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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2Rnj5V.jpg
당시 선거 포스터. 허경영이 눈에 띈다.[1]



개표방송 역사상 가장 긴장감이 없는 출구조사 영상.[2]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표차가 많이 난 선거

6공화국의 두번째 정권 교체

허경영 Raise UP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2007년 12월 19일에 실시 되어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참여정부의 말기는 부동산 정책 실책 등으로 인해 여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한나라당에서는 개가 나와도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10%초반까지 곤두박질쳤다.(갤럽 조사 결과 링크)노무현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 여권에 대한 실망감까지 더해져 열린우리당은 제17대 총선 이후 치뤄진 재보궐선거와 제4회 지방선거를 포함한 모든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과반의석이 붕괴되었다. 망조를 느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임종인, 천정배 의원을 시작으로 당시 열린우리당의 실세였던 김한길계와 재선 및 중도성향 초선 의원을 주축으로 각자도생을 추구하며 줄줄이 탈당해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 두차례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정동영 전 장관과 의장을 지낸 문희상, 김근태 전 의장도 신당에 합류함으로서 기존 참여정부와의 차별성을 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로 열린우리당이 된 대통합민주신당의 지지율은 결국 한자리수 지지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여권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고건마저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서 여권에서는 박근혜/이명박 대세론을 뒤집을 만한 여력을 가진 뚜렷한 유력 대권주자 없이 전 통일부장관 정동영,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 전 국무총리 이해찬[3] 등이 최종 경선에 참여했고 근소하게 지지율과 조직력 측면에서 앞서있던 정동영이 승리함에 따라 여권의 대권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제1야당한나라당이명박박근혜의 치열한 경선 끝에 이명박이 승리를 거머쥐어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한편, 한나라당에 있던 이회창은 지난번 2차례의 대선 낙선이후 정계 은퇴를 했으나 이를 번복하고 3번째로 대선에 도전하였다.

특이하게도 이 대선에서는 양자 및 삼자대결도 아닌 6자 대결이라는 복잡하고 헷갈릴만한 대선이기도 하였다. 상세히 뜯어다보면 1강 2 3약이긴 했지만. 여당과 야당이 모두 단일화 합의에도 실패하였고 후보들끼리 독자의 길을 고집하며[4] 개인적인 지도력 등을 주장하였지만 정작 유권자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표심을 줘야 할 지 그저 고민되는 대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서울시장을 지냈던 이명박과 MBC 기자,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던 정동영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그리고 유한킴벌리 CEO 출신인 문국현과 15대 대선에도 후보로 나왔던 이인제, 여기에 지난 대선에도 출마했던 이회창이 뒤늦게 합류하게 됨에 따라 이와 같은 6자 대결이 구성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명박이나 정동영을 제외한 나머지를 군소후보로 내려보기에는 그렇기도 하였고 미디어에서도 이들 6인 후보들의 현황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서 사실상 6자 대결이 확정된 셈이었다. 실제로 선관위 주최 주요 후보 토론회에서도 6인 모두 참석하였다.

2 경선 과정

2.1 한나라당의 상황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 이후 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를 시작으로 모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그 화룡정점으로 이를 시작으로 여권은 붕괴하기 시작했고, 야당은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에는 박근혜 대표 외에도 지난 4년여간 성공적(?)인 서울시정[5]을 이끈 이명박 전 서울시장, 그리고 역시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며 좋은 평가를 받은 손학규 전 경기지사라는 유력 대권주자가 있었고 이들 세 명을 소위 Big3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Big3 중에서도 손학규의 인지도나 지지율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아주 듣보 후보 수준은 아니었으나 3년여간 당 대표를 역임하며 탄핵으로 궤멸당한 당을 재건한 박근혜 대표하지만 2016년엔 기어코 당을 말아먹었다나 시내버스 개편, 청계천 복원을 강력하게 추진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비해 손학규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 손학규도 경기지사 시절 여러 대기업 공장을 경기도 내에 유치하기도 하는 등 성공적으로 도정을 수행했으나, 박근혜나 이명박에 비하면 이른바 뉴스를 탈 성과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괜히 현역 단체장들이 치적성 사업을 하는게 아니다. 도지사로서는 성공적이었으나 도지사직을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것.

