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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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영남 (趙英男, Cho Yeong-nam)
출생 1945년 4월 2일 (닭띠) / 황해도 평산군
본관 배천 조씨
국적 대한민국
혈액형 RH+ O형
학력 트리니티신학대학교 학사
서울대학교 성악과 명예졸업
서울대학교 성악과 중퇴
한양대학교 성악과 중퇴
용문고등학교
직업 가수
데뷔 1968년 노래 '딜라일라'
종교 개신교
가족 동생 성악가교수 조영수

일단 다 접고 대한민국 연예계의 상 쓰레기인 것을 전제로 들어가자! 연예계에 남아있을 수 있는게 신기한데, 아마 언론플레이가 신의 경지에 다다른 듯.

세시봉 출신으로 화개장터를 부른 레전드 뮤지션이였으나 점철된 논란으로 안 좋은 의미로 전설이 되버린 가수.

좋은 일보다 안좋은 일로 언론에 노출이 많이된 연예인중 TOP 1

1 개요

1963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킨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라고 언플을 꾸준히 해왔다. 그런데 사실 조영남이 최초는 아니다. 가요계에서 최초로 성악을 접목시킨 사람은 1940~50년대에 활동했던 현인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다. 참고로 이 곡을 조영남은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가 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쪽으로 유명해졌다.

보통 가수들이 죽으면 장례식에서 그 가수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주는게 관례인데 조영남은 이것 때문에 난감하다고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다. 즉, 자신이 죽으면 부를 노래는 보나마나 '화개장터'일 텐데 장례식 분위기 완전 엎어놓을 노래이다 보니... "구경 한번 와보세요!"(...) 더 웃긴 건 그보다 더한 가수도 있을 뻔했었다는 사실. 바로 즐거운 잔칫날(잔치잔치 벌렸네~ 로 시작하는 그 노래)로 유명한 블루벨스 중창단[1] 이야기다. 2001년 원로가수 고운봉 장례식에 왔던 원로 코미디언 남보원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그래서 이후 조영남은 자신의 장례식 때 불러달라는 곡을 직접 만들었다... 는데 사실 '모란동백'은 조영남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 원래 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 그런데 놀러와에서는 자기가 만들었다고 개드립을 쳤다. 근데 꼭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나 죽으면 이거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임" 으로 들리기는 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최 진사댁 셋째 딸인가?

2 연예계 경력

2.1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

1945년 4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나 1.4 후퇴의 피난행렬에 섞여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했다.[2]

일설에는 서울대학교의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연좌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라 북한 출신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한양대학교의 성악과에 몸을 담았다가 교수의 추천으로 서울대 음대로 이적에 성공, 서울대학교와 한양대학교 양쪽의 음대를 오고가며 성악을 배우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이후부터는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연애때문에 한양대를 자퇴하고 다시 시험을 봐서 서울대에 입학했다."라고 하고 있어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두 개의 학교를 번갈아가며 다닌 데다가 교수의 추천은 있었으나 장학금이나 학비 감면은 고려되지 않았다.

결국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 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3]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4][5]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6]) 이후 TV가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젊은 층은 화개장터밖에 모르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실제로는 번안 스탠다드팝 가수지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유명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대부분 잘 모른다. 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만 5천장을 팔았다고 하니 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

스타가 되어 돈을 벌고 좀 먹고 살 만해진 뒤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2.2 결혼과 전성기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영화배우 윤여정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7]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뉘우치지만,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조차 꺼내지 말라는 여론이 대다수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알아주는 바람둥이였는데, 결혼 생활 때도 그 버릇을 못 고쳤다. 거기다가 돈을 한 푼도 안 벌었던 것도 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 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 조차도 꺼내지 않는다. 강호동도 어쩔 줄 몰라하며 진행했다.[8]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다.[9][10]

지금이야 인식이 제대로 잡혔지만, 저때는 여성 연예인이 이혼하면 마약 복용 후 연기에 복귀할 수 있는 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겼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했다. 아 현정아 내 때는 예수재림이었어!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싫어하는 것.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한다. 온갖 쓰레기짓을 다 하고 살았으니 편했겠지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라며 변명하지만. 결국 한국 역사상 흔치 않은 공개적인 쓰레기다. 잘생긴 사람이 그랬어도 난봉꾼이라 욕먹을 텐데 이런 인간이 그러니 대중들이 더 기분 나빠한다.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0년대 중반에는 MBC 표준FM 16~18시 슬롯 <최유라, 조영남의 지금은 라디오시대>에 발탁이 되어 라디오로도 발을 넓혔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준다. '화개장터' 는 자기 스스로도 쪽팔려서 안 부르는 편. 결국 데뷔곡인 '딜라일라' 를 우려먹고 있다.[11]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다.

