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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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출신으로, 호는 죽산(竹山)이다.

조봉암 평전

2 일생

2.1 해방 전

경성YMCA중학부에서 1년 학습했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 갈등에 염증을 느껴 일본으로 갔으나 주오 대학 전문부를 다니다 중퇴했고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 참가하여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 공산대학도 다녔지만 폐결핵으로 관둬야 했다. 코민테른 측에서는 요양 후 복학을 권했지만 당시 치료약도 없던 폐결핵은 요양과 재발을 반복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중병이었다. 그 때문에 조봉암은 목숨을 걸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1924년 조선공산당 조직을 주도하였고, 조직 중앙위원장을 지냈다. 이때 박헌영, 김단야사회주의 운동의 거목들과 만났다. 조봉암이 이런 일련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데는 고향 선배 김찬의 도움이 절대적이기도 했다. 봉암은 김찬의 도움을 얻어 운동을 전개하면서 '박철환' 등의 가명을 사용했고 연사로 이름을 날렸다.

다음해 5월 말 쯤에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 집을 찾아가서 4월에 조선공산당이 수립되어 제 3인터내셔널의 승인을 받으러 모스크바로 가야하니 러시아 영사관여권교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여운형은 조봉암에게 여권을 주었다. 그러나 그해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임원들이 검거 되었을 때 이러한 사실이 일본 경찰에 포착되어 물의를 빚게 되어 피검,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 끝내 손가락 마디 7개가 동상으로 잘려나가기까지 했다고...#

상하이 공동 조계에서 여운형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 살던 시절, 결핵에 걸리자 죽기 전에 첫사랑이었던 봉암을 보고 죽어야겠다 싶어. 조선->일본 나가사키->상하이로 보름 가까이 걸려 찾아온 죽마고우 김이옥과 가정을 꾸렸다. 이미 김조이와 결혼한 상태였지만 김조이와는 러시아 유학 관계로 오래 헤어져 있었고, 김조이 또한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였다. 김이옥과의 사이에서는 장녀 조호정 여사를 낳았다. 김이옥은 삼십대 초반에 폐결핵으로 죽었는데,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조봉암이 사회주의 국제 청년단인 모풀의 공금을 유용한 것과 공산주의 경력은 두고두고 정치인 조봉암의 발목을 잡았다. 특히 박헌영과 크게 대립했는데,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박헌영의 극심한 조봉암 공박은 봉암이 우익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된다.

출옥 후, 일제 말기 인천으로 내려가 지냈다.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왕겨를 공급하는 조합에서 일을 보며 지냈고, 이때 세 번째 부인인 김봉림을 만났다. 봉암의 나이 50이 가까웠는데 20대 초반 여성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둘 사이에서는 조임정, 의정 여사가 태어났다. 김조이의 친정 식구들이 창원에서 인천으로 이사와 결합하기도 한 것을 보면 이때의 생활은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1945년 1월 해외와 비밀연락을 했다는 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 광복되던 날 순사가 찾아와 봉암과 함께 갇혀 있던 사람들을 불러내서 다른 방에 2열로 앉혔는데, 그때 봉암은 처형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고 한다. 그런데 순사가 '곧 항복할 것이다'라고 해서 놀랐다고.

2.2 해방 후

1945년 8.15 광복여운형이 치안권을 이양받아 정치범을 석방하면서 풀려났다. 여운형은 조봉암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가 출옥할 때 마중나갔다고 한다. 이후 죽산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활동을 시작으로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2.2.1 박헌영 비판

1946년에는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했는데, 그 과정에서 비타협적으로 좌경화된[2]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환멸을 느끼고 박헌영에게 조선공산당의 행태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실 조봉암은 자신의 편지가 박헌영에게만 전달되길 원했지 공개되길 바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946년 3월, 공산당 활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던 미군 CIC방첩대가 조봉암의 사무실(인천 민전지구)에 들어와 서류를 압수해갔는데 그 서류 중에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 초고가 있었고, 미군정은 그 초고에 윤색을 보태서 언론에 공개했다.[3] 그 결과 조봉암은 박헌영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고, 결국 조봉암은 1946년 5월에 박헌영과 결별하여 우익으로 전향하였다.

