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마 겐지

(죠지마 켄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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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지마 겐지(城島 健司)
생년월일1976년 6월 8일
국적일본
출신지나가사키현 사세보시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4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995~2005)
시애틀 매리너스 (2006~2009)
한신 타이거즈 (2010~2012)
2003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라이온즈)
조지마 겐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마쓰나카 노부히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 개요

일본프로야구포수. 아시아 출신 포수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쫄지마, 졸지마 조지 마켄지(George McKenzie)

2 데뷔하기까지

고교 시절부터 이미 초대형 타자로 이름을 날리며 프로의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러브콜을 받지만, 드레프트 전면 거부를 선언하고, 고마자와 대학으로의 추천 입학을 결정했으나, 도중에 갑자기 변심하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다.

이에 고마자와 대학 측은 불같이 화를 내며, "앞으로 절대 호크스로는 선수를 보내지 않겠다고" 공언까지 하였고, 호크스 구단 측은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조지마의 입단 취소까지 고려한다. 하지만 당시 호크스의 감독이었던 오 사다하루가 직접 중재에 나서면서 사건은 극적인 화해로 마무리되었고, 조지마도 무사히 입단식을 치룰 수 있었다.

3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입단 초기엔 코치들에게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엉망인 놈은 처음 본다.", "이 녀석을 포수 자리에 앉혔다간 큰일난다." 같은 엄청난 혹평을 들었다.

리드는 말할 것도 없고, 폭투가 나오면 막긴 커녕 공 피하기 바빠서 걸핏 하면 공을 뒤로 빠뜨리고, 간단한 뜬공조차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어깨 하나는 타고나서 도루 저지율은 무척 뛰어난 편이었다지만, 그 외에는 포수로서의 장점을 정말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타격 실력은 이미 프로에서 충분히 통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구단 측에서는 장점을 최대한 살릴 만한 외야수1루수로의 전향을 권유했으나, 포수에 대한 본인의 집착이 워낙 컸던 탓에 이 제안을 거절한다.

데뷔 첫 해에는 본연의 타격 실력을 살린 대타 요원으로 그럭저럭 활약했으나, 정작 포수로서의 기록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이듬해에는 아예 개막 초부터 2군으로 보내지는 굴욕까지 겪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선배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고, 스스로도 계속 연구하고 노력하면서 점차 포수로서의 기량이 향상되었으며, 마침내 프로 3년차부터는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하고, 사상 최연소 올스타 투표 1위와 포수 최연소 3할을 기록한다.[1]

물론 이는 본인의 노력만이 아닌, 그를 아낀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장이었다. 특히 당시 베테랑이었던 쿠도 키미야스는 자신의 승수를 포기하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조련했고,[2] 오 사다하루도 매 이닝마다 조지마를 부동자세로 옆에 세워 놓고는 잘못을 지적하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와카나 요시카즈나 타무라 후지오 등의 선배 포수들 역시 조지마를 붙들고 조련했다고. 여담이지만, 이미 젊은 시절부터 불같은 성질로 유명했던 조지마가 그런 갈굼 속에서도 단 한 번의 항명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정말로 그게 전부 다 맞는 소리였고, 실전에서도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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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도에게 갈굼당하는 조지마>

이후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된 2000년에는 일본시리즈에서 4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일본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고, 2003년엔 .330/.399/.593 34홈런 119타점의 활약으로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에 올려놓고 퍼시픽리그 MVP를 수상한다.

2004년에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다. 시즌 성적은 올림픽 차출로 누적에서 손해를 보긴 했지만, 타율 .338 36홈런 91타점 OPS 1.087를 기록했다.

2005년, 부상으로 이탈하기도 했으나 타율 .309 24홈런으로 팀의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에 기여한다.

이 기간 베스트나인 6회, 골든글러브 7회를 수상.

4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2005년 시즌을 마치며 FA 권한을 획득한 조지마는 메이저리그시애틀 매리너스와 3년 계약을 맺으며 이적에 합의한다.

2006년, 데뷔 첫해 성적은 0.291, 18홈런으로 상당히 준수했으며, 특히 수비율과 도루 저지율은 리그 톱 수준을 기록한다. 2007년에는 이보다는 성적이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그리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긴다.

