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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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국회의원 선거제15대 국회의원 선거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무소속
139석79석50석15석16석

1 개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는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이다. 투표율은 63.9%였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1]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와 같았다.

정당여당신한국당야당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였으며 비례대표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것의 합산으로 결정했다.

2 과정

14대 대선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있던 김대중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실력을 과시한 뒤, 그해 말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그가 속했던 통합민주당 내부에서 그의 복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자 아예 당을 나와 새정치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때 통합민주당 의원 중 동교동계를 위시한 2/3 정도가 국민회의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로서 야권은 크게 개편&분열되는데, 국민회의의 대선을 노린 안정, 보수적 행보에 통합민주당은 진보, 시민사회계 인사를 영입하며 경쟁을 벌이게 된다.

3 선거결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신한국당국민회의자민련민주당무소속
서울 (47)2718011
경기 (38)1810532
인천 (11)92000
강원 (13)90220
대전 (7)00700
충북 (8)20501
충남 (13)101200
광주 (6)06000
전북 (14)113000
전남 (17)017000
부산 (21)210000
경남 (23)170024
대구 (13)20803
경북 (19)110215
제주 (3)30000
지역구 (253)1216641916
전국구 (46)18 (34.5%)13 (25.3%)9 (16.2%)6 (11.2%)0 (12.8%)[2]
총합 (299)13979501516

3.1 분석

새정치국민회의는 여권의 개혁공천 분위기에 밀려 강세지역이던 서울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등 총 79석에 그치고 조세형, 한광호, 김병오 등 거물급 정치인들도 대거 낙선했다. 비례대표(전국구)에서도 14번이었던 김대중 총재가 불과 1% 가량의 득표 미달로 바로 앞 번호였던 13번까지만 당선되면서 낙선했다. 특히 이때 수도권 30여개 지역구에 통합민주당이 출마하면서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분열 양상이 벌어진게 컸다는 분석이 많았다. 다만 통합민주당이 선전한 지역에서는 국민회의-민주 간의 1-2위 다툼이 벌어져 이부영 후보를 제외하고는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 반면 통합민주당의 지지율이 낮은 지역에서는 국민회의가 큰 폭으로 졌으므로 통합민주당이 의외로 신한국당과 중도표를 분할한 제3당 효과를 낸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었다.# 중구에서는 박성범정대철을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성동을에서는 김학원조세형을 이기고 당선되었다. 결과적으로 국민회의는 서울에서만 16석이 뒤집혀 고작 18석을 확보, 서울지역 1당을 여당(27석)에 내주게 되었다. 100석 확보는 물론 제1당 확보를 장담하던 김대중 총재로서는 쓰라린 패배였다.

하지만 이때 김대중 총재는 선거결과를 놓고 유례없는 자화자찬에 들어갔다.

“이번 선거에서 왜 모든 언론은 국민회의가 패배했다고 보도하지요? 패배가 아니라 약진이란 표현을 쓰라고 언론에 요구하세요. 65석이 79석이 됐고 전국 58개 지역에서 3000표 차 이내의 초접전을 벌였는데 이게 민심이 아직 국민회의를 안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뭡니까. (중략) 신한국당이 170석에서 139석으로 준 것이 이긴 것이냐, 국민회의가 65석에서 79석이 된 게 진 것이냐, 뭐가 패배고 승리냐, 이걸 기조로 당 기자실에서 성명을 발표해주세요.”#

물론 이는 선거 전체로 볼땐 허세가 섞여있는 억지성 발언이었지만, 정신승리할 핑계는 되어 결과적으로 위기에 빠진 지지층을 추스르는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한편, 옛 민주자유당에서 탈당한 김종필 총재의 자유민주연합은 선거운동 기간 충청도와 함께 TK지방을 공략하여 전국 정당으로 홍보를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충청권을 싹쓸이하고 대구광역시에서도 선전해 50석으로 대약진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YS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제외하면 제3정당으로서 최대 의석을 확보한 것이다.[3]

통합민주당은 의석 수가 30석에서 15석으로 크게 줄어들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게 되었다. 울산시, 안동시에서 의석을 확보하면서 영남권에서 3석을 얻었지만 결국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는 신셀 면치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선자 3명이[4] 이후 신한국당으로 이적하였고, 이후 이기택계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세력이 분열되면서, 사실상 분당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15대 대선 정국때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으로 통합한다. 이때, 통합민주당에서 노무현, 김원기 등 일부 정치인들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에 참여하지 않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도운다.

