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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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
朝鮮人民共和國
임시 정부
국기국장
조선인민공화국의 명목상 영토[1]
주석이승만
부주석여운형
수도경성부
존속 기간1945년 ~ 1946년
성립 이전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후 체제미군정, 소련군정

1 개요

1945년 9월 6일 한반도의 식민지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선포한 공화국.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 선포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내의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크게 주도하였다. 그러나 내외부적 정세로 인해 어떠한 의미있는 활동도 보여주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국기는 태극기. 수도는 경기도 경성부(서울특별시). 약칭은 "인공"이다.

인민, 인공이라는 단어가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존재때문에 대단히 부정적인 늬앙스이겠지만, 해방정국 시기만해도 '인공'이라는 호칭이 적격했다고 봤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1947년 7월 6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적격한 국호 후보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70%의 지지를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필이면 오늘날 윗놈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자칭하는지라 "조선인민공화국"하면 북한을 말하는 줄 아는 오해가 많이도 일어난다. 결국에 이런 글까지 써졌으니...

2 배경

당시 막 일제로부터 8.15 광복에 성공한 직후, 무정부 상태였던 한반도에 소련미국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했다. 38선 북쪽은 이미 소련(소군정)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들이 집결되고 있었다.

한편 남쪽은 오키나와에서 북상하던 한국의 상황을 1도 몰랐던 미군이 아직 상륙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직도 조선총독부에는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남고 일본군이 치안을 장악하고 있었다.[2] 지하비밀조직 조선건국동맹으로 해방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여운형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활동은 활발했으나 아직 미군으로부터 실체를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끝에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9월 4일이 되자 미군 진주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고, 이때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박헌영은 <미군당국과 절충할 인민총의의 집결체>를 세워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여운형에 대한 지지를 천명한다.[3] 이후 이틀이 지난 9월 6일 저녁 1천여 명의 민중 대표들을 서울 경기여고에 모이게 한 후, 전국 인민대표자 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것이 그 기원이다.

3 건국 선포 및 각료

선포 후 며칠뒤인 14일 국내외 독립운동가와 좌우익을 총망라한 중앙정부 각료명단이 발표[4]되었다.

보듯이 고위층을 보면 좌우가 합작한 내각을 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임시정부 출신은 명목상의 고위직만 얻었고, 실상 주요 요직은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나 좌익세력이 차지하였다.[11] 또한 대리라는 단어에서 보듯 김병로, 조만식, 신익희, 김성수 등의 우파인사는 참여하지 않았다.

애초에 건준때 우파 대표로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은 건준을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장악할려는 움직임을 보고, 건준위를 2차 개편해 김병로, 이인 등 우익 인사들을 합류시켜서 힘의 균형을 유지할려고 여운형을 설득했었다. 그러나 여운형이 이를 거절하면서 안재홍과 우파 세력이 건준을 떠나게 된다. 이때문에 비교적 좌파에 포용적이었고 건준위 합류에 생각했었던 김병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여하간 건준은 일본제국주의 법률의 완전 폐기, 친일협력자 및 민족반역자의 토지몰수, 철도·통신·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강과 27개조 시정방침을 발표했다.[12]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인공"은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4 와해와 원인

어찌어찌 선포에는 성공했으나,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비 공산주의 진영 출신 독립운동가들도 미군정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제대로 된 정부 기능조차 하지 못하였다. 결국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를 그대로 이어받아 미 군정만이 38도선 이남에서의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하고, 남한내의 모든 정당에게 강령과 간부명단을 등록하게 했으며, 인민공화국도 하나의 정당으로 등록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은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1945년 10월경에 미 군정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우선 성립 자체가 너무 급조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미군정이 신탁통치를 선언한 후 서울에 도착한 날이 9월 9일, 건국 선포 시기는 9월 6일이었다. 또 이 시점 역시 광복 직후 고작 2주 후였고, 각료가 발표된 건 또 2주 후였으니, 한 나라를 이끌어갈 중책들을 고작 한 달만에 면면한 심사 없이 등용한 것이 되었다.

이는 애초에 여러 당파, 특히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 중심 당파의 지분 확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앞서말했듯 같은 독립 운동가 출신이라지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공산진영과 사회주의진영, 자유진영 등 다양한 이념의 운동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조선인민공화국은 이 주요 세력들의 충분한 논의 없이 급조된 탓에 모든 계층을 적합하게 끌어안을 겨를이 없었다. 저 각료 명단의 인물들 중 2/3이 이상이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나 좌파 출신 인물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나머지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거나 참여를 거부한 인사들이었다. 또한 소군정이 진행되던 북조선의 인사들도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은 (만약 미군정에 의해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할지라도) 통일정부는 수월하지 않았을 것임을 반증한다.

물론 건준이 이렇게 조급하게 인민공화국을 선포한데는 미군정의 지배가 시작되기 전에 건국을 해야 한다는 여운형의 부담감 때문이었으나, 거꾸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오래 가지 못한 이유는 그러한 미약하고 졸속인 기반부실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인공"의 실패와 함께 정치력에 상당부분 타격[13]을 입었으며, 이후로도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을 포용, 좌우합작 노선을 견지하며 연대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다가 박헌영에게 제대로 배신을 당하고 나서야 중도노선을 굳건히 견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상당히 늦은 후였고 결국 여운형의 꿈은 암살로 끝나고 난다.

5 의의도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들에 의해 주도권이 장악되면서 점점 급진화되어 인공 선포로 많은이들의 반발을 초래시켜 결국 '페이퍼 정부'로 실패로 끝나버렸지만, 나름 의의가 있는 부분도 있었다.

