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주 유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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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1979년에 일어난 유괴사건. 최초로 범죄 수사에 최면술사가 동원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납치된 아이는 정효주(鄭效朱)로 당시 부산의 한 수산업체 사장의 막내딸이었다.

2 1차 유괴

1978년 9월 15일 낮 12시에 남성국민학교 2학년이던 정효주는 귀가도중 한 40대 남성을 만나게 된다. 이 남성은 정효주에게 "차안에서 트렁크 열쇠를 갖다주렴. 그럼 집까지 태워줄께"라고 꼬드겼고 정효주가 차안에 올라타자 곧바로 차를 몰고 서울특별시로 올라갔다. 차안에서 낯선 아저씨가 자신을 데리고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을 알아챈 정효주는 차안에서 울음을 터트렸고 범인은 "나는 너 아버지 친구야. 너 아버지가 5,000만원 빚을 져 부산 세관에 잡혀갔고 아버지가 잡혀가기전에 너를 부탁하고 가셨어"라며 다독였다.

이후 범인은 효주를 데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협박전화를 걸었고 효주를 시켜 돈을 부치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 범인은 서울에 거주중이었던 정효주의 이모와 협상을 하겠다며 가족들에게 통보했는데 유괴 33일째 되던 날에 전화를 걸 공중전화를 물색하던 범인을 부산지방 경찰청 소속 공길용 경사에 의해 검거되며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범인은 매석환(梅錫煥)이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유괴[1]등 전과 9범을 기록했던 남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거주하며 자신의 자가용으로 불법 택시운전을 했는데, 부산에서 내렸던 한 승객이 "남성국민학교에는 부잣집 자식들이 많이 다닌다."라는 말을 했던 것을 듣고 곧바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매석환은 10년형을 선고받고 1989년에 만기 출소했다.

2.1 여담

  • 매석환은 아이를 납치 했지만 정효주에게 옷을 네벌 사주고, 불고기등 맛난 요리를 사주는 등 잘 대해줘서 정효주는 착한 아저씨라고 잘 따랐었다. 매석환이 검거됐을 당시 정효주는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있었는데 매석환을 잡아가자 "우리 착한 아저씨 왜 잡아가요!라고 하기도 했다.
  • 범죄 수사기법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던 데다 당시 사건을 비공개수사로 진행했기 때문에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정효주의 부모는 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국의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찾아 물어봤는데 모두 정효주가 죽었다고 했고 김중산 도사[2]라는 무속인만이 효주가 살아있다는 말을 했다.
  • 이때 차량번호를 파악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최면수사기법이 동원되었고 차량 번호를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공길용 씨가 직접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그래서인지 일부 영화적 연출과 정효주의 이름이 가명으로 처리된 것을 빼면 실제 사건과 동일하게 진행된다. 공길용과 김중산도 실명으로 등장. 대체적으로 평이 좋으며 전국적으로 2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다만 일반적인 스릴러를 생각한 관객들은 재미가 없다는 평이다.

3 2차 유괴

납치된지 7개월이 지난 1979년 4월에 정효주는 등교를 하던 도중 교문 앞에서 또 다시 납치를 당했다. 정효주는 납치이후 가족들과 매일 등교를 같이 했는데 딱 하루 같이 등교하지 않은 날에 납치를 당한 것. 이후 범인은 효주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며 1억 5,000만원을 요구했고 "신체를 절단해 보내겠다"라는 끔찍한 협박을 동반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정양의 아버지는 "딸만 살려주면 뭐든 들어주겠다."라고 했으며 1차 유괴범이었던 매석환은 "불안감을 떨치려면 애를 풀어주고 자수해라"라는 편지를 쓰기까지 했다. 부산시에서는 전단 60만장을 배포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5일째가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유괴사건 최초로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유괴범이 효주를 무사히 돌려주면 최대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고 말했고, 범인은 그날 밤 경주 톨게이트 인근에 효주를 내려 놓고 도주했다. 사건 발생 1년 8개월 후 범인이 잡혔는데 그는 정효주 아버지의 전 운전기사였던 이원석 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는 오보였다. 사실 이원석은 운전기사가 아니라 탈영병이었고, 다른 곳에서 트럭운전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고 효주 양의 어머니가 진술하였다. 관련기사 그는 법정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박대통령의 차녀가 '아버지의 약속을 지켜주길 바란다는 탄원서를 제출해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본격 삼권분립에 대한 도전

이원석은 1999년에 출소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차녀, 박근령의 은혜를 기억하며 2008년에 육영재단을 찾아가 150만원을 기부했다고 알려졌다.
  1. 4.19 혁명 발포 주동자였던 곽영주의 아들을 유괴해서 자신의 집에 판 땅굴에 숨겨놨다가 잡혔다.
  2. 2015년 기준 부산에서 철학관을 하고 있다고 한다. jTBC의 방송에서도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