2.2.2 좌우합작, 남북협상, 5.10총선거

조봉암은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자 여운형김규식을 지지하였으나 우익으로 전향했으니 김규식에게 가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규식은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거절하여 참여가 무산되었다. 그리고 48년에 열린 남북협상 때는 우익으로 전향한 것을 이유로 들어 참여하지 않았다.[4] 그리고 북한과 사회주의 세력에게 변절자라고 을 얻어먹어가면서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5]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보면 변절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조봉암은 당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피할 방도가 없으니 출마를 해서 국회의원이 된 다음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민중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려했던 것. 결과론적으로 5.10 선거에 사회주의세력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선택이 되었다.

그 무렵 단독선거를 무효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반대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자진 월북해버리거나 남한 내에서 폭력적 저항운동을 벌였으며(박헌영의 남로당 등) 민족주의 세력은 출마 자체를 아예 하지 않았다(4.3 사건, 여순사건 항목 참고). 만약 조봉암마저 없었다면 5.10 총선거는 오로지 단정수립을 찬성한 우익과 한민당세력만의 잔치판이 되었을 것이다.

2.2.3 대한민국 국회의원 및 농림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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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고, 그 때 그가 입안한 농지개혁법은 지주와 소작농 계급이 대다수를 이루고던 농촌사회의 불안정 요소를 점차 줄여나갔다. 농지개혁의 목표는 소작농의 비중을 줄이고 자영농의 비중을 늘리면서 농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소작농의 설움을 겪었던 민중들에 호응을 얻었다.[6]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지만 이러한 개혁정책 덕분에 6.25 전쟁 당시 농민들이 계급을 해방한다는 북한군 선전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설이 존재하며, 무엇보다 농부의 입장에서 농사지을 자신의 땅이 생겼다는 것은 굉장한 밑천이다. 이 밑천은 후에 자식 교육에 투자되는데, 비록 빈천하지만 당시 터져나온 한국의 폭발적인 교육열과 더불어 서민들이 먹고 살면서 교육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재원 중 하나가 되었다. [7]

한국전쟁 중에 납북 당하지 않고 간신히 남하[8]하여 부산에서도 정치에 참여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고[9], 제도적 개혁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얻은 조봉암은 후에 무소속으로 대선에 도전하였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작스레 지병으로 사망하고 조봉암은 290여만 표 차이로 이승만에게 패하여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떠올랐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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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국회 부의장 시절의 조봉암(맨 오른쪽) 모습.

사실 당시 민주당신익희 후보가 죽은 이후 통합을 지지했다면 조봉암은 부정선거에 불구하고도 당선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느니 이승만이 세 번 해먹는 게 낫다는 입장에서 '신익희 추모표'를 찍을 것을 독려했고 무효표만 185만여표가 나왔다. 당시 이승만의 득표수가 약 504만여표였고 조봉암의 득표수가 216만여표였으니 민주당이 기권투표를 유도하지 않았으면 5:4로 꽤나 싸워볼만 한 형국이었다.[11] 이 '신익희 추모표' 떡밥은 훗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민주당의 선거단일화 요구를 비판하는 근거로서 절찬리에 사용되고 있다. 그들의 노선이 조봉암과 과연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별개이다
당시 선거결과1,당시 선거결과2

그가 대선에 도전하게 된 것은 미국의 권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국은 남북 문제는 평화적 해결 밖에 방도가 없다고 보았는데 이승만은 오로지 반공을 외치고 사회주의 국가를 대놓고 도발하므로 희망이 없다고 판단, 그 대안으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조봉암을 지원했다고 한다.[12]

2.2.4 진보당 사건과 처형

이승만 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후에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정당[13]을 만든 걸 구실로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 특무대와 결탁해서 대북 밀무역을 하던 양명산이 간첩으로 체포되고 [14] 협박과 회유[15]로 그렇게 벌어들인 공작금을 통일사회당 창당자금에 지원했고 북의 서류를 조봉암에게 주었다는 진술을 하게 된다.

