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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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
1991년 3월 26일/6월 20일1995년 6월 27일1998년 6월 4일
1991년 지방선거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 개요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한국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은 68.4%를 기록하였다.

2 상세

국내 첫 동시지방선거이다. 4년 전 1991년 지방선거는 1960년 이후 31년 만에 다시 부활했지만,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한 날이 달랐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았다.[1] 더군다나 부활 이전의 지방선거도 같은 해에 여러 선거를 치르기는 했지만, 모든 선거 단위를 동시에 치르지 않았다.

광역자치단체장은 15개 특별시광역시에서 뽑았다. 1997년 7월 광역시로 승격된 울산은 광역시가 되면 새로 시장을 뽑는 법에 따라 선거를 해야 했지만, 다음 지방선거가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제1회 선거에서 뽑은 울산시장(기초자치단체장)이 광역시 설치법 부칙에 따라 초대 울산광역시장이 되고, 재선거는 없었다.

3 결과

선거 결과는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참패, 민주당의 선전, 자유민주연합의 돌풍으로 요약된다.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는 민자 5, 민주 4, 자민련 4, 무소속 2로 여당인 민자당이 가장 많이 승리하긴 했지만 여야로 따지자면 5:10의 완패. 뿐만 아니라 기초단체장에서도 민자 71, 민주 84를 기록했으며 광역의원 또한 민자 286, 민주 355로 열세였는데 민자당이 원내 과반수 정당임을 고려하면 완패 수준을 넘어 참패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취임 이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2] 각종 정책을 밀어붙이던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취임 2년 반만에 맞은 예상을 뛰어넘는 치명적인 중간평가로 한동안 정권이 휘청거리게 된다.

광역단체장을 놓고 보면 민자당은 경기, 인천, 부산, 경남[3], 경북에서 이겼고 민주당은 전남, 전북, 광주에다가 서울을 손에 넣었으며 자민련은 충남, 충북, 대전, 그리고 강원에서 승리했다. 나머지 지역인 대구와 제주는 무소속이 승리.

특히 서울의 결과가 엄청난 화젯거리였는데, 서울시장으로 유력했던 박찬종 무소속 후보가 선거 막판 민주당 조순에게 밀렸고 국무총리 출신의 민자당 정원식은 3위로 낙선하면서 망신살이 뻗친 것. 게다가 구청장은 서초구강남구 두 곳만 민자당이 차지했을뿐 나머지 23곳을 민주당이 장악했으며 이때부터 예고된 강남3구 서울시의회는 아예 122:11로 민주당이 싹쓸어버렸다. 애초 서울이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도[4] 격차가 너무 컸기에 사실상 YS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민자당의 수모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어졌는데, 나름대로 텃밭인 대구시장조차 구 여권 출신 무소속들에게 밀려나며 4위로 밀려나면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의 자민련 "녹색 바람"을 예고하였다. 이는 PK출신인 YS가 TK를 홀대한다는 정서와 함께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일어나 민심이반이 벌어진 탓으로 보이며, 실제로 경북에서도 민자당은 무소속 후보에게 고작 3.6%차로 신승했다. 이른바 TK지역에서 소문으로 나돌던 반민자 비민주 정서가 현실화된 것이다.

애초에 김대중의 절대 우세지역인 호남 지역과 김종필의 본거지였던 충남이야 그렇다 쳐도 전통적으로 여당 성향인 충북과 강원의 패배, 무엇보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고작 20.7% 득표로 3위에 그친 것은 너무 처참한 결과였다.[5]

충북에서도 민주당(이용희, 24.5% 득표)에 밀려 3위(23.3%), 강원에선 아예 최각규(65.7% 득표)의 인물론에 밀려 1:1 대결[6]에서 더블스코어의 패배(이상룡 차관, 34.3% 득표)를 당했다. 대구와 대전도 안습이었다. 대구에서는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36.8%로 당선되고 자민련의 이의익 후보가 22.1%를 득표해 선전할 때, 무소속 후보에게 밀려 조해녕 전 관선 시장이 고작 16.9%만을 득표했다(4위). 대전의 염홍철 시장 역시 고작 20.9%를 득표하면서 트리플 스코어(자민련 63.8%) 패배. 광주광역시에서는 1:1 대결에서 아예 10.2%라는 참담한 득표를 건졌다.