여당인 신한국당은 정치신인 공천과[5] 야권분열로 인한 수도권 의석 확보로 당초 예상보다 선전한 139석을 확보했으나, 대구에서의 부진[6] 등으로 과반수 확보엔 실패했다. 그러나 장학로 제1부속실장의 수뢰 혐의 등으로 인해 신한국당이 참패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상당히 선전했기 때문에, 제15대 총선의 승패를 따지자면 역시 신한국당의 반쪽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선거 결과 여당 139석, 야권 144석, 무소속 16석(12석은 영남 지역 무소속)의 절묘한 의석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났다면 이 총선은 그다지 회자되지 않았을 것이다.

3.2 "철새의 계절"

3.2.1 1차 집단 이동 - 신한국당의 과반 채우기와 크리스마스 날치기

선거 직후 신한국당은 통합민주당[7], 자유민주연합[8], 무소속 의원을 대거 영입,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며 1996년 연말의 크리스마스 직권상정 노동법 정국을 예고했다. 이러한 '의원 빼가기'로 신한국당은 157석까지 의석이 늘어났으며,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총 의석은 125석으로 줄어들었다(국민회의 79 + 자민련 46).

대선을 코앞에 둔 1997년 11월엔 DJP연합이 이뤄지고 신한국당에 박근혜 당시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영입되자, TK 자민련 의원 9명 중 3명인 이의익 의원(대구 북구갑)과 안택수 의원(대구 북 을), 박종근 의원(대구 달서 갑)이 자민련에서 신한국당으로 JP 통수를 날리며 당적을 바꿨다. 심지어 안택수 의원은 당시 자민련 현직 대변인이었다.(...)[9]

그리고 마지막 피날레로 1997년 11월 21일에는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의 전격 합당이 이루어지면서 거대 여당 한나라당이 출범하여 의석수는 자그만치 165석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상도덕 민심을 거스른 행위였다.

3.2.2 2차 집단 이동 - 민주-자민의 역(逆) "의원빼가기"

그런데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1야당인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제2야당 자민련의 지지를 받아 일명 DJP연합으로 당선되면서, 다시 신 '여소야대' 현상이 일어난다.[10] 헌데 첫 야당 신세를 겪게 된 한나라당은 빡쳤는지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안을 부결시키는 등 잦은 정국 파행을 일으키며 연립 여당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 빡친 연립 여당측은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전후해 역 '의원 빼가기' 러쉬를 시작한다. 바야흐로 철새전성시대

이때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항의하던 한나라당 하순봉 원내총무를 향한 자민련 구천서 원내총무의 발언이 압권이었는데, "우리는 아직 원금도 못 받았다." 흠좀무 뿐만 아니라 신한국당의 자민련 의원 대거 영입에 격노한 김종필은 DJP연합이 깨진 이후인 제16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도 아예 대놓고 중립을 선언해버릴 정도로 이회창에 대한 적개심을 끝끝내 풀지 않았다.[11]

1998년 4월 애초부터 탈당이 예고되었던 김종호, 박세직 의원을 시작으로 오장섭[12], 훗날 최단명 총리가 되는 이완구, 이의익[13] 의원이 자유민주연합에 들어가더니, 4월 29일엔 서정화, 이성호, 김인영, 이강희, 서한샘 의원이 새정치국민회의로 이적했다. 이어서 5월에 김명섭, 정영훈(새정치국민회의 행), 이택석(자유민주연합 행) 의원이 탈당했고, 8월에는 한나라당 홍문종 의원[14]이 탈당해 국민회의로 입당했다(국민회의 87석, 자민련 48석. 한나라 과반 붕괴).

이로서 여대야소 복귀가 확실시되자, 8월 28일에는 이인제-이만섭국민신당까지 국민회의에 합당을 하면서 7석이 추가되었고, 김학원 의원은 자민련에 입당했다. 9월 초에는 PK계의 노승우(자유민주연합 행), 김충일(새정치국민회의 행), 차수명 의원(자유민주연합 행)이 한나라당을 다시 탈당했으며, 최종적으로 9월 8일에는 한나라당의 유용태, 김길환, 박종우, 송훈석 4명까지 받아들이면서 국민회의 101석(개헌 저지선 확보), 자민련 52석의 153석 안정 과반 의석을 확보했으며, 한나라당은 140석으로 의석이 줄었다.[15]

3.2.3 3차 집단 이동 - 다시 고향(한나라당)으로

상당수 '철새' 의원들은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이른바 낙선운동의 영향) 그러나 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정치인도 존재한다. 그들은 2001년 통일부 장관 파동으로 DJP연합이 깨진 뒤 대부분 원래 있던 정당으로 돌아갔다. 상술된 의원 빼가기의 임팩트에 가려졌으나 2002년 말에는 한나라당의 의석이 16대 의원 의석수의 과반을 넘는 140석에 육박하는 등으로 볼때 꽤나 많은 정치인이 한나라당으로 복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엔 2010년대인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치인도 있다.[16][17]

