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S. 패튼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
George Smith Patton Jr
생애1885년 11월 11일 ~ 1945년 12월 21일
출생지미국캘리포니아샌게이브리얼
사망지독일하이델베르크
자녀조지 패튼 4세(1923년 12월 24일 ~ 2004년 6월 27일)
친척존 K. 워터스(1906년 12월 20일 ~ 1989년 1월 9일)
복무미국육군
복무 기간1909~1945
최종 계급대장
근무제15기병연대
제8기병연대
제13기병연대
지휘제304전차여단
제5기병연대
제2기갑사단
제2기갑여단
제1기갑군단
제2군단
제7군
제3군
제15군
주요 참전멕시코 혁명
제1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
서훈 내역수훈 십자장
은성 훈장
훈공장
조지 패튼 훈장내역정리(영어)

1 개요

싸움닭

'George Smith Patton III.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미치광이미군 장군. 미군 최초의 전차 부대 지휘관이자, 30년간 미군 주력 전차의 자리를 차지했던 M46/47/48/60 패튼 시리즈의 네이밍 모델로서도 유명하다.

2 그의 일생

2.1 출생과 성장

"생도들 차렷! 당황하지 마라. 지진은 곧 끝난다."

― 사관생도 시절,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당황해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생도들 앞에 제복까지 차려입고 나타나서 한 말

패튼은 남부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로버트 E. 리나 스톤월 잭슨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남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회색 유령' 존 싱글톤 모스비와 친하게 지냈다.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컵 데버스, 로버트 에이첼버거, 윌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퍼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상급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흔히들 패튼 하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활화산 같은 성격의 사고뭉치 지휘관' 하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사실 그 정도까진 아니고, 성질드러운 롬멜 쯤 된다. 아니, 그게 그건가?

오죽하면 별명싸움닭. 여우라 불리는 롬멜과 비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사고뭉치 같은게 별명 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게 불리는 별명이다. 전쟁광, 또라이

어쨌든 이 성깔 때문에 1915년 졸업생인 오마 브래들리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보다 늦게 진급했으며, 후배인 이 2명은 자신들의 선배가 사고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2.2 멕시코 내전과 1차 대전에서의 활약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에 있었군."

― 존 퍼싱. 패튼이 멕시코 내전에서 산적(Bandito)두목(반란군 장군)을 본네트에 매달고 개선한 걸 보고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퍼싱(M26 퍼싱의 네이밍 모델이 된 장군)의 부관으로 참전,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개선하는 기행활약을 벌여 일약 유명해졌다. 아니, 뭐 멧돼지 사냥했나?? 일단 그에게 걸린 '적군'은 멧돼지와 동급이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했을 때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서 죽기 일보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러온 기라성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자 죽어서 그들을 대하는게 더 무서워져서(...)어째 데자뷰가... 용기를 내어 "또 한명의 패튼이 전사할 시간이다!"라고 외치며 돌격했고, 패튼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몸소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께 해당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된다. 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된다.

2.3 양차 대전 사이의 행적

그러나 1차대전 종전 후 그를 늘 높이 평가해주던 퍼싱 장군이 퇴역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군내에서는 버린 자식 취급받았다. 불같은 성격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안하무인적 태도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포기한 상태라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전쟁광이란 타고난 성격이 전간기의 군축 분위기와는 상극인지라... 거기에 여러차례 음주사고에 불륜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섭식장애 증세까지 보이면서 (아돌프 히틀러처럼 단 것에 광분했다고 한다) 상층부의 골치를 썩혔다.