문제는 증거도 하나도 맞지도 않고 무죄로 하겠다는 약속이 깨어지자 양명산이 진술번복까지 하게 된다. 결국 유병진 판사는 조봉암과 진보당 간부들의 간첩 혐의는 무죄로 선고하고 조봉암에게만 불법무기소지죄를 적용하여 5년 징역을 선고했다.[16] 유병진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라도 안하면 조봉암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병진은 조봉암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했으며, 조봉암의 기일마다 묘소를 참배하며 사죄해 왔다. 나중에 이 부분은 무죄가 된다.

그래서 검찰에서 내세운게 진보당의 이념이 "평화통일"이라는 점을 들어서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고 조봉암은 바로 이 혐의로 처형된다.[17]

당시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던 장택상[18]을 비롯하여 반 이승만 계열의 국회의원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19] 이승만 세력이 다수였고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원이 실패하였고 심지어 미국마저 사형집행을 반대(보류)하였으나, 7월 3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서 사법살인이라고 일컫어지는 진보당 사건이다.

사형집행일 아침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던 중 호송 간수를 잠깐 기다리게 한 뒤 서대문 형무소 담장 옆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에 다가가 한참 동안 꽃향기를 맡은 뒤 담담히 형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집행관은 의례적인 절차에 이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조봉암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입회목사에게 누가복음 제23장 22절[20]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오전 11시 3분, 1959년 7월 31일 한낮에 교수형을 당했다. 11분 후인 11시 14분에는 이미 조봉암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싸늘한 시체로 변하여 검시관의 검시를 받았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 처형에 대해 철저히 언론통제를 했고 언론들은 침묵했다. 한국일보가 부고란에 1단 6행으로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지난 7월 31일 상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3시 서울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 반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21]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해 당시에도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고[22][23][24][25]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9개월 뒤...

2.3 장택상과 윤치영의 변론

역설적이게도 조봉암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을 때 조봉암의 무죄를 외친 것은 극우파 정객인 장택상윤치영이었다. 윤치영은 그가 억울하다는 주장을 했고, 길을 잘못 들어서 좌경으로 몰린 것 같다[26]고 평하였다.

장택상은 당시 홍진기 법무장관을 찾아다니며 조봉암에 대한 석방 구명운동을 벌였고, 국회에 조봉암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옥중의 조봉암을 대신하여 무료 변론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조봉암의 사형을 막을 수 없었다.[27]

3 사후

1993년 군사 정권 붕괴 이후 조봉암의 측근들은 김영삼에게 조봉암의 억울함을 탄원했다. 김영삼장택상의 정치적 제자인 점을 감안, 장택상이 그의 억울함을 인정한 만큼 김영삼도 그의 억울함을 들어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면당하고 말았다.[28]

2006년에 와서 다시 복권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9년에 죽산 조봉암 사망 50주년을 맞아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조봉암에 대한 평전 등 서적이 발간되는등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 및 명예복권이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조만간 건국훈장 수여까지 갈 듯했지만...학계에서 그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가 논의중이고 부인 김조이 여사가 먼저 2008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특히 좌파에서는 조봉암을 여운형, 장건상과 더불어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라고 평가하고 있다.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였던 박진목은 그가 큰 사람(대인)이지만 변절자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2010년 10월 29일 진보당 사건의 재심을 열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공식적으로 간첩혐의 무죄를 선고. 원심을 파기했다. 이걸로 조봉암이 사법살인 당한지 52년만에 신원(伸冤)되었다.대법원 판례

장녀 조호정씨는 아버지의 복권 소식에 기뻐하며 오랫동안 비워둔 아버지의 묘비에 내용을 새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심사과정에서 1941년 12월 그가 일제에 국방헌금 150원을 낸 전력이 있다며 심사를 보류했다.국가보훈처 정관회 공훈심사과장 인터뷰

아직도 일부 언론에서는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등의 주장을 펼치는데# 여태까지 서술했다시피 진보당 사건은 분명히 조작된 사건이다. 이게 재심청구를 받아들이는 글이고,이게 무죄라는걸 증명하는 판결문되시겠다.

