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탄

위서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왕릉관구검제갈탄등애종회

諸葛誕
(? ~ 258)

촉나라을 얻었고, 오나라을 얻었으며, 위나라를 얻었다.[1] - 세설신어

1 개요

삼국시대 나라의 정치가 겸 장군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자는 공휴(公休).

낭야군 양도현 사람으로 제갈량의 족제인데 혹은 먼 일가붙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먼 친척인 것은 확실하다.

2 정사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집안 조카라는 이유로 중용되지 못하다가 제갈량이 죽은 다음에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연의의 창작이며 정사에서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하후현, 등양 등과 교류하면서 이른바 '사총팔달'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을 얻으며 관직에 임용되었다고 한다.

문제 조비 대에 상서랑을 지낼 때, 두예의 조부인 두기와 더불어 조비가 탈 배를 시험하다 강풍으로 전복되어 둘 다 물에 빠졌는데, 호분 직책을 하고 있던 자가 제갈탄을 구하려고 하자 제갈탄은 제발 두기부터 구하라고 소리쳤지만 두기는 결국 익사하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강기슭에 표류해 살아남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당시 명제 조예는 이처럼 명성 높은 이들을 매우 싫어하여 "명성이란 병풍에 그린 떡과 같으니 실속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고, 중서랑 노육을 시켜 관리의 성적을 평가해 임용하는 제도를 만들게 했다. 이런 연고로 면직당했지만 조예 사후 조상이 정권을 잡자 친하던 하후현과 등양이 득세해 다시 어사중승, 상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뒤에 양주자사가 되어 소무장군까지 올랐고, 조상 일파가 실각하는 와중에도 사마의는 그를 계속 기용해서 왕릉을 토벌할 때 진동장군에 산양정후의 작위까지 받을 정도였다. 또한 사마씨 집안과도 인척관계를 맺어 사마의의 아들 사마주에게 딸을 시집보냈고, 막내아들 제갈정은 훗날 진 무제가 된 사마염과 어려서 서로 친하게 지냈다.[2][3]

사마사가 정권을 잡아 의 동흥을 공략하려 하자 호준과 함께 나아가 싸웠으나 제갈각이 펼친 기습작전으로 패해 관구검과 자리를 맞바꾸는 형식으로 벼슬이 깎여 진남장군 예주도독를 맡았다. 255년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이 손잡고 사마사에게 반기를 들자 그 제압에 앞장서 근거지였던 수춘을 빼앗았고, 그 공으로 진동대장군이 되어 다시 양주도독을 맡았다. 이 혼란을 틈타 오의 손준이 쳐들어 오는 것도 격퇴해 좌장군 유찬을 죽여, 정동대장군 고평후로 임명되었다.

이후 257년 사마소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데, 전에 친하게 지내던 하후현, 등양 등이 조상과 가까운 사이라 이들을 제거한 사마씨 일족을 늘 두려워한 나머지 양주 일대에서 민심을 모으며 근거를 확보하려 했으며, 이 낌새를 눈치챈 사마소는 후환을 제거할 생각으로 심복 가충을 파견해 소환령을 전했다. 제갈탄전에 인용된《위말전》에 따르면 가충이 선양 얘기로 제갈탄을 떠보자 위 황실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대답했다.[4] 조정으로부터 사공에 임명되어 낙양으로 영전하라는 명을 받자 자신을 제거할 계획이라 여긴 제갈탄은 사마소의 전횡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궐기해 양주자사 악침을 급습해 죽이고 수춘에 주둔하며, 제갈정과 부하인 장사 오강을 오로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사마소는 종회, 왕기, 진건, 석포 등을 데리고 토벌에 나섰으며, 오는 손침의 명령으로 오에 투항했던 문흠과 전단, 전역, 당자 등을 장수로 3만 원군을 보냈다. 문흠이 미리 합류한 뒤 위군이 수춘을 포위하자 수차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으며, 오의 원군 중 주이는 위군에 몇번 패한 죄로 손침에게 참수당했고 전단과 전역은 종회의 계책에 말려 위에 투항했다.

해를 넘겨 포위망이 지속되고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투항자가 속출했고, 문흠과 향후의 전략에 대해 의견 차이가 생기자 결국 문흠까지 죽였다.[5] 그 때문에 문앙, 문호 형제까지 위군에 투항했고 사마소는 이를 이용해 그들에게 벼슬을 준 뒤 수십기를 이끌고 성 주변을 돌면서 심리전을 펴게 했다. 제갈탄 측의 사기는 이를 계기로 급락해 기회를 틈탄 위군이 맹공을 퍼부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제갈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싸웠으나 이내 호분이 이끄는 군세에 궤멸당하면서 전사했다.

수춘이 함락당하며 당자 등 오의 장수들은 모두 사마소 군에게 항복했고,[6] 제갈탄의 삼족은 몰살당했으며 참수된 머리는 낙양에 보내졌다. 오로 건너간 아들 제갈정은 그대로 눌러앉아 오가 망할 때까지 장수로 지냈다.