게다가 사생활에 있어서도 취미로 승마나 요트를 즐길 정도로 귀족 취향이었는데, 문제는 세계 대공황 시기에도 그 짓을 하고 다녔다. 그쯤 되자 상관이든 동료들이든 부하들이든 누구나 그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얼마나 승마를 좋아했느냐 하면, 전투복 하의 대신에 승마복 바지를 입고, 손에도 승마용 채찍을 들고 다녔을 정도. 정작 자기는 부하들이 복장규정 안 지키면 갈궈댔으면서

1931년 일명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 당시 상당한 오점을 남겼다. 대공황시기 연금 지급을 요구하는 제대군인 시위대에 전차와 보병을 착검돌격 일본군인가? 흠좀무시켜서 무려 사상자 100여명이 나온 것(...).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대선에서 참패했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예편 후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떠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년까지도 이 사건에 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2.4 2차 대전에서의 활약

2.4.1 아프리카 전선

"이기지 못하면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첫 번째 전투를 벌이기 직전에 부하들에게 한 말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2기갑사단장으로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한다.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 미군이 독일-이탈리아 연합군에게 치욕적인 대패를 당하며 영국군에게서 "연합군의 이탈리아군"[1] 이란 조롱까지 받게되자 열불이 뻗칠대로 뻗친 미군 지휘부는 평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작자지만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광전사인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2군단의 지휘를 맡긴다. 패튼은 오합지졸들을 무지하게 갈궈서 카세린의 치욕에서 깨어나게 해준다. 그는 부하들을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화시켜 전사로서 바꿔내는데 성공하여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반격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들을 다수 이뤄낸다. 그러나 그는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2]

2.4.2 이탈리아 전선

이후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전에 제7군 사령관으로 참가한다. 몽고메리의 농간으로 조공으로 돌려지나, 오히려 그의 지휘부대가 영국군을 따돌리고 거점도시 멧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쳐 주객이 전도되게 만든다. 이후 몽고메리에게 라이벌로 찍힌다. 이 시기 독일군 내에도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특히 오합지졸인줄 알았던 미군을 영국군 이상의 강적으로 변화시키고 자기들만큼이나 기갑전, 속도전에 능한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덕분에 연합군 첩보부는 패튼이 지휘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짜 부대를 조직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독일 정보부를 속여 먹는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 당일에도 "영국내 패튼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노르망디는 페이크다!"라고 독일군이 결론내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술하는 야전병원에서 부하를 구타하는 등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보직 해임, 한직으로 쫓겨난다.

2.4.3 서부전선

"그럼 우리가 저 다리(레마겐의 철교)를 폭파해버리기라도 해야겠군."

― 레마겐의 철교를 주워먹은 후, 라인 강 도하작전을 망친다고 영국군이 징징대자 한 말

이후 유럽 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내 패주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진격하며 유럽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영화에도 잘 나와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마냥 가는 곳마다 독일군을 개발살내면서 질주했는데, 보급부대가 못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게 아니라 너네가 느린 것'이라고 취급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를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나가고 뒤따라오는 보병과 포병이 아까의 그 적군과 싸운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 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튼의 기갑부대가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소위 독일군의 전격전 방식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독일식 전격전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독일 기갑부대는 적을 회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적을 찾아다니면서 후들겨 팼다(…). 전격전의 '현재 정설'에 따르면 독일 전격전은 후티어 전술에 기갑 붙여둔 것의 발전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영미 군사학계의 풀러의 마비전 이론을 발전시킨 전격전 이론을 실천한 건 바로 패튼이었다.

한편 패튼은 야전군사령관이면서도 끊임 없이 전선시찰을 나가고[3],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올라오는 정보보고는 꼼꼼하게 살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닥돌하는 닥돌 바보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헛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시찰을 한 것에 가깝다. 일례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때도 오히려 오마 브래들리보다 독일군의 이상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원수를 몰아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와는 고양이 사이였다고 한다.[4] 어느 작전에서 몽고메리가 "패튼이 어느 독일군 장교의 군대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그 독일놈 모가지를 뽑아서 몽고메리 X구멍에 쑤셔버릴테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흠좀무.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이런 시나리오가 펼쳐졌다고 한다.

