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열

KBO 퓨처스리그 현재 감독
북부
리그
파일:Attachment/police baseball s 5.png유승안
(경찰)
한문연
(고양 다이노스)
파일:Attachment/doosan bears s.png공필성
(두산 베어스 2군)
쉐인 스펜서
(화성 히어로즈)
김동수
(LG 트윈스 2군)
파일:Attachment/sk wyverns s.png김무관
(SK 와이번스 2군)
남부
리그
파일:Attachment/lotte giants s.png손상대
(롯데 자이언츠 2군)
파일:Attachment/samsung lions s.png성준
(삼성 라이온즈 2군)
파일:Attachment/sangmu s.png박치왕
(신협 상무 피닉스)
파일:Attachment/hanwha eagles s.png최계훈
(한화 이글스 2군)
55px정회열
(KIA 타이거즈 2군)
파일:Attachment/KT Wiz s.png이상훈
(kt wiz 2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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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코치 부임 이후. 피칭머신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KIA 타이거즈 No.81
정회열(鄭會烈 / Hei-yeol Jung)
생년월일1968년 10월 9일
출신지전라남도 장성군
학력광주중앙초-충장중-광주일고-연세대
포지션포수, 우익수[1]
투타우투우타
프로 입단1990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소속 팀해태 타이거즈 (1990~1997)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지도자 경력SK 와이번스 배터리 코치 (2002)
한화 이글스 배터리 코치 (2003)
KIA 타이거즈 배터리 코치 (2004)
삼성 라이온즈 2군 배터리 코치 (2006~2009)
삼성 라이온즈 1군 배터리 코치 (2010~2011)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 코치 (2012~2013.8.)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 코치 (2013.8.~2013)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15~ )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5번(1990 ~ 1997)
김무종(1983 ~ 1988)정회열(1990 ~ 1997)신동주(200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6번(1998)
홍광천(1996)정회열(1998)김현욱(1999 ~ 200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5번(1999)
양용모(1997 ~ 1998)정회열(1999)배영수(2000~201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9번(2006 ~ 2011)
유남호(2001 ~ 2003)[2]정회열(2006 ~ 2011)황병일(2012)

1 소개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선수이자 現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포지션은 포수였다.

2 프로 선수 시절

1990년 해태 타이거즈에 1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3] 당시 해태에는 장채근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어 주로 백업 포수로 활약했으며 가끔 우익수 대수비로도 나갔다.[4] 과거에는 양용모같이 대놓고 도루하면서 포수를 안하는게 나았을 선수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프로1군에서 포수를 보는 선수 중에 기타포지션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포수치고는 주력도 나쁘지 않고 나름 야구 센스가 뛰어났던 선수. 1993년에 장채근의 뒤를 이어 주전 포수로 자리잡나 했더니, 다음 해 시즌 막판 새끼손가락 부상을 당하여 졸지에 시즌 아웃. 이 때문에 1995년에는 8경기 밖에 뛰지 못했고 그 공백은 1994년 시즌 중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이적한 최해식이 지켰다.

1996년에는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며 최해식의 백업으로 역할을 톡톡히 했으나 그 해 초 하와이 전지훈련 때 송유석, 이순철, 조계현, 이건열 등과 항명사건의 주범으로 찍혀 다음 해인 1997년에는 고작 1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5]

1993년에는 .275를 기록하면서 규정타석을 찍은 해태 타자중 이종범에 이어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제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1997년 시즌을 끝으로 해태에서 방출되어 이듬해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그러나 당시 삼성 구단은 김영진의 스트라이크 낫아웃 사건 때문에 그 대체요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서 포수를 영입하면서 포수 자원이 차고 넘쳤다. 때문에 삼성에서도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고[6] 결국 1999년에 은퇴했다.

참고로 전설적인 1999년 플레이오프의 마지막 타자로, 롯데의 마무리 투수인 주형광에게 삼진을 당한 주인공이다. 그래서 명승부 관련 영상에서 수없이 삼진을 당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현역시절 사직 야구장에서 매우 강했다. 1993년 연타석홈런을 치는가 하면 1999년 생애 프로 마지막홈런도 여기서 뽑아낸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KIA 타이거즈의 배터리코치를 역임했고 2005년에는 KIA 전력분석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2006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부름을 받아 삼성의 2군 배터리코치로 부임하였다. 2009년 말 기존 1군 배터리코치였던 강성우가 한화 감독으로 임명된 한대화를 따라 이적하면서 1군 배터리코치로 승격되었다. 1군 배터리코치가 된 후, 삼성 포수들의 주자견제와 도루저지는 보다 나아졌다. 그러나 다년간 삼성에 있었음에도 백업 포수를 키우지 못해 진갑용현재윤이 부상을 당했을 때 심광호, 채상병 등 외부에서 포수를 영입해야 했기에 삼팬들에게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11 시즌 종료 후, 선동열KIA 타이거즈의 신임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모두의 예상대로 김평호 코치와 함께 KIA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2013 시즌 중인 8월 17일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김용달, 조규제와 2군으로 내려갔다. 2013 시즌 후 스카우트 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4 시즌 후에는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4 스카우터 시절

201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0명 중 7명을 대졸로 뽑는 등, 지나치게 대졸 일색으로 지명했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라운드에 상관 없이 꽂히는 선수가 있으면 무자비하게 바로 지명했던 권윤민과 달리 이번엔 라운드에 맞는 적절한 픽을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최소 권윤민보단 낫다는 의견. 무엇보다도 스카우트 팀에 재직했던 2015년 신인드래프트 10라운드 픽이었던 김호령이 2016년 포텐이 터지며 어느 정도 좋은 평을 받았다.

여기에 부상으로 군대를 가야 하는 박지훈에게 함평 사회복무요원 근무를 권한 것도 정회열 스카우터였다. 함평에서 출퇴근하면서 쉬는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몸을 만들수 있도록 배려한 것.

5 2군 감독 시절

김용달 2군 감독이 2014시즌 끝나고 계약기간 만료로 물러나자 새 2군 감독이 되었다.

6 기타 사항

  • 프로필에서도 보듯 원래는 염경엽 넥센 히어로즈 감독과 같은 또래이고, 같은 해에 충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염경엽 감독과 달리 1년 일찍 프로의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2015년에 염경엽의 죽마고우이기도 한 어떤 런동님을 1군 감독으로 모시는 재미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7]
  • 2군 코치 시절 당시 경희대 야구부 투수 인스트럭터에게 기아 입단을 제안했는데 이 선수가 바로 최영필이다.

7 역대 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사사구
1990해태 타이거즈742020.2575210132619113
1991891930.238466162624225
1992972140.2765910174628319
19931173450.2759514173533021
1994802710.236648083422013
19958140.14321000000
1996591030.184194031112019
19971190.00000000001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 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사사구
1998삼성 라이온즈39610.262162008206
199947890.1801630214617
통 산62115010.246369584362001467124
  1. 주전을 차지하기 전인 1992시즌 플레이오프까지는 우익수로 종종 나왔다.
  2. 시즌중 기아로 옮겼다.
  3. 고교 - 대학 동기인 이호성도 같이 2순위 지명받아 입단했다.
  4.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수비S랭크까지는 못찍지만 외야수비가 가능하다.
  5. 더군다나 96년 코시 2차전때 번트실패로 갓끼리사마한테 참교육을 받았다.
  6. 김영진, 김지훈, 정회열, 김광현이 주전포수 경쟁을 했으나, 1999시즌 중 진갑용이 오면서 결국 진갑용이 주전포수가 되었다.
  7. 사실 이건 염경엽 감독이 중학교 때 유급크리를 먹어서 그런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