한국 연예인 중 손꼽히는 부자이며 재산가이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이상, 실거래가는 백억이 훨씬 넘는다고...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12]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벌었으면 지금의 재산 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저런 재산가가 된 것이다. 특히 재건축을 거듭할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는 있었는데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한다.[13]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확대한 그림이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2의 명작 스캔들이란 프로그램에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하고 있다. 그러나 괜히 조영남이 아닌지라 뒤에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큰 사건을 또 일으키고야 말았다. 애초에 본인보다 훨씬 경력자인 사람에게 맡기면서, 정교한 기획도 아니고 대충 컨셉을 던져주며 조수라고 칭하는 인간이다. 현대미술 트렌드를 감안해도 화가는 좀...

2.3 자유로운 영혼?

실향민이자 이혼남이라 자신을 속박할 것은 없다는 말을 하며 자기만 격식 안 챙기는 격식 없는 방송을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인 <조영남쇼>에선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격식이 없다기 보단 안하무인을 그럴 듯하게 포장[14] 하는 것에 불과하다란 악평을 듣기도 한다. 격식없이 대하는 것과 안하무인을 구별할줄을 모른다. 딱봐도 본인이 무슨 짓거리를 하던지 본인의 행동을 정당화 내지는 변호하기위해 깔고들어가는 변명일뿐. 미치려면 최소한 곱게 미치자.

2011년 9월 21일 방영된 빅 브라더스에서 게스트로 소녀시대가 나왔는데 멤버들을 포옹하는 과정에서 유독 태연만 강하게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는 논란이 퍼지기도 했다. 소덕들 분노 타오르는 소리 들린다. 나이차가 3배(조영남 1945년 생 당시 만 66살, 태연 1989년 생 당시 만 22살)나 나는 후배 여가수를 상대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비판과 오히려 나이 차이가 손녀뻘 정도 되는 만큼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 엇갈렸다. 다만 프로그램 자체가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주목도가 높지 못했는지 이후 별다른 해명이나 추가 논란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2013년에는 섹션TV 연예통신 리포터로 집에 방문한 서유리가 '친분을 통해서 작품을 더 싸게 살 수도 있느냐'라는 말에 여자친구애인이 되면 가능하다라는 말이나 장모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라는 개소리왈왈를 하기도 했다. 포옹하는 사진도 있으니 눈테러 주의. 서유리가 당시 지금에 비하면 낮은 인지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큰 논란이 되지는 않은 듯 하다.[15]

그런가 하면 2014년 4월엔 연예가중계 촬영차 리포터 자격으로 집에 찾아온 레인보우의 멤버 김지숙에게 결혼하자라는 개드립개소리을 작렬하여 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뒤늦게 지숙의 나이를 알고 했던 말을 취소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하긴 자기 한테 하는 짓거리를 보면 뭐... 당시 촬영분을 보면 결혼 얘기에 표정이 굳으면서 슬슬 피하는 김지숙을 볼 수 있다. 막판에 선배호칭을 쓴 김지숙에게 오빠라고 하게 한 건 .[16] 이에 대해 한달 후에 가족의 품격 풀하우스에 출연하여 해명을 했지만, 돌아온 건 그게 그거라는 핀잔 뿐....

언젠가는 전 부인이었던 윤여정을 기회가 되면 만나겠다는 속없는 발언을 했는데 아무래도 자서전과 공연 흥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으로 보여 세간에 빈축을 더하고 있다.

2015년 8월, 불후의 명곡 2에 출연한 마마무에게 엄마가 없다는 뜻이냐라고 물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인성이 아주... 그리고 1년 뒤에는 개그 콘서트에서 모 개그맨모 코너에서 재현하였다.

2007년 7월엔 당시 축구 국가대표 친선경기 중 한 경기였던 우즈벡전에서 애국가자신의 스타일로 불렀었다(...).