1.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2. 전략을 토의한다.
3.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가 신경전을 벌인다.
4. 곧 두 사람끼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닥버로우.
5. 회의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 원수가 뒷머리를 부여잡는다.
6. 브래들리 장군이 차를 타고가서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를 달랜다.
7. ?????
8. PROFIT!
1. 다시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이하 반복.

다만 중증 기동전 중독자인 만큼 요새나 시가지를 중심으로 버티는 적을 소탕하는데는 영 잼병이라 1944년 가을~겨울 사이 이렇다할 전과를 세우지 못한다[5].

그러다가 1944년 겨울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이해서 반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단 48시간만에 서쪽으로 진격중이던 미 제3군예하 3개사단으로 구성단 1개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동을 보였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 패튼이 앞서 설명한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인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린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하워간에 라인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돌프교를 장악해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군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못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다. 이건 라인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사진도 찍었다.[6]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떨던 몽고메리는 멍때려야 했다.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봐 노심초사했고...

종전 즈음하여 자기 사위가 포로로 잡혀있던 수용소에 부하를 보내 해방시키려 하다가 독일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좌절하는 사건이 일어나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 와중에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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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진급 후의 사진. 철모에 달린 계급장을 보면 대장용 계급장이 아니라 기존의 중장 계급장 위에 별 하나를 덧붙여 별 네개로 만들었다!

2.5 전쟁 이후의 행적과 최후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을 두들겨 부술 차례였지만 일본이 원자탄과 소련군 세례를 맞고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무뎌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낸 듯하다. 나는 평화가 싫어요!

전직 나치 당원을 정부 요직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 비난이 빗발치자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 나치 당원이다. 그러면 정부 일을 까막눈들한테 맡기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군정 사령관으로서는 적절치 못한 처사지만, 당장 실무를 맡길만한 사람은 일을 계속 하던 사람들 뿐이니 어쩔 수 없기는 하다. 문제는 비슷한 시간에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맥아더 원수는 그때까지의 모든 일본 최고 지도자가 그랬듯이 덴노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다 해먹었다. 한마디로 정치적 수완은 영 시원찮다는 증거.[7]

그러다 결국 교통사고로 그가 탄 지프가 트럭에 치이면서 사망하고 만다. 사고가 난 날은 미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인 12월 9일. 운전수와 동승자들은 찰과상만 입었지만 패튼은 뒤로 튕겨나가[8] 머리가 뒷유리창과 부딫힌 탓에 목뼈가 부러졌고, 12일 뒤 하이델베르크 군병원에서 죽고 만다. 사인은 색전증. 전쟁이 끝난지 고작 7달 만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안한 것을 싫어하고 평안하지 않은 것, 즉 전쟁을 미친듯이 좋아했고 그 전쟁에서 미친듯이 싸워 승리했던 자의 최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워낙에 유별난 삶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죽음에 관해 일종의 음모론 같은 게 주장되기도 했고 암살설을 바탕으로 한 허접스런 B급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78년작 Brass Target(한국판 제목: 암호명 S 비밀지령).[9] 이후 패튼이 살아서 6.25에도 참전했다면 남북통일이 일찍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일부 썰이 나오기도 한다.

패튼이 죽고 그의 유품을 치울때 패튼이 애지중지하게 키우던 불테리어 수컷이 슬퍼하며 그의 유품 곁에 드러누워 먹지도 않고 오랫동안 있었는데 "사람에게는 욕먹어도 기르던 개에게는 자상했다."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3 패튼의 연설

"여러분, 나는 제군들과 함께 영광스러운 진군을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다."

이런 식으로 점잖게 연설을 시작하고서...

"이제 제군들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들어가면 한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뒤 난롯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뭐 했어요?' 라고 물어보면 헛기침이나 하고 "응, 할아버지는 루이지애나에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지, 제군들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처다보며 말해주어라. '아가, 니 할애비는 위대한 3군과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새끼'와 함께 용감하게 진군했단다!