이에 크게 고무된 시애틀 매너리스 구단 측은 2008년 조지마와 3년 추가 계약을 하지만, 이후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0.227, 7홈런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 된다. 또한, 성적이 떨어지면서 구단 안팎으로 투수진과의 불화설이 차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통 리드 성향의 차이와 언어 소통 문제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곤 한다. 즉, 리그에 따른 리드 차이가 있는 데다[3]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따르는 만큼 이를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4] 특히 팀이 시즌 100패를 넘겼을 때는 팀 마운드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될 정도로 여론의 질타를 받아야 했다. 타격이라도 괜찮았다면 그나마 비난이 덜했겠지만, 타격 성적까지 저랬으니 실상 답이 없었다. 덕분에 팬들 사이에선 스즈키 이치로가 경기장 밖의 골칫거리라면, 조지마 겐지는 경기장 안의 골칫거리란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2009시즌이 시작될 당시 조지마는 절치부심하며 부활을 다짐하지만, 시즌 초기부터 부상을 입으며 메이저와 마이너를 계속 오르내렸고, 심지어 펠릭스 에르난데스, 제로드 워시번, 에릭 베다르 같은 투수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조지마와의 배터리 짜기를 거부하면서 출장 기회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다.[5] 타격은 지난해보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0.247, 9홈런으로 어디에 내세울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조지마를 두고 "출루율은 낮고, 장타력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고액 연봉의 늙다리 포수"라며 비꼬기도 했다.

역대 아시아 타자 선수들 중에서 메이저 직행 선수 홈런 2위. 피츠버그의 강정호가 2016시즌 21개의 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18개로 1위였다.

5 한신 타이거즈 시절, 그리고 은퇴

2009년 10월, 주전 경쟁에서 밀려난 데다 경기장 안팎으로 계속 이어지는 비난 여론에 시달리던 조지마는 결국 일본프로야구로의 복귀 의향을 밝히게 된다.[6] 그대로 메이저리그에 남아 있었다면 당장 먹튀 소리는 들을지 언정 일본보다 훨씬 높은 액수의 연봉이 보장받을 수 있음에도[7] 명예 회복을 먼저라고 생각해서인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포기한다.

많은 이들은 친정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의 복귀를 예상했고, 호크스 측과도 사전 교섭을 벌어긴 했으나, 그가 실제로는 복귀한 곳은 조지마 영입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한신 타이거즈였다. 이때 한신 타이거 측과 맺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4년간 총액 20억엔.[8]

참고로 이런 조지마의 일본 복귀로 인해 희비가 갈린 두 사람이 있는데, 바로 소프트뱅크 주전포수인 타노우에 히데노리와 한신 주전포수인 카노 케이스케였다. 둘 다 이제 막 주전포수로 발돋음 상태였던 터라 조지마의 복귀 소식에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한신을 선택한 조지마 덕분에 타노우에는 죽다 살아난 셈이 됐지만, 카노는 그저 지못미.

사실 호크스의 경우 다노우에가 주전자리를 거의 굳힌 상황이었던 탓에 조지마 영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호크스 측은 "몇 년 동안을 고생해서 겨우 타노우에를 키워 놓으니 이제 와서 복귀하면 우리 보고 뭘 어쩌라고?"라는 식의 분위기였다고 한다.[9] 그에 비해 실질적으로 2009년부터 주전 자리를 물려받은 카노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더딘 성장세를 보였던 터라 한신이 영입 경쟁에서 보다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으로 복귀한 첫 해인 2010년 타율 .303 28홈런 91타점 OPS .859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한신 타이거즈의 선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태균을 철저히 연구하여 봉쇄하겠다'고 호언장담,무안타로 꽁꽁 막았다 하지만 2010 시즌 종료 후 왼쪽 무릎 반월판이 손상되는 부상을 입으면서 2011 시즌의 정상 참가가 어려워졌다. 이에 한신은 그 대안으로 FA 선언을 한 후지이 아키히토와의 협상에 들어갔고, 결국 후지이와 2010년 11월 22일, 2년 계약에 합의했다.[10]

스토브리그 중에는 2011년 시즌 출장이 비관적일 거란 이야기가 돌았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부상이 호전되면서 2011년 시즌에도 6월 초까지 38경기를 주전포수로 출장했다. 하지만 부상의 여파가 남았던 탓인지 이 기간 동안 고작 타율 .189, 5홈런, 13타점을 올렸을 뿐이며, 작년보다 경기당 실책수까지 크게 늘어나는 등 본인의 이름값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최악의 기록을 남겼다. 결국 6월 10일에 등록 말소, 미국으로 건너가 정밀 진단을 받은 뒤 수술을 받았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긴 하나, 재활 기간이 필요한 만큼 사실상 시즌 아웃.