2.4 젊은 시절

1970년대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신고산 타령' 을 불렀다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서울의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났을 때 자기 공연에서 신고산 타령 노랫말을 "신고산이 우르르르르르~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로 고쳤으며 기관이 이거를 문제삼아 곤경을 치렀다. 그나마 이것도 아는 법조인 덕분에 묻어갔고 군입대 하는 것으로 겨우 사태가 수습되었다. 군대에 가서는 육군본부에서 복무했으며 이때가 또 골때리는 것이 장군들이 잘 봐줘서 매우 편하게 군생활을 했다고 한다. 당시 참모총장인 서종철 장군(샵 출신의 가수 겸 연기자 서지영의 할아버지. 초대 KBO 총재.)의 총애를 받았다고... 훈련소에서도 훈련소 중대장이 서울대 동기여서 매우 편하게 지냈고 그를 보려고 간부 및 여군들이 행정반을 너무 기웃거려 임무 수행이 안되니 아예 일과시간 전체를 합창실에서 혼자 지내게 했다.

와중 육군본부를 1년에 한 번씩 방문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왔을 때 무대에 불려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대통령이 좋아하는 '황성옛터'를 부르라고 지시를 받고 올라갔다가 긴장한 나머지 가사를 까먹었다고 한다.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가사를 떠올렸으나 결국 실패하고 박대통령이 웃으며 그 노래는 됐다는 신호를 하자 그만했다. 그 다음 실수를 만회해보겠다고 즉석곡을 불렀는데 이 노래가 하필 '각설이 타령(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DJ변. 결국 공연 끝내고 다음날 기상나팔과 함께 달려온 헌병차량에 실려가서 군 당국의 심문을 받는 처지가 되었으며 심문관은 "왜 대통령의 애창곡을 부르는 것을 거부(?)했으며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무슨 의미냐" 고 추궁했다고(대통령이 육본에 1년에 한 번씩 오기 때문에 대통령을 각설이에 빗댄 것 아니냐는 말) 하지만 군법무관으로 있던 조영남의 서울대 동기들이 "걔는 평소 아무 생각이 없는 애에요. 의식화된 놈이 아니라구요. 그냥 재미있게 해보려다 실수한 겁니다"라고 높으신 분들께 변호해준 덕분에 풀려났다고 한다.

또 한번은 청와대에 공연하러 갔는데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순간 윗옷 안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 사실은 연주를 위해 하모니카를 꺼낸 것이었지만 워낙 악기 자체가 금속인 데다 권총과 크기도 얼추 비슷하니 순간적으로 경호원들이 총을 뽑으려 드는 엄청난 분위기가 되어버렸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하모니카를 꺼내 미친 듯이 불었다고 한다(놀러와 세시봉 특집에서 밝힘).

그리고 2003년 국방부에서 진중문고로 명사들의 군생활 경험담을 모은 것을 책으로 엮었는데, 노무현, 이인제, 손학규 등 정치인들과 이상용, 전영록 등 연예계의 거장들 및 기타 학자 및 교수들이 무지무지하게 어렵고 힘든 곳에서 군 생활을 하며 겪었던 일들과 교훈을 이야기하는 판국에 조영남은'나 인맥빨로 매우 꿀 빨았다!' 라며 우쭐대는 모양새를 있는 그대로 실었다.

또한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단국대학교경기도 용인시 죽전으로 이전한 직후 단국대 이전 기념 열린음악회에 출연하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 조영남이 선곡한 곡이 하필이면 '도시여 안녕'(...) DJ변 확인사살. 이것은 도시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열린음악회 선곡표, 당시 영상. 청와대에서도 어그로를 끈 양반인데 까짓 거 대학교 따위야...

2.5 노골적인 친일 행보

이혼을 한 뒤로는 정기적으로 보수진영 쪽의 언론사들에서 칼럼을 쓰고 있다. 평소에는 소탈한 내용의 칼럼을 쓰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사고를 쳐주어 미운 털이 박혔다. 그러다가 가수들의 소득을 더 높여야 한다는 발언을 한 직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유명한 야스쿠니 신사에 그가 관광 코스로 관광을 간 것인데, 음반 유통 쪽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결국 오랜 기간 동안 해온 체험 삶의 현장 MC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몇 년 뒤 대뜸 일본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과 요구를 이제 그만두자는 내용의 책을 썼다. 이 책의 제목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친일선언>... 언론의 거센 탄압과 관심을 받았는데 이것을 기회삼아 자신이 관광삼아 야스쿠니 신사에 다녀왔다는 것을 해명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2ch 혐한들에게 일본으로 귀화하라는 비웃음 섞인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한데... 사실 위에서 언급된 '친일선언' 이란 책은 그 자극적인 제목과는 다르게 단순한 일본 찬양만을 담은 내용은 아니다. 한국인이라도 납득할 만한 일본의 장점은 물론 단점도 잘 짚어놓은 편이라 친일보다는 지일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는데 자극적인 제목 탓에 비난부터 받은 것. 물론 이렇다고 해서 사과 요구를 그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목을 저렇게 선정한 것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일 확률이 높다. 후일 조영남은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쓰면서 '진짜 맞아죽을 뻔한'이라고 서문에 적기도 했다.