Then there's one thing you men will be able to say when this war is over and you get back home. Thirty years from now when you're sitting by your fireside with your grandson on your knee and he asks,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orld War Two?' You won't have to cough and say, 'Well, your granddaddy shoveled shit in Louisiana.' No sir, you can look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Son, your granddaddy rode with the great Third Army and 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

이렇게 과격한 내용으로 끝맺었다고 한다. 패튼 장군과 함께 싸웠던 미군 참전용사들은 연설의 다른 부분은 다 잊었어도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새끼라는 대목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끼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냥 쏴 죽이지 않을것이다. 산채로 내장을 빼서 우리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기름칠을 할 것이다."

이런 연설도 했다. BADASS

4 평가

난폭한 맹장

호평과 악평이 교차하지만, 어쨌든 그가 명장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미국스러운 장군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호사가는 시대를 잘못 택해 태어난 사람이라고도 한다. 차라리 19세기 프로이센 기병 장군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거라고. 뮈라와 드림 매치가 펼쳐질 뻔했군. 거만한 천재 뮈라와 정신나간 명장 패튼...

미 육군은 M4의 후속 주력 전차 M46과, 개량형인 M47, M48, M60에 그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공로를 기렸다.

워낙 유별난 지라 히틀러조차 그가 참전하기 전에 성격 등을 알고 있었다고. "카우보이 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5 그 외 이야깃거리

부하들로부터는 두터운 인망(?)을 얻었는데,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보면 본격 타 부대에서는 존경을, 직속 부하들에게는 혐오감을 얻은 상관. "꼴도 보기 싫은 개자식이지만 우리를 전쟁에서 이기게 한다"는 게 총평.

그는 전투를 피하는(PTSD나 전쟁공포증 환자조차도 단순히 겁쟁이로 취급했다) 부하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면서 "내 부대에 너같은 겁쟁이는 필요없다! 꺼져버려!"하면서 폭언을 퍼부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용감하게 싸워서 큰 전공을 올린 부하들에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줬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다혈질이면서 용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취향의 인물이었던 셈. 겁쟁이를 경멸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아낌없이 칭찬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부하들을 쉬지않고 독려한 것도 그가 기갑부대를 현대판 기병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튼의 성향은 훗날 미디어에도 반영되어, 조지 C. 스콧 주연의 전기 영화인 <패튼>(국내명 :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는 독일군 정보장교인 슈타이거 소령이 자신의 상관인 요들 상급대장에게 패튼을 평가하면서 "그는 전쟁 역사가이며, 현대에 환생한 기사입니다"라 말했다.

특히 그는 전투 중에 부상당한 부하들이 입원한 야전병원에 직접 병문안을 가서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 다른 부대의 병사들까지 일일이 살펴보면서 격려했다고 한다. 군 사령관이 직접 말이다. 군의관헌병이야 죽어나겠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비슷한 성향의 부하들은 이 괴짜 사령관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미 3군은 거의 무적의 부대가 되다시피 해서 독일군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몇 안되는 연합군 지상부대가 되었다사실 뒤에 있는 아이젠하워가 더 무서운 것은 함정(또 하나는 김영옥 대위가 소속된 100대대). 또한 패튼은 아이젠하워와 더불어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차별하지 않아 몇 안돼는 군 내 인종 평등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은 끝끝내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바로 패튼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병크, 부상병 구타사건이었다.[10] 패튼이 부하들의 병문안을 위해 한 야전병원을 찾아 사병들의 침대를 일일이 돌던 그의 눈에 붕대도 감지 않았고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몰골의 병사가 침상에 버젓이 누워있던 장면이 들어온 것이다. 그 순간 격분한 패튼은 그 병사를 군화발로 걷어차고, 군의관을 불러서 "저놈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내가 직접 영창에 쳐넣어주겠어!"하고 소리친 후 곧장 부대로 돌아가버렸다. 병사는 바로 전쟁공포증을 앓고 있던 병사였고 그 사실이 곧 연합군 총사령부로 전해지면서 아이젠하워 원수는 신뢰하는 부하이자, 아끼던 육사 선배인 패튼의 구명을 위해 모든 종군기자들에게 정보 관제를 신신당부했고 패튼에게도 그 병사에게 직접 사과할 것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기자들도 그저 실수려니… 하고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진다