이정희는 조봉암의 뒤를 잇는다고 자처했으나 이건 무리가 많다. 조봉암이 억압을 하는 반공이 아닌 진보를 통해 반공을 하자는 주의였기 때문.

4 기타

조봉암의 처형과 관련하여 서대문형무소 수인들과 간부들 사이에 전해져내려오는 민담 중에 봉암새(혹은 죽산조)라는 민담이 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진보당 사건 자체가 짤막하게 언급되고 끝이지만, 2화 뒤에 이정재(깡패)가 사형 판결을 받고 조봉암이 썼던 방에 수감되는데, 이 때 죽산조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나는 어느 사이 비둘기의 벗이 되었다. 악하고 거짓 많은 인간들보다 이 비둘기는 얼마나 더 기특하며 정다운 친구인가 말이다.
비둘기가 좋아하는 콩, 그 콩을 내 밥에서 골라내어 던져준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주어 먹는 배고픔 속에서도 이 비둘기 모이만은 잊지 않는다. 식후 창가로 가서 구구구 비둘기를 불러 콩알을 던진다.

여기저기 모여와 구구거리면서 그걸 쪼아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끝없는 희열감에 젖는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일은 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딴 방의 사람들도 소중한 밥을 나누어 던져주는 것이었다.

건너편 2사의 조봉암 선생도 끼니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 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어 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 분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드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죽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교수대에서 그 막을 내린 것이다.
그 후 사형집행의 버드나무엔 전에 볼 수 없었던 낯선 진귀한 새가 나타나 슬피 운다는 것이며, 이것이 소위 ‘봉암새’ 혹은 ‘죽산조(竹山鳥)’라는 얘기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누가 지었는지 조차도 확실치 않는 ‘봉암새’의 얘기가 서대문 징역꾼과 형무관 사이에 마치 하나의 전설이나 민화(民話)처럼 구전되고 있다.

출처

여운형의 글에 따르면 조봉암은 을 아주 잘 마셨으며, 시를 잘 읊었고 강개가 북받치면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처형 직전 유언"막걸리 한 사발과 담배 한 개피만 달라"였다고... 그러나 간수들은 막걸리는 주지 않고 대신 담배는 허락하여 조봉암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개피를 맛있게 피운 후 처형 당했다고 한다.(...)

그 밖에,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씨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여운형과 가장 친했으며, 한민당과 이승만, 김구를 다 안좋게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김구테러리스트라며 싫어했다고 한다.#

허영만오! 한강에도 등장했다. # 조봉암의 죽음으로 주인공 이강토는 현실 정치에 절망하여 등을 돌리고 그림에만 몰두하게 된다. 2부의 중요 캐릭터.