그 밖에도 자신이 쓴 '예수의 샅바를 잡다' 는 일어판으로 수출도 되었다. 제목 보면 예수 까는 것 같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이 외에도 자신의 바람기에 대한 비판을 남성들에 대한 풍자로 흘려버리거나 미네르바에 대한 비난 등으로 유명한 이른바 한 건 터뜨리곤 자기 기준 없이 "남이 까니까 나도 깐다" 라는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체크한 뒤에 시간을 들여 반박 자료를 모아 터뜨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조영남 관련 정리 기사.

2.6 입양딸 가슴 발언 논란

잡지 신동아에 실렸던 인터뷰 중에 입양한 딸의 가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해당 인터뷰. 이 인터뷰는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엄청 사정해야 한 번 보여줄까 말깐데 증~ 말 예뻐. 환상적이라구.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다운 걸 브래지어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녀야 하다니... 참 여자들은 이상해. 한참 예쁠 땐 절대 안 보여주다 늙어서는 언제 그랬나 싶게 간수들을 안 하잖아. 이거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 아냐"

결국 몇번을 사정해서 봤다는 것인데, 참고로 이 기사가 실렸을 때 입양한 딸은 15살이었다. 만약 입양딸 조은지가 성적수치심을 느꼈다면 이것은 명백한 성추행이다.

2.7 윤동주 시인의 서시 개사 논란

놀러와에서 윤형주가 서시를 노래로 부르지 말라고 함께 출연한 조영남에게 밝힌바 있다.당시 그 이유까지 설명했는데 그 이유윤형주의 아버지가 서시에 손대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1년 3월 22일 KBS 희망음악회에서 일본도호쿠 대지진 피해민들을 위한 성금 모금을 진행하는데 조영남이 여기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개사한 노래를 불러 비판을 받았다.

워낙 교과서를 통해 익숙한 시이다 보니 작품 자체보다는 원작자의 사망 상황이 더 유명하다. 그렇지만 서시의 내용을 생각해보자면 조영남이 굳이 이 시를 노래로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일본 혐한들의 병크와 관련한 갖은 자료와 정보가 이미 국내 인터넷에 축적될 대로 축적돼온 상태였기 때문에 조영남 본인 자체도 이미 어그로 만땅인 상태에서 제대로 터졌던 것이다.

전황을 보면 조영남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서시를 노래로 만들기 전에 미리 윤형주에게 양해를 구했거나 일방통보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윤형주는 "원래 저런 형이라 내가 바꿀 수 없으니 포기하자"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2.8 망언 및 물의

2015년 신정아가 큐레이터를 맡은 사찰 전시전에서 신정아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고있다. 사실 이미 2007년에 "신정아씨가 학위 없이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문화계에 큰 공을 세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걸 사기라고 하고 큰 공이 아니라 젊은 작가들을 다 죽였다. 민폐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업적. # 끼리끼리 노는구만!

2015년 7월 KBS 신규 예능프로그램인 나를 돌아봐에 출연했는데, 제작발표회에서 돌연 하차 선언을 하고 기자회견장을 나가버렸다.# 파괴신강림. 요약하자면 출연자들 중에서 본인 방송부분 시청률이 꼴지를 할 경우, 자진하차를 하겠다는 농담을 던졌는데 동반 출연자인 김수미가 이미 경고를 많이 받아서 굳이 자진하차 하지 않더라도 자칫하면 퇴출당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해서 열받은 조영남이 나가버린 것이다. 빡종. 이후 이경규가 사정사정해서 둘을 다시 화해시키는데 성공했고, 뭐 그 이후로는 40년 만에 해운대에 같이 놀러가는 등 프로그램에 무사히 출연하고 있었다. 뭐 그나마 이 인간 꼴 안나서 다행이지.

