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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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수와 딸 조윤희

1 소개

프로야구 전 감독대행. 유독 감독대행이라는 말을 강조한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의 야구 인생, 특히 지도자 인생을 보면 그렇다.

2 선수시절

1949년생으로 1967년과 1968년 경북고가 전국대회에서 무려 다섯 번의 우승을 차지할 때, 그 주역이었다.[1] 함께 우승을 일군 선수가 임신근이었고, 당시 감독이 서영무였다. 그리고 3년 뒤의 남우식 시대까지 합쳐서 소위 경북고의 1차 전성기를 일군 주역이었다.[2] 고교야구 시절, 고교야구 역사상 최초의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이었다. 홈런을 친 대회가 1968년 청룡기 경남고와의 4강전이었으니, 팀 우승에 정말 제대로 기여한 셈. 졸업 후에는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한일은행에서 밀려난 후에는 새로 생긴 실업 팀 롯데 자이언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3 지도자감독대행 시절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광주일고 감독으로 재직했다. 그러다가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새롭게 창단한 해태 타이거즈의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먼저 김동엽 감독이 권유해서 가게 되었는데, 훗날 은사인 서영무 감독이 권유했을 때, 잠시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권유한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되었는데, 돌아온 것은 망신뿐.. 그 결과로 빚어진 사건이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통해 살펴보시길. 간략히 말해 김동엽 감독은 짤리고, 그는 감독 대행에 임명되어 1982년 시즌을 소화한다. 김동엽 감독이 시즌 시작 후, 겨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물러났기 때문에 사실상 그가 감독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식 감독으로는 임명되지 못하고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면서 다시 코치로 돌아갔다.

여러 프로 팀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가 백인천삼성 라이온즈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자 수석코치로 임명된다. 그리고 1997년 뇌출혈로 백인천이 입원했을 때, 1차로 감독대행으로 팀을 지휘한다. 그리고 퇴원한 백인천 감독이 다시 시즌 도중 신인급 투수인 전병호를 때리고 그냥 집에 가는 초유의 상황이 나오면서[3] 결국 남은 시즌 동안 두 번째로 감독 대행으로 팀을 지휘하게 된다.

감독대행으로 경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1997년 준PO에서는 김성근쌍방울을 눌렀고, 객관적인 전력에서 뒤진다는 평을 받았던 LG와의 PO에서도 2승 3패로 상당히 선전했다.[4]그래서 시즌 종료 후, 새 감독 선임 과정에서 당연히 신임 감독으로 유력했지만, 그리고 스스로도 정식 감독으로 올라간다고 알고 있었지만, 결국 정식 감독에 오르지 못했다. 서정환에게 밀렸는데, 이유는 서정환이 해태 시절 우승을 많이 해서 한국시리즈에 약한 팀 체질을 개선시킬 적임자라고 했다던가[5].그러나 조창수는 광주일고, 해태, 롯데, LG에서 모두 한번씩 우승했다는 게 함정 물론 그 뒤의 역사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감독대행만 세 번하고, 정식 감독에는 오르지 못했다.

감독대행 직에서 물러난 뒤, SK 와이번스의 수석코치와 2군 감독, 모교 경북고의 감독을 지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완전한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근래 나오는 뉴스는 부인과 두 딸에 관한 뉴스에 같이 취급되는 정도다.

4 가족관계

  • 부인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배구 동메달의 주역이자, 나는 작은새로 불리며 명성을 떨친, 전 GS칼텍스 서울 KIXX 감독인 조혜정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당시 여자 배구 실업팀 숙소 근처가 동대문운동장이라 야구선수인 조창수가 조혜정을 자주 찾아오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아마 먼저 꼬신듯?[6] 야구선수-배구선수 커플은 조창수-조혜정 커플이 처음.[7]
  • 두 딸은 현재 프로골퍼로 활동 중이다. 언니인 조윤희는 결혼을 한 주부골퍼이고, 동생인 조윤지는 KLPGA에서 2010년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가를 올리며, 2010년 KLPGA 신인상에 올랐다. 참고로 조윤희의 남편, 그러니까 맏사위인 김현진도 프로골퍼다.
  • 야구선수인 최익성과 사이가 안 좋은 인물 중 하나이다.(다른 한 명은 서정환) 실제로 최익성과는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타격폼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고. 하지만 감독대행 시절에 최익성에게 어느 정도 지원을 하고 그때마다 날 이해해 주시고 다음날이면 웃는 얼굴 맞아주셨시는 등 서정환에 비해 최소한의 양심을 보여줬다.
  1. 당시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는 총 세 개 뿐이었다. 즉, 사실상 전관왕.
  2. 2차 전성기는 1970년대 중반의 이선희, 황규봉 시대. 3차 전성기는 1981년 3관왕 당시 성준류중일이 이끌던 멤버들.
  3. 전병호의 빰을 때리고 집에 갔다는 사건이다. 뒷날 뇌출혈과 스트레스로 도저히 감독직을 수행하기 힘들어서 자진 사임했다고는 하는데, 롯데 감독으로 다시 부임한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던 2002년까지 5년의 공백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어찌어찌 병세가 회복된 모양이다.
  4. 여기서 발목을 제대로 잡힌 통에 LG는 정규시즌에서 불과 1.5게임차로 뒤졌던 해태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 4패로 맥없이 물러난다.
  5. 그 외에도 플레이 오프에서 잘 던지던 박동희를 강판시키고 성준을 올려 서용빈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패하는 어이없는 투수교체가 감독으로 승격되지 못한 원인인듯 하다.
  6. 조창수 감독이 4살 연상이다. 이 정도면, 원래 남자가 먼저 들이대지 않던가.
  7. 이후 이재우-이영주 커플이 두번째 야구-배구 부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