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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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갑제
한자趙甲濟
출생연도1945년
출생지경상북도 청송군[1]
직업언론인, 출판인, 편집인, 작가
경력국제신문 기자, 월간 마당 편집장, 조선일보 월간조선부(部) 기자, 월간조선 편집장 1기(1991 ~ 1996), 편집장 2기(1998 ~ 2004), 월간조선 초대 대표이사(2001년 ~ 2004년), 조갑제닷컴 대표

1 인물 소개

자기 나라를 지킬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써보지 못하고 남한테 구하려고 손을 내미는 것은 노예근성이다.
- 시국강연회 강연 중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지만원은..?

대한민국반공주의 쇼비니스트. 평론가 및 전 언론인. 1945년 10월 24일 일본에서 태어났으며,[2]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를 중퇴하였다. 고교 시절, 단파라디오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야구 중계방송을 들으며 영어, 일어를 공부했고, 군대에서 미 공군과 합동근무를 하고 비행기 식별 업무 때문에 일본 자위대와 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어, 일어 회화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1967년 3월 1일 공군에 입대하여 요격관제[3] 특기병으로 3년 4개월 복무하였다. 원래는 3년 만기 전역이었는데 훈련병 때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40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서 자대배치가 늦어졌고, 1.21사태 등으로 군 복무를 몇개월 더 했다고 한다. 전역이 늦어져 제때 복학을 못했고 빨리 사회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부산·경남지역의 신문인 국제신문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971년부터 부산·경남지역의 신문인 국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며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광주 현지로 달려가 그 곳을 현장취재하였던 경험이 있으며 그로 인해 신문사에서 퇴사하고 이후 월간 마당의 편집장을 지내다가 1983년 조선일보 월간조선부(部)에 입사하여 기자[4]로 활동하게 되었고 1991년 편집장 1기를 지냈고 1996년 ~ 1998년까지 해외연수를 갔던 경험이 있다. 이후 연수를 마친 1998년에 월간조선으로 복귀하여 편집장 2기를 맡았고 조선일보에 박정희에 관한 일담을 담은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연재하였다. 2001년 1월 2일자로 월간조선이 조선일보사에서 분리독립하여 독립법인 회사로 출범하면서 그 해부터 독립법인 월간조선사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편집장도 겸직하였다. 이후로는 20년 동안 몸 담았던 월간조선을 떠나게 되었으며 독자적으로 세운 독립법인 회사 조갑제닷컴의 대표가 되었다.

7~80년대 기자로서 조갑제는 가히 전설적인 족적들을 많이 남겼다. 환경문제 관련해 심층취재(이를테면 중금속 오염에 관한 실태, 포항 유전설이 나돌 때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고 폭로한 특종 보도[5][6] 등등)를 비롯해 박정희의 여성편력, 사생활 문제를 비롯해 권력형 비리[7]에 아주 날카롭게 다뤘으며,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때 남긴 책이 '유고' 2권 세트-1987년-이다.) 때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시기 각각 잠입 취재했었다. 80년대까지 국제 기자 및 작가들의 단체인 국제 펜클럽에서 상도 여러 번 탔고 일본에도 정론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임팩트의 리즈시절을 가진 기자는 전무후무하다

이밖에도 4공, 5공의 각종 비화에 관해서도 취재해 족적들 남기기도 했다. 1983년에는 월간조선 편집기자로 이직했다. 이 시기 조갑제는 탐사, 심층 취재 도중에 안기부에 붙들려 고문까지 당했다고. 당시 월간조선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CIA에 관한 기사를 실었는데, 과감하게도 국내에 존재하는 CIA 사무실 전화번호를 공개하는 용자짓을 해버렸다(...). 이때문에 조갑제는 고문 후유증 영향으로 실제 혼자 걸어가는데 있어 많이 힘겨워한다. 옆에 보좌진이 부축해 줄 정도. 이 시기까지만 해도 조갑제는 어떠한 외압,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로서 모범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논조에 변화가 생겨서 스탠스가 보수, 반공주의 노선으로 확고하게 경도되게 된다. 이에 대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지난 시점으로 우익 반공주의 성향으로 확 변했다는 설도 있으며, 87년 양김 분열과 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기대를 가졌던 민주화 세력의 엇나간 행보에 실망해서 생각이 바뀌었다는 추정도 있다. 여기에 관해 역사학자 한홍구는 '조갑제가 안기부로부터 각종 많은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정보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람 속 마음을 들어가보지 않는한 이 역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갑제에게 과거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는데 왜 생각이 바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샅샅이 뒤지다가 보니까, 어느 순간 박정희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매료되었다고 밝힌 바는 있다.