4 트리비아

4.1 사전예측조사의 실패

총선 출구조사 안습 전설의 첫 막을 올렸다.(...)[18] KBS, MBC, SBS 방송3사가 전년도 실시한 지방선거 투표자 조사결과가 제법 정확하게 나오자 정치권에선 투표자조사를 용인하도록 법을 바꾸었고, 방송사간의 지나친 경쟁을 피한다는 취지(일단 말은 그렇다. 물론 현실하고 거리가 멀었지만..)를 살려 공동 투표자 조사를 시행했다. 그리고 이 투표자 조사결과를 저녁 6시 정각에 발표했다.[19] 이 투표자 조사에선 신한국당이 압도적으로 과반 확보(175석)하는 것으로 나왔고, 당연히 국민회의와 민주당 지지자들은 엄청난 멘붕을 겪게 되고 신한국당 지지자들이나 당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겠지만...[20]

정작 개표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망했어요. 최종 개표결과는 신한국당 139석으로 예측의석보다 36석이나 적게 나왔고 국민회의는 8석(투표자조사:71석), 자민련은 16석(투표자조사:34석), 민주당은 4석(투표자조사:11석), 무소속이 8석(투표자조사:8석)이나 많이 나왔다. 덕분에 밤새도록 방송 3사에 항의전화가 빗발쳤고 그 후폭풍으로 인해 다음날 방송 3사는 사과방송을 해야했고, 덧붙여 외신에서도 비웃음거리로 소개되는 등 굴욕을 당해야했다.(...) 당시 1995년 지방선거때의 예측조사가 대략 맞았기에 이번에도 예측조사 결과만 보고나서 일찍 잠에 들엇다가 다음날 결과를 보고나서 깜짝 놀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투표자 조사를 시행한 여론조사 기관들의 신뢰도도 추락해 광고조사의 신뢰성이 떨어졌다. 이는 1997년 한국갤럽에서 제15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맞추고 나서야 해소된다. 하지만 총선 출구조사는 여전히 안습이라는건 안 자랑. 여하튼 당시 신한국당 당원들은 개표가 시작되기 전에 너무 결과가 압도적으로 나왔던 탓에 선거운동 기간 동안 나온 예측치에 비해 잘 나온 수치임에도 개표 중이나 개표가 끝나고 나서는 기분이 영 찝찝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당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어쟀든 민주당이나 국민회의 당원들 입장에서 보면 출구조사 결과가 너무 절망적으로 나왔던 탓에 그나마 개표 중이나 개표가 끝난 뒤에 멘붕을 덜 겪기는 했다.

4.2 정치 1번지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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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선거 사상 손꼽힐만한 죽음의 조
이명박, 이종찬, 노무현 후보 등이 출마했던 '정치 1번지' 서울 종로구의 경우 민주당계 지지층의 표분열 양상이 벌어져, 당시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가 지역구 초선[21]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2년 뒤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받던 중에 자진 사퇴하여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이 자리는 국민회의로 나온 노무현 후보가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덕분에 역대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한 국회의원 선거구가 된다[22]

4.3 김진명 대 맹형규

당시 국민회의에선 서울특별시 송파구 을 선거구에 불쏘시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큰 인기를 끈 김진명 작가를[23] 공천한 바 있다. 상대는 역시 초선에 도전하는 SBS 아나운서 출신 맹형규. 결과는 맹형규 후보가 39.8% 득표로 당선. 김진명은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 33.2%를 득표하며 낙선했다.[24]