  • 1차대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나 PTSD란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었다. 지휘관들은 그런 증세를 보이는 이들을 그저 겁쟁이로 취급할 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한 뒤로 군의관들은 거듭된 전투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지고 기계처럼 변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악했으며, 사방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로 미쳐버린 군인들이 속출하면서 비로소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전장공포는 1차 세계대전 때부터 연합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개전전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아 비숙련 징집병의 비율이 높았던 영국군이 이 문제에 대해 민감했다. 그에 비해 미군은 당시의 영국군과 같은 처지임에도 상대적으로 참전 기간이 짧아 직접적으로 PTSD 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다만 동맹국인 영국의 전훈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엔 영국군이 겁쟁이라서 저런 놈들이 많이 나온다고 떠벌였을 정도.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시점이 되면 패튼 같은 행동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금기시될 정도까지 인식이 바뀌긴 했다.

이번의 피해자는 시칠리아 전투 중에 질척질척한 참호 속에 처박혀있다가 참호족염을 얻어 입원 중인 병사였다. 그리고 이 병사는 자신의 앞을 다시 지나가던 패튼을 향해 "저는 1주일 넘게 전투화를 신은 채로 흙탕물로 가득찬 참호 속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장군님." 하고서 그를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대꾸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에도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은 패튼이 사과했지만 이미 그 소식은 미국 전역에 퍼진 뒤였고, 거기에 기자들이 이전의 폭행사건도 모두 폭로해버렸다. 당연히 여론의 반응은 "이 미친놈아!"였다. 곧 전국에서 패튼을 맹렬히 비난하는 기사가 쓰여지고 그를 퇴역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또다시 아이젠하워가 나서서 간신히 뒷수습을 했지만 "이제 조지가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나는 그를 파면시킬 거야. 나도 언제까지나 뒷수습을 해줄 순 없단 말이야." 하고 부관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져버렸다.

  • 그런데 이 일련의 사건들은 잘 생각해 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때 병사들의 인권을 정말로 잘 지키는 나라였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당장 2000년대 초반 한국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PTSD 환자 사건은 아무런 이슈도 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참호족염 환자 사건은 감히 병사가 장군에게 대들었다며 그 병사가 오히려 까였을 것이 영창눈에 뻔하게 보인다. 그런게 이슈라도 된게 2010년 넘어서라는 걸 생각하면 미군의 병영문화가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작전에서 한 번 아이젠하워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작전 당시에 예정되었던 두 번째 야간 강하작전이 해안의 대공포 사수와 해상의 지원함대에게 제대로 통보가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팀킬사건이 벌어진 일 때문이다. 원래 해당 공수작전에 따라 2,300명이 강하할 예정이었는데, 이 팀킬로 전사한 사람만 400명, 중경상자까지 포함하면 답이 안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강하작전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대공사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패튼이 강하작전에 참여할 82공수사단과 수송기 조종사들에 통보하기를 "만약 지상이나 함정이 포격을 하거든 자신들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한 것. 절대 귀관들을 격추시키려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어느정도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하여 "책임소재를 파악하고 귀관이 직접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귀관의 목이 날아갈 것!"이란 투의 전보를 보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미군의 삽질에는 아이젠하워의 책임이 가장 큰지라 그냥 넘어갔다.

사실 보직 해임 시기 아이젠하워는 그를 본국에 송환하려 했으나 조지 마셜 참모총장이 이를 반대, 결국 1년 가까이를 휘하부대 하나없는 장군으로 허송해야 했다. 그 사이 자기 부관이었던 브래들리는 중장 진급하여 나중에는 상관으로 모시는 사태마저 벌어진다(…).