오늘날 조갑제는 대체적인 논조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이승만박정희에 대해서는 강하게 옹호하는 논조를 가졌고, 김대중노무현은 극렬히 비판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언론인으로써 초창기 활동했을당시 썻던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랑 <박정희> 전기 시리즈(1992년 까치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는 같은 사람이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 김지하와 마찬가지로 6월 혁명 이후 논조가 바뀐 케이스 중 한 명이다.[8]

사실 이래저래 엇나갈 때도 많고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긴 하지만, 2010년 이후부터 규모가 확 커져버린 넷우익에 비하면 확실한 논조가 있다. 또한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강하게 옹호하는 점이 그와 정치성향에서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수도 있지만 비판하는데 있어 조금 신중해야 하는 것이, 위에도 언급했듯 박정희 정권 시절에 누구보다도 날선 비판을 했던 인물이 조갑제다. 유신정권에 아부하며 이권을 챙기던 지식인이나 언론도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분명 큰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이고 또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오히려 스탠스를 옹호 쪽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시류 편승적이거나 기회주의적 발로에서 기인하지는 않았다는 의미. 실제로 다른 강성 보수 지식인들과 달리 조갑제에 대한 반대 진영의 평가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성보수 인사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여타 극우인사들과는 달리 반대 진영에서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다.

월간조선 대표 이사에서 경질된 이후 조갑제닷컴을 운영하고 있다. 우파 언론인의 표상이긴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만큼은 자기가 직접 목숨 걸고 취재를 다녀와서 쓴 글이며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까임방지권 수준이다. 또한 5.18과 관련된 많은 역사자료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 때문인지 반대 편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지만원에 비해 조갑제는 크게 까이지 않는 편이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지만원과 비교하는 것은 큰 실례이다.

1.1 비판

1.1.1 과도한 반공주의

그가 저술한 <종북백과사전>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건 우리의 임무다. 그게 싫으면 이민가라'
전형적인 인신공격의 오류이다. Ergo Decedo 참고

1.1.2 극단적인 핵무장론

적이 핵무장 했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핵 필요해
한국이 핵을 보유할 시 주변국에 미치는 영향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을 하기도 했다.

1.1.3 한미 동맹 해체론

이스라엘과의 비교를 들면서 북한과의 비교를 들면서 남북이 일대일로 싸워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1]

1.1.4 6.25전쟁에 대한 시각

  • 정규재: (중략) 6.25전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6.25전쟁 자체는 고통의 과정이었지만, 그 이후 근대화로 새 출발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최근 들었습니다.
  • 조갑제: 6.25는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어요. 6.25 없었으면 1960년대 초에 한국은 월남 식으로 공산화됐을 겁니다. 6.25가 났을 때 한국은 출구가 없었어요. 한미 동맹도 없었고, 주한 미군도 나갔고, 국회에는 좌익들이 들어와서 여러가지 분탕질을 하고 있었고, 이미 산악 지역에는 북한 게릴라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중략) 저는 6.25 없었으면 한국은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9]

"6.25 전쟁은 미국을 붙잡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 문제가 된 문창극의 발언과 비슷한 내용이다. 조갑제는 다른 글에서 6.25로 인해서 남한이 사라질 뻔했다고 하는 주장한 바도 있으며, 6.25전쟁을 한국과 자유진영의 승리로 보기 때문에 이를 공산군의 남침을 저지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발언이 김일성의 남침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정당화하였다고 볼 수는 있다. 비유하자면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한 다음 굉장히 힘들게 자라서 뛰어난 사람이 된 사람에게 "당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은 재앙으로 위장한 축복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식민지 근대화론하고도 비슷한 내용인데, 식민지 근대화론 자체는 학술적으로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에는 조심히 접근해야 하는 것과 같다.

2 언론인으로서의 조갑제

조갑제는 1991년부터 계속 월간조선의 편집장 자리에 있었고, 월간조선이 독립법인화 된 2001년부터는 편집장 겸 대표이사를 맡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조갑제의 주장과 행동이 강경화, 극단화 됨에 따라, 조선일보는 부담을 느끼고, 조갑제를 비판하는 칼럼을 지면에 게재하는 등 그와 점점 거리를 두게 된다.

