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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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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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의 수석코치.

KIA 타이거즈 No.76
조계현 (趙啓顯 / Cho Kye-Hyeon)
생년월일1964년 5월 1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전라북도 군산시
학력군산상고 - 연세대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8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소속팀농협 (1988)
해태 타이거즈 (1989~1997)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두산 베어스 (2000~2001)
지도자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3~2005)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5)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08~2009)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9)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0)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0)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1)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12~2014)
LG 트윈스 2군 감독 (2014)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5~)
등번호26번 (해태 1989)
17번 (해태 1990~1997)
27번 (삼성)
14번 (두산)
77번 (KIA, 삼성 투수코치)
75번 (두산 투수코치)
71번 (LG 수석코치)
76번[1] (KIA 수석코치)
1993년, 1994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송진우(빙그레 이글스)조계현(해태 타이거즈)이상훈(LG 트윈스)
조계현(해태 타이거즈)
이상훈(LG 트윈스)
1995년 한국프로야구 최우수 평균 자책점
정민철(한화 이글스)조계현(해태 타이거즈)구대성(한화 이글스)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6번
조계현(1989)이대진(1993-1999)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7번
강만식(1982-1988)조계현(1990~1997)곽현희(1998~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7번
김훈(1997)조계현(1998~1999)남기헌(2000~2001)
두산 베어스 등번호 14번
조계현(2000~2001)고영민(2002~20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김종모(2001~2004)조계현(2006~2009)김종훈(2010~ )

1 소개

변화구의 마술사
싸움닭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동하던 투수이자 KIA 타이거즈의 수석코치.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사퇴한 후, 5월 11일까지 18일간 수석 코치 보직으로 감독 대행을 맡다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면서 2군 감독으로 보직변경되었으나, 김기태가 기아 감독으로 부임하자 LG를 나와 다시 친정 팀의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싱커볼 마스터이자, 1990년대 중반 최고의 콩라인. 93, 94, 96년에 3번이나 골든글러브 2위 득표자가 되었다. 그래도 마구마구에서 최근 1993년 엘리트카드를 받은게 위안이라고나 할까..

해태 타이거즈 올드 팬에게 선동열을 제외하고 이강철과 비교해서 누가 1990년대의 에이스냐 물으면,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정도의 행복한 고민일 것이다. 1993~1996은 조계현이지만 1989~1998은 이강철이 아닐런지..

2 고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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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고 시절. 사진 맨 앞쪽이 조계현.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출신이다. 고교시절인 1981년 1학년 때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대통령기에서 우승시켰다. 1982년 북일고와 맞붙은 청룡기에서는 당시 또다른 초 에이스급 선수였던 안성수와 결승전에서 1:1로 12회 완투+ 다음날 다시 연장전을 계속하는 강행군을 하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하면서도 결국 팀을 우승시켰다.

청룡기 준결승도 치열했다 .당시 광주일고 문희수는 1학년이었는데도 둘은 치열한 투수전을 벌였다. 둘 다 강속구 투수들이었고, 타자들은 그들 앞에서 추풍낙엽이었다.이 게임도 연장전 승부가 아니었을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명 승부였다. 1981년 박노준, 김건우의 선린상고, 1985년 박동희의 부산고, 1991년 조성민의 신일고와 함께 군산상고 조계현은 고교야구에서도 가장 화려한 별이었다.