손학규는 경기지사 퇴임 직후 민심 100일 대장정 등의 행보를 보이며 어떻게든 지지율 반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명박과 박근혜의 강력한 철웅성을 넘기 힘들었고, 결국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한다. 이로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양자 대결로 좁혀진다. 이 2명 외에, 당내 중진이었던 홍준표 당시 국회의원과 당내 소장파의 필두였던 원희룡 당시 국회의원이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물론 실제 대권보다는 차기 당권이나 입지도 등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밖에 역시 소장파인 고진화 당시 국회의원도 경선에 참여했으나 경선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후보를 사퇴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내 경쟁은 치열했다. 일단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압승을 이끌고, 특히 대전은요? 한 마디를 통해[6] 어렵다고 생각한 대전시장까지 가져온 박근혜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입장에서 박근혜는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고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끈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기습감행한 것이 박근혜에게 악조건으로 작용했다. 여자는 남자보다 안보위기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고정관념으로 한나라당의 주요 지지층인 기성세대가 박근혜에서 이명박으로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재보궐선거도 박근혜에겐 악재였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근혜였지만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부진한 성적을 내고 말았다. 수도권 기초단체장들은 공천불복 탈당파에 의해, 대전 서구 국회의원 선거는 국민중심당 + 열린우리당의 비공식적 연대에 막혀 패한 것. 엄밀히 말해서 박근혜는 당헌당규산 대권당권 분리 및 대선후보 경선 참여 1년 전 대표직 사퇴 조항에 따라 2006년 6월에 당 대표직을 사퇴한 상황이었지만 박근혜가 전면에 나선 선거였기에 그 책임론까지 덤터기 쓴 것.

아울러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전략적으로 수도권 후보론, 경제 후보론이 나오는 실정이었다. 우선 수도권 후보론은 표많은 수도권 출신 인물로 수도권의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영남은 누가 봐도 몰표가 쏟아지는 표밭이었으니 TK 기반의 박근혜보단, 역시 TK 출신이지만 서울시장을 역임한 이명박이 수도권 표 획득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영남은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받는 표가 거의 동일할 테니) 경제 후보론은 당시 참여정부의 경제실정[7]을 이용하기 위한 전략으로 재벌그룹 평사원으로 출발해 CEO를 거쳐 서울시장으로 성과를 보여준 이명박에게 더 유리하다는 논리였다.(박근혜는 당 대표만을 역임해서 경제적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이 약점을 알고 있던 박근혜는 줄푸세 공약을 내걸며 맞섰지만 747 공약을 내건 이명박에게 밀렸고, 결국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최종적으로 이명박이 이기긴 했지만 당시 상황은 당내 지지도는 박근혜가 앞섰지만,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성공적인 정치활동 덕분에 여론 지지율이 앞선 상태였다. 둘의 우세한 분야가 다르고 정도도 비등해서 경선 룰에 따라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네거티브를 퍼붓는 진흙탕 싸움 속에서 둘의 과거 비리는 이때 다 드러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여담으로 그 유명한 발언(...)이었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이후 선거 직전까지 BBK 논란이 계속되고, 후술하겠지만 느닷없는 이회창의 독자출마로 보수 표 분산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측은 급히 박근혜에 SOS를 친다. 당시 이회창이 필사적으로 박근혜 영입에 나섰기 때문인데, 최종적으로 박근혜가 한나라당 잔류를 택하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은 단일대오를 구축하게 된다.[8]

2.2 범여권의 상황 1. 열린우리당에서 대통합민주신당까지

상술한대로 참여정부의 부동산 실책등으로 여당은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갔으며 정권교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9] 게다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로 인해 거의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는 중에도 여권에서도 유력후보는 존재했으니, 그는 바로 고건 전 총리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도 무난한 행정능력을 보이며[10]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넓은 계층에게 인정받으며 초창기 모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11] 고건 본인도 이를 의식했는지 자신의 지지세를 끌어모으고 '한국의미래를준비하는당'를 창당하는 활동을 벌였으나, 성과가 신통치 않았는지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12] 이로서 여당의 대권후보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만다.
그나마 유력 후보라 할 만한 사람은 정동영김근태정도인데 이 두 사람은 통일부 장관 자리를 두고 사생결단 매치니가 가라 복지부[13]를 벌인데다 두 후보 모두 여러 선거에서의 참패 책임이 있었다. 특히 정동영의 경우 2006년 지방선거 당시 당 대표로서 대참패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당시 유력 후보군으로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있었다. 모두 다 내각 출신인데 유력 대권주자가 없자 대통령과 청와대가 당 내 중진 및 신임하는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시켜 무게감을 더해주려는 배려였다.