결정적으로 2005년 조갑제의 친일보다 나쁜 건 친북 주장[10] 이후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 논란이 커지자 조선일보는 그를 월간조선 대표에서 경질했고, 조선일보 편집국장 자리에 조갑제의 극단성을 비판하던 기자를 앉혔다. 최소한 대중을 상대하는 언론으로 수익을 내야하는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대통령을 인격적으로 모독하거나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초극단주의적 성향의 관계자를 마냥 품고 갈 수는 없었던 셈.

또한 몽골징기스칸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몽골 현지 취재도 여러번 다녀온 경력이 있다. 월간조선 시절에 몽골 취재 기사를 올린 사례가 많으며, 이후 조갑제닷컴 등에도 징기스칸을 소재로 한 글을 자주 쓰고 있다.

글을 쓸 때 국한문혼용체를 많이 사용하는 편.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을 남긴 적도 있다.

3 새누리당 공천 내홍에 대한 평가

2016년 20대 총선 과정에서 친박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존영'이란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조갑제는 친박계가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을 덜어트렸고 친박계가 개인 박근혜에 대한 충성이 아부로 비춰진다고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대통령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은 없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직이라는 것은 프레지던트(president)가 아니고 프레지던시(presidency)이며,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대통령 사진을 거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통령 개인을 중심에 두고 친박(親朴), 비박(非朴), 진박(眞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 보수의 윤리가 없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인들은 특유의 '저항적 정의감'을 갖고 있다면서 권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또한 당 정체성 위반을 이유로 유승민, 이재오 등 컷오프시킨 논란에 대해서도 공천관리위원회가 찍어내리기하는 것보다는 공천을 탈락시키고자 한다면 국민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택해야 하며, 경선을 붙이든지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다 보니까 국민들한테는 정치 보복처럼 비춰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승민 의원에 대해서는 새누리당의 정체성과 부합하지 않고 좌파영합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안보관과 국방문제, 중부담 - 중복지로의 복지강화, 단기적인 경기부양 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동조하였다. 조갑제는 유승민의 공천문제에 대해서 공관위가 당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유권자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4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조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지만원을 비롯해 극우 반공주의 진영이 어떻게든지 폄하하려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면서 반공적 민주화 운동으로 높이 평가한다. 무엇보다 조갑제 본인이 당시 기자 신분으로 광주, 즉 생생한 현장에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봤기 때문이다.[11] 기자에게 있어서 현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큰 사례로 손색없다.

이미 조갑제는 80년대부터 5.18 광주폭동설을 강하게 부정했으며 월간조선에서도 이것만은 아니라고 계엄군의 무차별한 시민 학살이라며 계엄군의 총에 피투성이가 된 시신 사진들을 실으면서 강력하게 비난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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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찍은 사진으로 광주 시민들이 플래카드로 북괴는 오판말라[13]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조갑제가 5.18은 반공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이래도 북괴가 개입했다고 생각하세요?소름끼치게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그냥 귀막고 입에 녹음내용 재생하는 수준이라...

최근 조갑제는 '조갑제의 광주사태 왜 총을 들고 왜 총을 쐈나 광주사태 루머와 싸운 30년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는 5.18의 북한개입설을 체계적으로 반박했는데, 일베저장소의 회원들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1점테러를 하는 중. 광주사태라는 표현 제목 때문에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지만 책 본문에서는 처음부터 민주화 운동이라는 표현을 쓰고있다. 그렇다보니 일베저장소에서는 어이없게도 그를 좌빨이라고 열심히 까고 있다. 여태까지 일베 애들이 좋아하는 레퍼런스 다 준 것도 다 부정할 기세

참고로 본 사건은 후일 김일성이 대남공작의 지지부진함을 성토하면서 엄청 시무룩 혹무룩 해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 남조선 독재정권을 타도하려는 운동세력이 일어났는데 왜 거기에 우리 쪽(북한)에 호응하는 세력이 없느냐 도대체 대남공작이 어떻게 돼 가고 있길래 이 좋은 기회를 놓쳤냐 " 라고 시무룩해했다고. 김칫국도 작작

4.1 문제점

조갑제 씨는 5월 20일부터 광주에 머물렀는데, 그 때부터는 공수부대가 온건(?)해진 편이었다. 5월 18일~5월 19일 상황을 모른 채 5월 20일부터 보면 '시위대가 괜히 과격'한 것처럼 보이거나 양비론이 나올 수 있다. 조갑제 기자는 5월 20일부터 본 걸로 일반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김문수, 조갑제 할 말은 한다-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 에선 화려한 휴가에 화를 내면서 (시민들 무장 후에) "학살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며 "서로 살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또한 조갑제 씨는 화려한 휴가가 과장됐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갑제 씨는 5월 20일부터 현장에 있던 사람이다. 5월 18일~19일을 잘 모른다. 5월 18일부터 본 김영택 기자는 오히려 화려한 휴가가 실제보다 못하다고 한다. 이건 5월 20일부터 본 광경을 전체로 잘못된 일반화한 것.