반대로 민주당은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유력하던 서울시장 자리를 조순 후보가 대역전극 끝에 확보하고,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도 민자당을 앞서는 등의 선전으로 당세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당 내부적으로 보면 묘한게 경기도 지사 자리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여 이기택 당대표의 입지가 위축되고, 정작 정계 밖에서 활동하던 김대중 당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의 입지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지만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정계에 복귀는 하지 않았지만 선거유세엔 참여한 김대중 이사장은 서울 시장으로는 조순, 경기지사에는 이종찬을 밀었다. 그러나 이기택은 자신이 당대표라며 장경우를 밀었고, 이러한 경기지사 후보 선출 과정에서 폭력사태와 후보매수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과는 민주자유당 피닉제이인제의 당선.[7] 하지만 이후로도 당내 갈등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DJ의 정계복귀선언에 대한 찬반 논란까지 부르며 결국 김대중이 정계 복귀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사실상의 당쪼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 해인 1996년 총선에서 민주당계는 2개의 정당이 따로 놀게 되었다. 결과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항목 참고.

한편 이 선거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시장 후보에 출마하여 2위로 낙선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는 선거전 초반 지역주의 타파와 인물론을 기치로 내세워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했으나, 정작 정계 밖에 있던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지역등권론[8]을 들고 나오자 부산 보수표가 결집하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제대로 팀킬한 셈인데 이에 열받은 노 후보 캠프측에선 이런 지역등권론을 공개적으로 디스하기도 했다.[9][10] 전북에서는 거꾸로 민자당 강현욱 후보가 지역등권론에 발목을 잡히며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민주당 유종근 후보에게 참패했다.[11]

경북, 경남, 대구에서는 기초단체장 가운데 무소속 당선자가 제일 많았다. 특히 포항시에서 민주당 박기환 후보가 32.37%의 득표로 민자당 최수환 후보(24.42% 득표)을 수월하게 꺾고 당선되는 등의 파란이 빚어졌다. 안동시, 상주시, 군위군, 칠곡군 등에서는 아예 민자당 후보가 나오지 못해 무소속 리그가 벌어졌으며, 구미시의 김관용 후보조차도 자민련과의 대결에서 35.1%대 33.9%의 신승을 해야했다. 경남에서도 창원시, 마산시 등에서 무소속 시장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남해군에서는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불과 37세의 나이로 당선되면서 민선 최연소 단체장의 기록을 세웠다.

치명타를 입은 YS 정권은 와신상담에 나서 당명을 고치고 민주자유당에서 신한국당으로 재창당한다. 또한 95년 겨울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고 대형 비리와 쿠데타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면서 지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로 인해 신한국당은 다음해 치뤄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로 갈라진 야권 분열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대구의 참패 속에서도 나머지 영남지역과 강원, 제주, 특히 수도권의 승리로 1당 유지에 성공하는 등, "레임덕은 없다"라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결국 1996년 연말의 노동법 날치기와 이인제의 경선 불복, 최종보스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여러 최악의 사태를 겪으며 정권을 내주고 만다.

그리고 이 선거로 인해 3당 합당으로 소멸된 것 같았던 지역 구도는 완벽하게 다시 부활했으며, 김대중은 정계 복귀와 대선 승리로 가는 큰 길을 열게 된다.