당 상황이 개판이 되고 당내 후보군이 다 상처투성이인 상황에서 김한길계는 범여권 재편을 목적으로 탈당을 결행,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고, 이를 신호탄으로 대선후보군을 포함한 현역 의원 상당수의 연쇄 탈당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도개혁통합신당측과 손학규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탈당파가 연대하고, 민주당 탈당파가 여기에 합류하였으며 열린우리당이 해체하여 흡수되는 형식으로 모여서 대통합민주신당이 결성된다.

창당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바로 대선후보 경선에 착수했으나 후보들 상태가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엄청난 수의 후보가 쏟아져나와 컷오프를 해야 했다. 통합신당파의 지지를 받은 정동영, 한나라당 탈당파로서 인지도나 긍정적 측면에서 우월했던 손학규[14], 구 열린우리당과 친노계의 집중지원을 받은 이해찬이 범여권 Big3으로 불렸으며, 친노계에선 추가로 한명숙 전 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구 민주당계 탈당파에선 추미애 전 의원이, 그리고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 의원과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까지 9명이 출마했다. 다른 유력후보였던 김근태나 정세균 의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8월 27일 컷오프에서 추미애, 천정배, 신기남, 김두관 4인이 탈락한다. 이후 시작된 본선 경선에서는 한명숙, 유시민 후보가 차례대로 후보직을 사퇴하며 같은 친노계인 이해찬을 지지했다.[15] 결국 남은 빅3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니고 있던 정동영이 후보로 선출된다. 손학규는 한나라당 탈당파라서 당 내 조직력이 너무 미약했고 애시당초 탈당을 함께 한 동반자들도 거의 없었으며, 이해찬은 유시민, 한명숙의 지원을 받았지만 친노계 후보였기에 배척받았다.게다가 골프광이라는 안좋은 이미지도 안고 있었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스떼기 논란이 터져버리는 등 해당 경선도 진흙탕 싸움 이미지에서 벗어날수는 없었다.

이후 정동영은 어떻게든 범여권 및 진보진영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입싸움(...)으로만 끝난채 모두 실패로 끝난다.

2.3 범여권의 상황 2. 민주당

2003년 열린우리당의 분당 이래 참여정부 및 열린우리당, 친노계와 철전지 원수가 된 구 동교동계 중심의 민주당은 2007년 열린우리당의 붕괴 속에 이익을 보고 덩치를 키워 열린우리당을 대신하여 범여권의 대표로서 대선에 임하려 했다. 김한길계 탈당파의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하여 중도통합민주당이 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김한길계는 소통합에서 대통합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다시 당을 깨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 이에 중도통합민주당은 당명을 다시 민주당으로 돌려놓고 독자노선을 추구한다.

그리고 희대의 탈당전문가 이인제가 때를 같이하여 국민중심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한다!!!

그 직후 시작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처참했다. 장상, 신국환은 그렇다 쳐도 나름대로 네임드인 조순형, 김민석까지 이제 막 당에 들어온 이인제에게 압도적으로 쳐발리며 민주당은 대선후보 타이틀을 풍운아 이인제에게 넘겨주고 만다. 전국적인 인지도나 조직동원 능력에서 이인제를 따라올 상대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에선 없었고, 조순형 등 다른 후보들은 이인제를 막기 위해 차출하다시피 한 거라 선거 준비가 안되어 있기도 했다.

이후 정동영은 상술했다시피 이인제와 단일화 협상을 진행했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이인제는 독자노선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여 당 내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모두 탈당해버린다.(...)[16]

이런저런 탈도 많은 경선과정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충청도의 거물이었던 이인제는 충청지방을 기반으로 10% 안팎의 건재한 지지율을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후술할 이회창이라는 최종보스가 나타나는데...

2.4 범여권의 상황 3. 기타

범여권의 양대 정당이 이처럼 개판으로 돌아가면서 야권 지지자들과 재야 및 시민단체들은 대안 모색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일부 온건보수 진영에서는 고건을 다시 한 번 설득해보려 했으나 고건은 불출마 의지가 확고했고, 대신 유한킴벌리 CEO 출신의 문국현을 새로운 범여권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문국현 본인도 정치욕심이 있었는지 모든 회사에서의 직함을 내려놓고 창조한국당을 창당하면서 대선에 나선다.