리그베다 위키시절에 어느 한 유저가 조갑제가 수구라며 5.18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자 '기적의 역사학자'들은 조갑제는 광주에 직접 가서 취재한 일이 있다며 그 유저를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광주는 조갑제만 간게 아니다. 중앙일보 장재열 기자,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오히려 조갑제보다 먼저 광주상황을 목격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일부에선 "실제 5.18 관련 사료의 다수가 바로 조갑제 기자의 자료"라는 말도 하는데 근거없는 소리다.

조갑제의 글에는 5월 20일 이후 자기 본 것을 심하게 일반화를 하는 부분이 있다. 한편, 일부 똑똑하면서도 5.18을 폄훼하려는 사람은 김대령지만원의 책은 쓰는 대신 조갑제 씨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조갑제는 그 두 사람처럼 사실 관계를 왜곡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5 여담

  • 언제인가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글에 대해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것들은 대개 무시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서 비판문을 쓴 사람들 중에서 고마웠던 사람이 있느냐 질문에 강준만 교수를 꼽았다.

6 기자로서의 조언

기자 출신으로 신동아 2006년 8월호 기사#에서 특종사냥에 대한 조언을 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강성 보수 성향으로 방향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탐사취재 보도했던 경력만큼은 살아있는 느낌. 기레기들이 참조해야 할 글이다. 원래 기자로서 조갑제는 탐사보도나 르포 형식으로 상당한 규모의 특종을 수 차례 보도하는 등 언론계에서 인정받는 실력있는 기자였다. 경향신문의 인터뷰에도 응할 정도로 기자의 본질을 알리는 대선배로서의 입지도 화려하다.

  •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춰라. 가급적 대중성이 강한 분야가 좋다. 야구가 인기면 야구, 권투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면 권투, 석유면 석유, 고분 발굴이면 고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춰라.
  • 논문 색인집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라. 국회도서관과 주요 대학, 연구기관에서는 다양한 논문 색인집을 내고 있다. 여기에 실린 논문 제목을 정기적으로 살펴보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다.
  • 관보를 비롯한 정부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읽어라. 관보를 비롯한 정부 간행물에 실린 사안은 정부의 공식 정책이거나 정책으로 확정될 것이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보도해도 오보가 될 가능성이 작다. 각 부처에서 나오는 보도자료에만 의존하면 특종을 쓸 수 없다.
  • 루틴(routine)한 취재를 반복하라. 출입처 이외의 기관도 정기적으로 챙겨라. 경찰서를 출입할 때는 구청도 드나들어라. 그러면 2중으로 취재지역을 훑을 수 있다.
  • 취재 현장에는 반드시 가라. 현장에 가면 사무실이나 기자실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 같이 술을 마심으로써 취재원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지양하라. 맑은 정신으로 취재해야 취재원이 안심한다. 취재한 것은 반드시 기사화하고 취재원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해 확실한 신뢰관계를 구축한다. 그가 새로운 제보자를 소개해 준다.
  • 다작(多作) 속에 특종이 있다. 기사 욕심을 내서 기사를 많이 쓰는 기자가 특종에 접근한다. ‘기사는 힘으로 쓰는 것’이고 ‘발로 만드는 것’이다.
  • 문제의식을 갖고 한 주제를 물고 늘어져라. 한번 잡은 주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취재하다 보면 시작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큼직한 특종이 걸려든다. 잡지기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 ‘사실은 이념에 우선한다’는 소신이 필요하다. 이념과 신념에 빠져버리면 왜곡된 기사를 내놓게 된다. 기자는 사명감 때문에 취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추적하는데 재미를 느끼며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이념과 신념에 빠진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명문(名文)과 미문(美文)을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한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라. 형용사 부사 접속사는 되도록 쓰지 말고 건조한 문장을 만들어라.
  • 특종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취재를 피하는 취재원은 몇 번이고 찾아가는 성의를 보여라. 알아도 취재원에게 자꾸 물어봄으로써 상대방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취재원을 감동시키거나 신뢰를 주지 못하면 제대로 된 취재를 하지 못한다.
  •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해서 데스크와 충돌하지 말라. 그들도 이유가 있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취재원뿐 아니라 데스크에게도 신뢰를 주어야 한다. 데스크가 의심하지 않도록 정밀한 취재를 할 수 있는 능력부터 갖춰라.