그러나 이런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안성수는 완전히 야구 인생이 맛이 가서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졌고, 조계현도 어깨가 맛이 가서 파이어볼러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했다. 혹사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한일고교야구 정기 교류전에서 조계현은 3차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다 시피하여 2승 1패를 거뒀다. 당시 감독이었던 경북고 구수갑 감독이 라이벌 팀 에이스를 일부러 굴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선동열, 김건우[2]등과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혹사로 인해 연세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타자로 전향도 고려했다고. 그러나 연대 재학 후반부에 조계현은 팔색조 변화구라고 불리는 다양한 구질을 연마하여 변화구+컨트롤 위주의 기교파 투수가 되었고, 이것 덕분에 그는 전성기 못지않은 투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계현 하면 승부사처럼 조금은 경직되고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 대학 시절 그는 귀여운 곰돌이처럼 푸근한 인상의 매력남이기도 했다. 연세대 에이스는 최동원, 윤학길, 김정수, 조계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윤학길만 순둥이다. 김정수가 가을 까치요 이순철 김성래 조계현이 큰경기 명승부를 펼친 이유는 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정기연고전의 살떨리는 큰승부를 체감한 덕분이리라. 조계현은 초등시절 학교의 요청으로 1년을 꿇었다.프로 진출도 올림픽 때문에 1년을 유예했고. 고졸 선수보다 6년 늦게 프로에 진출한 것은 팬으로서 아쉬운 점이다. 100승은 더 볼수도 있었을 텐데.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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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농협 입단 사진

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고 나서, 이듬해인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 팀에 입단한 듯.1982년 세계야구선수권을 위해 국가대표들은 1년간 프로 진출이 유예되었다. 1989년은 1년 전 선수들과 함께 진출하게 되어 막강 선수들이 무더기 입단한 해로 기록된다. 조계현, 이강철, 송진우 등 투타 막강선수들이 많았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신인왕은 아마 시절 그들에 비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 한 박정현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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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3인방 중 한 축이었으며,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 1995년에[3]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4]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고, 엘지 해태의 3연전 모두 잠실야구장이 매진되기도 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조계현은 투수왕국 해태에서 최고 투수는 못 됐을지 모르지만 열혈 팬들도 거느리고 있다. 그는 팬들에게 투혼의 승부사처럼 비췄다. 대단한 구속도 아닌데도 강심장의 자신있는 투구 모습은 정말 짜릿한 희열을 선물했다. 특히 삼성, LG 등 라이벌 팀과의 대전엔 더 짜릿했다. 해태는 군산상고 주축에 광주일고가 보조하는 식으로 출범했고 해태의 전성기 마지막엔 군산상고 출신 조계현이 있었다.그가 떠난 후 해태의 우승도 끊기고, 결국 부도가 난 건 묘한 느낌을 준다. 그후로 해태나 기아에서 군산, 전주 출신은 줄어드는데 쌍방울의 출범도 이유가 됐겠다. 해태에서 빛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조계현은 성적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수로 기억된다. 그가 던질때는 야구 승부 정신의 처절함과 치열함이 있었기에 그만의 팬덤과 아우라를 남길 수 있었다. 당시 명 투수들이 그렇지만 문희수처럼 대학을 안 가고 프로에 진출했다면 더 막강한 해태와 좋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지.

1992년까지는 셋업+마무리로 입단동기 이강철에 비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1993년 그가 만개했다. 선동열이 마무리로 내려가면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꾸는데,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다.

조계현은 고교 1학년시절 강속구 투수로 등장했다. 그후 어깨에 무리가 있었는지 속구가 무뎌졌지만, 프로에 나타날 때 그는 강속구도 자주 구사했다. 한데 1992년 200이닝에 가까운 투구를 한후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야구를 오래 못할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그후 본격적으로 변화구와 제구력 투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큰 성과를 얻었다. 그는 겨울전지훈련에 자주 동행치 않았다. 주로 따스한 남쪽 완도의 섬에서 보내곤했다. 보길도였을까? 아마도 체력적 부담도 있었겠고 자율훈련에 자신도 있었겠지만 구질개발이 중요하다고 보고 개인훈련을 택했을지도.

1994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그 해 해태는 LG의 맞대결에서 7승 11패를 당했지만 그 중 5승이 조계현이였다. 81승을 올리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바람 야구 LG에게 유일한 저승사자가 있었으니, 그건 조계현이었던 것!! 2년 연속 다승 1위를 하였다.

1995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2달가량 출장을 못 하며 9승에 그쳤으나[5] 이상훈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방어율왕에 올랐다.