장기려 박사를 다룬 평전 2권에서 모두 장기려 박사가 처한 당시 고난을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편히 있었을까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1. 과거 이글루스에서 활동한 모 블로거는 1939~1945년 기간동안 조봉암은 '변절자'였다는등 '친일파'라는등 얼빠진 소리를 하고 왜곡된 선동질, 왜곡질하고 있는데, 실제로 조봉암이 이 기간동안 '유휴분자'라고 비난받았던건 사실이다. 그러나 1945년 1월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고 끌려가서 8.15 광복때 풀려난 것을 감안하면 조봉암이 전향을 하고 변절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 내내 봉암은 '특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있었다. 공동 조계에서 이옥과 생활하던 때조차 품에 칼을 품고 잘 정도로 밀정에 쫓기는 신세였다.
  2. 사실 조봉암의 입장이나 편지의 내용을 보면 좌경화의 문제 같은 것 보다는 자신의 처우 문제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스크바 대학 유학파로 코민테른의 지원을 등에 업고 활동한 조봉암의 입지가 이 시기에는 엄청나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조봉암 변절논란까지 나오는 것도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던 그 시기에 조봉암이 개인 생계활동 이외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광복이후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 조봉암의 입지를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조봉암이 박헌영에 '너 너무하는거 아니냐, 나한테 그러면 안된다'라는 식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3. 이 과정에서 안재홍이 비판서한을 입수하여 한성일보에 보도했다고 하며, 조봉암이 미군에 붙잡혔다가 석방 된 이후로 좌익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성명서가 그의 명의로 배포되기도 했다. 서한을 계기로 조봉암의 이름이 우익측에서 좌익 비판용도로 이용된 측면도 있었다.
  4. 김구가 우익이었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과 달리 조봉암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정치인으로서 현실을 고려한 측면이 있었다. 한번 변절한 사람이 또 변절했다고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그나마 남았던 지지기반 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김구의 경우 좌우합작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우익적 입장을 견지했다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김구를 지지했던 우익쪽 지지가 떨어져나가서 이승만에게로 갔다. 물론 병크를 터트린 이승만보다 후대의 평가는 높아졌지만(...)
  5. 이 때문에 남로당에 의한 테러위협에 시달려서 선거기간 중에 시골에 은거했다고 한다.
  6. 물론 모든 소작농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고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이 잘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농지개혁법 항목 참조.
  7. 후에 사회교육을 받아 민주주의를 학습한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성을 깨닫고 저항하였으며, 이는 4.19 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봉암은 의도했건 안했건 4.19 혁명의 간접적 원인을 제공한 셈이 된다.
  8. 신익희조차 가족들을 데리고, 자신의 부하인 윤길중에게 함께 피난가자고 약속해놓고 먼저 서울에서 도망친 것과는 정반대로, 조봉암은 끝까지 서울에 남아서 다른 국회의원들의 피난비용을 마련해주고 인민군에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공문서들을 불태우고 정리하여 새벽차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아내와 같이 도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아내는 행방불명되고 말았다.(다만 사실상 북한에 끌려가 죽은 것으로 심증이 굳어지고 있다. 이유는 조봉암 가묘 옆에 첫 아내나 재혼한 아내 가묘가 없는 것인데, 조봉암을 배신자라고 칭하고 분풀이로 김조이 선생을 죽인 북한이 이승만에게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다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이 한국전쟁에서 똑같이 한 짓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것은, 조봉암이 대전에서 이승만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들었던 말은 "서울에 남아 인민위원장이 됐다더니..." 였다. 서울 시민들에게는 끝까지 수도를 사수하라고 해놓고 가장 먼저 부리나케 도망간 사람이 오히려 서울에 남아 본분을 다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몬 것이다. 출처 : 이영석, <<죽산 조봉암>> (원음출판사, 1983) pp.181 ~ 182.
  9. 당시 강력한 중도파 정치인이었던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이 납북되어 이승만을 강하게 견제할 인물은 조봉암 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승만은 부산까지 따라온 조봉암을 보고 북에 가지 않고 왜 여기 왔냐고 그랬다고 한다.
