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이름제인 오스틴
본명Jane Austen
출생1775년 12월 16일
사망1817년 7월 18일 (41세)
국적영국

1 개요

제인 오스틴은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이다. 주로 당대 영국 중상류층 젠트리의 생활을 펜에 담았으며 유명한 작품으로는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엠마등이 있다.

2 상세

1775년 햄프셔 주 스티븐슨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막내로, 아버지 조지 오스틴은 옥스퍼드 대학교를 나와서 지역 교구 목사를 지냈다고 했다. 신분상 목사의 자녀이므로 중상류는 되지만 형제자매가 많고 교구가 크지 않아 가정형편은 넉넉하진 못 했다고.

언니 커샌드라와 같이 수도원 기숙학교에서 2년간 교육을 받고 나머지는 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 정도면 당대 젠트리 여성 중에서도 꽤 교육을 받은 편이었다. 또한 아버지가 엄하지 않아서 많은 시간을 독서에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던 것 같다. 18세기 영국 상류층 여성들은 당시 유럽 분위기가 그렇듯 교양을 쌓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는 미술, 음악 등 많은 분야를 골고루 적당히 할 줄 안다(말 그대로 '교양' 수준)는 것이었지, 어느 한 가지를 전문적으로 파는 것은 오히려 품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11세 무렵부터 소설을 습작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쓴 글을 저녁식사 후에 가족들에게 들려주고 평가받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젊을 때는 연애사업에도 꽤나 몰두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오빠인 헨리가 '제인은 춤에 미쳤어요!'라고 쓴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언니 커샌드라가 제인 오스틴의 가장 친한 친구로, 지금 남아있는 가장 유명한 초상이 커샌드라가 그린 것이다.

20세에 톰 르프로이라는 아일랜드 태생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둘은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갔고, 제인이 언니 커샌드라에게 내일이면 톰에게 청혼받을 것 같다[1]고 보낸 편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톰이 부잣집 아가씨와 결혼하길 바란 가족의 반대로 둘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이 결혼이 무산된 즈음해서 나중에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된 첫인상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프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첫인상을 집필하고 나서 제인은 그녀의 아버지와 같이 소설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이곳저곳 찾아다녔지만 다 거절당하고 나중에 노생어 애비로 개작된 수잔도 출판사가 판권을 샀지만 제인이 나중에 유명세를 타서 판권을 되살 때까지 출판되지는 않았다. 이래저래 초기에는 문전박대당하는 상황이었던 듯.

아버지가 지역 교구 목사직을 은퇴하고 바스로 지역을 옮기면서 제인 오스틴은 한동안 작품 활동이 뜸해진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인 1802년, 옥스퍼드 대학을 나오고 지역에서 꽤나 명망 있는 집 자식인 레이널드 비그위저[2]라는 사람에게 청혼을 받고 이를 수락한다. 주변 사람들의 남아있는 기록들을 보면 레이널드는 그닥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말더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꽤나 사는 집 자식인 그와의 결혼은 역시 독신이었던 언니 커샌드라의 경제적 문제나 오빠들의 진로에도 도움이 될 수 있었고, 가족 대 가족으로 본다면 제인네 집안에 큰 이득이 되는 결혼이었다. 하지만 제인은 이 청혼 수락을 번복하고 이후에도 쭉 독신으로 살다 독신으로 죽는다.

부친 사망 후 바스에서 초튼으로 이사한 후 정력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해 4개의 소설을 출판한다. 주로 오빠 헨리가 출판사와 연락을 하고 제인 자신은 익명으로 발표를 했다. <이성과 감성>은 출판과 동시에 꽤나 호평을 받았고, 제인이 독립적으로 먹고 살 만한 경제적인 자산을 주었다.[3] 이어서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오만과 편견>을, 이어 <맨스필드 파크>를 발표한다. 런던 상류층 사회에서 제인의 소설은 꽤나 인기를 끌었고 당대 영국 섭정이었던 후의 조지 4세도 오스틴의 소설을 좋아해서 그녀를 궁으로 초청했다고 한다. 이 초청 때문에 제인은 다음 작품 엠마를 반강제적으로 왕세자에게 헌정해야만 했다.