1996 시즌은 1993이나 1994랑 비교되지만 그해 못지않게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1점대를 늘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2점대를 찍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하고 만다. 결국 ERA 2.07에 16승을 찍고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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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6년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이대진, 김상진 등 신예 에이스들이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나서[6] 1997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4억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7]

여기서 1998 시즌과 1999 시즌을 보냈지만 1998 시즌은 2년전의 그 선수는 어디 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했고, 1999 시즌은 말 그대로 몇경기 못 올라오면서 퇴물이나 다름없던 모습을 보여 삼성에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해태 시절 투수코치로 인연이 있었던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지금은 킬인식이라 부르지만 사람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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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서글펐던 과거 시절을 잊고 활기찬 모습을 선보이며 선수 생활의 황혼을 장식했던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시절

두산 베어스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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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운뎃글자가 을 떠올리게 하는 '계'인데다 '변화구의 마술사', '팔색조', '싸움닭' 등의 별명을 얻은 탓에 팬들 사이에서는 투수코치로 있을 때 투수진이 망가지면 조닭이라고 부르며 대차게 깐다.[9]

4 코치 생활

4.1 KIA 타이거즈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

KIA 타이거즈 No.77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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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6년만에 친정팀 코치로 다시 시작된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영영 못볼줄았던 그가 10년만에 돌아왔다.

삼성 라이온즈 No.77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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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7년만에 다시 밟게되었으며 코치생활이 제일 길었던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은퇴한 후 2002년에는 KBS 해설위원으로 있었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이 당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KIA 투수코치 시절에는 김진우에게 너클볼을 장착시키려다 제대로 망한 전적이 있고 삼성에서는 윤성환을 조련시킨 것을 제외하면 잉여 투수들을 올리고 털리느라 팬들로부터 까였다. 특히 조닭의 행보가 절정에 달한 2009 시즌에는 조현근-최원제-김상수 + 박성훈-차우찬, 소위 조원수박차라 불리는 화약고 미완성된 투수들을 심심할 때마다 올리고 털리는 일을 반복하여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10]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투수코치로 있을 때 성장한 윤성환은 조계현과 마찬가지로 빠른 구속보다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와 승부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윤성환은 다양한 변화구보다는 속구-커브의 투 피치로 타자와 승부할 때가 많다는 게 차이점.

이후 김용국과 함께 2009 시즌 후 삼성의 코치직에서 짤렸고 삼성 팬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의 후임으로 오치아이 에이지가 온 후 삼성의 불펜진이 철벽 포스를 내뿜기 시작하자 조계현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김용국은 나중에 류중일이 요청하여 복귀하긴 했지만....)

4.2 두산 베어스 시절

두산 베어스 No.75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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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9년 만에 코치로 돌아왔으나 초단기 코치 생활에 흑역사를 안긴 두산 베어스 시절 코치님 여기서 시구하시면 안됩니다!!!

2010 시즌에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부임했는데, 선발-불펜 할 것 없이 두산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켜 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용병들과 김선우를 제외하고 선발진이 모조리 개박살났으며, 패전조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롯데의 양상문, 한화의 이상군, 기아의 이강철과 함께 KBO 최악의 사대천왕막장 투수코치로 꼽혔으며, 두산에서도 2군으로 밀려난 후에야 겨우 두산 투수진이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2011년 5월 이후부터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헌데 그전에 올라왔던 사람이 윤석환이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평판이 조금 나아졌다. 예로 노경은-김강률 등의 투수들이 구위가 개선되며 호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일부 두산 팬들이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노경은의 구속이 150km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이버 용병 투수 페르난도 니에베 역시 초반과 달리 불펜에서 각성해서 맹활약하였다. 페르난도의 초반 부진 이유는 성실하고 싹싹한 더스틴 니퍼트와 달리 투수코치들의 투구 조언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조계현이 그 자리에서 변화구를 몇 개 던져 주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마운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일단 투수들을 다독여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기존의 윤석환이나, 달감독같은 경우 도망가지 말고 맞더라도 "걍 네 공 믿고 가운데 찔러넣어"를 주문하며 타자와 피하는 투구를 하는 투수들을 갈군다면, 조계현은 "괜찮어, 슬금슬금 던져, 변화구 가르쳐 준것도 쓰고..." 하면서 조용히 다독이는 편이라 한다.