특히 훗날 자기 돈 안쓰기로 유명한 모 대권주자랑 다르게 자신의 사재를 아낌없이 퍼부어 창당 및 선거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영춘 의원[17]이 문국현 지지를 선언하며 창조한국당에 입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젊은층에게 인기를 얻으며 초반 20%에 근접하던 지지율은 시일이 지나 유력후보에게 관심이 집중되면서 10% 미만으로 폭락한다.

역시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김선미 의원은 과학기술계 인사인 정근모씨가 창당한 참주인연합에 입당, 이 듣보정당(...)을 단숨에 원내정당으로 만들어주었으나 아무 이미도 없었다. 이후 정근모는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으나, 후보 사퇴까지 진행하지는 않아서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수는 있었다.

이수성의 경우 국회의원 및 문민정부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18] 약간의 인지도를 보여왔으며 무소속으로 출마를 결정하였다. 이때 열린우리당 잔류파인 김혁규 김원웅 의원을 비롯해 강운태 전 장관과 이홍구국무총리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레이스에서 중도하차했으며 정동영을 지지했다는 설이 돌았으나, 본인은 부인했다.

2.5 민주노동당의 상황

범여권으로 분류하긴 힘들지만 反한나라당 연대로 같이 거론되던 민주노동당도 17대 대선을 앞두고 꽤 격렬한 논쟁을 겪었다. 지난 대선에선 권영길로 무난하게 후보를 추대했지만,[19] 2007년 민주노동당이 처한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우선, 17대 총선의 성공을 본 NL계가 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당내 세력비가 바뀌었고, 2006년 당내 인사들이 연루된 간첩사건인 일심회 사건을 두고 NL과 PD가 크게 대립하였으며 그 이후의 제1차 핵실험을 두고 같은 갈등이 반복되었다.

결국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주자가 없던 NL는 권영길과 연대하여 권영길을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PD는 의정활동으로 스타덤에 오른 노회찬, 심상정을 앞세워 반격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압도적인 인지도와 NL의 지원을 받은 권영길이 2%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이 과정으로 당원사이의 갈등이 터져버리고 이는 훗날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정동영도 권영길에게 단일화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이도 거절당했다.

2.6 국민중심당 & 이회창의 상황

자민련을 대신하여 충청정당으로 탄생한 국민중심당은 일찌감치 당 대표 심대평을 대선후보로 선출한 상태였으나[20] 심대평 본인도 대권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고 다만 정계개편의 목적 및 유력정당이 대선후보도 못낼순 없다는 자존심으로 후보등록을 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재야에서 암중모색하던 이회창이 11월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17대 대선은 느닷없이 안개 속에 빠져 버린다.

이회창은 전략적으로 국민중심당과 연대, 심대평은 바로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고 이회창 지지 선언을 한다. 이에 반발하여 정진석 의원[21]이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입당, 이명박 지지 선언을 하는 등 진통이 있었으나 대구의 한나라당 곽상문 의원이 탈당하여 이회창 캠프에 합류하는 등 호재도 생겼다.

이회창은 이명박의 전략이 경제에 치우쳐져 있음을 노리고, 북핵위기 등을 틈탄 안보분야에 강점을 두어 보수 후보로서의 차별화를 두었다. 또 이명박의 BBK 논란 및 과거 선거법 위반 논란 등을 공격하며 자신의 대법관, 대쪽총리 이력을 연관시키는 등의 대선 삼수생다운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충청권에 국한된 지지로 인해 표 확장성의 한계를 맞이했다. 그리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회창이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연대 대상은 바로 박근혜였다.이회창 : 아, 5년 전에 좀 잘해줄걸...