한편 교류전 기간부터는 라쿠텐에서 이적한 후지이 아키히토가 주전포수 자리를 꿰어차며, 공수에서 그럭저럭 준수한 활약을 보인 터라 부상을 빨리 떨쳐내지 못한다면 이후 조지마의 입지가 크게 좁아질 거란 예측도 나왔다. 문제는 후지이도 오십보 백보라는 거다.

수술 후의 재활 훈련은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결국 포수 포지션을 소화할 정도로 회복되진 못하였다. 그에 따라 구단 측은 조지마에게 일시적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고, 조지마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2012 시즌 동안에는 포수가 아닌 1루수로 출장하게 됐다. 덕분에 스프링캠프 중에도 포수가 아닌 1루수로서 수비 훈련을 받았으며, 훈련 기간 동안 포수 미트는 아예 껴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2012년 시즌 중에 포수로 선발 출장하는 것은 이미 포기한 상태이지만 포수란 포지션 자체를 포기한 것은 절대 아니며, 감독과 코치 역시 궁극적으로는 포수로 복귀해 줄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당시 후지이가 주전 포수를 맡는 동안 한신 성적이 계속 추락했던 터라 코치진은 물론 한신 팬들로서도 조지마의 복귀가 매우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2 시즌에는 1루수와 대타로 24게임에 출전, 타율 .179 무홈런 5타점에 그치는 등 부진했으며, 도중에 또다시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쳐 복귀를 시도하다 2군 경기에서 수비 도중 또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거듭된 부상으로 더는 포수로 뛰는 게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고, 구단 측은 1루수로의 완전 전환을 권유했지만, 조지마는 "포수로 뛸 수 없다면 차라리 은퇴를 선택하겠다."며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11] 더욱이 이에 앞서 가네모토 도모아키도 같은 달 은퇴를 밝혔기 때문에 한신 팬들로서는 여러 모로 더욱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9월 29일, 그는 1군이 아닌 2군에서 은퇴 경기를 가졌다. 부상 여파로 시즌 내내 1루수나 대타로만 나오던 조지마였지만, 은퇴 경기인 만큼 이때는 3번 타자 겸 포수로 출장했다. 조지마는 이 경기에서 1회말 무사 1, 2루 상황에서 적시타를 때린 직후 교체됐고, 꽃다발과 함께 동료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자신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가 일본을 대표하는 포수 중 하나로 불리며, 한때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하여 활약했던 대선수였다는 걸 감안하다면 아무래도 상당한 초라한 은퇴식인 셈이었다.[12]

6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나 해설자 등 야구와 관련된 일체의 활동은 하지않고 취미였던 낚시 등으로 세월을 보내며 유유자적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벌어놓은 연봉을 까먹으면서 마냥 놀고 있는 건 아니고 규슈 지역 지역 방송국의 낚시 프로그램과 골프 프로그램 등의 메인 호스트로 출연 중이라고 한다. 프로그램이 나름대로 인기가 있어서 방송국에서도 만족하고 있다는 모양.