2015년 8월 2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2에 출연한 걸그룹 마마무에게는 그룹 이름의 뜻을 묻더니 "혹시 마마無[17]란 소리에요?"라는 주옥 같은 패드립을 날려 논란이 되고 있다.노장의 패드립은 죽지 않아! 일단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게 사람이 물어볼 질문인가가 문제. 애초에 그룹 이름만 듣고 그런 드립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부터가... 근데 그렇게 따지면 조영남은 고향이 없다 카더라. 그야 실향민이니까...

그리고 2015년 9월 21일 나를 돌아봐 녹화장에서 지각을 했는데, 적반하장으로 애꿎은 송해의 매니저 조우종을 구박해 송해가 화를 냈다고... 결국 송해에게 무릎 꿇고 사죄했다고 한다. 송해 선생님 정의구현. 꼴 좋다 조영남!

10월 16일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는 이번엔 제시에게 1년 전 김지숙에게 했던 헛소리를 또다시 지껄였다.[18] 당연히 이를 접한 이들은 또 다시 조영남을 미친 듯이 깠다. 또한 제시의 생방송 무대인데 가사도 제대로 안 외워오고 직전에 말을 자꾸만 바꾸는 모습에 아무리 본인이 선배라 해도 무례하다며 욕을 들어먹고 있다. 또 바로 옆에 탈의실이 있다는 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서 바지 지퍼를 풀고 윗옷을 다 벗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앞에 제시와 여성 백댄서, 카메라가 있었다는 점이다. 제시의 인성 재평가행. 이 정도면 보살이다.

11월 20일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는, 가면을 쓴 여성에게 '이혼한 남자가 어떻냐'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저 질문은 남녀노소를 떠나서 실례다. 결국 조영남은 김수미와 함께 26회(2016년 1월 22일 방송분)를 끝으로 같이 완전 하차하였다.

2016년 1월에 방영된 나를 돌아봐에서는 이번엔 트와이스쯔위가 방송소감으로 즐거웠어요라는 말을 지겨웠어요라고 잘못말하자 모두가 빵 터지고 잭슨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틈을 타 입 쩍쩍 벌리고 웃으며 끌어안으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 장면의 백미는 이런 조영남의 흑심을 캐치한 경규옹이 당황하는 척 하면서 조영남을 제지하는 모습. 그정도 말렸으면 눈치껏 빠져야 하는데 결국 끝까지 테이블에서 불쑥 기어나와 분위기 타려다가 쯔위가 "즐거웠어요"라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실패. 이때도 즐거웠다는 말을 꺼내기전 조영남을 마주 본 쯔위가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다된 개그컷에 조영남 뿌리기 라는 반응. 손녀뻘인 애한테까지 그러고 싶을까..

2.9 대작 사기 혐의

조영남 대작 사건 항목 참고.

3 음악적 평가

3.1 가창력에 관하여

목소리가 아주 뛰어나다. 1945년 생인 사람이 2016년 현재에도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 박자감각을 드러낸다. 물론 조영남을 넘어서는 사람도 많지만, 조영남 본인이 그렇게까지 관리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편곡이나 애드립을 잘 한다. 음악적 감각이 나쁘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공연 직전에 갑자기 곡을 바꿀 일이 생기자 자기가 평소에 외우는 다른 곡의 악보를 급하게 자기 손으로 써서 밴드에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성악 공부로 인해 코드 진행, 멜로디와 화성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다는 증거다.[19] 방송이나 공연에서 그가 노래부르면서 엇박이나 음을 바꾸는 기교를 부릴 때 자세히 들어보면 완전히 벗어날 듯하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않는다. 이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실제로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많은 가수들이 콘서트 같은 공연에서 기교를 부리다가 조절을 못해서 아예 음정이나 리듬이 3~4단계씩 확 빗나가 버리는 사례도 많다. 반대로 조영남이랑 비슷한 또래의 연예인들이 특별손님의 형식으로 조영남 공연에 출연해 조영남 모창을 위해 고의로 엇박을 넣었다가 마무리까지 박자를 못잡고 날려버리기도 했다. 조영남식 창법이 결코 쉬운 게 아닌 것이다. 조영남이 그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시대를 감안했을 때의 이야기.

