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

趙壹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문장가. 자는 원숙(元叔).

한양 서현 사람으로 몸이 장대해 보기에 세상들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자신의 재능만 믿고 오만불손해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 그 배척을 변명하는 글을 지었다고 했다. 그 후 여러 번 죽을 죄를 지었다가 죽을 뻔 했지만 친구들의 구제로 죽음을 면했으며, 궁조부를 지어 보답했다.

영제 때 군의 상계리로 천거되었다가 낙양으로 갔는데, 계리들이 사도 원봉에게 뇌물을 주면서 절할 때 혼자만 길게 읍만 했다. 원봉이 이상해서 묻자 역이기한고제를 보고도 길게 읍만 했는데 이게 왜 이상하냐고 했으며, 원봉이 그의 손을 잡고 상석에 앉혔다고 한다.

하남윤 양척이 원봉과 함께 그를 칭찬하면서 천거하자 사대부들은 그의 풍채를 흠모했으며, 주군에서 다투어 예의를 갖춰 불렀는데, 관청에서 열 번이나 불렀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 원봉이 상을 잘 보는 사람에게 조일의 상을 보게 했는데, 벼슬이 군리에 머무른다고 하자 그 말대로 조일은 군리에만 머물렀다.

현존하는 것 중에서만 최초로 서법에 대한 의론인 비초서를 쓴 사람으로 비초서를 통해 장지의 서법인 초서의 장초를 비판하면서 장지의 제자 강후, 양선 등이 지나치게 추앙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의 작품으로 자세질사부, 궁조부 등이 있으며, 그에 대한 고사성어로는 세구구반이라는 말이 있다.

세설신어에서 양척을 찾아가 그와 교류하게 된 일화가 있다.

하남윤 양척을 찾아갔다가 만날 수 없었지만 공경 중에서 양척이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의탁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해 날마다 가서 그 집의 대문에서 기다렸는데, 이미 뵙기를 청한다고 통지했지만 양척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조일은 곧장 들어가서 양척에게 다가서면서 "삼가 서주에서 오랫동안 공의 고상한 풍모를 우러르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만났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니 이 운명을 어찌할까!"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곡을 했으며, 문하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달려 들어와 옆에 가득 들어섰다.

양척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일어나 그를 맞이해 얘기를 나눴으며, 다음날 아침은 양척은 거마를 크게 거느리고 조일을 찾아갔다. 당시 여러 계리들은 대부분 거마와 장막을 성대하게 치장했지만 조일은 낡은 수레에 짚 가리개를 한 채 그 옆에서 노숙했으며, 조일은 양척을 맞이해 수레 아레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저녁이 되어 떠나갈 때 양척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좋은 옥돌을 쪼개보지 않으면 반드시 피눈물을 흘리며 설명하는 자가 생기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으며, 양척이 사공 원봉과 조일을 칭찬하고 천거하자 그 명성이 도성에 진동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