3 평가

위진 교체기 역사를 서술할때 가장 골아픈 존재 중 하나. 찬탈의사를 내비치며 떠보는 가충에게 발끈한 기록이 있는가하면 황제 조모를 협박한 기록도 있고 사마씨에 붙어 영화를 누릴수도 있는 위치에서[7] 반란을 일으킨거보면 충신같기도 한데 오를 끌어들였는 점에서 진의가 의심스러워진다. 사람마다 평가가 획획 갈리고 관련 기록이 같은 사서내에서조차 상충되는 사례도 있어[8] 후세인들의 판단을 어렵게한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 셋을 일컬어 '촉은 용을 얻고, 오는 범을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라고 평해져 셋 중에서는 역량이 가장 못한 인물로 들어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당대 위나 오에서 명망이 드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얼핏 멸칭으로 받아 들여질 수도 있는 '개'라는 표현은 '공이 있는 자'로 해석될 수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다지 멸칭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용과 호랑이가 넘사벽이라 그래보일 뿐 게다가 후대인들의 평가 중에서는 제갈탄을 개로 평하는 것이 부당하다면서 제갈근보다도 높게 치는 경우도 있다. 나이로 보나 활약한 시대로 보나 제갈량, 제갈근보단 오히려 뒷세대인 제갈각, 제갈첨과 가까운데 굳이 제갈량, 제갈근과 비교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과 동일선상에 오를만큼 제갈탄의 명성이 높았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다.

제갈탄 수하에 있던 수백 명은 투항하지 않은 죄를 지었으므로 참수당하게 되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제갈공(諸葛公)을 위해 죽으니 여한이 없다.”
제갈탄이 인심을 얻은 것은 이와 같았다. - 삼국지 <위서> 제갈탄전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그를 따르던 군사 수백이 항복을 택하지 않고 모두 죽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전횡의 빈객들이 순사한 것에 견주는 평가가 동시대에 나올 만큼 인망은 높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보다 유연함이나 과단성을 능력과 더불어 갖췄더라면 그 자신의 처신에 따라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4 미디어 믹스

창작물에서는 '제갈씨 보정'과 '충신 보정'을 받아서 비교적 괜찮게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4.1 반삼국지

반삼국지에서는 조카 제갈첨의 말빨에 넘어가 촉에 투항한다. 역시 동인지.

4.2 삼국전투기

제갈탄(삼국전투기) 문서 참조.

4.3 진삼국무쌍 시리즈

제갈탄(진삼국무쌍) 항목 참조.

4.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전반적인 능력치는 70대에 매력은 80대 초반으로 후반부 플레이에서는 충분히 쓸만한 정도의 만능형 장수다. 삼국지 9이후 새롭게 추가된 시나리오인 삼국지 11 '영웅집결'에서 관구검의 부하장수로 설정되어 있다. 단순히 반란 나중에 일으켰다는 이유로 원수의 부하로 만들어버린 더러운 코에이(…). 더군다나 관구검과 서로 친애무장이다? 그나마 문흠과는 혐오 관계.

삼국지 3에서는 그냥 그저그런 장군일 뿐이다. 육지66 수지70 무력72 지력70 정치59 매력80으로 자신보다 훨씬 무력이 높은 문흠이 장군이 되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제갈탄은 장군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장군이 될 수 있다는 점에만 만족하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채모나 오나라 장수가 아닌데도 수전지휘가 육전지휘보다 높다.

삼국지 5에서의 능력치는 83/73/56/83에 진형도 추행,학익,어린으로 괜찮고, 보유특기도 화시, 원시, 응사등 좋은 특기가 있지만 무쌍이 없어서 쓸데가 없는 분기, 잉여인 화계도 가지고 있는게 조금 아쉽다.

삼국지 6에서의 능력치는 79/79/73/72/81에 꿈은 패권. 파워업키트의 짧은 시나리오 중 하나인 제갈탄 궐기에서는 수춘을 본거지로 삼은 군주로 등장한다. 장수가 본인을 포함해 문흠, 문앙 부자에 오강이라는 듣보잡 이렇게 4명이라 난이도는 최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마소 세력의 주력인 등애 부자와 양호, 두예 등은 각각 촉과 오 전선에 투입되어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적장은 종회나 왕준, 왕기 정도이며, 후방은 병력만 많고 장수는 없는 사실상의 공백지이므로 제갈탄(군주 통솔병력 2만)+문앙(초반 장군직 병력 9천 5백) 정도만 끌고 가서 소패-하비를 터는 것으로 게임을 시작하면 된다.[9] 게다가 초기 부하 장수 중에서 문앙은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장수들 중 최고의 무력 스텟을 자랑하니 후방의 나약한 문관급 장수들을 수월하게 바를 수 있다. 본거지인 수춘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위는 통치도시 대비 장수 숫자가 너무나 부족해서 병력수만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면 웬만해선 먼저 쳐들어오지 않고,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장수들을 잘 놔두면 사마소가 알아서 몸값흥정을 하러 올것이며, 등용이 되는 장수들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으니 징병에 올인하고 내정은 내다버려도 상관없다