사석에서 당대의 유명 가수들 특히 트로트 쪽을 씹고 다닌 것으로 유명한데 가창력에 한해서는 그럴 만하다는 게 중평이다. 특히 스탠더드 팝 시절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손꼽혔고 현미, 조영남은 당시 미군들에게 가장 '미국적인 목소리' 로 선호받던 가수였다. 그의 대표곡 '딜라일라' 등의 번안곡에서도 원곡의 맛을 가장 잘 살렸다. 한국의 셰... 셱스 밤?! 톰 존스라고 불렸고 그에 손색이 없는 수준. 지금도 조영남과 비슷한 나이거나 윗세대인 어르신들은 젊은 시절 조영남을 팝과 클래식에 뛰어났던 가수쪽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미 스탠더드 팝의 시대는 끝났고 성악 특유의 톤을 진정성이 없다거나 작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현재의 풍토이므로 그런 점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본인도 예능용 멘트긴 했지만 자신의 음색이 대다수의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라 너무 세련된, 대중가요와는 맞지 않는 창법이라고 말했다.[20] 근데 사실 그보다는 성악톤을 이용하는 방식 자체가 파워있는 가창을 기본으로 해야 감동이 커지는데 젊을때보다 확실히 힘이 약해진 느낌으로 노래맛이 떨어진 부분이 크다. 원래 젊을때 조영남의 가창력 기반은 기교나 힘조절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고 꾸준히 음을 질러서 울리는 방식이라 감정의 흐름을 관객석까지 온전히 밀어붙이는 힘[21]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성악은 힘으로 밀면서 그 속에 세밀한 기교를 만드는 장르지, 다른 대중음악처럼 고의로 중간중간 기교를 넣어 힘을 확 떨어뜨리면서 한다는 개념이 필요없는 장르이며, 젊은 시절 조영남은 이를 잘 소화해 그야말로 뜨겁고 굵은 노래로 성공한 것이었다. 그것이 성악톤의 스탠다드팝이라는 장르로 큰 인기를 얻은 원천이었다.[22] 혹시 조영남이 나이들면서 운동과 식이조절로 체형을 불리고, 힘을 키워 젊었을 때 파워를 유지하려고 들었으면 모르지만, 딱히 그쪽으로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살았다면 사실상 나이들어 젊을때보다 살이 빠지고 힘이 떨어지는 것은 음악적 재능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당연하다. [23]

3.2 음악성에 관하여

작곡 능력은 평범한 편이다. 길옥윤 등의 당시 작곡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도 있고 본인도 곡은 쓰는데 영 생각만큼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할 정도. 번안곡 가수의 한계점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싱어로만 살기에는 본인의 재능이 아깝고 싱어송라이터를 겸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세시봉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뉴 웨이브' 의 한 축 내지는 아이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김민기, 송창식이라는 뛰어난 송라이터들 때문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

4 그 밖에

이경규몰래카메라에 당한 적이 있는데 마라톤 대회에 나가 그 자신은 죽어라 달렸는데 같이 달린 사람들은 이게 몰래카메라인지 알고 쉬엄쉬엄 달리고 그 혼자만 죽어라 달리고 말았다. 응원하던 다른 연예인들(동기 및 코미디언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조영남 이름을 불렀는데 그 플래카드 앞에는 '힘내라 조영남~!' 이런 격려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 플래카드들을 뒤집자 '놀구 있네', '너 속았어~' 같은 말들로 반전을 보여줬다(물론 시청자들만 보게 만들었다). 경규옹 정의구현.

그리고 결승선을 통과하여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몰래카메라에 속으셨습니다~'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조영남은 숨이 가뻐서 헥헥거리느라 그걸 보지도 못했고 이경규와 다른 사람들이 저거 보라고 한 다음에야 그걸 보더니만 정말로 열 터져서 이경규 등짝을 때리면서 "야... 난 죽어라 달렸어!"라며 열 터지는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몇년뒤 제대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이주일과 함께 나왔는데 둘 다 타이즈를 입고 타이즈 안에 커다란 포탄을 넣고선 사타구니 쪽이 묵직하게 축 늘어진 것을 보여주며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조영남 노래를 코미디 뮤직비디오로 만든 것에서 도시로 온 시골 총각을 연기했는데 서울 와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어느 꼬마아이가 운동화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자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구두약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는다. 그러다가 이를 본 아이 아빠가 화내면서 구두약을 조영남 얼굴에 된통 칠하는 보복을 당하기도 하며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병서 및 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과 코미디 연기도 한 바 있다.