나치당을 미국 민주-공화당 정도로 비유하고 나치 인사들을 관대히 처리해 물의를 일으켰고, 오히려 연합국인 공산주의자인 러시아인을 매우 싫어했다.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석했을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IS-3같은 소련 중(重)전차의 강력함과 전차포의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자, "제 부하가 그렇게 먼 거리에서 적을 쏘는 비겁한 짓을 한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베를린에 입성하고 나선 우린 괜찮은 민족 하나를 쓸어버리고 그 자리를 소련 야만인들로 채워넣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근대 5종 경기 선수로 참가해 300m 자유형 수영에서는 37명 중 6위를, 에페 펜싱에서는 29명 중 3위를, 크로스컨트리 장애물 경마에서는 퍼포먼스는 완벽했으니 시간이 약간 뒤쳐져서 3위를, 4킬로 크로스컨트리 경주에서는 골을 45m 남겨두고 걸어들어올 정도로 체력이 소진돼 15명 중 3위를 차지했다. 권총 사격에서는 뛰어난 사격실력으로 소문났음에도 불구하고 32명중 20위를 차지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선수들이 사격용 권총으로 .22 구경을 사용할때 혼자서 군의 제식 구경인 .38 구경을 사용해서 발생한 문제였다. 사격을 할수록 먼젓번에 맞은 구멍에 겹쳐 맞으면서 사격지에 탄착 구멍이 확대되다보니, 나중에 쏜 탄이 벌어진 구멍을 흔적없이 통과해버린 것이다. 심판은 표적지에서 탄착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해서 완전히 빗나갔다고 판정했다.

그외에 검술에도 꽤나 능통해서 세이버 검술서를 저술하였다. 검술 스타일이 본인의 성격을 반영해서인지 베기나 흘리기 같은 기술 버리고 오직 직선적인 찌르기만 존재한다. 그가 디자인한 세이버도 거의 찌르기 위주로 만들어진 직도 세이버이다. 이미 올림픽 이후 유럽 여행을 하다가 프랑스 기병학교의 검술 교관과 교류를 가졌고, 1913년에는 아예 군의 허락을 받아 프랑스에 가서 검술을 배웠다. 그가 디자인한 세이버가 미군 기병대의 제식 세이버로 채택되기도 했다. 중세에 태어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인물.

도널드 트럼프가 2차대전 미국의 장군 조지 패튼과 외모가 닮았다는 말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지 패튼은 생전에 '환생','윤회'(reincarnation)에 대해 말하곤 했다는데 공교롭게도 패튼이 교통사고로 사망한것은 1945년이고. 트럼프가 태어난해는 1946년이기도 하다. 괄괄하고 공격적인꼴통 성격도 둘이 비슷하다. 그럼 설마 트럼프도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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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패튼과 연관된 인물들

한국전쟁에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던 낙동강의 위기를 극복하고, 1.4후퇴 직후까지 UN군을 지휘한 월튼 워커 장군은 2차대전중 제20군단장으로서 그의 부하였다. 패튼 만큼이나 저돌적 지휘 스타일로 유명했던 그가 옛 상관과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역사의 우연. 이 후 패튼과 같이 그의 이름도 전차에 붙여졌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와 클레이턴 에이브럼스는 둘 다 대전 중 패튼 휘하에서 대대장에서 연대장 시절을 보냈다.

그와 붕어빵처럼 외모가 닮은 아들 조지 패튼 4세도 군문에 들어 갔는데 한국전에선 전차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는 11기갑수색연대장으로 싸웠고 나중에는 소장으로 전역한다. 베트남에서 3년동안 싸울 정도로 용맹한 군인이었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온후한 성격이었다.

