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독살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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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왕결전병기 독살

조선 왕들의 죽음 가운데 그 죽음에 의문과 의혹이 이는 경우 논란이 되는 이야기.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음모론 중 하나다. 조선왕조는 왕권이 절대적이지는 않았고, 왕권은 신하들에게 견제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탓에 왕이 갑자기 죽거나 그 죽음에 의문이 있을 경우 독살설이 제기되곤 했다. 어쨌든 왕이 폐위되었다 하더라도 목숨은 유배지에서 자연사할 때까지 살려주는 것이 철칙[1]이었던 조선이어서, 아예 대놓고 왕이 살해당하던 고려시대 무신정권과는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왕뿐만 아니라 차기 왕이 유력했던 단명한 세자들에 대해서도 독살설이 제기되곤 한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영조의 세자였던 효장세자,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독살설은 당대에 왕의 죽음을 아쉬워 하거나 백성들의 공분을 사는 신료에 대한 원망에서 나오거나 아예 현대의 일부 사기꾼들이 왜곡하고 지어낸게 대부분으로, 단종이나 고종을 제외하면 간단한 정황 증거조차 찾을 수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정조 독살설이나 송시열효종, 현종 독살 배후설도 정설로 인정될 근거는 없으며 도리어 독살이 아니라는 증거만 잔뜩 있어서[2] 지금에 와선 유사역사학 중심의 역사왜곡에 불과하다. 이제 와서 다시 조사해본들 남아있는 분석 근거들이 너무 적다는 한계도 있고, 당시의 낙후된 의료기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병이나 오진, 의료사고 등을 모두 독살로 몰아가는 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의 인물들은 독살설이 더욱 성립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는데 당시 조선에는 그렇게 강력한 인공 독극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장 죽으라고 보낸 사약마저도 체질에 따라 제대로 듣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연히 15~19세기 수준 문명인데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볼 수만도 없다. 게다가 천연 독극물도 얼마든지 비방으로 쓸 수 있고 그보다 훨씬 전에도 동아시아에서 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은 많다.

실제로 이 중, 소현세자의 경우는 당시 사관들조차도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봤고,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실제 그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다. 그를 경계한 인조가 독살한 게 아닌가 의심된다는 것. 실록등 사료에서도 사체의 독살 징후가 발견되고 아들의 사망에 대한 인조의 무덤덤한 반응 등이 정황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한의학적 관점에서 소현세자의 평소 건강 상태와 시술내용을 조명한 반박론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으니 맹신은 금물이다.

전체는 아니지만 이 독살설은 노론 음모론과도 상당히 겹치는 편. 정조 독살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2 독살설이 제기되는 조선의 임금, 세자들

학계에서도 독살 가능성을 인정하는 경우는 ★ 표시.

  • 문종
  • 단종 ★: 단종의 경우 비공식적으로 사약을 준 뒤 은폐했다는 설과,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고 목을 졸라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일단 단종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 자체는 거의 사실이므로 이 쪽은 살해 방법에 대한 논란에 가깝다.
  • 예종
  • 연산군: 이 항목에 올라온 왕, 세자들과 다른점이 있는데 다른 왕이나 세자들은 왕이나 세자로 있는 때 독살 의혹이 제기된거고 연산군의 경우에는 왕에서 쫒겨나 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을 때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인종
  • 선조
  • 소현세자
  • 효종
  • 현종
  • 경종 : 당시에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이후 영조 연간에 이인좌의 난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현재도 학계 정설까지는 아니나 독살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름대로 꽤 있다.
  • 효장세자
  • 정조
  • 문효세자
  • 효명세자
  • 고종 ★ : 고종의 경우 조선인들의 독살이 아닌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이다.

이중에서 단종, 인종, 정조, 고종 독살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종 독살설은 영조 어간을 뒤집어놓을 정도의 폭발력을 자랑했었지만 지금은 경종 자체가 듣보잡으로 전락해서 주목을 받지 못한다.

  1. 세조는 씹었지만
  2. 정조의 경우 애시당초 세도 정치를 실시한 장본인은 노론 벽파가 아니라 정조의 편에 섰던 시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