  10. 그마저도 부정선거였다. 진보당은 투개표장에 참관인을 내기가 어려웠고, 일부 참관인은 폭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결국 진보당에서는 "선거에선 이겼는데 개표에서 졌다"라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당시 임시수도부산의 한 선거구에서는 조봉암표 뭉치에 이승만표를 앞뒤로 한장만 붙여서 이승만표로 둔갑시켰는데, 나중에는 이승만표가 먼저 떨어지더라..."라는 말도 나왔다. 물론 사실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그 만큼 민심이 얼마만큼 부패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등을 돌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1. 물론 당시 민주당이 실질적으로 자유당의 2중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신익희의 185만표가 고스란히 조봉암에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부동층이 있었겠지만 대략적인 형세가 그러했다는 말이다.
  12. 하지만 당시 조봉암의 과거 경력 때문에 미국 측에서 조봉암을 은근히 미심쩍어했었다. 이것은 조봉암 사건을 사실상 관전했다는 측면에서 밝혀진다.(후일 김대중 사형선고 때 미국의 입장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드러난다.)
  13. 진보당을 지칭한다. 사실 죽산은 당시 결성된 민주당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민주당 구파를 이루는 명망가들인 조병옥, 신익희 등은 과거 공산당에 피해본 게 많았기 때문에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의 입당을 반대했다. 그런데 장택상이나 김성수는 공산당 결별 선언만 확실히 한다면 입당을 허락해주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민주당 주류에서 마지못해 입당허가를 고려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안있어 김성수가 죽어버려서 입당허가가 안나게 되었고(...)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14. 특무대의 조작이라는 설부터 3중 간첩이라는 말도 있다.
  15. 양명산의 말에 의하면 약물고문
  16. 당시의 어지러운 정세 하에서 정치적 주요인사들은 누구나 권총 정도는 소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즉, 이승만 정권에서 조봉암을 숙청하려고 마음먹은 상황에서 무죄를 때릴 수는 없고 뭐라도 하나 엮어넣기는 해야겠기에 궁여지책으로 엮은 것이 불법무기소지...
  17. 유병진 판사의 경우는 앞의 판결 때문에 반공청년단들이 '용공판사타도',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를 외치며 난동부렸다. 결국 그 일로 유병진은 법관 연임 심사에서 탈락, 법복을 벗어야 했다.
  18. 비록 장택상이 좌파탄압의 앞잡이로 유명했지만 조봉암만큼은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19. 심지어 장택상은 "벼룩에게 굴레를 씌워 수레를 돌리지 박사가 조봉암을 처형할까?"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이 사람(예수)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때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1. 당시 언론 측에서 이런 통제에 법적근거를 묻자 일제 총독부 시행령이라고 답했다. 일제시대 시행령에 의하면 특정한 범죄자의 사형내지는 장례식 관련 보도는 통제하는 것이었다. 응?
  22. 물론 현재까지도 그걸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고 오제도 변호사였다. 이 사람이 망명 잘 해서 훈장까지 받은 황장엽과 의형제를 맺었다.
  23. 보수논조의 동아일보도 조봉암 재판 과정에서 조봉암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아서 그렇게 되었지 죽산이 간첩이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기사를 내었다.
  24. 미국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해인 1958년 1월 23일자 주한 미대사관은 보고문서(Joint Weeka)에 On basis available information Embassy believes purported evidence against Cho is, at best flimsy and that arrest and reported confession is administration attempt to discredit Progressive Party.(번역 : 이용 가능한 기본적인 정보들로부터 판단하건데 대사관 측은 조봉암에 대한 불리한 증거라고 하는 것들은 기껏해야 설득력이 없다고 밖에 할 수 없으며 구속 건과 보도된 증언은 진보당을 흠집내기 위한 정권의 수작이다.)라고 작성하여 조작으로 보고 있었다.
  25. 참군인으로 유명한 이종찬 역시 국민 방위군 사건 해결로 많이 접하게 된 조봉암이 불법적인 재판(민간인이 군재판에 회부된 것.)이니, 사형은 안 된다며, 역시 그 사건으로 권력 핵심에 오른 이기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26.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을 돌려서 말한 듯 싶다.
  27. 윤치영이승만의 최측근에다가 국회 헌법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는 공산당이나 쓰는 단어라 쓰면 안된다고 해서 무산시켰고, 장택상은 해방정국에서 박헌영김원봉, 남로당을 탄압하고 괴롭혔던 인물인 것을 보면 의외의 행동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당시 법무장관은 후에 4.19 혁명 당시 최인규의 뒤를 이어서 발포를 지시한 내무장관을 하였고, 한국 최고 재벌 회장인 이건희를 사위로 두고, 6대 일간지에 속하는 언론사인 중앙일보 창업주까지 되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28. 근데 재미난 것은 황장엽김영삼 정권 시절에 망명한 인연으로 서로 절친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도움 안 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