나름 자주적인 한반도의 통일정부를 세우려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방자치 부분에 있어서 특히 의의가 있었다. 인공이 조직됨에 따라 지방에 있던 기존에 전국적으로 활동했던 건준 지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이 진주한 뒤에도 해당 지방 주민들의 지지 속에 치안을 담당하는 등 '지방정부'로서 활동한 곳이 적지 않게 꽤나 많았다. [14] 이 인민위원회는 치안,행정 능력이 '우리 스스로도 이끌어 나갈 수 있음'을 능력으로 보여준 사례로 의의가 있다.[15] 이러한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대중들에게 상당한 신망과 지지를 받고 있었다.# 비록 서울의 중앙인민위원회는 박헌영의 극좌파들이 주도하였기때문에 우익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이와 달리 지방의 인민위원회 경우는 좌익들만이 아닌 지역에서 양심가로 명망 높은 우익세력 인사들도 대거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예를들어 중국, 소련, 일본 등지에 이민,징용이나 징병등 나갔다가 돌아오는 귀환민들의 행렬은 해방 후 수개월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던 무렵에 인민위원회는 이들을 맞이해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고 아직 철수하지 않은 일본 군,경을 견제하는 등 1945년 말까지 실질적인 국가 기관처럼 활동했었다.

특히 가장 의의가 있었던것은 소작료 개혁 관련이었다. 서울의 중앙인민위원회가 결정한 소작료 3:7제는 특히 농민들의 환호속에 받아들여졌었다.[16] 이는 미군정이 10월 5일 군정법령 제5호로 법제화 한 '소작료를 생산량의 3분의 1만 내면 된다'는 3/1제를 공포한것도 이 인민위원회에서 내세웠던 '3:7제'가 농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었던 점에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방정국 당시 사람들은 정권형태가 '군정체제'[17]보다는 '인민위원회'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었다.#

6 결론

이로써 미군의 직접통치를 받지 않고 자주적인 한반도의 통일정부를 세우려던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여파로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 승인은 물론이고 단체로서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12월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터지면서 해방정국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으며, 여운형의 후속타인 좌우합작운동도 실패로 돌아갔다. 기어이는 1948년 두개의 정부가 출연하고 말았던 것이다. 1950년 결국 6.25 전쟁이 발발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도 일본 공산당이 비슷한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 미국으로 부터 무시당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인민공화국 참고.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은 아니지만 여운형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세워볼 수는 있다. 대한민국을 점령하고 괴뢰국으로 만들면 여운형이 대통령이 된다.
  1.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38도선 이남 영토와 똑같이 자리잡으려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북에는 이미 소련군이 진주했기 때문.
  2.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건준위가 활동했었지만, 조선총독부는 격하게 반발. 8월 20일에 경성(서울)에서 다시 치안권과 행정권을 장악할려고 했었고, 이과정에서 이중 혼란을 겪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총독부와 건준위 사이간 이중혼란이 오는 반면에, 지방에서는 건준위에서 자체적으로 치안,행정권 활동했던 상태.
  3. 물론 이것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후 조직을 장악하려는 전형적인 공산당식 전략이었다. 이는 1945년 8월 해방되자마자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재건파를 조직하고, '8월 테제'를 선포한 부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4. 이 각료명단은 박헌영이 초안 작성.
  5. 김병로와 함께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과 일제의 변호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다. 1926년 조선 최초의 6개월간 민간인 세계일주를 다니기도 했다. 신간회나 건준에 적극 참여하며 온건좌파의 성향을 띄었으나, 결국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냈다. 1951년 병사.
  6. 이후 월북
  7. 연해주 고려공산당 출신 남로당 간부.
  8. 1927년 원산 총파업으로 이름을 알린 좌파인사.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교수로 조선건국동맹 때부터 참여하였다. 이후 월북하여 북한 헌법을 기초하였으나 숙청당했다고 추정된다.
  9. 박헌영의 오른팔 역을 하는 남로당의 제2인자였다.
  10. 보성고보를 수석졸업하고 독일 유학했던 엘리트 출신으로 독일 공산당(KPD) 당원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공산당,독립운동 활동을 하다가 연인인 간첩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하였으나 역시 숙청당했다.
  11. 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주창한 '8월 테제'에 따른것이다. '8월 테제'란,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력을 포용하면서 나아가 최종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단계적 전략 요지의 내용을 담은 선언을 말한다.
  12. 이 정강정책은 조소앙이 기초해서 임시정부가 내걸고 있던 삼균주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13. 여운형 자신은 인공수립에는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시기였던 1945년 8월, 건준위 활동 초창기에 2번 연달아 괴한에게 피습되어 테러 2차례 연속당하면서 병원 입원신세 지내는동안, 건준 내부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급속도록 장악해버렸다. 결국 나아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인공을 선포하게 되는데까지 묵인해 이용당한 꼴이 되버렸다.
  14.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따르면, 38선 이남의 조사대상 138개 군 가운데 128개 군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에 해당하는 69곳의 인민위원회가 자치관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15.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현재는 정년퇴임으로 석좌교수)에 따르면, 해방직후에 이러한 자치기구가 없었다면 굉장히 커다란 혼란이 겪었을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16.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주제 하에서 소작료를 5할, 많게는 6~8할까지 내 절대적인 빈곤에 신음하던 농민들이 3할만 소작료로 내면 된다는 주장에 '정말 이것이 해방이구나'하고 감격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17. 당시 군정체제때 일제때 경찰로 복무했던 친일경찰 출신들이 다수 점유했었고, 이들 친일경찰들은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