박근헤와 연대만 된다면, 이회창은 지역적으로 단번에 TK를 탈환하고 PK에도 일정부분 영향력을 뻗고 수도권 보수표까지 일부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경상도라는 강력한 지지기반을 상실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득표는 크게 깍여나갈 것이고, 그렇다면 경상도 표 절반과 수도권 표에 기반한 이명박, 수도권 리버럴과[22] 호남표의 정동영, 충청도 표와 경상도 표 나머지 절반을 먹고 들어가는 이회창이라는 삼자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16대 대선 정국 당시 앙금이 있던 두 사람이었지만 일단 아쉬운 것은 이회창이었기에 여러 차례 읍소하며 헬프를 친다. 이에 호응하여 곽상문 등 강경 친박의원 일부와 박사모 등 일부 지지세력이 이회창에게 합세했으나 정작 박근혜 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회창은 세 차례에 걸쳐 박근혜의 집을 찾아가 삼고초려를 보여주려 했으나 박근혜는 한 번도 만나주지 않고 이후 이명박의 지지유세에 합류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것으로 17대 대선의 승리자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3 본선

어째 본선 내용이 경선보다 더 초라해 보이는건 기분탓이 아니다

야권도 여권도 치열한 경선과정을 거치며 힘겹게 후보를 선출했지만, 참여정부 말기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에 힘입어 정권교체는 기정사실화 되어갔고 참여정부의 국정실패와 대통합민주신당내 빈약한 인재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결과 정권교체의 주인공은 이명박이었다. 당시 화두였던 경제회복을 전면에 내세우며 승세를 이어갔고, 삼자구도에도 불구하고 50%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반면 정동영은 이명박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지지율을 보이며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한술 얹어서 출마도하지 않았던 당시의 이회창의 지지율에도 밀리는 안습한 구도는 이어지기만 했다.[23]

출마 직후의 이회창은 이인제와 같은 충청도 출신임에도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더 컸는지 충청도 기반의 이인제의 지지율을 죄다(...) 흡수했고 이명박을 위협할 정도로 강세를 보였으나 얼마안가 거품이 빠져버려 정동영의 절반까지 폭락하고 만다. 이로서 대선 후반에는 정동영은 이명박의 절반, 이회창은 정동영의 절반이라는 지지율이 고착화되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말 개최된 2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여권측에서는 반등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노무현 본인의 지지율에만 기여하고 대선 구도에서는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애초에 노무현과 어떻게든 떨어지려던 여당이었지만

본선에서도 어김없이 다른 후보들은 이명박의 BBK의혹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24] 이명박은 경제를 강조하는 마이페이스를 걸어갔고 지지율 순위가 뒤집어지는 일은 없이 결국 아래의 개표 결과까지 이어지게 된다.

4 개표

선거일 오후 6시에 발표된 출구조사 결과, 이명박 후보가 과반을 기록하는 압승을 할 것으로 예측되었다.[25] 예상 득표율 차이가 너무나도 커서 출구조사 결과만으로도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된 분위기였다. 출구조사 발표 당시 각 당의 반응을 모은 돌발영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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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주는 짤. 개표 5%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선 확실[26]이 떠 있다.[27] 다만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고, 최초로 대선에서 당선자의 득표수가 줄어든 사례라[28] 정치적 무관심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29]

호남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명박이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정동영은 호남권에서만 득표율 1위를 기록했고[30] 이회창은 충청권과 영남권에서 2위의 득표율을 기록하였을 뿐 어느 지역에서도 득표율 1위를 기록하지 못했다.[31] 여하간 무소속 역대 최다 득표가 될 듯.

요약한 개표 과정 SBS 뉴스.기사 그리고 개표 당시의 영상이 남아있는 뉴스들. 개표 10%후보자 연고지개표 22.3%특징지역개표30.5%개표 40%개표 44%. 아주그냥 학살인게, 보통 대선 개표에서는 1위 - 2위 후보 간 표차가 벌어지더라도 중간중간 2위 후보가 표차를 줄여가면서 벌어지는데,[32] 이 때 선거에서 1-2위 실시간 개표현황을 보면(화면 아래에 나오는 것들) 이명박 - 정동영 표차가 계속해서 불어나기만 하고 있다. 이런 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지? 개표 총평 기사1 개표 총평 기사2 개표 총평 기사3 개표 결과 정리

이명박 후보 당선 장면. 당선 확정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겨우 850만 표대(...)에 그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더 충공깽인 것은 당선 확정 시점에서 개표율이 76%대.. 그나마도 SBS인 경우 개표율 22% 시점부터 이미 당선 확정이라고 표기해버렸다.(...)[33] 사실 이 현상은 말도 안되는 것이, 당선 유력 및 확실의 경우 통계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차가 크다면 개표 초반에도 뜰 수가 있으나, 당선 확정은 순수한 산수의 영역으로 적어도 표가 절반 이상 개표되어야 가능하다. 보통은 개표가 90%이상 진행되어야 당선 확정이 뜬다. 그 예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개표 96% 정도에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당선 확정이란, "남은 표를 2위 후보자가 전부 가져가도 1위가 바뀌지 않는 것"으로, 당선 확실이 뜬 순간부터 "(카운트다운) = {(남은 표수) - (1위 후보와 2위 후보 간 표차)}/2."의 공식에 따라 산출하며 저 카운트다운이 0이 되었을 때 당선 확정이 된다.