2014년에 당시 26년만에 신곡 통일바보를 발표했다.
  1. 허나 블루벨스 중창단 멤버 중 현양, 김천악, 박일호는 모두 이미 타계하였고 서양훈만 2016년 현재 생존해있다. 돌아간 멤버 장례식 때 정말로 "즐거운 잔칫날"을 불렀다면 추가 바람.
  2. 조영남의 노래 중 '삽다리'라는 노래의 가사에 '내 고향 삽교를 아시나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을 말한다.
  3. 원곡도 미국에서 유명한 명곡에 속한다. 톰 존스가 불렀다.
  4. 딜라일라 이야기가 그리스 시대 이야기라 첫방송에서 그리스 분위기 세트에 조영남 본인이 상체가 많이 노출되는(?) 그리스 토가와 흡사하게 만든 의상을 입고 나온데다가 실제 딜라일라 역할을 한 여자배우까지 동원했다. 196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보수적이던 당시 방송분위기에 상상도 못할 복장으로 거의 오페라 수준으로 공연을 하는데 당시로서는 심한 노출에 칼까지 들고 나와 실제이야기 속 딜라일라는 결국 애인에게 칼 맞아 죽는다. 퍼포먼스하며 노래를 불렀으니 당연히 큰 이슈가 되었다. 다음날 신문에도 그 퍼포먼스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곡이 원래 명곡이며 짧은 편이지만 후렴부 임팩트가 강해서 길지 않게 듣기에 훌륭하므로 퍼포먼스와 조화가 잘 맞아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5. 그리고 당시 그는 순수 성악 스타일로 짧은 시간에 감정을 많이 싣는 칸타타처럼 부른데다가 초기 번안가사도 최근에 고쳐진 가사에 비해 더 강한 편이었다. 과거 초기 방송분량을 들어보면 반주방식, 창법, 가사가 최근보다 훨씬 더 에너지 넘치게 강한 분위기로 불렀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버전은 반주도 가사도 약화시킨 상태에 (조영남의 중년 이후 생긴)'쪼'(버릇)가 추가된 창법이라 곡 전체의 느낌이 많이 순화된 버전이다. 말하자면 그의 데뷔는 대중음악 스타일로 성공한 톰 존스의 원곡과 달리, 성악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파격적이고 수준 높은 실험성이 돋보인 무대였다.
  6. 방송 데뷔 전에도 미군부대 공연에서 돈 잘 받고 잘 나가던 가수였다.
  7. 간단히 말해서, 부흥회다. 1970년대 초는 막 '세계최대의 교회'를 건립했던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포함해서 한국 대형교회들이 총집결해서 초대형 전도대회를 연이어 열었고, 1973년에는 100만 인파를 동원했던 최대의 흥행이었다. 즉, 이걸 절대로 일반 집회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괜히 조영남이 뜬금없이 미국으로 날아가서 신학 학위를 받고 돌아오는게 아닌 것이다.
  8. 과거 윤여정이 딴지일보에서 참석한 인터뷰에서는, 하는 수 없이 조영남을 C로 지칭했다. Cho Yeong Nam 이기 때문에 C로 지칭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이라는 말이 있지만 비속어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9. 젊은 팬들에게 윤여정은 그저 원로 배우지만, 젊을 때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저 때에도, 윤여정과 엮이는 결혼과 이혼 문제가 떠돌아다녔다. 실제로 조영남은 인기가 절정인 배우를 지옥불로 떨어뜨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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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윤여정의 20대 시절의 모습이다. 거기다 최고의 장희빈이라는 타이틀까지 있었던 당대 최고 스타였다. 이런 꽃다운 여자의 인생을 지 기분나쁘다고 구둣발로 밟아놨으니... 여담이지만 지금은 개성이 존중되기 때문에 못생겨도 배우로 대성할 수 있지만 이 당시에는 철저하게 외모로만 뽑는 게 배우였다. 그런 즉 유해진이 이 시대 사람이라면 절대 뜨지 못 했다는 얘기다. 실제로도 유해진은 그런 시대를 막 벗어나기 시작했던 90년대 초중반에 데뷔를 했고, 연극배우를 거쳐 꽤 오랜 기간 동안 무명 생활을 겪었다.
  11. 사실 90년대부터는 딜라일라를 방송에서 부른 적이 없었는데,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20여년 만에 과거 회상을 하다가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다시 주목받게 되어 그 후 수년간 계속 부르게 되었다.
  12. 조영남 본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팔 마음이 없다고 한다. 단 재건축 하던 시기에는 팔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13. 대신 재건축 공사를 하면서 처음 지어질 때 크기보다 두배 이상 공간이 커진 거라 확장하는 추가 비용이 크게 필요해 당시 나이와 체력에 비해 행사와 방송출연을 많이 하느라 몸고생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도 목숨걸고 지켰다고 한다.