어쩌면 직구앓이, 파워직구 위주의 두산 투수들에게 변화구를 가르치면서 슬금슬금 피하면서 승부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두산 투수진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듯. 2009년까지 직구위주의 공격 투구를 했던 김선우가 2010 시즌 이후로 여러 구종을 장착하면서 2011년에 16승을 달성한 것도 조계현의 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두산 베어스 팬들은 3~5선발 이후를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조계현을 꼽고 있다. 혹사로 기껏 발굴한 투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계속되고 있으며, 변화구를 잘못 장착시켜 두산 투수들의 구속이 일괄적으로 5km씩 감속했다는 비판도 있다. 결과적으로 두산이 2011 시즌을 말아먹는 데 한몫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

4.3 LG 트윈스 시절

LG 트윈스 No.71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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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코치 시절.

어수선했던 2011 시즌이 끝난 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직에서 사임하고 DTD 올림픽대표팀에서 코치로 함께한[11]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아 LG 트윈스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여태 맡았던 투수코치가 아닌 만큼 과연 수석코치로 어떤 활약을 할 지 우려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개막한 이후 별다른 언론 노출도 없었으며, 투수 기용 및 관리에 있어서도 주로 차명석 1군 투수코치가 부각되는 등 투수 쪽에 개입하기보다 성질 부리는 감독 달래기수석코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듯하여 LG 팬들에게 까이지 않았다. 아예 잊혀진 수준 김태한이 그러길 바란다

2012년 9월 12일 SK전에서는 5살 연하인 김기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리다가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나타난 걸 보면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말리는 걸 김기태 감독이 뿌리치는 과정에서 저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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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LG의 성적이 좋아지면서, 김기태 감독을 잘 보좌하고 있는 것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감독이 야수지명타자 출신인 만큼 투수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조언해준 듯. 물론 투수진의 안정화는 차명석 투수코치의 공이 크지만...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퇴했지만, 구단이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상태이고 여전히 엔트리에는 김기태 감독이 올라와 있어서 사실상 감독 대행임에도 공식 직함은 여전히 수석코치인 어정쩡한 상태에서 팀을 이끌었다.

LG 프런트에서는 조계현에게 감독 제의를 했으나, 김기태 감독과의 의리를 지켜 사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조계현이 사실상 감독 대행역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자신을 "수석코치"로 못박아 둔 것을 보면, 일부 조계현까들이 주장하는 대로 겸손을 가장한 언플은 아닌 듯하다.[12] 어쨌든, 기대한 성적반등은 없었지만,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백창수를 1군에 꾸준히 기용한 것만큼은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5월 11일,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고, 5월 12일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된다.

시즌 중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차출되었다.

4.4 다시 KIA

김기태가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게 됨에 따라, 김기태를 따라 친정 팀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10년 만에 친정 앞으로 보직은 똑같이 수석코치다.

당초 kt wiz에서 2군 감독으로 영입을 타진했지만 김기태가 KIA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고민 끝에 KIA 타이거즈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현이 KIA로 옮기자, kt wiz두산 베어스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었던 황병일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김기태 감독과의 호흡은 여전히 잘 맞는 편. 무지 재미있고 유쾌한 성격이라 선수들이 많이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한다.

2차 드래프트 1라운드로 데려온 배힘찬이 드럽게 못하고 있는데, 배힘찬을 데려온 김기태만 욕 먹었지만 사실 먼저 뽑자고 얘기한 건 조계현이라고 한다.선수 보는 눈이 이렇게 없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기록.