  • 10도시 지배 목표 달성하기 : 소패와 하비를 점령하고 화북으로 올라가버리면 공백지나 다름없는 10도시를 파죽지세로 확보할 수 있어 가장 빠르게 시나리오 클리어가 가능하다.
  • 황제 조모 옹립 목표 달성하기 : 화북의 도시를 6개정도 점령하고 기본 병력들을 끌어모으면 징병을 하지 않아도 7만 가까운 병력이 모이는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낙양까지의 거리를 잰 뒤 가장 가까운 곳에 장수와 병력을 집중시켜 뚫어내면 된다.
  • 사마소 참수 목표 달성하기 : 황제 옹립과 같은 방법으로 클리어하되, 야전으로 출전한 사마소를 격퇴해 포로로 잡은 뒤 낙양 공성전은 하지 않으면 된다. 제갈탄이 사마소를 잡아 통쾌하게 참수시켜버리는 엔딩이 나온다. 사마소도 죽이고 황제도 옹립하면 황제 옹립과 같은 엔딩이 나온다.

마지막 짧은 시나리오이지만 낙양점령(=황제조모옹립), 10도시지배, 사마소참수 셋 모두가 너무나 쉬운 목표이기 때문에, 진정한 하드코어 게이머라면 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오의 도시들을 점령해서 10도시를 채우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는게 좋다. 이러면 진짜로 마지막 스테이지 다운 고난도 미션으로 바뀐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80/70/76/76. 병법은 이것저것 많은 데 2단계 이상의 공격계 병법 등 정작 좋은 것이 별로 없는 게 흠이다. 분전, 돌파, 제사, 누선,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81/71/75/66/82로 만능형에 특기는 10개. 능력치 합이 375로 한끝차로 능력치 TOP50 안에 들지 못했다.

삼국지 11에선 금강 특기를 가지고 나온다. 금강 특기 보유자 중에선 가장 통솔력이 높다.[10] 능력치는 81/72/71/75/82로 총합은 382.

삼국지 11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양평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부하로는 제갈정, 관구검, 관구수, 관구전, 문흠, 문앙, 문호, 당자, 장반, 오강, 윤대목, 초이가 있다. 장수들 정치력이 대체로 높지 않아 내정이 다소 힘들지만 전투력은 북평의 유표보다 높으므로 유표를 멸망시켜 유표 및 괴씨 형제를 얻으면 한결 수월해진다. 구석에서 시작한다는 장점도 있어서 난이도는 비교적 낮은 편. 영웅집결과 비교하면 관구검과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삼국지 12에서는 자기 아들은 삭제되었지만 자신은 살아있다. 삼국지 6과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72/72/76/75. 전법은 기군병격.
  1.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개가 제갈탄이다. 다만 이 개(狗)가 사실은 공구(功狗)라서 공이 있는 자라는 설도 있다.
  2. 여담으로 제갈탄의 또다른 딸은 왕릉의 아들 왕광의 부인이 되었다. 다만 선후관계는 불명으로 어느 쪽이 언니인지 알 수 없다. 중국 위키에서는 장녀가 사마주의 부인, 차녀가 왕광의 부인이라 되어 있다.어?
  3. 훗날 오가 진에게 멸망당하자 사마염은 제갈정을 불러 시중에 임명하려 했으나, 제갈정은 끝내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서 여생을 마쳤다. 낭야왕 사마주의 아들 동안왕 사마요는 제갈탄의 외손자였는데, 혜제 때 문앙을 역적으로 몰아 멸족시키고 외할아버지 제갈탄, 외삼촌 제갈정, 그리고 백부 사마사를 간접적으로 죽인 원수를 갚았다.
  4. 연의에서는 충심 깊은 제갈씨 일족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위 조정에 신명을 다하겠다며 속을 떠보는 가충을 꾸짖는 장면으로 나온다.믿고 쓰는 제갈씨. 위말전의 일화를 가지고 각색한 듯.
  5. 정사에 따르면 문흠이 양주자사로 있던 시절부터 서로 사이가 나빴다.
  6. 정사 제갈탄전 주석 및 자치통감에 의하면 오나라 장수 중에서 우전이라는 사람만 끝까지 분투하다 죽는다. 이게 꼭 제갈탄의 문제는 아니고 당시 오의 집권자인 손침이 워낙 개막장이라 그렇다.
  7. 하후현, 등양과 친하긴 했지만 사마의 사돈에 관구검, 문흠의 난때까진 사마씨 정권에 협력했다.
  8. 동흥전투 관련 기록은 한진춘추라는 한 사서내에서 기록이 상충된다.
  9. 처음부터 동맹상태인 오와 공동작전을 맺고 가면 아군을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도 오군이 알아서 점령을 해준다고 봐도 된다.
  10. 방어력은 통솔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금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통솔이 높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