4.4 뉴스 앵커들의 정계 진출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맹형규SBS 8 뉴스 앵커와 박성범, 이윤성(1944)KBS 뉴스 9 앵커를 이미지 쇄신차원에서 영입하였고, 이에 뒤질세라 국민회의에서도 정동영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영입하였다. 이들은 전부 전국구가 아닌 지역구로 출마했는데 아무래도 대중적 인지도가 있었기에 기존에 지역기반으로 활동하던 정치인들을 누르고 전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해낸다. 이전부터 정계활동을 하던 하순봉 전 뉴스데스크 앵커까지 포함하면 5전 5승이고 변웅전까지 합하면 6전 6승인 셈. 하지만 훗날엔 아나운서 출신들도 많이들 낙선한다는게 함정
  1. 지역구 253명, 전국구 46명
  2. 1인 2표제가 시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표(死票)로 분류되었다.
  3. 다만 통일민주당은 의석이 아닌 득표율로는 당시 제2당이었고, 민주화 이후 양당 체제가 본격적으로 확립된 90년대 이후부터 생긴 제3당으로 치자면 역대 최대 의석이라고 볼 수도 있다.
  4. 이규택(경기 여주), 황규선(경기 이천), 최욱철(강원 강릉을).
  5. 모래시계 검사로 떴던 홍준표, 민중당 출신의 이재오, 김문수 등 정치 신인들을 수도권에 대거 공천했다.
  6. YS 집권기와 맞물려있다보니, PK정권 느낌이 강했던 당시 신한국당 대신 김종필의 자민련을 밀어줬다는 분석이 많았다. 다만 경북은 1당 자리를 차지했다.
  7. 이규택(경기도 여주군), 황규선(경기 이천시), 최욱철(강원도 강릉시을).
  8. 최각규 강원도 지사, 유종수(류종수, 춘천시을), 황학수(강릉시 갑) 등 강원도 지역 정치인을 죄다 끌어들였다.
  9. 그는 당적을 바꾸기 직전까지만 해도 자민련 대변인으로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기피의혹을 선두에 서서 문제제기 했었는데, 신한국당으로 이적한 이후엔 이회창 후보를 "참신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라고 추켜세운다.(...)
  10. 당선 직후 새정치국민회의 이석현 의원의 '한국/남조선 병기 명함' 파동으로 자진 탈당, 의석이 더 줄어들었다.
  11. 헌데 재미있는 점은 그 이회창이 세운 자유선진당이 이후 몰락한 자민련을 대신해 충청계 지역정당의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것. 하지만 결국 자유선진당도 세에 밀려 2012년 새누리당과 합당한다.
  12. 총선에서는 자민련 조종석 후보에게 개발살났으나, 조종석 의원의 선거운동원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며 치뤄진 재선거에서 이회창 고향의 몰표를 받아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서 원내총무,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다. DJP연합 해체 이후 다시 한나라당 복당을 시도했으나 그때의 통수를 잊지 못한(...) 이회창에게 거절당한 뒤 정계를 떠난다.
  13. 원래 자민련 공천으로 당선되었으나 반김대중 정서와 대구시장 출마를 염두에 두고 한나라당으로 옮겼다. 그러나 기대했던 대구시장 후보 공천을 받지 못하자 다시 자민련으로 복당해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10%대 득표율로 한나라당 문희갑 후보에게 개발살나며 정치를 그만둔다.
  14. 2013~2014년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15. 이 명단에는 국민회의 1석, 자민련 2석의 명단이 빠져있다.
  16. 일례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원유철의 경우 애초 신한국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가 이인제를 지지하면서 국민신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에서 정치활동을 한 전적이 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돌아가면서 지금에 이른 것.
  17. 물론 개중엔 송훈석 전 의원처럼 정치 성향이 변해서 그대로 눌러앉아버린 케이스도 일부 존재했다.
  18. 정확힌 4년 후인 16대 총선부터 출구조사가 시작되었고, 당시엔 출구조사가 아닌 전화조사로 예측한 것이였다.
  19. 이 와중에 MBC가 상당수 지역구에서 불법(지금은 불법이 아니지만 당시엔 투표소에서 500M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출구조사를 하는건 불법으로 지정되어있었다) 출구조사를 벌이다가 타 방송사에 의해 무산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당일엔 발표되지 않았고, 선거 다음날 MBC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사가 벌인 출구조사가 정확하다고 홍보할때 공개되었다. 그리고 투표자 조사결과가 틀리고 출구조사 결과가 상당히 정확한걸로 나오자 출구조사 거리 규정 완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동안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16대 총선에선 망했어요.(...)
  20. 참고로 당선자 예측발표 했을땐 오차범위(+-4.3%) 따윈 쌩까고 조금이라도 앞서면 그냥 당선예상! 이런 식으로 발표했다. 물론 오차범위를 감안해도 신한국당 130-189석, 국민회의 54-82석, 자민련 25-37석, 민주당 11-14석, 무소속 4-10석으로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사실상 당선자 예측이라는 의미가 없다시피한 조사이긴 했다. (특히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의 경우 예상 의석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전국구 득표율에서도 국민회의-자민련-민주당의 경우 오차범위 내에서 맞쳤으나 신한국당의 경우 실제 득표율(34.8%)보다 예측조사(43.5%)가 훨씬 더 나왔다.(...)
  21. 전국구 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그것까지 합치면 재선의원이었다.
  22. 윤보선,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
  23. 1958년생으로 당시 만 38세였다.(...)
  24. 지역구에 모교인 보성고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