥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