4 출구조사의 등장

MBC에서 국내 최초로 선거 예측조사 결과를 개표 시작 전에 발표하였다.[12] SBS에서도 선거 전날에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오후 6시에 발표했으며 실제 결과도 꽤 정확했다. 이런 사전예측조사는 그 이전까지 선거결과를 알려면 밤을 꼬박 지새며 보내야한다는 점 때문에[13] 불편함을 겪던 시민들에게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었다. 다만 이전까지 출구조사를 시행한 전례가 전혀 없었기에 선거법 위반 논란이 생기기도 했으나, 결과가 정확하게 나온데다가 이미 미국과 프랑스, 영국, 일본에서 투표자들을 상대로 예측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바로 합법화되었다. 하지만 다음해 총선부턴...본격적인 총선 사전예측조사 실패의 저주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1. 본래 제13대 대통령 선거 공약과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1992년 6월에 단체장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총선 참패로 후유증을 앓은 민주정의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제2당의 지위를 누리던 평화민주당이 이에 동조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선거" 공약과 함께 무산되었다. 하지만 정작 평민당은 3당 합당으로 엿을 먹게 된다.
  2. 임기초만 해도 지지율이 80%를 상회했다.
  3. 울산의 경우 이 때는 경남의 기초자치단체였다.
  4.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4대 대통령 선거 모두 서울에서는 김대중(평민당)이 이겼다.
  5. 일반 시민 자원봉사자가 아이디어를 냈다는 "서울 포청천"이라는 별명과 당시 정계복귀를 노리던 김대중 전 총재의 적극적인 지원유세도 조순 후보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정작 2년 후엔 제대로 갈라서게 되는게 함정
  6. 민주당 이봉모 후보가 후보등록 직전 사퇴했다. 이 후보의 사퇴는 일시적으로 민주당과 자민련간 야권연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인천, 경기 등 수도권에서 야권연대론으로 양 야당간 힘싸움이 두드려졌다. 그러나 결국엔 두 지역 모두 민주당과 자민련이 각자 후보를 냈고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민자당의 당선.
  7. 여담으로 이 이인제가 훗날 김대중 대통령 당선의 제1공신(...)이 되니 역시 역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8. '모든 지역이 동등한 권리를 나눠갖고 각자의 권리를 바탕으로 수평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 요체인 발언이었으나, 사실상 속내는 영남에 맞서 호남+충청 연대를 하자는 것 아니냐며 꺼져가던 지역주의를 다시 활활 피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민자당에서 막 쫓겨나듯 탈당한 JP는 충청도가 핫바지냐는 일명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 나오며 지역감정을 부채질했다.
  9. 심지어 이부영, 김정길의 선거 유세장 발언 중엔 DJ와 JP는 권력욕에 눈이 멀었으며 정계에서 퇴진시켜야 한다는 극딜 수준의 발언도 있었다. 그만큼 DJ의 지역등권론이 불러온 후폭풍이 여러 의미로 대단했던 셈.
  10. 이후 DJ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이부영, 제정구 등은 조순 서울시장과 함께 1997년 한나라당 창당에 합류하게 된다. 다만 노무현, 김정길 등은 한나라당에 가지 않고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
  11.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호남에서 민자당(현 새누리당) 득표율은 (대선을 제외하면) 아주 낮진 않았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는 20%~30%의 여당 고정표가 꼬박꼬박 나왔고, 전북에선 지역구에 따라서 당선권에 상당히 근접하기도 했다. 이후 강현욱은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 간판을 내걸고 군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호남 유일의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강현욱은 1999년 말 탈당해 이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호남의 보수성향 인사들 대부분이 국민회의로 떠나버렸다. 여기에 당의 호남에 대한 전략적 무관심마저 겹치면서 한나라당 시기에는 두 자리수 득표율을 올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전락했다.
  12. 사실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자 조사를 시행했으나 선거법 위반사항이라 발표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13대 대선때는 발표를 하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해외언론을 통해서였고 국내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며, 14대 대선때는 발표가 되기는 했으나 이미 개표가 중반일때 발표된거라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측조사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13. 심지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에는 다음날에도 개표방송을 봐야 했다. 물론 13대와 14대 대선은 사실상 개표 중반에 이미 결과가 대략 나오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