7 기타

  • 규슈의 '열혈남아'라는 이미지답게 성격이 화통하고 화끈한 터라 대인 관계가 비교적 원만한 편이며, 후쿠오카 야구의 상징적 존재다 보니 인기 역시 상당히 높다. 또한, 기자들에게 껄끄러운 질문을 받아도 특유의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가볍게 잘 받아 넘기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다만, 반대로 지나치게 다혈질인 데다 안하무인에 너무 멋대로 군다고 보는 이들도 상당히 많은 터라 항상 이런저런 질 나쁜 루머가 그를 따라다니기도 한다.
워낙 고집불통이다 보니 고교 시절인 1학년 때부터 선배들에게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며 멋대로 개긴 통에 엄청나게 얻어 맞았다. 당시 같은 학교에 재학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야구부 창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퍽퍽 고기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아, 또 조지마가 얻어 터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신인시절에 데드볼을 맞았다고 데뷔 10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 대선배 투수한테 죽일듯이 달려들는가 하면, 경기가 안 풀리는 날엔 덕아웃에 앉아서 어린 투수들을 갈군다는 이야기도 있다.
  • 야구 해설가 토요다 야스미츠[13]가 신문 논평을 통해 자신에 대해 악평을 하자, 이를 보고 열이 받아서 토요다의 사진을 자신의 방에 도배해서 붙여놓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몇날 며칠을 지내가다 딱 한 번 마주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토요다의 기를 확 꺾어 놓았다는 일화도 있다. 이때 조지마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야구계 대선배인 토요다는 그걸 받아치긴커녕 미안하다는 말만 연발하며 그를 진정시키기 바빴으며, 그 이후부터 토요다는 절대 조지마에 대한 악평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한가지 재밌는 점은 토요다 야스미츠 역시 선수 시절에는 조지마와 마찬가지로 다혈질에 악동으로 유명했던 터라 걸핏하면 선배들한테 덤벼들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뛰어난 타격 실력과 그에 매우 못 미치는 특유의 정신줄 놓은 수비 실력까지 감안하면 둘은 거의 판박이 수준이라 할 만하다. 물론 조지마 쪽은 노력을 통해 그 엉망이었던 수비를 어느 정도 극복하긴 했지만 말이다.
  • 포수로서의 대선배이자 일본프로야구의 레전드노무라 카츠야[14]와는 그에게 "넌 일단 인간부터 되거라."란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로 매우 사이가 나쁘다. 이유인 즉슨, WBC 아시아 예선 당시, 일본이 한국에 0:1로 밀리자 노무라 감독은 조지마의 볼배합 문제를 지적는데, 이에 조지마는 "그러는 감독님은 선수생활 할 때 한 번도 실점 안 하셨나 보네?"라며 곧바로 직격탄을 날려 버린 것이다. 결국 이 이후부터는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는다고 한다.
  • 자신이 퍼시픽리그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2000대 초반 퍼시픽리그에서 정상급 활약을 펼친 선수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당시 퍼시픽리그에서 활약한 선수 대부분은 센트럴리그는 단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덕에 중계를 자주 배정 받아 인기가 높은 것일 뿐이며, 죄다 돈지랄로 퍼시픽리그의 좋은 선수 훔쳐가는 구단들이라는 식의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한다.
  • 의사 소통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던 모양인지 WBC 2회 대회에선 MLB TV 해설자들이 그의 영어 실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정도이지, 절대적인 수준으로 보자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일례로 샌디에고에서 벌어진 한국과의 본선대회 당시 삼진을 당한 뒤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는데 그 직후에 퇴장을 당한 적이 있다. 이유인 즉슨 타석에 놓고간 배트를 다시 가져가라는 주심의 말을 못 알아들었던 것. 조지마는 퇴장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심판을 향해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통역원이 나서서 내용을 해석해 주자 그때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고 한다. 안습
  1. 다만, 리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리드는 여전히 형편없지만, 이젠 짬밥이 쌓이고, 팀내 위상까지 높아진 탓에 주변에서 대놓고 까기 어려워졌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2. 조지마의 리드를 거부하고 끝내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던지는가 하면, 조지마 사인 대로 공 던져서 얻어 맞고는 덕아웃에 돌아와 조지마를 자기 옆에 앉혀 놓고 계속 갈궜다고 한다. 그리고 1996년에는 15패나 당하면서 리그 최다패를 기록하고 쿠도의 통산 200승도 그만큼 늦어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3. 이것은 리그 차이라기보다 조지마의 블로킹 성공률이 낮은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자기가 받기 편한 공을 중심으로 볼배합을 하다 보니, 내용이 단조로워져서 읽히기 쉽다는 것이다.
  4. 자세한 것은 포수 항목을 참조.
  5. 덕분에 투수진과의 불화설이 점점 설득력을 얻었으며, 이때부터는 기껏해야 대타로 간간히 올라오는 처지가 됐다.
  6. 본인 말에 따르면 출장 기회를 잡기 어려워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7. 설령 지명 할당으로 방출되더라도 계약된 연봉은 전액 지급해야 한다.
  8. 메이저리그에서 복귀했다는 점을 내세워 좀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불어 주요 요구 사항은 돈이 아닌 주전 보장이었다.
  9. 재밌는 건 그 타노우에 역시 그 이후 1년만에 몰락했다는 것이며, 결국 소프트뱅크는 세이부에서 호소카와 토오루를 데려와야 했다. 그리고 1군 백업 포수자리도 야마자키 카츠키에게 밀리며 2013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10. 참고로 후지이 아키히토의 영입 이후 카노 케이스케는 결국 외야수로 보직을 전환하였다. 가노 불쌍해요
  11. 사실상 이미 9월 초순 경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은퇴 결심을 알렸다고 한다.
  12. 본래 구단 측은 따로 은퇴식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조지마는 이를 거부하고 다음 2군 경기를 끝으로 바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1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인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OB이자 퍼시픽리그 역대 최고의 유격수로 평가받는 전설이다. 前 긴테츠, 오릭스의 감독이었던 故 오기 아키라와 키스톤 콤비를 이뤘다.
  14. 노무라가 난카이 구단과 척을 진 이후로 거의 연을 끊다시피 했지만 호크스의 대선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