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공

Fürstbischof

신성 로마 제국의 성직제후직중 하나다.

제국백과 마찬가지로 역덕이 아닌 이상 들어본 적도 없을 작위로, 명칭 그대로 성직자가 세속권력을 지닌채로 도시단위의 교구가 아닌 세속제후처럼 광대한 영역을 봉토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성직자가 아닌 제후로서의 권력을 가졌으며, 동시에 성직자가 아닌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로 분류되었다. 주교공들은 세속제후들과 함께 제국의회에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주교공의 시초는 오토 1세의 제국교회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제국교회정책은 고위성직자들을 등용하는 방침으로 오토 1세가 자신의 친척들을 요직에 임명해 제국 각지의 영주들의 세력을 꺾으려다 실패하면서, 성직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으로(한마디로 세습이 불가능하다) 세속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교회가 초부족적 ·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이용했다. 세속 영주가 자기가 지은 교회에 권리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왕은 그의 직속 교회에 대하여 사유교회주로서 관장의 임명이나 재산의 이용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오토 1세와 그 후계자들은 직속교회의 고위성직자를 국왕의 관료(官僚)로서 처우하고, 교회나 수도원의 영지를 왕령지에 준해서 관리했으며, 교회에는 광대한 토지를 기부해 바치면서 공권불입권 등의 기타의 특권을 주면서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황제교황마저도 맘대로 갈아우는 시기가 되자, 11세기 이래 클뤼니수도원의 개혁운동을 계기로 교회 내부에 자각의 소리가 높아졌다. 국왕의 초월적 권위와 그 사유교회제적 지배를 부인하고, 1122년 월므스 조약에서 성직자의 교회법적 선거의 원칙이 승인됨으로써 엄밀한 의미에서의 '제국교회정책'은 끝이 났다. 1220년 최종적으로는 프리드리히 2세가 교회령의 독립성을 인정한 칙령으로 주교공은 독자적인 제후세력으로 분류된다.

13세기에 선제후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 교황 우르반 4세는 자신의 편지에서 "태고의 전통"에 따라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일곱 명의 제후들을 언급하면서 그중 세명의 성직제후들인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들을 언급하는 등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356년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공표하면서 마인츠과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들은 다른 4명의 세속제후들과 함께 선제후가 되었다.

제국 내에서 주교령의 수는 1521년 53개였고, 주교공직은 구 귀족들과 제후의 자손들, 제국기사, 구 가신귀족에 의해 독점되어왔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을 거치고 1648년에는 23개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대다수의 주교령이 개신교로 개종하여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계통의 주교공 등은 극소수가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주교공직은 비 제후 귀족은 물론 시민 계급 또한 주교직에 오른다면 제국제후직에 오를 수가 있었으나 1803년까지 제국교회는 귀족교회로 관리되었으며, 이는 사회계층이동을 제한적인 형태로나마 허용되었다.

이후 18세기에 들어서 다시 주교령은 26개로 늘어났으나 1792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 퍼지면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주교령은 그 정당성을 잃기 시작했으며, 라인강 부근의 주교령은 프랑스군에 점령되면서 "국유화"되었으며, 나머지 주교령 또한 주변의 세속제후들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1801년 뤼네빌 조약과 1803년 제국사절회의 주요결의안을 통해 세속화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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