7 어록

병사의 눈은 예지로 빛나야하며 완전히 전투에 열광케 하여 왕성한 기백과 공격정신으로 승리의 길로 전진토록 하라.
공격해오는 적 전차에 성난 늑대같이 달려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공포와는 타협하지 말라, 아니 상의조차도 하지 말라.
공격하라, 공격하라, 피로가 극심할 때까지 공격하라. 피로가 극에 도달해서 쓰러졌을 때 바로 그때 다시 공격하라.
휘발유가 있는 한은 어디든 간다.
내 부하들은 벨트를 씹어먹을 수 있지만, 탱크는 기름이 필요하단 말이다.
두려움은 1분간 참으면, 용기가 된다.
나라를 위해 죽지마라, 적들이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어라. [11]
대담, 대담, 항상 대담.
전쟁에 비하자면 인간이 이룩한 다른 것은 하찮은 것이다. 나는 전쟁이 좋아 견딜수가 없다.
내게는 전쟁보다도 평화가 지옥이다.
빌어먹을 조지 패튼이라는 개새끼[12]
불쌍한 거지새끼들(...)
우리는 이 지옥을 끝낼것이다. 신속하게 이 염병할 찌꺼기들을 청소하고나서, 더 빠르게 저 피똥싸는 원숭이들을 끝장내고 놈들의 둥지를 청소해야 한다. 염병할 해병대놈들이 모든 공을 독차지하기전에 말이야
날 앞장서든가, 날 따르던가, 아니면 내앞에서 꺼지든가.
상관에 대한 충의는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부하에 대한 충의다. 위대한 사람들에게 빈번히 발견되는 특성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남을수 있게 해준 것이다.
신은 내 적들에게 자비를 배풀것이다. 왜냐면 난 그렇지 않을 것이니까.
용기는 1분을 더 버티게 하는 두려움이다.
용기는 잠시동안 공포를 억누르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저 버러지 놈들의 목을 따기 위해 가는게 아니야 우리는 저놈들의 창자를 뜯어서 전차들이 잘 굴러갈 수있게 윤활유로 쓸거야
전쟁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곳이다.
항구적인 평화는 쓸데없는 꿈이다.
등이 있다. 그답다면 그다운 말들이다.