  14. 격식없다고 하지만 연하나 하급자에는 해당없이 본인에 대한 격식만은 꼭 있어야 한다. 조영남의 발언이 어이없는 이유 중의 하나.
  15. 그래도 서유리가 SNL 코리아 출연으로 주목받기 시작한게 2012년부터라 당시에 인지도가 많이 낮은 건 아니어서 게임팬들 사이에서는 반감이 심했다.
  16. 보면 알겠지만 조영남은 1945년 생이고 김지숙은 1990년 생이다. 나이 차이만 무려 45살 차이나 나고, 출생 년도도 딱 2배나 차이가 나는데, 이런 사람에게 상식적으로 어떻게 지숙이 미쳤다고 오빠라고 부를 수가 있겠는가?
  17. 마마=엄마, 無=없다. 즉 엄마 없다.
  18. 음악 관련으로 이야기를 하러온 제시에게 '결혼을 했느냐', '남자친구가 있느냐, 없다면 얼마동안 싱글이였냐', '난 너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 등의 발언을 장난스럽게도 아니고 진지하고 집요하게 지껄여 제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고 진짜 전화를 한 건지는 몰라도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제시라고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전혀 재미있지도 않은 드립을 쳤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시의 표정이 압권. 제시도 한 성질 하는데 40년 선배라...
  19. 물론 제시와 합동 공연을 했을 때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장르에다가 빠른 랩이 많이 들어간 곡이 나오는 바람에 연습 중에 리듬이 안 맞아 마찰과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었다.
  20. 이 때문에 이용의 불후의 히트곡 '잊혀진 계절'을 거절했다고 한다.
  21. 영국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서 처음 방송에 등장할 때의 못생기고 뚱뚱하고 어눌한 폴 포츠가 왜 관중들에게 눈물과 감동을 주었는가? 그의 인생역경?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방송에 나간 것일뿐 당시 방청하던 관중들은 그런 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교? 그것도 아니다. 그는 정규 성악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실제로 당시 그의 가창 속 기본기나 기교는 프로 수준은 커녕 아마추어 수준에서도 약간 부족했으며, 어차피 그 관중들은 음악전문가들도 아니었다. 그가 주었던 감동은 그의 가창에서 느껴지던 넘치는 힘이었다. 물론 그 분야 1등이 되려면 당연히 모든걸 다 갖춰야겠지만, 근본적으로 성악쪽은 기교보다는 힘이 훨씬 중요하고 그래서 선천적 재능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악쪽에서 기교가 안 되는 사람이 노력으로 기교를 늘리는 게, 힘이 안 되는 사람이 노력으로 힘을 늘리는 것보다는 더 가능성이 높다.
  22. 나이들고 약간 힘이 떨어졌을 뿐 조영남이 그걸 다 잃지는 않았다. 일단 목소리 자체가 낮아져서, 모자란 힘을 극복하기에는 창법 자체의 가치와 다른 부분도 있다. 성악톤으로 가는 가창은 발성이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전성기 때 발성이 강렬했던 가수여도, 늙으면 기교에 초점을 맞춰간다. 조영남은 원래 성악톤에서 힘을 조금 떨어뜨린 스타일이라서, 요즘 젊은이에게 가창력이 약해 보일 수도 있다.
  23. 당연히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성악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든 원래 힘을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그래도 힘이 조금씩 떨어지기 때문에 클래식 무대 출연 회수를 줄이다가, 더는 가망이 없을 때 정식 성악가수 세계에서 물러나, 전문 교육자가 되거나, 대중음악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조수미처럼 알아주는 레전드도, 40대가 되면서 조금씩 정통 클래식 무대 출연을 줄이고 클래식+대중음악 혼합무대 출연을 늘리고(이건 그녀 본인의 소신과도 관계가 있지만) 있는데, 아직 정통클래식 무대도 서고 있어 현역 은퇴는 아니기 때문에 50대의 나이에도 매일같이 근력 운동이나 유산소 운동을 하여 최대한 힘을 유지하려고 꾸준히 노력한다. 그만큼 성악은 힘이 중요하다. 사실 중년~노년기에 특별한 체력관리 없이는 아무리 천재적 기교와 음악 재능이 있어도 한 번의 정통 클래식 무대조차 소화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