5 결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기호후보명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선유무
1정동영대통합민주신당6,174,68126.1%2낙선
2이명박한나라당11,492,38948.7%1당선
3권영길민주노동당712,1213.0%5낙선
4이인제민주당160,7080.7%6낙선
5심대평국민중심당---기권
6문국현창조한국당1,375,4985.8%4낙선
7정근모참주인연합15,3800.06%9낙선
8허경영경제공화당96,7560.4%7낙선
9전관새시대참사람연합7,161[34]0.03%10낙선
10금민사회당18,2230.07%8낙선
11이수성화합과도약을위한국민연대---기권
12이회창무소속3,559,96315.1%3낙선
선거인수37,653,518투표수23,732,854
무효표수119,974투표율63.0%

6 기타

KBS 개표방송. 개표방송 초반에 원더걸스Tell Me를 후보들 캐릭터가 추는 영상을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MBC의 선택2007 개표방송 오프닝 영상.

선거 결과 표에서 보듯이 1987년 직선제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후보가 난립한 선거였다. 여권(개혁권)에서도 4명, 야권(보수권)에서도 4명허경영 더하면 5명, 진보권에서도 2명이 나왔다. 사퇴를 빼도 3명, 2명, 2명. 금민 후보는 역대 최연소(45세)를 기록했다. 반면 최고령 이회창 후보의 나이는 72세였다.

참고로 이 대선은 허경영의 존재감이 눈부신(...) 선거였다. 허경영은 정근모와 사회당의 금민을 거뜬히 넘겼고, 영남, 강남 등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높은 곳들에서 이인제를 이겼다(...) 굴욕 최강 읍면동 단위로 보면 허경영 후보는 울진군 서면에서 13.6%(...)를 득표하기도 하였다. 17대 대선의 허경영 후보의 경우 박빙 대결이 아니라서 관심을 받은 측면도 있다. 18대 대선때라면 박근혜 문재인 양자대결에 초점이 맞춰져서 이 정도의 관심은 못 받았을 터인데 17대 대선은 워낙 이명박의 독주라서(...)

이인제는 원래 새천년민주당이 이름을 바꾼 2005년 민주당을 사실상 접수하다시피 했고, 대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인제는 그의 출신지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10%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보이며 토론회에도 참석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회창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충청도의 지지층을 죄다 빼앗아 버리자 소수점대의 지지율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15대 대선에서 당한걸 되갚은거라 카더라 또한 이인제 항목에도 알 수 있듯이 이인제는 잦은 당적 변경으로 신임을 잃어갔고 민주당도 당차원의 문제로 지지율을 잃어갔지만, 이회창은 무소속이 오히려 메리트로 작용한 것이다.