8 대중매체에서의 패튼

  • 여러 번 영화화될 뻔 했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부인의 타계 후 1970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명작 패튼 대전차군단이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언급이 되는데(책), 중대원 한명이 부상으로 목에 구멍을 내 숨을 쉬기 때문에 넥타이를 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열식에서도 넥타이를 매지 못하고 참가했는데, 패튼이 이걸 보고 욕을 퍼부은 모양(…). 그 병사는 당당히 앞섶을 풀었고, 패튼은 머쓱한 표정으로 지나갔다는 이야기.[13]
  •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의 캠페인 모드에서 사자왕 리처드, 이순신 장군과 함꼐 3대 미션 주인공으로 나온다. 북아프리카 전선부터 독일 패망까지 주요 전투들을 패튼의 시점으로 재현했는데, 패튼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주요 전투들을 잘 살렸다.
  • 알파캣이 그린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 등장한다. 괄괄한 성격으로 부하들을 몰아붙여 독일군을 분쇄하는 용장전쟁광으로 묘사된다.
  • 일본의 웹 소설 별이 펄럭일 때에도 등장한다. 작품 내에선 해전이 위주로 다뤄지기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는 않지만 첫 등장에서부터 승리 직후 포로가 된 겁쟁이 적장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등 상당한 또라이 기질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묘사되는 건 아니고 순식간에 적 부대의 허리를 끊거나 몇겹으로 된 방어선을 뚫어내고 수십 킬로미터를 순식간에 돌파하는 등 능력도 상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작중 판타지 국가들의 시민수준이 중세~19세기 즈음이라 경외의 시선과 찬양을 받고 있다. 그래, 난 이런 전장을 원했어
  • 삼국지장비와 싱크로율이 높다. 급한 성미, 불같은 성격, 후임 갈구기(...) 등. 용맹하고 잘싸운 부하에게는 잘해줬다는 면도 비슷하다. 차이라면, 장비는 관우의 죽음이 그의 급한 성미를 더 심하게 해버린 나머지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정도.]
  1. 사실 이탈리아군에게도 조롱을 받을 지경이었다. 이 당시의 이탈리아군은 롬멜의 훈련과 영국군과의 실전을 거치면서 나름 숙련도가 쌓인 병사들이었고 아프리카 전선에서 그래뵈도 숫적으로 주력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군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아리에테 사단이 성능이 열등한 M14/41로 셔먼 전차 22대 등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2. 이 때, 롬멜은 아프리카 군단원들이 다들 앓고 있던 지병인 이질과 위장병이 악화되어 본국에 가있었다. 군의관이 병가를 내라고 거듭거듭 말하다 못해서 강제로 병가를 보내버렸다고. 여담으로 이 원인은 부실한 위생관리에 있었다고 한다.
  3. 애용하던 전용 지휘 차량은 전선 근처를 돌아다니기에 일단은 방탄판등을 덧붙였다. 한편 만약 무장이 없다면 꼭 자기가 직접 쏠 수 있는 자리에 기관총을 개조해서 다는 것은 덤.. 근데 조용히 적을 피해 다니긴 글렀던 것이 항상 큼지막하게 빨간/흰색 조합 장성판을 붙이고 다녔다.
  4. 사실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 어찌 보면 동족 혐오(...).그래도 입에 쌍욕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는 게 라이벌 P씨보단 나아보이기도...
  5. 그런데 이러한 요새지구 공략의 경우 속전속결로 결판나는 경우는 드물고 수주 혹은 수개월 간의 준비를 거친 공성전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지라 불과 2~3개월 동안 요새지구인 메츠에 고착되었다고 해서 요새에 대해 무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6. 이 상황은 1969년 영화 레마겐의 철교의 후반부에 잘 나와있다.
  7. 다만, 이건 당시 맥아더는 한 전역의 집단군사령관 직을 맡을 수 있는 원수였는 데 반해서, 패튼은 기껏해야 야전군사령관대장이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맥아더처럼 본국이 뭐라하건 간에 다 씹으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밀어붙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는 말. 육군 중장에 군단장밖에 안되는데다 정치행정 분야에 졸 무지했던 존 하지 장군만 쓸데없이 운좋았다.
  8. 1945년에는 아직 차량에 안전벨트를 장착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9. 하지만 상기했다시피 그는 정치적 수완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맥아더나 아이젠하워 처럼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냥저냥 전쟁영웅으로 대우만 받으며 살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굳이 그를 암살할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B급 영화설정...
  10. 이와 정반대의 인물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이마무라 히토시와 졸장이자 삼간사우의 일원으로 유명한 카와베 마사카즈. 이 사람들은 부하들을 굉장히 사랑했고 이마무라가 전정공포증을 앓고 있던 병사를 보더니(아래의 패튼이 본것처럼 눈에 붕대도 감지 않았고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몰골의 병사가 침상에 버젓이 누워있었다) "나도 자네처럼 그런 고통을 겪었던 일도 있었지."라며 그 병사를 위로해주었다.
  11. 패튼이 연설을 한 번만 한 게 아니라서 바리에이션이 다양한데, 이 대목은 미육군 제6사단을 상대로 할 때 한 말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단순하게 요약한 문장이기도 하며, 동시에 동시대 일본군의 카미카제가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도 같이 깔수있는 연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2. 패튼의 연설을 들은 그당시 병사들이 이대목만큼은 기억한다는거 보면 화끈한 명언 맞는것 같다(...).
  13. 얼 헤일 병장(Sgt. Earl Hale)에 관한 일화인데 TV판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패튼이 바스토뉴에 고립되어 있던 101공수사단을 구출한 것에 대해 자막해설로, 그리고 조 토이와 윈터스가 우리 101공수에겐 그딴 도움 전혀 필요없었다고 까버리는 장면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