7 저서

  •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 1986년, 기자 조갑제가 사형수 오휘웅의 억울함과 무고함을 입증한 전설적인 책. 사법부의 문제점과 사형제에 관련해서 조목조목 파해친 책이다.
  • 대폭발 - 1985년 2.12 총선에 대한 분석 및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 관련 다룬 르포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 유고 (2권 세트) - 부마항쟁,10.26 사건을 다룬 책. 그밖에 이 책에서 박정희의 비리 및 사생활 문제 관련해서 적나라하게 다뤘다.
  • 조갑제의 광주사태 : 왜 총을 들고, 왜 총을 쐈나? 광주사태 루머와 싸운 30년 이야기
  • 군부 - 안기부의 행태들을 날카롭게 본격 해부한 책.
  • <한강의 새벽> - 5.16쿠데타를 긍정 평가한다.
  • 종북 백과사전
  • 역적모의(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을 엮어서 깐다)
  1. 본래 태어난 곳은 일본 사이타마 현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청송군으로 건너와 자랐다는 일설이 있다.
  2. 본래는 경북 청송군 출신이라고 하였지만 일본 사이타마 현에서 태어나 해방 후 청송으로 건너와 자랐다는 일설이 있다. 그가 펴낸 저서 프로필에는 경북 청송 태생이라고만 되어있다.
  3. 요격관제병은 관제사가 전투기를 관제할 때 그 옆에서 수동식 컴퓨터로 비행기의 속도, 고도, 방향 등을 계산하여 보좌해주는 조수(助手) 역할을 수행한다.
  4. 이때 주로 많이 쓴 기사가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였다.
  5. 이때 거의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국가적으로 이제 한국도 산유국이 되어서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의 설움을 벗어나겠다고 신나했는데 조갑제 기자는 당시 국회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논문들을 열람하고 지질학자 및 화학자 등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아예 논문을 한 편 만들었다. 자비로 논문을 출간해서 관계 당국과 언론사, 석유시추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학자들에게 보냈고 결국 조갑제는 "한국의 산유국화" 주장을 개발살냈다.
  6.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후반에도 언론을 통해 동해 시추 이야기가 보도됐는데, 그것은 박정희 정부 때 저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며 사실이다. 동해-1가스전에선 현재도 가스와 석유가 나오고 경남 지역에 공급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때의 저 스캔들이 워낙 유명해서, 가스전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사진을 주요 신문이 1면에 실어줬음에도 사람들은 잘 모른다.
  7. 이쪽 분야에 오늘날 가장 날카롭게 다루는 기자로는 시사in주진우 기자가 있긴 하지만, 그 주진우 기자도 저 7~80년대 시절의 조갑제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만큼 7~80년대 시절의 조갑제는 기자로써 가장 날카로운 권력형 비리에 강한 기자였다.
  8. 1989년 이전까지의 조갑제는 반독재, 민주주의 쪽 언론인으로 활동했었다. 1987년~1988년 역동적으로 흘러가던 한국사회의 모습(특히 87년 대통령 선거때 양김의 분열과 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로 그의 논조는 확 틀어져버린 것. 그의 확 틀어져버린 논조에 대해 혹자는 '진짜 조갑제는 남산에 끌려가서 죽고, 대역이 조갑제라는 이름을 쓴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9. 출처 책 정규재TV 닥치고 진실 321쪽
  10. 조갑제는 1987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주장과는 전혀 배치되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한길사' 책에서 그는 친일파들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부정적 영향들을 끼친 주범들로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는 논조를 보였던게 조갑제였다.
  11. 이밖에도 조갑제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도 잠입취재했던 경력이 있던 기자다.
  12. 또 다른 극우 인사 꼴통 지만원과 완전히 갈라선 것도 이 문제 때문이란 추측이 많다. 참고로 지만원은 인터넷에서 5.18 폭동설을 체계적으로 유포한 최초의 인물이다.
  13.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항쟁이 진행되고 있으니, 혼란을 틈타 민주주의의 민 자도 모르는 북괴는 남침할 생각도 말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실제로, 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도 대학생 시위대는 훌라송에 맞추어 김일성은 오판말라를 외친 바 있다. 70년대까지 "김일성은 오판말라 반공전선 이상없다"는 용공 혐의를 의식한 시위대가 자주 외치는 구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