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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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1960년 8월 12일[1]1963년 10월 15일1967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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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3년 10월 15일에 있었던 제5대 대통령을 뽑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이다.

2 배경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민정이양을 위해 실시한 선거이다.[2]

3 과정

5.16 정변 직후 정당을 해산하였으나, 1962년 12월 17일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1963년 1월 1일 정당활동이 다시 허용되면서 새로운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대한민국 국군을 예편하면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후보등록 결과, 총 7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다.

기호 1번 신흥당 장이석
기호 2번 자유민주당 송요찬
기호 3번 민주공화당 박정희
기호 4번 추풍회 오재영
기호 5번 민정당 윤보선
기호 6번 국민의당 허정
기호 7번 정민회 변영태

선거 판도는 주로 박정희의 군정에 대해 야권 후보들이 비판하고, 박정희는 이를 방어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한편 야권 후보들 안에서도 5.16 군사정변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에 대해 "장면 등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윤보선은 "장면 정권 하에서 데모와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으며, 자신은 결국 군사정부를 추인하지 않았다"고 방어하였다.

결국 야권 주요 후보였던 허정, 송요찬이 윤보선을 지지하며 후보를 사퇴하였고, 선거는 군사정변 지도자 박정희 vs 민주세력 단일후보 윤보선의 구도로 흘러갔다.

3.1 박정희 사상논쟁

투표까지 3주 정도 남았던 9월 23일, 박정희 측에서 라디오 방송에서 윤보선을 '가장된 민족주의'라고 공격한다. 이에 대응하듯 다음날 윤보선 후보가 유세 중 전주에서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다. 박정희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발언을 하면서 선거구도는 순식간에 사상논쟁으로 발전하였다. 박정희 후보의 1940년대 말 남조선노동당 활동 경력[3]사실 군정 시절에도 박정희는 자신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퇴폐적 민주주의(제2공화국)를 뿌리뽑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고착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자주 하였는데, 윤보선의 공세로 인해 그렇다면 그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게 설마 공산주의였던 것이냐지금 생각하면 헛다리를 짚어도 그렇게 짚을 수 있는지 모르겠을의혹을 불렀던 것.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박정희 후보 측에서는 매카시즘 공세라고 비판하면서 지금은 확실하게 전향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윤보선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만주군관학교 입학 문제 등 친일 의혹까지 제기했다.

4 결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기호후보명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선유무
1장이석신흥당198,8372.0%5낙선
2송요찬자유민주당---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3박정희민주공화당4,702,64046.6%1당선
4오재영추풍회408,6644.1%3낙선
5윤보선민정당4,546,61445.1%2낙선
6허정국민의당---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7변영태정민회224,4432.2%4낙선

그 사상논쟁이 결국 윤보선의 발목을 잡았다.

박정희윤보선득표율 1.5%, 단 15만 표 차이로 따돌리면서 승리를 거둔다. 득표율이나 득표수 차이로 역대 최저수준. 대한민국 역대 대선 중 가장 치열한 승부로 평가되고 있다.
이때부터 30여년간 군 부재자투표가 사실상 여당을 찍을 수밖에 없는 공개투표로 진행되었다는 점과 우리나라 국군장병의 수를 생각한다면 군 부재자투표만 공정하게 실시되었어도 사실상 결과가 뒤바뀔 수 있는 수준이었다.