40살이 되던 1816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1817년 사망, 시신은 윈체스터 성당에 안치되었다. 사인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한데 아마도 부신피질의 기능이 떨어지는 병인 애디슨 병과 티푸스의 재발형인 브릴-진저병, 림프종의 일종인 호지킨 림프종, 우유를 멸균처리하지 않고 먹을 시 생기는 소결핵균 감염증 등 많은 이론이 제시되고 있으나 확실한 건 없다. 아무래도 한 가지 질병으로 죽진 않았을 것라는 것이 현재의 통론. 하여튼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될 때 사망해서 많은 작품들은 사후에 이르러서야 출간되게 되었다.

3 평가

사후의 인기만큼은 아니어도 생전에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작품이 인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풍족한 삶을 살지는 못 했는데, 이는 익명으로 활동한 것도 있었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급작스럽게 사망한 이유도 있다.

당대에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대한 평론들은 주로 피상적으로 도덕적 교훈을 논했지만, 월터 스콧은 그녀의 필체에 담긴 리얼리즘에도 주목했다. 대체로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영국 왕실의 왕세자도 그녀의 소설을 좋아해서 오스틴을 궁으로 초대까지 한 것이다.

사후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작품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평론가들은 그녀의 작품에 부정적이었다. 1869년 그녀의 조카가 이모에 대한 기억을 담은 책을 출간하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더욱 올라갔는데 이 때문에 비평 또한 무지하게 쏟아졌다. 조카들은 작가 지망생이었는데, 당대 빅토리아조 특유의 근엄한 도덕주의 기준에 맞춘 사실만을 모아 전기를 쓰는 바람에 사후 100여 년간 제인은 요절한 성녀로 알려졌다. 가장 친했던 바로 손윗언니인 커샌드라는 동생과 거의 매일 그날그날의 일을 편지로 주고받았고, 제인의 생활이나 견해를 잘 보여주는 편지가 상당히 있었지만 제인이 죽은 뒤 사적인 편지들이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이후 정본이 확립되고 누락된 편지와 습작, 미완성작들이 출간되며 그녀는 재조명되며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제인은 요조숙녀나 성녀라기보다는 지적이고 활력이 넘치며 개성이 강한 인물로서, 풍자에 능한 작가답게 주변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속물주의에 대한 비판과 조소를 삼가지 않았다. 다만 그러한 비판은 그녀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듯 듣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이끌어내는 장난스러운 것에 가까웠음을 언니와 나눈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4]

후대의 소설가들이나 드라마 작가, 특히 한국 드라마 작가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제인 오스틴은 정말로 식상하고 진부할 수 있는 소재와 통속적인 구조 속에서도 주제의식과 재미 두 가지를 다 잡아냈다.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위와 같은 구조를 가진 작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범람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양질의 작품을 찾기란 매우 힘이 든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분명히 표지만 봐도, 발단, 전개, 결말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는 점, 그러면서도 그냥 잘 읽히는 말초적인 재미만이 아닌 진지한 주제를 녹여낸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이 사람이 현대에 다시 태어났다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 정도.

수많은 문학적 연구들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주제로 이루어졌고, 대중적 인기도 대단해서 1940년대부터 영상화된 제인 오스틴의 작품 숫자는 엄청 많다. BBC에서 오만과 편견을 드라마화한 것만 해도 수차례가 넘는다. 현재는 영문학계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들을 각색하는 걸로도 모자라 2007년에는 제인 오스틴 본인의 젊은 시절 톰 르프로이와의 사랑을 중점으로 그린 영화 《비커밍 제인》이 제작되었다. 제인 역은 앤 해서웨이, 톰 르프로이 역은 제임스 매커보이가 맡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처럼 작가의 삶과 작품 속에서 따온 허구를 로맨틱하게 짜맞추어 만들어낸 이야기인 만큼 진지한 전기영화로 보면 좀 곤란하다.

4 작품

  1. "다음 무도회에서 그이한테서 청혼을 받을 것 같아. 그렇지만 그 하얀색 코트를 다시는 안 입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거절할 거야." 농담조이지만 청혼받으리라 확신한 것은 확실해보인다.
  2.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친구의 오빠였다.
  3. 독립적이라고 하기에 애매한 점이, 그녀의 소설 중 대부분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집안일을 돕거나 친척의 출산을 돕는 일을 하는 와중에 틈틈이 쓴 것들이다. 즉, 형제와 친척들에게 기대어 산 셈인데 이러한 생활방식은 대체로 당시의 노처녀들의 것으로, 제인은 딱히 풍족한 삶은 지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책을 팔아 번 돈도 대단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4. "그 사람들 아주 멋지게 사는 부자들인데, 특히 그 여자는 돈에 묻히는 걸 아주 즐기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다르다고 해줬더니 우리가 사귈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하는 것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