정통보수를 강조하며 기성세대에게 어필을 많이했던 이회창이었지만, 의외로 이회창의 성적표에는 20대의 표가 가장 많았고 세대가 올라갈수록 오히려 표는 떨어지기만 했다.[35] 물론 떨어져나간 기성세대는 대부분 이명박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당시 선거의 젊은층의 여당이든 제1야당이든 유력정당에 대한 불신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민주당 : 나는...? 어찌되었든 15%를 넘는 득표율을 보여준 덕에 무소속 최고득표율 기록을 갱신했고, 선거자금도 돌려받을수는 있었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보수계열 정당이 승리한 최초이자 유일한 선거이기도 하다. 6공화국 출범 이래 계속해서 김대중, 노무현이 승리했고, 다음 선거에서는 문재인이 승리한 전적 속에서 이명박이 유일한 보수계열의 후보였다.[36] 이는 전국적인 여론이 이명박에게 쏠린 점도 크지만, 서울특별시장의 경력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텃밭인 영남 지역의 경우, 대구·경북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70% 이상의 득표율을 얻었던 반면[37] 부울경에서는 50%대 득표율에 그쳤는데, 이는 이회창 후보의 보수표 분산에 의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15대 대선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중부 지방에서도 정동영이 완패했기 때문에 15대 대선과 같은 기적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대선 직후에는 패배한 정당 측에서 불복하고 개표과정에서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관례(?)로 남아있으나, 이번 대선에서는 어찌나 표차가 컸는지(...) 이마저도 적은 편이었고 여당 측과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물론 일부 진영에선 음모론 대신 국개론을 시전했지만 이것도 묻혔다.(...)[38]
  1. 사퇴한 후보(5번 심대평, 11번 이수성)의 포스터는 포함되지 않았다.
  2. 영상속의 앵커는 신경민 기자인데, 이후 MBC를 퇴사하고 민주통합당으로 가서 19~20대 국회의원이 된다. 또한 신 앵커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와는 고교동창 사이이다.(MBC 기자경력은 정동영이 78년 입사, 신경민이 81년 입사로 정동영이 선배이다.)
  3. 정렬 순서는 지지율 순
  4. 이는 당시 판세가 이명박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다음해에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 또한 한 몫 했다.
  5. 성공적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지만 청계천 복원이나 시내버스 개편 등의 난제를 불도저처럼 강력히 추진하여 사람들에게 강력하고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6. 그 유명한 면도날 피격사건 이후 의식을 찾은 뒤 나온 첫발언으로 당시 지방선거의 화제였다.
  7. 사실 부동산을 제외하면 실정이라 하기도 힘들었지만, 부동산 폭등의 충격파가 워낙 컸다. 거기다 종부세 논란까지 겹치고... 당시 문제되던 청년실업, 가계부채 등은 10년대 중반에 와서 해소는 커녕 더 악화되었다.
  8. 친박계 곽상문 의원이 개별적으로 탈당해 이회창을 지지하고, 박사모도 공식적으로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의 이탈일 뿐이었다.
  9.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유행어로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가 있다.
  10. 그러나 노무현과의 관계는 끝이 개운치 못했는데,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라는 악평을 내리며 사실상 둘은 결별한 사이였다. 만일 더 끌어안았더라면 유력한 대선주자를 탄생시킬지도 모를 아쉬운 부분.
  11. 고건 대통령 대행은 노 대통령 처럼 특정 정당 지지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직설적인 화법의 소유자도 아닌지라 발언에 대해서 논란도 없었다. 보수,진보 양쪽에서 평가가 좋았다.
  12. 이런 배경은 훗날 정계 은퇴한 뒤 밝혔는데, 야당에게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민심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호남의 후예라서 영남 패권주의를 깰 수 없다고 판단, 대선 도전은 포기했다고 밝혔다. 참고로 후술할 정동영도 호남 출신인데, 이는 선견지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13. 노무현 대통령이 유력 주자들을 내각에 입각시키면서 통일부와 보건복지부를 제안했는데, 당시 대북정책이 온건 기조였던 데다가 북한도 제2연평해전 이후로 딱히 사고를 치지 않았고(핵실험 이전이었다.) 해서 통일부 장관의 정치적 위상이 훨씬 높았기에 두 유력 정치인이 충돌했던 것. 결국 정동영이 이겨서 통일부 장관을, 김근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았다. 2016년 현재는 통일부의 위상이 땅으로 떨어지고 복지 문제가 강조되면서 보건복지부의 위상이 높아졌다.
  14. 한나라당에선 분명 인지도, 지지율 등등 다 밀려서 탈당했지만 한나라당의 제3후보가 바로 범여권 정당의 유력후보가 될 지경이었다.(...)