역대기록
년도소속팀ERA경기완투완봉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
1989해태 타이거즈2.8431707940174153368597
19903.2830105141300178 1/31448783130
19913.2521109900130 1/3100646875
19922.9437311061201561231354598
19932.152810417610196 1/31418517118
19942.61271451850021017112626135
19951.711940960012697237659
19962.072711316700191 2/314512457116
19973.71252189001141111129771
년도소속팀ERA경기완투완봉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
1998삼성 라이온즈5.21292081100150 1/317119641294
199911.511200030020 1/336512316
년도소속팀ERA경기완투완봉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
2000두산 베어스3.74160073008981726553
20015.28180035008799733538
통산3.173206419126(7위)921701823 1/31572113605791100

6 여담

  • 야구인중에서 박희수는 물론이거나 이숭용도 반반 섞일 정도로 닮았으며, 심지어는 선수 시절에 생김새가 그럴싸해보여서 그런지 과거 모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삼장법사까지 닮았다는 소릴 듣게 된다. 근데 당시 머리 빡빡밀었던 정황이 없어서 기분 탓으로 그런 별명이 붙었나 보다!!!
  1. 2014 마무리 캠프 때에는 임시로 81번을 달았다.
  2. 이때 선린상고 동기였던 박노준은 차출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1963년생인 선동열, 김건우와 달리 박노준은 1962년 생으로 1살이 많아서 나이제한에 걸렸기 때문.
  3.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전성기였다.
  4.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정적 요인은 조계현과의 맞대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5. 이건 이종범이 없는 타선의 무기력함도 있었다.
  6. 하와이 전지훈련 중 이순철, 송유석, 김정수, 이건열, 정회열 등과 같이 항명사건을 터뜨린 게 원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1997시즌 사이에 대거 정리된다. 단 김정수만큼은 예외, 어느정도 사건 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는데 이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로 이적했다.
  7. 조계현 영입은 삼성 라이온즈 돈지랄의 시작이었다. 1999년에는 두산 투수 김상진을 6억 5,000만원에 잡았다. 그리고 동시기에 김현욱과 김기태를 쌍방울에서 20억원에 잡았다. 또한 해태에서 임창용을 30억원을 주고 사왔다. 그리고 2000년에는 해태에서 이강철을 3년 8억+FA 보상금, 그리고 LG에서 김동수를 3년 8억+FA 보상금을 쥐여주면서 데려왔다. 1998~2000년 3년간 삼성이 선수영입에 쓴 돈은 76억 5,000만원 이상이다.흠좀무
  8.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신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
  9. 투구 동작시 다리를 반대쪽 다리 위로 꼬아서 내려오는 게 닭싸움하는 듯한 모습이라 싸움닭이라 하기도 함.
  10. 이후 위의 잉여 라인(...)에서 조현근최원제는 군대를 갔다 와도 여전히 성장하지 못했고, 최원제는 결국 타자로 전향했다. 투상수와 박성훈은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나마 차우찬이 터지긴 했는데, 이쪽도 2011년부터 2012년까지 투구 밸런스를 잃으면서 또 헤매야 했다. 뭐가 터진 걸까
  11. 사실 김기태와는 삼성에서 1999 시즌에 한솥밥을 먹기도 했었다.
  12. 수석코치는 대체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감독이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고 두번째는 감독을 중간에 잘랐을 때, 보험을 위해 프런트에서 선임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조계현, 그리고 2011년 선동열이 KIA에 부임할 때 데려온 이순철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현이 김기태가 사라진 이후 감독대행을 계속 맡기도 좀 껄끄러웠을 것이다. 올해 LG를 맡아 감독이 되는건 자신의 커리어에 해가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기도 하고.. 후자의 범주는 2009년 당시 조범현 KIA 감독 아래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종모, 그리고 2006년 이순철이 LG 감독을 사임한 후, 감독대행을 맡았던 양승호가 있다. (김기태 자신도 박종훈 밑에서 프런트 보험용 수석코치를 했다.) 기아가 해당년에 우승한 후, 조범현의 발언권이 높아지자, 가장 먼저 한 것이 김종모를 자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