5 영향

어쨌든 쿠데타로 집권했던 군부 세력에 대해 평가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4] 이를 잘 공략하면 윤보선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으나, 쿠데타 문제나 친일 논란이 아닌, 색깔론에 집중하면서 제1공화국 시기 이념갈등에 인한 피해를 입은 계층에서 오히려 반발이 일어나고 말았다. 야권 지식인 계층과 혁신계(진보진영)에서도 윤보선을 극우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지지가 약해졌으며, 무엇보다도 이념 갈등에 의한 학살사건을 직접 겪었던 전라남도경상도[5][6], 제주특별자치도 투표자들의 마음을 박정희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았다. 실제 이 투표에서 박정희는 전라남도에서 득표율 57%,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득표율 70%, 합해서 표차 33만 표라는 엄청난 득표를 거둔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윤보선이 이겼겠지

한편 이 선거는 최초로 지역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난 선거이기도 했다. 단 그 구도가 지금의 영-호남 구도가 아닌 남북 구도[7]였다. 서울특별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에서는 윤보선 후보가 승리하였고, 부산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승리하였다.[8]

기밀 해제된 미국 자료에 따르면 3.15 부정선거, 정확히는 4.19 혁명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남한이 공산화가 될 것이라 두려워 했는데 다행히도 선거는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치뤄졌고, 미국은 안심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 여론 조사를 한 결과 무슨 이변이 있어도 박정희가 과반수 득표를 한다는 결과가 나왔고, 그래서 미국도 보고 있는데 무리수를 두지 말자는 오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개표가 시작되자 예상과 달리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고, 최종 개표결과가 확인될 때까지 청와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만약 이 선거에서 윤보선이 승리하였을 경우,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형욱윤보선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윤보선을 저격하려고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초로 색깔 논쟁이 끼어든 선거로, 네거티브 전략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색깔 논쟁을 시작한 사람이 박정희가 아닌 윤보선이었다는 것은 지금 보기엔 다소 놀라운 일일지도. 오히려 이 때의 색깔 논쟁 때문에 박정희반공 노선이 더욱 짙어지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그 네거티브에 윤보선의 후계자들은 계속 당하고

참고로 대통령 선거 한 달뒤에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당시 민주공화당은 총 득표수의 1/3을 간신히 넘는 33.5%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당시 야권에서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는 등의 삽질을 하는바람에(이는 역으로 뒤집으면 선거전략만 잘 짯어도 대선에서의 패배를 만회함과 동시에 정국 주도권을 쥘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9])수 민주공화당이 압도적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110석/175석)
  1. 1960년 3월 15일3.15 부정선거무효처리되었다.
  2. 군정시기 정치세력화를 위한 온갖 부정과 정치활동 금지조치 등의 상당한 선거부정이 있었고, 그래서 이 대선 자체도 부정선거 의혹도 높았지만, 사실 아래 단락만 봐도 색깔론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야권이 승리할수있었던 선거였다. 물론 암살문제는 별개
  3. 이는 박정희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는데, 이 공산주의자였고, 이 때문에 대구 10.1 사건때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 복수심의 의미로 남로당에 잠시 가담했던 것.
  4. 이는 사회통제가 심해진데다가 1962년도의 화폐개혁 실패와 가뭄의 영향으로 경제적으로도 영 좋은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5. 지금은 보수적이라 평해지는 경상도지만 일제강점기만 해도 대구가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진보적 성향이 짙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 폭동, 여순 사건 등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엄청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6. 참고로 대구, 경북의 경우 박정희 정권의 영향아래 산업적으로 발전하면서 보수적으로 성향이 바뀌었고 부, 울, 경 지방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통일민주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하면서 성향이 보수성향으로 변하게 되었다.
  7. 서울특별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vs 부산광역시 전라도 경상도 제주특별자치도
  8. 여담이지만 이때 박정희를 지지했던 전라남북도는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토사구팽당함으로써 결국 강원도와 더불어 낙후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일부 네티즌은 호남권의 쇠퇴와 낙후를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를 지지한 것에 대한 업보라고 평하기도 한다.
  9. 실제 1988년 총선에서 각 정당이 지역기반을 그대로 유지해서 민정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자 총선을 통해 대선에서의 패배 분위기를 만회한 평민, 민주, 공화 3당이 정국주도권을 줘서 노태우 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했었다. 물론 89년도의 공안정국과 1990년 3당 합당으로 그 균형이 깨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