  15. 참고로 경선 과정 TV토론에서 한명숙은 대리모를 아이 대신 키워주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유시민은 멧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전사를 투입하겠다고 말해 일반인들의 웃음과 범여권 지지자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16. 해당 인사를 나열하자면 조순형, 김홍업, 이낙연 등. 결국 당에는 김종인 등의 비례대표 의원 5명에다 지역구 의원은 이인제 본인 한명만 남게 되었다.
  17.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부산 부산진 갑에서 당선된 그 사람 맞다.
  18. 그동안 보수권인 신한국당에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이후 친여권적 행보를 보였다. 그냥 여권만 있는건가
  19. 여담으로 당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20. 상술했듯이 이인제가 여기에 불복하고 탈당해서 민주당에 들어간 것이다.
  21. 2016년 새누리당 원내대표
  22. 대체적으로 대선에서는 수도권이 진보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많았지만, 현실은 수도권마저 이명박이 잠식하고있는 상황이었다.
  23. 하지만 출마하지 않은 후보를 대결구도에 낄 경우 지지율에 거품이 많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하고, 실제로도 이회창의 출마 직후 전부 빠져버렸다(...)
  24. 여담으로 나경원 의원의 이명박을 실드치려던 목적으로 주어는 없다 식의 발언이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25. KBS-MBC 이명박 50.3%, 정동영 26.0%, 이회창 13.5% SBS 이명박 51.3%, 정동영 25.0%, 이회창 13.8%.
  26. 당선 유력이 뜨지 않고 그냥 바로 확실이 떴다. 참고로 SBS는 자체적으로 그 시점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일지감치 선언했다.
  27. 그렇다고 처음부터 앞서나갔냐고? 그건 아니고 해남 땅끝마을부터 개표가 시작되어 정동영 후보가 앞서 나갔다.(...) 당연하겠지만 개표가 채 1%도 진행되기 전에 이명박 후보가 역전했고, 이후 순위가 뒤집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이명박 후보가 직선제 실시 이후 최다득표차인 약 530여만 표 차로 당선되었다.
  28. 투표율 60%라 30% 대통이라며
  29. 그러나 대부분 보수표인 이회창표가 이명박 표를 갈라먹은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걸 감안하면 사실상 정동영의 패배는 압도적인 패배(...) 이명박과 이회창의 득표를 합치면 1505만표에 득표율은 63.7%, 정동영 후보와의 득표차는 정동영 후보의 득표수를 훨씬 넘기는 890만여표였다. 이 때문에 대선 이후 민주당 내에서 잃어버린 500만표론이 나오게 되었다.물론 5년 뒤에 되찾아오긴 했지만 과반을 넘기지 못해서 낙선
  30.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영남권에서도 선전한 것과 달리, 이 선거에서 정동영의 영남권 득표율은 처참했다. 정동영은 PK에서 약 10% 초반, TK에서 6% 남짓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특히 정동영의 TK에서의 득표율은 호남에서의 이명박의 득표율(약 9%)보다 더 낮은 수치였다. 기초자치단체 기준으로 봐도 정동영은 호남을 제외하면 충북 보은(그나마 여기서도 득표율은 30%대에 불과했다)을 제외한 모든 지역구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밀렸다.
  31. 다만 이것은 광역자치단체 기준이고, 기초자치단체 기준으로 이회창 후보는 충청남도 공주시, 보령시, 연기군, 부여군, 서천군, 홍성군, 청양군, 예산군에서 1위를 했다. 자유선진당의 텃밭이 된다
  32. 여기에는 개표 초반에 노년층 개표가 되고 나중에 청년층 개표가 된다는 공직선거법 상 허위사실이 적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투표함 단위로 개표하며, 투표함은 한번 설치되면 투표 시작부터 끝까지 꽉 차더라도(참고로, 절대 꽉 차지 않는다)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즉, 노년층이든 젊은층이든 한 투표함에 들어가 있으면 다 똑같은 시점에 개표되는 것. 많은 사람들이 빨리 개표되는 건 노년층이 많고 늦게 개표되는 건 젊은층이 많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런 요지의 발언을 한 사람한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공직선거법 상 허위사실유포죄에 해당할 수 있다며 발언자제를 요청한 적이 있다. 다만 이런 오해는 새누리당계(농촌, 구도심)와 새정치민주연합계(신도시)가 우위를 보이는 지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33. 사실 SBS는 5년 전에도 저랬다.
  34. 직접 선거로 치러진 역대 대선 출마자 중 득표율 전체 꼴찌를 달성했다.
  35. 더더욱 아이러니한것은 20대의 표에서는 이회창이 문국현에게 밀린 4위였다.
  36. 더욱이 진보계열이 승리하긴 했어도 대개 접전의 양상을 띈 다른 선거와는 달리 이명박은 정동영을 2배가 넘는 표차로 말그대로 개발살 냈다.
  37. 특히 이명박의 고향이나 다름없던 경상북도 포항시에서는 80% 이상의 득표율이 나왔다.
  38. 정작 국개론이 힘을 발휘한건 18대 대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